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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서원 2016-09-17 본문

역사 문화 유적지 관광지

자운서원 2016-09-17

singingman 2023. 1. 23.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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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리에 있는 율곡 이이 유적지다.
율곡은 퇴계와 함께 우리 나라 주자학의 두 거봉이다.
둘 다 남인 계열의 학자이다.
퇴계는 9번이나 과거에서 장원을 할 정도로 조선 최고의 천재였다.
다음백과에 의하면

자운서원

紫雲書院
시대문화재 지정건립시기성격유형면적소재지분야
조선 후기
경기도 시도기념물 제45호
1615년(광해군 7)
서원, 교육시설
유적
1동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
교육/교육

요약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에 있는 조선후기 이이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시도기념물.

내용

1615년(광해군 7)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이(李珥)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50년 (효종 1)에 ‘자운(紫雲)’이라고 사액되었으며, 그 뒤 김장생(金長生)과 박세채(朴世采)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위패는 매안(埋安)하고 서원터에 설단(設壇)하여 향사를 지내왔다. 그 뒤 1969년에 지방유림의 기금과 국비보조로 복원하고 1975년과 1976년에 걸쳐 보수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팔작지붕으로 된 6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동서 협문(夾門) 등이 있으며, 담장 밖에는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져 있다. 서원의 좌측 능선에는 이이와 양친의 묘소가 있고, 근처에 경기도 교육위원회에서 설립한 율곡교육원이 있다.

사우에는 이이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 서원은 1973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묘정비는 1978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매년 8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5변(籩) 5두(豆)이다. 재산으로는 전답 2,000여 평과 약간의 대지가 있다.

이이[  ]

1536(중종 31)∼1584(선조 17), 조선 중기 문신. 본 영정은 김은호 화백이 그린 것으로 1975년 표준영정에 지정되었다.

이칭별칭유형시대출생 - 사망성격출신지성별본관저서(작품)대표관직(경력)
 숙헌(),  율곡() 석담() 우재(), 시호 문성()
인물
조선/조선 전기
1536년(중종 31) ~ 1584년(선조 17)
학자, 문신
강릉
덕수()
천도책, 동호문답, 인심도심설, 김시습전, 만언봉사, 기자실기, 격몽요결, 성학집요
호조좌랑, 예조좌랑, 이조좌랑, 이조판서

정의

조선전기 「동호문답」, 「인심도심설」, 『성학집요』 등을 저술한 학자. 문신.

개설

강원도 강릉 출생. 본관은 덕수(). 자는 숙헌(), 호는 율곡()·석담()·우재(). 아버지는 증좌찬성 이원수()이며, 어머니는 현모양처의 사표로 추앙받는 사임당신씨()이다. 아명을 현룡()이라 했는데, 어머니 사임당이 그를 낳던 날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 서리는 꿈을 꾸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 산실()은 몽룡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생애 및 활동사항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 났다. 1548년(명종 3)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1551년 16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하였다. 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1555년 20세 때 하산해 다시 유학에 전심하였다.

1557년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였다. 1558년 봄 예안()의 도산()으로 이황()을 방문했고, 그 해 겨울의 별시(문과 초시)에서 「천도책()」을 지어 장원하였다.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 ‘구도장원공()’이라 일컬어졌다. 1561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564년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1568년(선조 1) 천추사(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해에 19세 때부터 교분을 맺은 성혼과 ‘지선여중()’ 및 ‘안자격치성정지설()’ 등 주자학의 근본문제들을 논하였다. 1569년 임금에게 「동호문답()」을 지어 올렸다.

1572년 파주 율곡리에서 성혼과 이기()·사단칠정()·인심도심() 등을 논하였다. 1574년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재해로 인해 「만언봉사()」를 올렸다. 1575년 주자학의 핵심을 간추린 『성학집요()』를 편찬했다. 1577년 아동교육서인 『격몽요결()』, 1580년 기자의 행적을 정리한 『기자실기()』를 편찬했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어명으로 「인심도심설()」을 지어 올렸다. 이 해에 「김시습전()」을 쓰고, 『학교모범()』을 지었으며, 1583년 「시무육조()」를 올려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1584년 서울대사동()에서 영면하여,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학문세계와 저서

1545년 을사사화가 발생해 수많은 사류()가 죽고 유배되었다. 사림은 출사()를 포기하고 물러서서 학문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1565년(명종 20) 문정대비()의 죽음과 20년간 정사를 전횡하던 권신 윤원형()의 실각으로 나라 안의 정세가 바뀌었다. 을사사화 이후 죄를 입은 사람들이 풀려나고, 사림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이이는 30세로서 출사 1년째 되는 해였다.

