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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윗옷을 벗은 첼리스트 본문
샬롯 무어만과 함께 한 퍼포먼스
아래의 글은 http://seulsong.egloos.com/m/3890181에서 복사해 옴
백남준에 관한 엄청 많은 자료가 http://seulsong.egloos.com/에 있다.
뉴욕 아방가르드페스티벌공연을 통해 에술적 유대를 확인한 남준과 무어맨은 1965년 유럽순회공연을 다녔다 그들은 파리 로마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스톡홀름 등 유럽각지에서 공연 퍼포먼스를 했다
음악과 성에 대한 남준의 철학은 독특하면서도 시대를 앞서갔다 그는 항상 미술과 문학에서 그렇듯이 음악에서도 성을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이렇게 표현했다
진지함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음악에서 성을 제거한다는 것은 오히려 음악의 진지함을 해치는 일이다. 음악과 미술과 문학과 동일한 위치의 고전에술이다. 따라서 음악도 로렌스 프로이트가 필요한 것이다 -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서문 중에서
남준의 이 같은 철학은 흔쾌히 호응하고 용감하게 거들고 나선 게 샬럿이다. 실은 샬럿을 만나기 전부터 남준은 반라 차림의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를 찾고 있었다. 일본전위음악가인 시오미 미에코에게 부탁을 했지만 퇴짜를 맞았다. 그가 아는 다른 전위예술가 앨리슨 놀스는 과격한 퍼포먼스를 했지만 클래식 연주자가 아니었다. 반드시 고전음악연주자여야 한다는 게 남준의 조건이었다.
반면 정통파 첼리스트인 샬럿은 퍼포먼스를 위해 옷을 벗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더 좋은 건 그녀가 음악적인 재능뿐만 아니라 미미와 매력적인 몸매 예술가로서의 섬세한 감수성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남준이 찾아 헤매던 퍼포먼스 동반자로서 아직 적합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보수적인 미국남부출신의 그녀가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벗은 몸을 드러내며 공연을 한 것은 아니다. 선정적인 공연의 발단은 시은 예기치 못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1965년 5월 남준과 샬럿은 장 자크 르벨이 파리 몽파르나스 미문화원엣 열었던 표현자유의 페스티발 festival de la libre expression에서 함께 공연을 할 예정이었다. 그들은 이미 1여 년 동안 호흡을 맞춰온 터였다. 의상을 정상적인 연주복을 입기도 했다. 그런데 공연당일 저녁 문화원에서 리허설을 막 끝낸 샬럿이 숙소에 검은 드레스를 놓고 왔다고 호텔로 가야한다고 소리를 쳤다. 개막 30분을 남긴 상황이었다. 밖을 보니 교통체증 때문에 거리가 꽉 막혀 이대로 호텔을 갔다가는 도저히 공연시간까지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남준은 커다란 투명 플라스틱 보호막이 둘둘 말려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남준은 즉각 그걸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샬럿에게 말했다.
저거 어때 저녁 이브닝드레스로 입는 거야
그러나 샬럿이 소리쳤다
말도 안 돼
그러나 결국 그녀는 루비콘 강을 건넸다. 남준의 설득 끝에 급기야 속이 훤히 비치는 투명한 비닐을 몸에 두르고 무대에 섰던 것이다. 맨 정신으로는 어려웠나 보다 무대에 오르기 전 스카치 위스키를 한 잔 걸쳤다. 그녀가 나타나자 프랑스 관객은 장내가 떠나갈 듯이 박수를 쳤다. 샬럿은 스카치를 한 모금 더 마시고 격정적인 연주를 시작했다.
술기운이었는지 너무 긴장한 탓인지 그러다 결국 무대에서 쓰려져버렸다. 바로 이날 이후 샬럿의 전위적인 공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계속된 1965년 뉴욕에서 선 보인 존 케이지의 현악기 연주자를 위한 26분 1.1499초 를 해석한 퍼포먼스도 그 중 하나다. 이 퍼포먼스는 현악기 연주자를 위한 26분 1.1499초를 연주하던 샬럿이 윗옷을 찢고 두손으로 첼로 줄을 붙잡아 스스로 인간첼로가 된 남준을 껴안고 그를 악기 삼아 첼로를 연주하는 퍼포먼스였다
클래식음악과 성의 결합을 추구했던 남준이 작곡한 곡이 있다. 바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1966년 독일 아헨에서 초연된 이 작품에서 샬럿은 아예 나신을 드러냈다. 오페라 섹스는 1967년 뉴욕에서 공연되었을 때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4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토플리스로 3막은 아랫도리를 벗고 그리고 마지막 4막에서는 완전한 누드로 연주를 하게 되어 있었다.
당시 미국은 유럽보다 훨씬 보수적인 사회였다 첼리스트가 옷을 다 벗은 연주를 한다는 소문이 돌자 미국당국은 그 공연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고 만약 강행한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여러 번 경고한 터이다
이런 통보를 의식하여 뉴욕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이 공연에서는 특별히 200명을 엄선하여 그들에게만 초대장을 보냈다. 일반인에게는 입장이 금지된 비공개공연이었다. 시간이 되고 막이 오르자. 샬럿은 어둠 속에 비키니차림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첼로를 연주했다. 1막이 끝나고 2막이 시작되자 예고된대로 샬럿은 가슴을 완전히 드러낸 토플리스 차림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즉시 사복 경찰관 3명이 무대위로 뛰어올라왔다.
그리고는 샬럿의 상반신을 코트로 덮어버린 다음에 경찰서로 끌고 갔다.
