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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안동 도산서원 17-08-09 본문
성수 부부와 문목 부부가 함께 가다.
워낙 유명한 서원이고 내가 존경하는 인물 가운데 한 분인 퇴계 선생님의 서원이어서 더 애착이 간다.
퇴계 선생님에 관한 학문적인 업적과 많은 일화가 존경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지만 특히 최인호 소설
'유림' 이후 더욱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었던 것 같다.
다른 서원에 비해서 규모도 크고 영주에 있는 소수 서원처럼 입장료도 받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 이황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1969년 5월 28일 사적 제170호에 지정되고, 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이황이 사망한 지 4년 후인 1574년에 설립되었다. 영남학파와 한국 유학을 대표하는 이황을 모신만큼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이언적을 모신 경주 옥산서원과 함께 한국의 양대 서원으로 꼽힌다.
퇴계 이황은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기에 이곳이 생가이면서 태실이 모셔져 있다. 참고로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년)에 시작하여 1576년 완공하였다. 1570년 퇴계 이황이 작고하자, 1572년에 위패를 상덕사에 모시기 위해 공사가 시작되었다. 1575년에 선조가 명필 한석봉으로 하여금 쓰게한 편액을 하사함으로써 영남 유림의 본산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조목(趙穆)을 종향(從享)했다.
도산서원은 교육기관으로 학문을 연마하는 기관이었지만, 영남 안동과 주변지역 사림들의 모임 장소이기도 했다. 1884년 서얼들이 도산서원 출입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서원에서는 끝까지 허락할수 없다고 거절했고, 서얼들과 서원 유사(有司)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조정에서는 서자들의 서원 출입 허락 상소가 계속되자 1884년(고종 21년) 조정에서는 서얼들도 서원 출입을 허용하라는 공문인 관문(關文)을 각 관아와 서원에 하달하였다. 1884년 11월 조정에서 하달한 관문에서 "서원에 서류들의 출입을 허용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경주 옥산서원은 곧 서얼의 서원 출입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도산서원은 서자출입을 허용하는 것은 옥산서원의 사정이지 도산서원은 적용할수 없다며 거절했다.
분개한 서얼들이 단체로 도산서원을 찾아와 드디어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다. 서얼들은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데 어찌 예안의 하늘이 경주의 하늘과 다르단 말인가"라고 했다. 서얼들에게 서원의 수노(首奴)들은 몰매를 맞고 "피가 흘러 땅에 가득했고", 유사 등 임원은 서얼들에게 잡혀 "옷이 찢어지고 머리카락이 떨어지며 강물에 패댕이쳐지기도" 하는 등 갖은 수모를 입었다. 이를 두고 서원 측에서는 "서원이 창건된 이래 다시없는 극변"이라 했다. 사태가 진정된 후 도산서원에서는 이 사실을 기록해 놓았으며, 이를 《도산서원서류사변일기 陶山書院庶類事變日記》라 부른다.
서자들이 출입을 요구하면서 폭력을 행사하자, 결국 관망하던 군청이 개입했다. 1885년 2월 10일 최대의 폭력 사건이 발생하여 "임원 모두 수모를 당했고, 심지어 종손에게 욕하고 종택을 파괴하려 한다"며 관아에서 조사를 시작했다.
관아가 개입하자 서얼들 무리 사이에에 분열이 일어나 일부는 도망치고, 일부는 남아 있다가 붙잡혀 구금되고 일부는 자기 집안에 끌려가 문벌(門罰)을 받았다. 문벌을 받은 서얼들은 관아의 판결에 불복하고, 이후 안동권 곳곳의 다른 서얼들과 연합하여 대립했다. 결국 서자들과 도산서원의 갈등, 대립은 4년 1개월간 계속되었고, 결국 1888년 12월 서자들의 출입 요구가 관철되었다.