1567년에는 이황이 상경하였다. 그 해 6월,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면서 8월에는 을사사화 이후 피죄되었던 노수신()·유희춘() 등이 서용()되었다. 선조 즉위 다음 해인 1568년에는 조광조()에게 영의정을 추서하고, 이황이 일시에 대제학에 취임하고, 남곤()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이황은 『성학십도()』를 지어 올렸고, 1569년(선조 2)에는 이이가 「동호문답」을 지어 올렸다.

1570년에는 유관()·유인숙()의 신원이 이루어지는 등 정국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면서 사림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오랜 구습이나 폐풍은 일시에 시정될 수 없었고 유림의 활동은 떨쳐 일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1575년부터는 동서의 분당으로 사림이 분열되고 정쟁이 심각해졌다. 연산군 이래의 폐법은 고쳐지지 않은 채 국가의 기강은 무너지고 민생의 곤고는 극도에 달하였으며, 군사적으로도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1565년부터 1592년(선조 26)까지의 약 30년간은 국정을 쇄신해 민생과 국력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이는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를 ‘중쇠기()’로 판단해 일대 경장()이 요구되는 시대라 보았다. 이이는 「만언봉사」에서 “시의()라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하여 법을 만들어 백성을 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이는 조선의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 태조가 창업했고, 세종이 수성()해 『경제육전()』을 비로소 제정하였다. 세조가 그 일을 계승해 『경국대전』을 제정했으니, 이것은 모두 ‘시의()에 따라 제도를 개혁한()’ 것이요, 조종()의 법도를 변란()함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대의 변천에 따른 법의 개정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이에게 성리학은 단순한 사변적 관상철학()이 아니었다. 그는 성리학의 이론을 전개함에 있어 시세()를 알아서 옳게 처리해야 한다는 ‘실공()’과 ‘실효()’를 항상 강조하였다. 그는 「만언봉사」에서,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에는 실지의 일을 힘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정치를 하면서 시의를 알지 못하고 일에 당해 실공을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다스림의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이는 항상 위에서부터 바르게 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실효를 거두며, 시의에 맞도록 폐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이는 사화로 입은 선비들의 원을 풀어주고, 위훈()을 삭탈함으로써 정의를 밝히며, 붕당의 폐를 씻어서 화합할 것 등 구체적 사항을 논의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기()를 튼튼히 하고 국맥()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이는 성현의 도는 ‘시의와 실공’을 떠나서 있지 않으므로 현실을 파악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요()·순()·공()·맹()이 있더라도 시폐()를 고침이 없이는 도리가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이는 진리란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여기서 이()와 기()를 불리()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이이 성리설의 특징을 보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이와 성혼은 평상시에 경학이나 도학과 관련해 문답하는 서한을 교환하였다. 이황이 죽은 지 2년 뒤 이이가 37세가 되던 1572년에 성리설에 대한 본격적인 논란을 벌였다. 그것은 이황과 기대승의 논변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한 것이 아니라, 단 1년 사이에 9회에 걸쳐 주고받은 것이다. 대체로 성혼이 이이에게 질의하고 이이가 회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성혼의 질의내용은 비교적 단순한 것으로, 주자학의 핵심 논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였다. 성혼은 일찍이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오간 사단칠정론()에 대해 기대승의 논의를 존중하다가 이황의 이기호발설()의 도덕적 고민을 이해하고 그 취지에 수긍하게 되었다. 성혼은 이 문제를 과연 어떻게 정돈해야 하느냐고 이이에게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호발설()에 대한 성혼의 재론을 계기로 이이는 이황은 물론이요 서경덕()과 나흠순()에 대한 논평뿐 아니라, 경전의 본의와 송대 제유()의 성리설을 집약적으로 논술해 나갔다. 이 논쟁은 이이에게 성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고 심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후기의 저작인 『성학집요』 속의 성리설이나 만년작인 「인심도심설」의 내용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다.

이이는 선배인 이황의 이원적 이기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황이 이기를 그처럼 분열적 대립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이황 자신이 잇단 사화를 겪으며 당시의 사회정치적 혼란과 부조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데 연유한다. 이황은 개인과 집단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공의()와 사리()의 분별이 명확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이황이 천리와 인욕, 인심과 도심, 사단과 칠정, 그리고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대립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자각의 반영이다.

