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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비사 곤도 시로스케 저 이인숙 역 힌명호 감수 해설 이마고 2007년 367쪽 8/15~8/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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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비사 곤도 시로스케 저 이인숙 역 힌명호 감수 해설 이마고 2007년 367쪽 8/15~8/17

singingman 2023. 2. 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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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젊은 관리가 15년간 우리 황실에서 근무하면서 본 대한제국 마지막 시기의 모습이다.
고종황제가 얼마나 힘이 없었는지 알 수있고 순종 역시 일본인들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저자가 일본인이니까 그렇긴 하지만 한일합병을 일본이 우리에게 문명을 전해주고 망해가는 종묘사직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완용, 손병준, 윤덕영, 윤택영등이 일본 총독의 앞잡이가 되어서 나라를 팔아먹는 장면들이 상상이 된다.
특히 순종을 일왕에게 인사시키기 위해서 온갖 위협과 술수를 쓰다가 마지막에는 고종이 비로 간택한지
30년이나 지난 여자를 찾아서 고종을 협박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우리 순종이 일왕에게 절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중국 황제에게도 우리 왕이 직접가서 절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순종은 각본에 따라 일왕과 왕족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조상의 묘에도 절하는 이런 짓을 하고 돌아온다.

창덕궁 화재, 고종과 순종의 갑작스런 죽음, 영친왕의 어린 아들이 고국을 방문했다가 돌아가기 직전에 죽는
이야기등 역사의 현장을 본 저자가 기억을 더듬어서 쓴 책이다.

황태자였던 순종의 두번째 비인 윤 황후의 본방나인으로 입궁한 김명길이라는 상궁이 쓴 '낙선재 주변'이라는
책도 있다.
일본이 왕실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 궁내부의 직원으로 들어간 저자는 일본을 오가면서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이토 히로부미는 아주 존경하는 것 같고 데라우치는 그리 좋게 말하지 않는 것 같다.

조선 후기 궁녀의 수는 대략 500명 정도 되었는데 궁내부에서 이들을 거의 다 구조조정해서 출궁시키고
저자가 근무할 당시는 200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궁녀는 업무에 따라
지밀-침실에서 일하는 궁녀
침방 - 바느질 담당 궁녀
수방 - 자수등을 놓는 궁녀
세수방 - 세숫물 담당 궁녀
소주방 - 음식을 담당하는 궁녀
세답방 - 빨래 담당 궁녀
색장 - 심부름 담당 궁녀
무수리 - 물긷는 궁녀
복이 - 아궁이에 불때는 궁녀
취반비 - 궁녀들의 하녀
최고위 궁녀는 제조상궁, 다음은 부제조상궁, 감찰상궁, 상궁, 나인,하녀 등으로 서열화되어 있다.
궁녀들은 보토 7세 전후에 입궁해서 입궁 후 15년 정도 지나면 정식 나인이 되고 다시 15년쯤 지나면 상궁으로 승진한다.

우범선(우장춘의 아버지)을 암살한 고영근이라는 사람은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사람으로 홍릉의 참봉이 되어서까지 충성을 다한다.

이 당시 종묘는 일본식으로 관리한 것 같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종묘는 이른 아침부터 담당자들에 의해 아름답게 꾸며져 깨끗한 모래에 새겨진 비질 자국도 정갈하고..." 이 글을 보면 일본 정원을 연상하게 된다.

고종이 커피를 좋아해서 정관헌에서 커피를 종종 마셨는데 어느 날 러시아 역관이었던 김홍륙이 러시아와의 통상에서 거액을 횡령하고 흑산도로 유배가 결정되자 고종을 해치려고 황제의 음식을 담당했던 김종화를 시켜서 아편을 탄 커피를 올리게 한다.
이 때 고종은 냄새가 이상해서 많이 안 마셨지만 순종은 많이 마셔서 이빨이 18개가 빠졌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 때 생식 기능도 이상해져서 후손을 낳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설도 있다.

고종이 커피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Waeber)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커피를 고종에게 처음으로 전해준 사람은 마리 앙뚜와네트 손탁이라는 프랑스 여자였다고 한다. 이 여자는 러시아 공사의 처형이었다고. 이 여자는 나중에 손탁 호텔을 짓고 거기에 정동 구락부라는 카페를 열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카페가 되는 것이다.

"많은
존경을 받는
프랑스 중년 여인이
오랫동안 황실에서 일하며 유럽의
물품을 주문하고 식사를 접대하는 역할을 했다"

1901년 6월
덕수궁에 초대되었던
프랑스 소설가 피에르 로티는
<매화 부인의 제 3의 청춘>이라는 소설에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대한 경험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 "중년의 프랑스여인"이 외국 여행자를 황제의 테이블로
안내한 후 "커피, 술과 담배"를 주었다는 기록이 실제로 존재했다.