시사단은 본래 1792년(정조 16) 3월에 정조가 이조판서 이만수(李晩秀)에게 명하여 퇴계 이황(李滉)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신설하여 안동 지역의 인재를 선발토록 한 데서 비롯되었다. 도산별과는 문과 2인, 진사 2인, 초시 7인, 상격(賞格) 14인을 선발하는 별시(別試)로서 그 과시(科試)가 시사단(試士壇)에서 거행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왕버들의 크기가 대단하다. -청송 주산지에 있는 버들보다 더 크다.
하지만 그 나무가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에 따라서 아름다움이 많이 달라진다.
매화를 얼마나 좋아했으면 돌아가실 때 유언이 매화분에 물 잘 주라고 했다는 설이 전해졌을까?
두향과의 로맨스도 매화와 연관되어 있다.
아래는 성호 이익이 도산서원을 참배한 여행기(謁陶山書院記)이다. 성호집(이익 지음 최채기 정영미 옮김 한국고전번역원 2017년 9월 20일 초판 pp. 107~112)에서 발췌함.
내가 청량산(淸凉山)에서 발길을 돌려 도산을 방문할 때 신택경(申澤卿)이 함께하였다. 반나절쯤 길을 가서 온계(溫溪)를 지날 적에 길가에서 멀리 서원을 가리키며 물으니, 답하기를, “노선생의 선대부(先大夫) 찬성공(贊成公)과 종부(從父) 승지공(承旨公), 형 관찰공(觀察公) 세 분을 제사하는 곳입니다.” 하였다. 영남 사람들은 선생을 지극히 존경하여 선생의 어버이와 스승에 대해서도 모두 추중(推重)하고 향모(向慕)하는 것이 이와 같다. 하물며 선생의 유적(遺迹)이 있고 가르침을 베푼 곳을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공경함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다시 작은 고개를 지나 먼저 애일당(愛日堂)을 들렀으니, 바로 이농암(李聾巖)이 살던 곳으로 매우 아늑하고 절묘한 곳이었다. 말 머리를 돌려 왼쪽으로 달려가 비로소 도산에 이르렀다.
도산은 선생이 늘 기거하던 별장(別莊)으로, 계상(溪上)에서 5리쯤 떨어져 있다. 계상은 선생의 본댁이 있는 곳으로, 퇴계(退溪)라고 이르는 곳이다. 동쪽 상류로 곧장 가는 길에 산기슭 하나가 가로막아서 도산과 통하지 않으니 선생이 늘 산 위를 거쳐서 지팡이를 짚고 왕래하였다고 한다. 대개 산과 물이 구불구불 감싸 안고 돌아 시냇물에 임하여 하나의 골짝이 펼쳐지는데, 산은 영지산(靈芝山)의 줄기이고 물은 황지(黃池)에서 발원한 것이다. 또 청량산으로부터 뻗어 온 산이 물 흐름을 따라서 서쪽으로 달리다가 영지산의 한 줄기와 하류에서 합쳐서 좌우에서 절하고 있는 듯하니, 이른바 동서의 두 취병(翠屛)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동(洞)은 작지만 가운데가 툭 트여서 마을이 들어설 만하니, “터가 넓고 지세가 뛰어나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궁벽하지 않다.”라고 한 본기(本記)에서 증험할 수 있다. 선생이 손수 창건한 도산서당(陶山書堂)이 여전히 여기에 있는데 후인들이 이어서 서당의 뒤에 서원을 건립하여 존봉(尊奉)하였다.