이황에게 이발()과 기발(), 사단과 칠정, 그리고 도심과 인심은 각기 순수한 정신적 가치와 신체적·물질적 욕구의 두 방향을 의미하였다. 이황은 이기가 왕신관계()에 있으며, 인심은 항상 도심의 명령을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관계가 전도되면 개인적으로는 도덕성의 방기를,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윤리의 파멸과 정치의 타락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이황은 일체의 작위의 근원은 마음의 위미지간()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황은 혼탁한 정치현실을 떠나 학문을 닦음으로써 ‘입언수후()’하여 도()를 전해주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이에 비해 이이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1565년 이후로 사림이 다시 복귀하게 되면서 사회적 상황을 개선하고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며 국맥을 바로잡을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이이는 현실의 개선 그 자체에 진리성을 찾았다. 이이가 이기를 불상잡()의 대립이 아니라 불상리()의 묘()에서 파악하는 것도 이 같은 낙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이의 사칠론이나 인심도심설에 대한 해석도 이황의 이원적인 논의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이는 칠정을 형기()에 속한 것으로만 보지 않고 본연지성 또한 기질지성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 구별하는 것이지, 사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이에게 기란 단순히 혈기지기()로서 타락의 가능성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는 물질적인 것, 감성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 심령이나 이성까지도 포괄한다. 여기서 기는 본연지성을 엄폐()하는 것일 뿐 아니라, 본연지성을 드러나게도 하고 나아가 회복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이는 “인심도심이 다 기의 발이요, 기에 있어 본연지리()를 순()한다면 기가 본시 본연지기()이다.”라고 하며, “기의 청명여부()는 다 기의 소위()이니, 호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인심도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심은 ‘구체()’를 위한 것으로서 그리고 도심은 ‘도의()’를 위한 것으로서 서로 구별된다. 그러나 이이는 이황의 주장처럼 하나는 기발, 하나는 이발로 서로 다른 본질과 근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하나의 심이 “단지 발하는 곳에 있어서 이단()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인심은 성현이라도 면할 수 없으며, “먹을 때 먹고 입을 때 입는 것”은 바로 천리인 것이다. 이이는 인심이라 해도 그것이 알맞게 조절된 상태에서는 “인심 또한 도심이 된다.”고 하였다.

흔히 서경덕은 물론이요 이이까지도 ‘주기론()’이라 하여 학문적으로 연관시켜 보는 경향이 있다. 서경덕과 이이는 다 같이 기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기의 불멸성, 능동성을 강조해 기의 면을 전폭적으로 긍정한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이는 서경덕이 이기의 불리()에 대한 이해는 깊고 투철하지만, 그 위에 뚜렷이 극본궁원()하는 이()의 면이 있음을 몰랐다고 비판했다. 서경덕이나 송대의 장재()가 기에 치우치고 이기를 혼동해 성현의 뜻에 묘계()치 못하였다고 지적했다.

이이는 서경덕의 유기론적() 입장에 대해 ‘이통기국()’을 모르는 소치라 하여 ‘한 모퉁이를 본 사람()’라 폄하했다. 이이 또한 이기지묘()를 말하지만 이이는 서경덕처럼 구극적() 존재를 태허지기()로 보지 않고, 태극지리()로 이해한다.

이이는 이황처럼 이와 기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이가 기에 우월하다는 이우위설()을 주장했다. 이와 기는 결코 혼동할 수 없는 것이며, 이는 기의 추뉴()요 근저()요 주재()라는 것이다. 이의 본체는 통일적 원리이지만 그것은 사사물물에서 유행하는 것이요 만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황이 이와 기가 각각 실질적 동력으로 발용한다는 호발설을 주창한 데 대해, 이이는 이기는 이합과 선후가 없다는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했다. 이이의 견해는 처음부터 이기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이황과 달리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현상 그 자체의 소이연으로서 이를 말하는 까닭에 이발()이 따로 있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이는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통기국설’로, 그리고 이황의 이기이원적 경향에 대해서는 ‘기발이승일도설’로 대응했다. 서경덕은 실재하는 기의 생성변화를 떠나서 별도로 묘()를 말하는 것은 진리를 모르는 자라 하였다. 그러나 이황은 이와 달리 이()야말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으로서 이로 말미암아 모든 학문 도술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이황은 만유를 가능하게 하는 초월적 존재로서 이를 강조한 반면, 서경덕은 이를 기 자체와 작용상의 자율성 또는 내재율로 보아 기의 실재성과 사실성을 강조하였다. 서경덕은 유기론자로서 기를 중시하고, 이황은 이우위설을 논해 이의 구극성()을 강조하였다. 서경덕과 이황은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면서도 이와 같이 매우 대조적인 견해를 견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이는 이의 세계와 기의 영역을 완전히 긍정하여 포괄하면서, 동시에 양면을 아울러 지양시켰다. 이이는 기의 사실성과 이의 초월성을 체인(: 충분히 납득함)해 양자를 불리의 관계에서 파악하면서 ‘이기지묘’를 강조했다. 이이는 이기의 묘처()야말로 알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명하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이이는 태극과 음양, 이와 기의 관계는 일이이()요 이이일()이라는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그의 이론을 대략 다음과 같이 집약하였다.