독신이었고
외모가 빼어나지는
않았으나 밝고 쾌활하며
언어와 외교에 능했던 이 여인은
한국 근대사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활을 했다.
1896년 고종 황제를 만난 이 프랑스 여인은 황제의 조언자 중
한명이 되어 황실의 오랜 전통을 바꾸고 서양 문화를 도입했다.

또한
황제에게
처음으로 커피를
맛보게 한 인물이 바로
그녀였으며 한국에 커피를
소개하는데 기여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커피는 오늘날 한국인들의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이 여인의 이름은 마리-앙투아네트 손탁이다.

1838년 10월1일
독일 국경과 가까운
알자스 오뷔르 마을에서
태어난 마리-앙투아네트는 러시아 발트해
연안에 사는 언니를 만나기 위해 러시아로 향한다.
젊은 프랑스 여인은 러시아 외교관 칼 이바노비치 베베르의
아내인 외제니 베베르부인과 가까운 사이가 된다. 1885년 베베르가
주한 러시아 공사로 임명되자 마리-앙투아네트는 베베르 부부를 따라
서울에 와서 러시아 공관의 의전을 담당하게 된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47세였다.

이 프랑스
여인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대한제국의
문화에 관심을 가졌고 러시아 공관의
의전으로 황제와의 특별한 관계를 계기로
고종 황제에게 유럽 음식과 섬세한 커피 맛을
즐기는 법을 알려주었다. 황제는 커피를 좋아하게 되고
아침 식사와 연회 때 커피를 마시는 습관을 빠르게 갖게 되었다.

1897년 고종은
주변 열강인 중국과
일본에게 자주 국권을 표명할
필요성을 느끼고 자신을 대한제국의
황제라고 칭했다. 이러한 거대한 정치적인
변동 속에서 고종 황제는 마리-앙투아네트를
잊지않고 음식과 의전을 단당하는 "황실전례관"으로 공식 임명하였다.

5년 동안
마리-앙투아네트는
요리, 주류, 커피 보급은 물론
화려한 연회와 피에르 로티와 같은
외국 사절을 맞는 안내를 맡았다. 1902년
마리 앙투아네트는 황실 인근에 자신의 호텔을 열게 된다.
손탁호텔은 근대 유럽식 창문, 전기시설, 전화기와 욕실을 갖춘 최초의 건물이었다.

손탁여사는
이 호텔에 서울
최초의 커피솝을 열었고
이 카페에 외교관들과 몇몇 외국
상인들을 이용하게 하였으며 점차 다른 카페에
영감을 주어 한국인들이 커피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넓혔다.

1897년 고종은
주변 열강인 중국과
일본에게 자주 국권을 표명할
필요성을 느끼고 자신을 대한제국의
황제라고 칭했다. 이러한 거대한 정치적인
변동 속에서 고종 황제는 마리-앙투아네트를
잊지않고 음식과 의전을 단당하는 "황실전례관"으로 공식 임명하였다.

5년 동안
마리-앙투아네트는
요리, 주류, 커피 보급은 물론
화려한 연회와 피에르 로티와 같은
외국 사절을 맞는 안내를 맡았다. 1902년
마리 앙투아네트는 황실 인근에 자신의 호텔을 열게 된다.
손탁호텔은 근대 유럽식 창문, 전기시설, 전화기와 욕실을 갖춘 최초의 건물이었다.

손탁여사는
이 호텔에 서울
최초의 커피솝을 열었고
이 카페에 외교관들과 몇몇 외국
상인들을 이용하게 하였으며 점차 다른 카페에
영감을 주어 한국인들이 커피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넓혔다.

위의 글은 http://cafe.daum.net/lee801326/fWOm/110?q=%EA%B3%A0%EC%A2%85%EC%97%90%EA%B2%8C%20%EC%BB%A4%ED%94%BC%EB%A5%BC%20%EC%95%8C%EB%A0%A4%EC%A4%80%20%EB%9F%AC%EC%8B%9C%EC%95%84%20%EA%B3%B5%EC%82%AC 에서 복사해 옴.

고종 황제를 위한 한 잔의 커피

"많은 존경을 받는 프랑스 중년 여인이 오랫동안 황실에서 일하며 유럽의 물품을 주문하고 식사를 접대하는 역할을 했다" 1901년 6월 덕수궁에 초대되었던 프랑스 소설가 피에르 로티는 매화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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