우리들은 말에서 내려 공순히 바깥문으로 들어갔다. 서쪽에 동몽재(童蒙齋)가 서당과 마주 대하고 있는데, 동몽재는 어린 선비가 학문을 익히는 곳이라고 한다. 다시 진덕문(進德門)으로 들어가니 또한 좌우에 재(齋)가 있는데, 동쪽은 박약재(博約齋)이고 서쪽은 홍의재(弘毅齋)이다. 가운데에 남쪽을 향하여 강당(講堂)을 두었는데 편액을 전교당(典敎堂)이라 하고, 당의 서쪽 실(室)이 한존재(閑存齋)이다. 한존재는 원(院) 내에 반드시 장임(長任)을 두어서 그로 하여금 제생(諸生)을 통솔하며 항상 이곳에 거처하게 한 곳이고, 박약재와 홍의재는 곧 제생이 머무는 곳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홍의재에 들어가 거재(居齋)하는 사인(士人) 금명구(琴命耈)를 만나서 원의 규모와 지명, 민풍(民風)의 대개를 대략 들었다. 이어서 원노를 불러 사우(祠宇)의 바깥 정문을 열도록 하고 배알하는 절차를 상세히 물은 뒤에 감히 들어가니, 상덕사(尙德祠)라는 세 글자 편액이 높이 걸려 있었다. 또 남쪽 문을 열어 주어, 우리들이 뜰아래에서 엄숙히 참배하고 추창하여 서쪽 계단을 통해 가 몸을 숙이고 문지방 밖에 차례로 서서 사당 내의 제도를 살펴보고자 하였는데, 왼쪽에 월천(月川) 조공(趙公)을 배향하는 신위만 있을 뿐이었다. 다시 서쪽 담으로 통하는 작은 문을 열자 담 밖에 집 2채가 있는데, 하나는 주고(酒庫)라고 하고 하나는 제기(祭器)를 보관해 놓는 곳이라고 하였다. 우리들이 마침내 추창하여 나가서 홍의재에 이르자 재 뒤에 다시 실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가리켜 유사방(有司房)이라고 하였다.
잠시 있다가 금생(琴生)과 함께 간 곳이 바로 도산서당인데, 이곳은 정말 선생이 친히 지은 곳이어서 나무 한 그루, 돌 한 덩이도 사람들이 감히 옮기거나 바꾸지 못하였다. 때문에 낮은 담장과 그윽한 사립문, 작은 도랑과 네모난 연못이 소박한 유제(遺制) 그대로여서 마치 선생을 뵌 듯 우러러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다. 처음에는 숙연하여 마치 담소하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가 나중에는 그리워서 잡고 어루만지며 공경을 느끼게 된다. 백 년이 지난 후에도 사람들이 유적과 덕행에 대해 아직도 보고 감동하여 흥기하는데, 하물며 당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집은 3칸인데, 동쪽은 헌(軒)이고 서쪽은 부엌이고 가운데는 실이다. 실은 완락재(翫樂齋)라 하고 헌은 암서헌(巖栖軒)이라 하여, 합하여 도산서당이라고 명명하였다. 헌의 동쪽에 또 작은방 하나를 붙여 헌과 통하도록 해서 청(廳)을 만들고 나무를 쪼개 판(板)을 만들었는데 오늘날의 와상(臥床) 모양 같았다. 금생이 말하기를, “선생 당시에는 이것이 없었는데 한강(寒岡)이 유의(遺意)를 받들어 나중에 만든 것입니다.” 하였다. 못은 정우당(淨友塘)이라 하는데 작은 샘의 물을 끌어다가 대었다. 문은 유정문(幽貞門)이라 하는데 섶나무를 엮어서 만든 것으로 대개 평시의 제도를 본뜬 것이다. 뜰 왼쪽에서부터 산기슭에 이르기까지 소나무와 전나무가 숲을 이루었는데 밑동이 모두 한 아름 정도 되었다. 물어보니, 선생이 손수 기른 것이라고 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벌써 140년이나 되었는데 나무만은 여전히 무성하게 남아 있으니, 사람들이 아름다운 나무에 흙을 북돋아 주고 감당(甘棠)에 비의하는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실 안을 구경해 보니 서쪽과 북쪽 두 벽에 모두 장이 있는데, 각각 2층으로 된 장에는 모두 유물(遺物)이 보관되어 있었다. 선기옥형(璿璣玉衡)이라는 기구(器具) 하나, 책상, 등잔대, 투호(投壺) 각각 하나, 화분대(花盆臺), 타구(唾具) 각각 하나, 벼룻집 하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벼루는 어떤 자에게 도둑맞아서 지금은 없다고 한다. 무릇 벼루는 한 조각 돌덩어리일 뿐이나, 이곳에 있으면 값을 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이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 있으면 다만 다른 돌덩이와 같은 것일 뿐인데, 저 훔쳐간 자는 도대체 무슨 마음이었던가. 아, 유감스럽다. 또 청려장(靑藜杖) 한 자루는 갑(匣)을 만들어 간직해 놓았는데 조금의 파손도 없고 품질도 보기 드문 것이었다. 1치마다 마디가 두서너 개 있어 학(鶴)의 무릎 같았고, 두드리면 쨍쨍 울리면서 맑은 소리가 나서 보배로 여길 만하였다.