“전훈()을 고찰하면 이기는 일()이면서 이()요, 이()이면서 일()이다. 이기가 혼연무간해 원래 떨어지지 않으므로 정자는 ‘기즉도()요 도즉기()’라 했고, 떨어지지 않을지라도 혼연한 가운데 섞이지 않아서 일물()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주자는 ‘이는 스스로 이요, 기는 스스로 기’라고 한 것이다. 이 두 설을 종합해 깊이 생각하면 이기지묘를 거의 알 수 있으리라. 그 대강을 말하면 이는 무형하고 기는 유형하다. 그러므로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다. 이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므로, 기는 발()하고 이는 승()한다. 무형무위하면서 유형유위한 것의 주()인 것은 이이며, 유형유위하면서 무형무위한 것의 기()인 것은 기이다().”

이이의 이통기국과 기발이승일도설은 보편적 원리와 특수한 사실을 상호관련 하에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사사물물을 관통하고 있으며, 본연지리는 스스로의 보편성을 가지는 것이지만, 변화하는 사실과 관련한 유행지리()를 떠나서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보편적 원리가 사사물물의 개별적 사실을 관통하고 있으며, 또한 구체적인 변화의 상을 떠나서는 추구할 수 없다는 논리로서, 성리와 실사가 혼융무간한 관계임을 통찰한 결과이다.

또한, 이이는 이른바 의()와 이()를 구별해 이원화하는 사고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리()와 실리()를 불가리()의 관계에서 보고 있다. 이이는 「시무칠조책()」에서 “도()의 병립할 수 없는 것은 시()와 비()이며, 사()의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이()와 해()이다. 한갓 이해가 급하다고 하여 시비의 소재를 불고()한다면 제사지의()에서 어긋난다. 또한 시비를 생각해 이해의 소재를 살피지 않는다면 응변지권()에서 어긋난다. …… 권()에는 정규()가 없으니 중()을 얻음이 귀하고, 의()에는 상제()가 없나니 의()에 합함이 중하다. 중을 얻고 의에 합하면, 즉 시()와 이()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진실로 국가를 평안하게 하고 민중에게 이로우면 다 행할 수 있는 일이요,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고 민중을 보호하지 못하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옳고 그름을 가르는 규범의 문제와 이해관계를 따지는 현실 문제가 ‘득중()’, ‘합의()’함으로써, 보국과 안민이라는 차원에서 시()와 이()의 조화라는 하나의 사실로 지향됨을 볼 수 있다. 이이는 시대에 따라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 각기 다르다고 보았다. 이이는 시대를 ‘창업()’과 ‘수성()’ 그리고 ‘경장()’의 과정으로 나누어 논했으며, 당시를 경장기라고 보았다.

이이는 「동호문답」에서 가장 큰 폐법으로 다섯 가지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것은 모두 민생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① 일가절린()의 폐, ② 진상번중()의 폐, ③ 공물방납()의 폐, ④ 역사불균()의 폐, ⑤ 이서주구()의 폐를 꼽았다. 이러한 이이의 지적은 당시의 시대상과 민중의 질고()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다.

또한, 이이는 국세조사와 같은 전국적인 규모의 조사를 실시해 실정에 알맞게 폐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밖에도 이이는 「만언봉사」·『성학집요』 및 수많은 상소문을 통해 정치·경제·문교·국방 등에 가장 필요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더 나아가 이이는 국정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개인이나 일부 지도층으로부터 하향식으로 수행될 것이 아니라, 언로를 개방해 국민 모두가 말할 수 있게 하고, 위정자는 아래로부터의 중지()를 모아야 한다고 보았다. 조광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이에게 언로의 개색()은 국가 흥망에 관계된 중대한 일로서 강조되었다. 공론()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국민의 정당한 일반 의사가 곧 국시()가 된다고 지적하면서, 언로의 개방성과 여론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또한, 이이는 경제사()의 창설을 제의하면서 단지 기성 관료가 아니라, 시무를 밝게 알고 국사를 염려하는 사류로서 윤리성과 합리성을 겸비한 최고의 지성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듯 의리와 실리, 이념과 현실의 통합적 구상은 후기에 한국의 의리학과 실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도 조선 중기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전개에서 이이의 성리설이 끼친 영향을 깊이 관찰해야 한다. 이이의 성리사상은 오늘날에도 유심과 유물, 주체와 상황, 그리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부터 양자의 조화와 발전을 도모하는 데에 새로운 방향을 던져주고 있다.

상훈과 추모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 일등()에 추록되었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풍덕의 구암서원(), 황주의 백록동서원(鹿) 등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이 [李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이 (naver.com)

이이

조선전기 「동호문답」, 「인심도심설」, 『성학집요』 등을 저술한 학자. 문신. [개설] 강원도 강릉 출생.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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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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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 동재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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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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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올리기 전에 손씻는 곳



축문 태우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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