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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안동 병산서원 17-08-08 본문
서애 유성룡 선생의 병산서원을 다시 가다.
몇년 전 갔다 온 적이 있지만 이번 여름 여행으로 성수네와 문목,세 집이 함께 가다.
류성룡(柳成龍, 1542년 11월 7일(음력 10월 1일) ~ 1607년 5월 31일(음력 5월 6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인문학자, 의학자, 저술가이다. 본관은 풍산(豊山)[1],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경상도 의성의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간성군수 류공작(柳公綽)의 손자이며,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柳仲郢)의 차남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후에1590년 통신사로 갔던 조목(趙穆)·김성일과 동문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용되어 서인이 아닌 이산해와 같은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계기로 강경파인 아계 이산해, 정인홍 등과 결별하고 남인을 형성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군관인 이순신을 천거하여 선조로 하여금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도록 하였으며
이순신으로 하여금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웠고, 임진왜란에 4도
도제찰사, 영의정으로 어려운 조선 조정을 총 지휘하였다.
노량해전과 같은 날인, 정인홍, 이이첨 등의 북인의 상소로 인해 영의정에서 관직삭탈하게 된다.
안동으로 내려가 선조의 부름에도 올라가지 않고 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이다.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았던 청백리이면서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란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순신의 형
이요신과 친구사이기도 하다. (위키백과에서 복사해 옴)
퇴계의 제자로 동문수학한 학봉 김성일과 퇴계 이 황의 후손들이 벌인 병호시비가 해결되었다는 기사가 있었지만
아직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눈길들이 많다.
이 둘은 어릴 때부터 뛰어난 천재들이었다.
퇴계는 학봉을 보고 "이런 아이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고 했고 서애를 보고도 "하늘이 내린 아이"라고 했다.
그만큼 뛰어난 사람들이었으니 서열을 가리기도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병호시비를 보니 송시열과 윤증의 회니시비도 생각난다.
우리 나라에는 가문 간의 불화로 수 백년간 후손들이 서로 혼인도 하지 않는 유명한 분쟁이 몇 건 있다.
파평윤씨 청송심씨 400년 묘지다툼 대화로 끝냈다.
2004년8월 파평윤씨 땅 2500평 제공 청송심씨묘 19기 이장 합의
오는 5월 묘 이장- 윤관 장군 묘역 담 허는 등 대대적 정비사업 추진
파평윤씨와 청송심씨의 400여년간의 묘지다툼이 현세와 와서 타결돼 화제가 되고 있다. 선조대보다 현재의 후손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명문가인 파평윤씨와 청송심씨의 392년간의 묘지다툼이 지난해 8월 청송심씨 측의 제의에 의해 파평윤씨 측이 땅 2천500여평을 내어놓고 윤관 장군묘에서 500m 정도 떨어진 청송심씨 측 땅과 파평윤씨 측 임야 경계선 부근에 묘지를 이장하는 조건으로 합의한 것으로 최근 밝혀졌다.
문제의 발단은 파평윤씨 시조로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공신록을 받은 윤신달의 5대손인 윤관 장군(1040~1111)의 묘를 청송심씨 측이 밀어버리고 그 위쪽에 1614년 청송심씨의 수장이며, 명종의 장인으로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1593~1662)이 부친 묘를 몰래 조성하면서 시작된다.
이같은 배경에는 경기도 파주시 공탄면 분수리에 있는 윤관 장군의 묘가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으로 꼽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심지원의 묘가 조성된 후 윤관 장군의 묘가 파헤쳐졌기 때문에 찾지를 못했다.
왜냐면 그곳은 연산군 때 왕의 사냥터로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양주, 파주, 고양 세 고을이 왕의 사냥터인 유행소로 정해 놓은데다 한참 청송심씨의 세력이 막강할 때였기 때문에 이같은 일이 가능했다.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가 일찍 죽자 둘째 왕비가 인순왕후의 뜻을 받들어 윤관 장군의 묘를 파헤쳐 평지로 만들어 버리고는 그 위에 심지원의 묘를 조성했다.
이후 왕의 사냥터라는 이유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해 133년간 잊혀졌다.
이후 영조 23년(1747년)에 윤관 장군의 후손인 윤동규가 그의 아들 윤광로와 함께 혼사로 장단 땅을 가다가 분수원에 이르러 윤관 장군의 유영을 잊고 있었음을 느끼고 산위에서 살피고 있는데, 심지원의 묘 아래에 큰 무덤이 있는 흔적은 보이나 분묘의 형상이 깍여져 있고 옛 비석이 하나 서 있어 가보니 이호문의 비석이었다.
두 부자는 그곳 지방 사람들에게 묘의 내력을 수소문 해보니 심지원 묘 아래 큰 무덤이 윤관의 묘지이고, 청송심씨 측이 이곳에 투장을 해놓은 후에 일체의 흔적을 없애버렸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에 조족과 의논해 이호문의 손자 형진을 붙잡아다가 다그치니, 청송심씨측이 이씨를 매수하여 묘를 파헤쳐 심지원의 묘를 조성한 사실을 알아냈다.
드디어 파평윤씨 일가가 이에 반발해 영조 39년(1763년) 윤관 장군의 묘를 되찾겠다며, 심지원의 묘 일부를 파헤쳤고 청송심씨 일가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왕인 영조는 입장이 난처했다. 파평윤씨와 청송심씨 모두 왕비를 배출해 외가가 되었기 때문에 어느 한편도 들어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영조는 윤관 장군의 묘와 영의정 심지원의 묘를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두 문장에 화해를 구했으나 파평윤씨 일가는 이에 불목해 용미(산소 뒷부분)를 누르는 심지원의 묘를 이장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가 상소를 올린 도사공 윤희복이 ‘어전발악’을 했다고 하여 매를 맞다가 죽기에 이르러 이로 인해 두 문중은 원수처럼 지내왔다.
이후에 청송심씨와 파평윤씨는 서로 간 결혼도 하지 않을 정도로 뿌리깊은 원한을 갖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 문중간의 묘지 싸움은 결국 권력싸움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만큼 양 가문은 왕비를 다수 배출할 만큼 명문가이기 때문이다.
서원 입구에 배롱나무가 많이 피어 있다.
우리 나라 고 건축물 중 자연 지형을 파괴하지 않고 가장 잘 조화를 이룬 건축물로 영주 부석사와 함께 손꼽힌다고 한다.
옛 한옥을 볼 때 마다 어떻게 저런 작은 공간에서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런 작은 방에서 한 식구가 몽땅 함께 살기도 했으니, 지금처럼 많은 가구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최소한의 삶, 요즘 작은 유행을 일으키고 있는 미니멀 라이프 (Minimal Life)를 살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입교당에서 만대루쪽을 바라보면 앞에 병산이 병풍처럼 보였겠다.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앞을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긴 하지만 여기도 강과 산이 보이니 시원한 풍경이
펼쳐지겠다.
내가 사진 찍는 기술이 부족해서 산을 짤라 버렸네.좀 더 높은 각도에서 산 전체가 다 나오게
찍어야 하는데 건물에만 욕심을 내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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