동쪽으로 문을 내서 걷어 올리면 헌과 통할 수 있고, 남쪽으로 작은 창문을 내고 창 안쪽에 시렁을 가로놓아서 시렁 위에 베개와 자리 등의 물건을 두었다. 금생이 말하기를, “이 방은 선생의 수택(手澤)이 남아 있기 때문에 누추하고 낡았지만 감히 개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벽면에 선생의 차기(箚記)와 필적이 정연하게 있었는데, 근래 원장(院長) 아무개가 유택(遺宅)을 수선하는 일로 방백에게 아뢰니, 방백도 감히 필요한 물자를 아끼지 않고 주었다. 종이를 많이 얻어 벽을 모두 새롭게 도배해 버려 이제는 한 글자도 남아 있는 것이 없게 되었다. 이에 사림이 회의하여 서원 문적에서 원장의 이름을 삭제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조롱하고 한탄하고 있다.
아, 선생의 말씀과 행동 하나하나가 후세의 법칙이 되지 않는 것이 없어서 상서로운 구름과 해같이 사모하고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러본다. 지금까지 거처와 용구가 아직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누군들 아끼고 진기한 보배로 여기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비록 자질구레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모두 마음에 새기고 삼가 기록한 것이다. 이는 옛것을 사모하는 벽(癖)일 뿐이니, 보는 사람이 이해하기 바란다.
다시 홍의재에 이르러 마침내 금생과 함께 잤다. 노복이 다시 심원록(尋院錄)을 내와서 우리들이 성명과 자(字), 향관(鄕貫), 날짜를 줄지어 썼으니, 또한 전례이다. 이튿날 아침 출발하려 할 즈음 동쪽 기슭을 100보쯤 걸어 올라가서 천연대(天淵臺)에 이르니, 서쪽 기슭의 천운대(天雲臺)와 마주하여 우뚝 서 있었는데 물길이 도도하게 흘러 앞을 지나가고 시계(視界)가 탁 트여 원근을 막힘없이 전부 바라볼 수 있었다. 석(石) 위에 새긴 ‘천연대(天淵臺)’란 세 글자는 또한 월천이 유의에 따라 만든 것이다. 다시 천운대를 따라 내려와 저녁에 영천군(榮川郡)으로 가서 구학정(龜鶴亭)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도산서당은 세칸 집이고 마루의 이름이 암서헌이고 방의 이름은 완락재다.
퇴계 선생님의 글 도산기에 의하면 암서헌이라는 이름은 '운곡의 시에 "도를 오래도록
지키지 못하니 바위에 깃들여 작은 효험 바라노라"라고 한 말에서 따 온 것이라 하고 방의 이름인 완락재는
주희의 명당 실기에 "완상하여 즐기니 여기서 평생토록 지내도 싫증나지 않을 만하다."라고 한 말에서 따 온
것이라 한다.
도산 서당을 지으며 읊은 완락재라는 7언 절구가 있다.
경을 주로 하되 의를 쌓는 공부를 해야 하니
잊지도 조장도 않으면 차츰 융통하게 되리라
주염계의 태극의 오묘함에 꼭 맞게 되면
비로소 믿으리 천년 전도 지금도 그 즐거움 같음을
성호 이익에 의하면 연못은 작은 샘의 물을 끌어다가 대었다고 한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져서 연못을 만들 때 사각형으로 많이 만들었다고...
