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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정조처럼 소통하라 정창권 사우 2018년 268쪽 ~10/08 본문

독서

정조처럼 소통하라 정창권 사우 2018년 268쪽 ~10/08

singingman 2023. 4. 10.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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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쓰여진 12통의 편지를 통해 소통의 지혜를 설명한 책이다.

12개의 편지는

 

1. 편지 정치의 달인, 정조

2. 이 부부의 평등한 소통법, 군관 나신걸

3. 남편을 변화시킨 쪽지 편지, 강정일당

4. 영혼을 매료시킨 감성적 소통의 대가 이순신

5. 살림하는 남자, 퇴계 이황

6. 존경받는 아버지, 연암 박지원 

7. 배려하되 단호하게, 명성황후

8. 엄격하고 깐깐한 아버지, 다산 정약용

9. 딸 바보, 선조

10. 외롭고 쓸쓸한 왕비 인선왕후

11. 노부부의 사랑과 전쟁, 신천강씨

12. 불통의 고통, 곽주

 

저자의 말에 의하면 조선 중기 까지는 남녀의 평등이 상당히 잘 이루어졌지만 조선 후기에 성리학이 성행하면서 남존 여비 사상이 강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 중기 까지는 여자들도 남자들과 동등하게 유산을 물려받았고 같은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오히려 혼인제도가 조선 중기 까지는 결혼한 사람들은 출발은 처가 살이에서 시작했다고 하니 여자의 발언권이 강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

 

그리고 조선 시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안목도 식민사관 때문에 많이 비뚤어져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대원군이나 고종, 명성황후를 우리가 좋지 않게 바라보는 시각도 식민사관의 영향이 크다고 저자는 말한다.

물론 이들의 욕심이나 무능, 무당에게 매달린 일들은 객관적으로도 비난받을 만하지만...

 

정조는 편지를 정치에 아주 잘 활용했다.

정치적으로 반대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노론 벽파의 심환지와도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고 이런 편지들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팽례라는 전담 연락책을 두기도 했다.

심환지에게 이 편지는 없애라고 했는데도 그는 몰래 간직하고 있다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졌다.

아마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었던 심환지는 이 편지들을 나중에 왕을 공격할 때 사용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편지에는 오늘날 우리가  sns에서 잘 사용하는 ㅋㅋ나 ㅎㅎ 같은 기호를 사용했다.

'呵呵' 라는 글을 편지 중간에 썼는데 이건은 우리 말로 옮기면 '껄껄'이라고 할 수 있다.

비속어도 사용하고 아주 솔직하게 편지를 썼다.

 

강정일당이 남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낮잠은 기를 혼탁하게 하고 뜻을 해이하게 하며 말을 많이 하면 원망과 비방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술을 과음하면 성품과 덕을 손상시키게 되고 흡연을 많이 하면 정신을 손상하고 거만함을 기르게 됩니다. 모두 다 경계해야 할 것들입니다."

 

남편의 공부를 보면서 어깨너머로 공부한 강정일당의 남편(과거에 급제할 능력이 안 되는 것을 안 아내가 삯바느질등을 하면서 남편을 공부하게 하여 마을 서당의 훈장이 되게 만들었다.)인 윤광연이 아내의 사후에 너무 슬퍼하는 것을 보고 홀아비로 살 것이 너무 처량해서 그러느냐고 비난하는 이웃에게 쓴 글을 보면

"그렇지 않다! 내가 어찌 그것 때문에 슬퍼하겠는가? 다만 나의 스승이 죽었으니 앞으로 의심나는 것이 있어도 누가 그것을 풀어주겠는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누가 그것을 도와주겠는가? 내게 잘못이 있더라도 누가 그것을 바로 잡아주겠는가? 내게 허물이 있더라도 누가 그것을 훈계해주겠는가? 지극히 타당하고 바른 논의와 오묘한 뜻을 어디서 듣겠는가? 심신을 수양하고 품성을 닦는 방도를 어디서 배우겠는가? 내가 큰 과오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부모의 가르침 때문이고 스승과 벗으로부터 훈도를 받는 것도 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공은 역시 부인이었다. 이제 부인이 나를 뚜고 떠나니 마치 닻을 잃은 배와 같고 길잡이 없는 장님과 같다. 멋대로 흔들리며 의지할 곳이 없고 이리저리 넘어지며 갈 곳이 없다. 이것이 내가 심하게 슬퍼하는 이유로다."라고 대답했다.

 

내가 존경해마지 않는 퇴계 선생님도 첩을 두었고 말년에는 재물을 모으는데 열심이었던 같다.

퇴계 선생님은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21살에 김해 허씨와 혼인했지만 27살에 둘째 아들 이채를 낳고 산후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래서 30세에 안동권씨를 재취로 맞았다. 그녀는 지적 장애가 있었다. 당시에는 지적 장애에 대한 편견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일종의 병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전해오는 말로는 안동으로 귀양 온 권질이 찾아와 과년한 딸을 받아줄 것을 청하자 거절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받아들였다고 한다.

첫째 부인 허씨가 병으로 죽고 나서 창원의 관비를 유모로 들여 어린 자식을 돌보게 했다. 이후 그녀는 퇴계의 첩으로 들어가 서자 '적'을 낳았고 지적 장애가 있는 권씨 부인을 대신해 실질적인 주부 역할을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퇴계가 58세 때인 1558년에 큰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에 이렇게 썼다.

 

"반듯한 사람들(부인)이 가고 나서 부득이하게 이 사람(소실)으로 하여금 집안일을 주관하게 하나 일시의 편법일뿐이요 가문을 세우고 후손들에게 보여줄 만한 바른 도리는 아니다."

 

최인호의 소설 유림에는 퇴계와 두향의 로맨스가 나와서 지금도 단양에 가면 그녀의 무덤이 있다고 하고 그 일대에서는 두향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현실과 소설의 차이일 수도 있으나 이 때문에 퇴계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질 정도는 아니다.

 

 

 

손자를 귀여워하는 것은 왕후라고해서 다르지 않다.

인선왕후의 편지를 보면

 

 

다산은 서학을 이론으로는 받아들였지만 몸으로는 익히지 않은 것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큰 아들 학연이 의술에 관심이 많아 의사가 되려고 하자 의원을 천하다고 말하면서 그만두라고 한다.

경제에 밝아서 수익이 좋은 뽕나무를 심으라고도 하고 과일이나 약초 재배법도 아들에게 알려준다.

술은 절대 마시지 말라고 하고 근면과 검소가 가장 좋은 유산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산은 아들들에게 쓴 편지에서 과거 준비를 강요하고 강진 유배지에서 첩을 두었는데 이 첩에게서 딸 "홍임"이가 내어났다.

그런데 유배가 풀려서 돌아가면서 다산 초당의 주인인 윤씨에게 편지를 보내 홍임이 모녀를 잘 보살펴달라는 부탁을 한 이후로는 20년이 넘도록 모른채 하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