이 작품의 작곡자이자 제작자인 남준도 함께 연행되었다. 그는 양복차림으로 공연장에 점잖게 앉아있었기 때문에 훈방 조치되었다. 그러나 샬럿은 결국 풀려나기는 했지만 외설혐의로 재판에 붙여졌고 이 사건은 외설과 예술의 자유 논쟁으로 비화하여 미국 예술계 전체에 뜨거운 화두가 되었다.
샬럿이 법정에 서게 되면서 애가 닳은 남준은 그녀를 구출해내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었다. 미국은 물론 유럽의 유명예술가를 동원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 시인이자 정치 운동가인 장 자크 르벨에게 편지를
보내 뉴욕주 지사에게 샬럿의 사면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보내달라고 사정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고맙단느 답장을 늦게 보내는 나를
1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번 용서해 주게나
자네의 멋진 전보
1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번 넘게 고맙다네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에서 남준은 다음과 같은 것을 요청했다
샬럿 무어맨은 유럽에서는 진지하고 역동적인 아방가르드 예술가로 존경받는다는 사실,
자네가 샬럿을 위해 파리 미문화원에서 음악회를 열었다는 것,
그녀가 그 음악회에 알몸을 등장했는데도 경찰이 간섭하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파리에서는 이 공연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평이 좋았고 비평가들도 호의적이었다는 것,
전세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얼마나 분개하는지 친절하면서도 단호하게 항의해주게 바라네
어쨌거나 재판은 시작되었고 그 후 생각도 못 할 문제가 생겼다. 빈털터리 예술가 처지에 변호사 비용을 대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였다. 남준은 결국 이 문제도 자기식으로 풀었다. 1968년 6월 10일 샬럿 무어맨과 함께 한국의 가야금 명인 황병기를 동원하여 뉴욕 타운홀에서 전위적인 재판모금연주를 열었던 것이다
남준이 황병기를 알게 된 것은 그의 누이를 통해서였다. 2번째 누이 백영득은 큰 다방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가야금을 배우고 싶은 마음에 황병기에게 전화를 걸어 레슨을 청했다. 황병기가 이를 허락하여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열심히 배웠는데 한 1년쯤 지난 후에 그녀는 황병기에게 무심결에 전위예술을 한다고 난리를 치는 남준이라는
동생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백남준이라는 괴짜 예술가의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때이다. 그러나 황병기는 음악예술이라는 일본잡지를 통해서 백남준을 알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68년 5월 말경 황병기는 아시아 소사이어티의 초청을 받아 뉴욕에서 가야금 연주를 할 기회가 생겼다. 뉴욕에 도착한 황병기는 평소 만나고 싶었던 백남준에게 전화를 해 자신이 작은 누이의 가야금 선생이자 경기고 후배임을 밝혔다. 이런 차에 학교후배가 제 발로 찾아와 전화를 걸었으니 한 걸음에 달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남준은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만나자고 한 후에 황병기를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스튜디오로 불렸다
그런 뒤에 그를 가까이 있는 차이나타운 중국 음식점으로 데려가 이야기 꽃을 피웠다. 당시 시대상황에서는
두 사람은 일반 경기고생들이 하지 않는 예술 그것도 비디오 아트, 가야금, 별종 중의 별종이었다.
이들은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했다
어쨌든 이날 이후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졌고 그리하여 황병기에게 남은 샬럿의 변호사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공연에 출연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런 우여곡절끝에 무대에 오른 황병기는 평소와 다름없이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즉흥적인 남도선율이 공연장에 퍼지자 샬럿이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채 커다랗고 까만 자루를 들고 나왔다. 그 자루에는 지퍼가 달려 있었다. 샬럿은 지퍼를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안에서 지퍼를 닫고 무대 위에서 가야금 소리에 맞춰 굴러다녔다.
그러다 지퍼를 열고 바깥을 내다보기도 하고 팔과 다리를 내밀었다가 집어넣기도 했다.
당시 황병기는 가야금 연주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낯설고 독특한 무대는 처음이었다며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훗날 털어놓았다.
1967년 첼로 연주자 샬롯 무어맨과 함께 한 ‘오페라 섹스' 퍼포먼스의 한 장면
미국법원은 결국 오페라 섹스를 외설이 아닌 예술이라는 남준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샬럿에게 선고유예판결을
내린다. 남준과 샬럿의 완벽한 승리였다.
샬럿은 토플리스 첼리스트란 별명이 죽을 때까지 붙어다녔고 어쨌거나 두 사람은 예술의 자유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두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심경은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했다. 그냥 예술적 동반자로 보기에는 너무나 샬럿이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둘은 늘 붙어다니며 유럽 여러 나라 순회 공연했다. 아슬아슬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 남준에게는 다른 예술적 잠재력과 에너지가 훨씬 많았는데 왜 이런 미덥지 않은 퍼포먼스에 시간과 재능을 낭비하는 지 의문이 들었다. 그에게 비디오 아트처럼 빛나는 재능을 발휘한 좋은 장르가 있지 않은가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지만 샬럿과 벌이는 해프닝에 대해 너그러울 수 없었다. 그래서 때로 이 문제로 논쟁을 벌렸다.
당신이 샬럿과 벌이는 해프닝은 찬사보다 적을 더 많이 만들고 있어요
그게 내 인생이야 그냥 하고 싶어서 할 뿐이야
왜 그런 일을 하나요 당신 스스로 재능을 낭비하고 더럽히고 있어요
더 이상 잔소리 하지 마
늘 이런 식이었다 샬럿과 공연에 관해서는 남준은 결코 내 말을 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