퇴계 선생님의 칠언절귀 '시습재'
새끼 새 날갯짓 익히듯 날마다 명과 성에 힘써서
시시때때로 거듭 생각하고 실천해야지
깊은 희열 얻는 건 익히 공부하는 데 달렸으니
어찌 맛난 요리가 입에 즐거운 정도일까
농운정사는 도흥경의 시에서 취해 농산의 흰구름을 말 한다
친구가 찾아 왔으나 차릴 것이 없어 물 한사발을 상 위에 올려 대접하니
하늘의 흰구름이 사발그릇에 깨끗하게 비친다는 말이다
선비의 깨끗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도산서당의 기숙사에 붙인 이름이다
퇴계선생은 모름지기 유생들은 학업에 전념 해야한다고 하여 장인공(工)자로 직접 설계하고
농운정사라 편액을 직접 제작하여 걸어 좌측을 시습제라 하고 우측을 관란헌이라 하였다
몹시도 더운 어느 날 두 유생이 훌륭하다는 스승 퇴계선생의 제자가 되고져 도산서당을 찾았다
우선 퇴계선생이 그토록 아끼신다는 서당 앞 열정에서 찬 물 한두레박을 들이켰다
과연 그 물 맛은 달고 차고 정갈했다
불쑥 도산서당으로 들어가는 일은 스승에 대한 예가 아니므로
우선 농운정사에 들러 전갈하는 학동에게 알렸다
학동이 전 하기를
"선생님 성주와 합천에서 왔다고 하니이더
두 젊은 유생으로 보이는데 선생님의 제자가 되려고 먼길을
찾아왔다고 하니이더
예가 아니지만 꼭 선생님을 만나뵈옵고 가겠다고 하니이더 "
라고 전 하자 퇴계선생 또한 사람을 차별하는 법 없이 대장장이 배순도
글을 배우도록 허락한 터라 농운정사로 발길을 돌렸다
시습제 마루에서는 마침 찌는듯한 여름 날이라 한 유생이 도폿자락과 바지 저고리를 풀어 헤치고
배꼽까지 내 놓은 채 코 까지 골면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으며 관란헌의 한 유생은
의관을 정제 한 채로 땀을 철철 흘리며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꼿꼿한 정 자세로 앉아 있지 않는가?
퇴계선생은 두 모습을 둘러 보고는 시습제 유생은 제자로 받아 들이고
관란헌 유생은 받아 들이지 않고 집으로 돌려 보냈다
의외의 일이 벌어져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라면 이 더운 날씨에 옷을 벗는게 마땅하며 먼길 걸어 도착했으니
피곤하여 낮잠도 자는것이 마땅한 인간의 도리요 자연의 이치라고 하였으며
더운데도 불구하고 도폿자락으로 꽁꽁 싸 매어 힘든 환경을 억지로 참고
꼿꼿이 앉아 있는 모습은 자연과 순리에 역행하는 도리이며 오히려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평생을 "무자기" 즉 자신을 속이지 말라"라는 선생의 좌우명을 실천한 퇴계선생의 판단이었다
더우면 더운데로 추우면 추운데로 행 할 줄 아는 천인합일의 성리학의 심오한 뜻이 배여 있다
훗날 시습제의 유생은 한강 정구(1543~1620)였으며
관란헌의 유생은 내암 정인홍(1535~1623)이라 전 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습기를 어떻게 막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왕조 실록 서고도 보면 다 이렇게 지상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다.
