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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 윤두서 자화상 2021-02-06 본문
전부터 공재 자화상을 보고 싶었는데 인터넷에 보니까 해남 녹우당에 그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산에서 해남을 멀다는 생각 없이 가게 되었다.
막상 가서 제2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을 보니 국보 제 240호인 원본이 아니고 영인본이 걸려 있다.
관리인에게 물어봤더니 원본은 보관상의 어려움으로 따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천리길을 마다 않고 달려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처음 이 그림을 보았을 때의 감동이라기 보다는 충격을 말하자면 그림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었다.
"안광이 지배를 철하는" 그 눈빛을 감히 바로 바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장중함이 마치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를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이었다.
그 후 이 그림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니 원래 그림에는 귀가 있었고 옷깃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귀가 있고 없고 옷깃이 있고 없고는 내게는 이 그림의 감동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 자화상의 수염이 쥐수염으로 만든 붓으로 그렸다는 소설적 상상력인지 사실인지를 추가하기도 한다.
당시 회화의 한 수법인 버드나무 숯을 이용해서 종이의 앞뒤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고 한다.
또 조선의 많은 자화상이나 인물화가 약간 옆으로 비껴진 각도에서 그려진 데 비해서 공재의 이 자화상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 강렬함이 더 강조되는 것 같다.
유명한 강세황의 자화상을 봐도 측면에서 그리니까 한쪽 귀만 나온다.
또 전신상이나 상반신을 그린 그림들이 많은데 비해 이 그림은 오로지 얼굴 부분만 집중적으로 화면 가득하게 그렸다.
자화상은 터럭 하나도 다르게 그리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자화상에는 그 사람의 사실적인 얼굴뿐만 아니라 인격과 성품이 드러나야 한다고 한다.
이 두 조건을 충족시키는 그림으로서 공재의 자화상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서양화가들 가운데도 자화상을 그린 화가들이 많이 있지만 내 기준으로는 공재를 능가하는 그림은 없다.
귀를 자른 고흐의 자화상이 고통스럽게 살다 간 자신을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내면을 잘 표현한 그림으로는 나는 공재의 자화상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공재는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서 큰 아버지 집에 양자로 들어간다.
해남 윤씨 가문은 큰 부를 이룩했지만 종가의 손이 귀해서 그의 증조부였던 고산 윤선도도 큰 아버지 윤유기의 양자로 들어가고 공재도 8살인가에(내 기억을 믿을 수 없다.) 윤이석의 집안으로 양자로 들어간다.
그리고 과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진사시에도 합격하지만 당시 서인들 집권하에 있던 조정에서 남인 계열이었던 그의 집안은 빛을 보지 못하고 벼슬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여생을 시화에 몰두한다.
어떤 평론가들은 이런 사정을 알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그림에는 한 사나이의 울분이 표현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울분까지는 못 느끼겠다.
이글거리는 눈과 두툼한 입술에서 한 대장부를 본다.
그의 증조부 고산 윤선도도 송시열등의 서인들과의 정치 싸움에서 패해서 오랜 유배 생활을 겪는다.
그러면서 우리 나라 시조 문학에 큰 업적을 남긴다
공재는 우리 나라 풍속화를 개척했고 겸재 정선과 현재 심사정과 함께 흔히 조선의 3재로 알려져 있다.
선대에 이미 진도와 완도 간척 사업등으로 호남의 손꼽히는 부자로 많은 부를 축적한 집안이었지만 정치에서는 빛을 보지 못한 것이 오히려 예술에 몰입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또 정치해서 밥을 먹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으니 이 또한 그의 복으로 보인다.
그의 손녀 소온(小溫)은 다산 정약용의 어머니다.
그러니까 다산은 그의 외증손자가 된다.
다산도 정조 시대에 남인이어서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는데 이 어려움은 선조때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남인은 숙종 초반과 기사환국 때 잠깐 빛을 보고 갑술환국에서 몰락한 이후 조정에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조정에 오래 남아 있지 않고 유배나 낙향한 위인들에게서 많은 걸작들이 나온다.
그의 증조부가 그랬고 자신이 그랬고 다산이 이곳 해남에 유배 와서 500여권에 이르는 책을 저술했고 추사는 제주 유배를 통해서 추사체를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원교 이광사를 인정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추게 되었다.
이 집안이 부를 대물림할 수 있었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당시 재산으로 취급하던 노비를 천대하던 풍토에서 오히려 불쌍히 여긴 점을 들 수 있다.
'공재 윤두서'라는 책 리뷰에는 공재가 말한 이런 글이 나온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노비를 재물로 본다.
채찍질하고, 포학하게 대하여 소나 말보다 못하게 대한다.
저 소와 말도 그 임무를 하지 못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팔지 못할까 봐 잔인하게 상처를 내거나 얼고 굶주리게 하지 않는다.
오직 노비에 대해서만은 이러한 우려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얼고 굶주리게 하여, 해치고 상처 내어 살아서는 그 집안을 파괴하고, 죽어서는 그 재산을 몰수하는데 이르니 슬프구나.
나는 이러한 까닭에 이 기록을 남겨 잘 대우하라고 하였다.
이로써 스스로를 경계하여 반성하고, 또한 자손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다.”(인터넷서점 인터파크도서 (interpark.com))
나는 이 그림에서 위의 말을 하는 넉넉한 인품의 소유자 공재를 본다.
울분에 가득한 소심한 사나이를 보는 것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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