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김포 문수산
- 평화누리길 경기 구간 완주
- 앙코르와트
- 김포 한재당
- #북한산 문수봉 #북한산 승가봉 능선
- #건봉사 #고성 건봉사
- 성인대
- 군위 팔공산
- 평화누리길 7코스
- #강화나들길 3코스
- 해파랑길 8코스
- 미시령 성인대
- 명동 성당 미사
- #붕당의 발생 #붕당의 형성 #붕당의 시작
-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 북한산 만포면옥
- 티스토리챌린지
- #강화 나들길 18코스 #강화 나들길 18코스 왕골 공예마을 가는 길
- #평화누리길 2코스 #평화누리길 1코스 #평화누리길 1~2코스
- 단양 구담봉
- 해파랑길 48코스
- #조선 국왕의 일생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엮음 글항아리
- 평화누리길 3코스
- 평화누리길 4코스
- #윤두서 자화상 #공재 윤두서 자화상 #공재 자화상
- #조선 중기 정치와 정책(인조~현종 시기)
- 오블완
- 정서진 #정서진 라이딩
- #대흥사 #해남 대흥사
- 해파랑길 20코스
- Today
- Total
노래하는 사람
조선 사람의 조선 여행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엮음 전용훈 책임기획 글항아리 2012년 455쪽 8/8 2016-08-08 23:17:49 본문
조선 사람의 조선 여행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엮음 전용훈 책임기획 글항아리 2012년 455쪽 8/8 2016-08-08 23:17:49
singingman 2022. 12. 27. 16:22조선시대와 일제치하의 12편의 여행 기록과 '소설가 구보씨의 행복찾기라'는 소설요약을 모은 책.
그림들이 풍부하게 실려있어서 읽기가 쉽다.
조선의 선비나 여유있는 사람들은 여행의 기록을 글이나 그림으로 남겨서 노년에 누워서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그래서 그것을 臥遊라 불렀다.
그림이나 글로만 아니라 집안에 석가산을 만들거나 목가산 옥가산을 만들기도 했다.
습창 치료를 위한 사도세자의 온양 온천 여행기는 온천욕만이 아니라 영조가 사도세자의 정치적 능력을 시험해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온천욕은 당시 피부병을 치료하는 흔한 방법의 하나였다.
별자리는 3원 28수의 별자리가 알려져 있었다.
3원은 태미원,자미원,천시원으로 태미뭔은 황제가 정사를 살피는 외원이고 자미원은 황제가 기거하는 내원, 천시원은 황제가 다스리는 서민들의 생활공간을 말한다.
북두칠성은 도교에서는 모든 신의 왕인 태상노군을 따르는 일곱 신으로 묘사되고 불교에서는 부처를 보좌하는 일곱보살로 그려지기도 했다.
조선의 여성들은 여행이 어려웠지만 안동 하회마을에 살던 연안 이씨는 65세의 나이에 충청도 부여까지 여행한 여행기를 남겼다.
1830년 김금원은 14살의 나이에 남장을 하고 어렵게 부모의 허락을 얻어 세상 여행을 했다. 약 20년간의 여행 기록을 남겼다.
조선시대 음악가들은 과거때가 되면 함께 서울로 모여들었다.
왜냐하면 합격축하연에 음악가들을 많이 초빙했고 이때 이름을 날리게 되면 출세길이 열리기도 했디 때문이다.
대원군은 판소리나 정악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도와주었다.
금옥총부라는 책에는 노래 가사만이 아니라 그 노래의 배경등도 기록했다.
줄풍류 영산회상은 사대부들이 즐겨 연주하던 음악이었다.
사설시조 진국명산은 판소리 앞에 부르는 단가로도 사용되었다.
금강산은 조선시대에도 중요한 산이었다.
금강산의 이름은 고려시대에 화엄경과 법화경이 많이 읽혔는데 이 책에 '해동의 금강산'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으로 인해 동해가에 위치한 이 산이 원래는 개골산이나 풍악산등으로 불렸지만 차차 금강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금강산 12,000봉은 화엄경에는 담무갈 보살이 만이천 권속을 거느리고 금강산에 기거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금강산 일만 이천봉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금강산이라는 이름이 불교적 색채가 짙어서 금강산으로 부르기를 기피하고 풍악이나 개골로 불렀다.
그래서 금강산을 그린 화첩도 금강산도라고 부르기보다는 海山帖, 풍악권, 海嶽圖등으로 불렀다.
과거를 보러 영남 유생이 서울로 가는 길도 여행이 된다.
영남 양반 노상추는 12년의 노력끝에 무과에 합격하는 영예를 얻게되는데 그의 서울 상경기와 과거에 관한 기록이 좋은 자료가 된다.
경북 선산에서 서울까지는 꼬박 7일이 걸리는 거리였다.
암행어사들은 이름과 달리 암행이 되지 못하고 신분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고 지방관들이 미리 알고 준비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어떤 암행어사들은 지방관들의 비리를 벌하기보다는 그들과 한 패가 되어 백성들을 괴롭히는 경우도 있었다.
왕명을 받고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방관들로부터 향응을 받기도 하고 기생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유배가는 사람들은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줄에 묶이거나 닭장같은 우리에 가둬서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또 유배지에서의 생활도 그리 부자유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고관들이 유배를 가는 경우에는 그 지역의 지방관들이 오히려 편리를 봐주고 함께 여행도 하고 했다.
1545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성주에 유배된 이문건은 정3품 당상관이었기에 유배지에서 자유롭게 지내고 지방관의 호의로 해인사로 유람을 떠나기도 한다. 심지어는 관기와 밤을 보내기도 하고 별 어려움 없이 지낸다. 중앙에서처럼 권력을 휘두르지 못할 뿐이지 생활에는 별 문제가 없다. 식생활도 관리들이 해결해주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었다.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세연정에서 지낼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어서였다.
商人은 원래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므로 행상이라는 말에서 행을 빼도 원래는 장돌뱅이나 보부상인처럼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사람을 뜻했다.
보부상들은 자기들의 조직이 있었고 어쩌면 오늘날의 조폭과 비슷한 면도 있었다고 한다.
장돌뱅이들은 이효석의 '메밀꽃...'에서 보듯이 여러 장들을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했다. 그러니 얼마나 고달팠겠는가?
백두산은 최남선에게만 아니라 우리 민족에게 영산으로 알려진 중요한 산이고 민족의 출발점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수학여행은 일본의 통치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고 수학여행이라는 말 자체가 일제 치하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말이라고 한다.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가지 않는다고 동맹휴학까지 해서 수학여행을 가기도 했다.
소설가 구보씨의 행복찾기는 일제시대에 하루동안 서울시내를 도보와 전차로 돌아다닌 이야기다.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감을 선물한 스승들 필립 얀시 엮음 최종훈 역 두란노 2005년 325쪽 8/16~8/17 (1) | 2022.12.27 |
---|---|
치유 폴 트루니에 저 정동섭. 정지훈 역 cup 2007년 301쪽 8/9~8/15 (0) | 2022.12.27 |
한 길 가는 순례자 유진 피터슨 저 김유리 역 IVP 2001년 225쪽 8/5~8/7 2016-08-07 18:15:17 (0) | 2022.12.27 |
일본의 사상 마루야마 마사오 저 김석근 역 한길사 2003년 3쇄 283/290 8/3~8/4 2016-08-04 18:15:06 (0) | 2022.12.27 |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필립 얀시 저 윤종석 역 IVP 1999년 333/341 8/1~8/2 2016-08-02 10:12:40 (1) | 2022.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