서원의 일반적인 구조는 들어가는 길에 홍살문이 있고, 다음이 문루門樓이고, 다음이 외삼문이고, 다음이 마당인데 좌우에 동 서재東 西齋가 있고, 마당 북쪽에 강당講堂이 있고, 강당 뒤편에 사당祠堂을 모셨는데 사당에 들어가는 문이 내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홍살문은 훌륭한 선현先賢의 위패位牌를 모신 신성神聖한 지역임을 알리는 것이고, 문루는 공부하는 선비들이 쉬기도 하고 풍류를 즐기는 곳이기도 하고 집회의 장소로 활용하기도 한다. 외삼문은 서원을 출입하는 문으로서 이 문안에서는 선비로서 체통을 지키며 경건敬虔하고 엄숙嚴肅하게 행동을 하여야 한다. 외삼문은 문루 아래에 시설된 곳, 그렇지 않은 곳, 또 문을 하나로 꾸민 경우도 많다.
삼문三門은 대체로 사람이 출입하는 문과 신神이 출입하는 문으로 구분한다. 가운데 문이 신이 출입하고 양 측면 문은 사람이 출입한다. 명실 공히 서원의 정문인 셈이다. 이 문에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그 이름의 의미는 출입하는 선비들의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을 알려 주고 있다. 예를 든다면 병산서원은 복례문復禮門으로 사리사욕을 극복하여 예를 갖추라는 것이고, 도동서원의 환주문喚主門은 내 마음의 주인을 부르라는 의미이다.
“의지를 굳세게 하면 뜻을 굳게 지녀 잘못되지 않게 도에 나아가는데 용감하다[剛則守得定不回 進道勇敢]”라는 횡거橫渠(1020~1077. 張載. 중국 北宋시대 哲學家)의 말에서 인용하였다고 한다. 즉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마음이 굳건해야 용감하게 도리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http://cafe.daum.net/dosanseowon에서 복사해 옴.)
조선 제14대 왕 선조(宣祖, 1552~1608)는 어느 날 한석봉(韓石峯, 1543~1605)을 불러 글씨를 쓰게 하였다. 선조는 당시 명필인 한석봉에게 도산서원의 현판을 쓰게 하려 하였으나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내가 만약 도산서원 현판 글씨를 쓰라고 한석봉에게 말하면, 놀란 가슴에 붓이 떨려 글씨가 잘 안 나올 테지.’ 그리하여 선조는 한석봉에게 이를 일러 주지 않고 도산서원 네 글자를 거꾸로 한 자, 한 자 불렀다. 이에 한석봉은 영문도 모르고 받아쓰게 되었다.
선조는 맨 처음에 ‘원(院)’자를 부르고, 다음에 ‘서(書)’자를 부르고, 그 다음에 ‘산(山)’자를 불렀으며, 마지막에 ‘도(陶)’자를 쓰게 하였다. 한석봉은 순서대로 ‘원’자, ‘서’자, ‘산’자를 쓰고 나서 급기야 선조가 ‘도’자를 부르자 ‘아하. 이거 내가 도산서원 현판을 쓰는구나’ 하고 알아차렸다. 한석봉은 자신이 도산서원 현판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가슴이 두근대는 중에 붓을 떨며 마지막 ‘도’자를 쓰게 되었다. 그래서 도산서원 현판 글씨가 약간 비뚤어져 있는 것이라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아래 도산 서당 영역에 있는 농운정사와 함께 학생들의 기숙사다. 하급생들의 기숙사인 서재 -성호집에 의하면 성호 이익이 1700년대에 이 도산서원을 방문하고 쓴 방문기에도 이 두 건물이 서원의 원생이 머무는 곳이라 기록되어 있다.
전교당典敎堂의 ‘전典’은 ‘법’이란 뜻도 있고, ‘책’이라는 뜻도 있다. 합해서 풀이하면 주로 윤리와 도덕적 법法을 기록한 책을 지칭하는 글자이다. ‘당堂’은 한 쪽에 방이 있고 중앙에 마루가 있는 구조로 된 집이다. 전교당은 ‘인간이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집’이란 의미이다.
한존재는 지금으로 말하면 기숙사같은 역할이었던 것 같다.- 성호 이익의 도산서원 방문기에는 이곳이 "장임(長任)을 두어서 원생들을 통솔하며 항상 거처하게 한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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