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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하가 왼쪽 어깨를 드러내다 본문
손자 건하가 식탁에 앉아 있다가 더웠는지 왼쪽 어깨가 드러나게 벗었다.
그것을 보고 아래 고사가 생각났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죽고 태자 영(盈)이 그 뒤를 이었는데, 이이가 바로 혜제(惠帝)이다. 나이도 어린 데다가 유약하기 짝이 없었던 혜제는 어린 나이에 일찍이 정치를 포기하고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고, 모든 실권은 한고조의 황후인 여후(呂后)가 쥐고 있었다.(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는 〈여후본기(呂后本紀)〉는 있지만 〈혜제본기(惠帝本紀)〉는 없다.) 혜제는 즉위한 지 7년 만에 죽었다. 혜제가 죽자 여후는 소리를 내어 울기는 했으나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당시 15세의 나이로 시중 벼슬에 올랐던 장벽강(張辟疆, 장량(張良)의 아들)이 좌상인 진평(陳平)을 보고 물었다. “태후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유를 아십니까?”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진평에게 장벽강이 말했다. “돌아가신 황제에게 장성한 아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승상을 비롯해 고조의 옛 신하들이 실권을 잡게 될 것이므로 스스로 불안한 생각에서 그런 것입니다. 좌상께서 태후에게 친정 사람들로 근위(近衛)장군을 삼고 궁중의 요직에 임명토록 권하십시오. 그러면 태후도 안심을 하고 중신들도 화를 면하게 될 것입니다.” 진평은 장벽강의 꾀에 따랐다. 여후는 몹시 기뻐했다.
여후는 여씨 천하를 만들기 위해 유씨 제후왕들에게 여씨 일족의 딸들을 왕후로 맞이하게 하거나, ‘유씨가 아니면 왕으로 봉하지 말라.’는 고조의 유지를 어기고 여씨들을 제후왕에 봉했다.[한고조 유방은 BC196년 영포(英布, 경포(黥布))의 반란을 평정하는 전쟁 중에 가슴에 화살을 맞았고, 그 이듬해 3월에 상처가 재발하여 사망했다. 유방은 임종 전에 제후들과 신하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다음 백마(白馬)를 죽여 함께 그 피를 마시며 ‘비유불왕 비공불후(非劉不王, 非功不侯)’, 즉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고, 공이 없으면 후(侯)로 봉해서는 안 된다.’는 맹약을 하게 했다.]
여후는 집권 8년 만에 병으로 누웠는데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조왕(趙王) 여록(呂祿)과 여왕(呂王) 여산(呂産)을 상장군에 임명하여 근위 북군과 남군을 맡긴 다음, 두 사람을 불러 유언을 남겼다. “너희들이 제후왕이 된 것을 대신들은 못마땅해하고 있다. 내가 죽으면 난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군대를 이끌고 궁중을 잘 지키고 내 출상 때에도 허술한 점이 없도록 해라.” 여후는 얼마 후 죽었다. 장례식이 끝나자 진평이 활동을 개시하여 태위 주발(周勃)과 더불어 여씨 타도 계획을 세우고 먼저 여산과 여록에게서 군권을 빼앗는 작업에 들어갔다.
진평은 여록과 친하게 지내는 역기(酈寄)를 여록에게 보내 이렇게 달랬다. “대신들은 당신들이 왕으로 있으면서 봉지로 가지 않고 군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음모라도 꾸미지 않나 하여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군권을 태위에게 돌려주고 봉지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면 대신들도 안심을 하게 되고 당신들도 왕의 지위를 편안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여록은 과연 그렇겠다 싶어 상장군의 직인을 반납하고 북군의 군권을 태위인 주발에게 넘기고 말았다. 주발은 즉시 북군 군문으로 들어가 장병들에게 소리쳤다. “여씨를 위하는 사람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유씨를 위하는 사람은 왼쪽 어깨를 드러내라.” 장병들은 모두 왼쪽 어깨를 드러냈다.(太尉勃入北軍, 行令軍中曰, 爲呂氏右袒, 爲劉氏左袒. 軍皆左袒.) 이리하여 혁명은 성공을 하게 되었고, 여씨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조리 잡혀 죽고 말았다. 천하는 다시 유씨에게로 돌아갔다.
이 이야기는 《사기 〈여후본기〉》와 《한서(漢書) 〈고후기(高后紀)〉》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여 ‘좌단’은 같은 편에 서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좌우단(左右袒)’이라고도 한다. ‘단(袒)’은 웃통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거나 소매를 걷는 것을 말한다.
‘여씨를 위하는 사람들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유씨를 원하는 사람은 왼쪽 어깨를 드러내라(爲呂氏右袒 爲劉氏左袒/ 위여씨우단 위유씨좌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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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이유는?
“이때 수보리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꿇은 채 합장하며 부처님께 아뢰었다.” 『금강경』 제2장 선현기청분의 초입이다. 수보리의 이러한 행위가 있고 나서 부처님은 불교 교리의 정수인 공포에 관한 설명을 시작한다. 여기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것' '오른쪽 무릎을 꿇는 것' 그리고 합장이 품은 의미는 동일하다. 상대방에게 공경을 표하기 위한 방법이다.
한자 원문으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것은 편단우견, 오른쪽 무릎을 꿇는 것은 우슬착지다. 아울러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에 경의를 나타낼 때에도 으레 세 번 탑돌이를 하는데 반드시 오른쪽으로 돌아야 한다. 이름하여 우요삼잡. 이처럼 불교에서는 항시 오른쪽이 더 먼저이며 더 우월하고 신성한 것이다. 단적으로 부처님의 생애부터 오른쪽 일색이다.
마야부인은 부처님을 오른쪽 옆구리로 낳았다. 산통을 느낄 때 무우수 나뭇가지를 잡은 손도 오른손이었다. 이 땅에 온 부처님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왼손은 땅을, 오른손은 하늘을 가리키며 그렇게 외쳤다. 예로부터 우리는 하늘을 땅보다 상전으로 여겼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은 오른손으로 땅을 짚고 항마촉지인을 그리며 모든 욕망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음을 천명했다. 제자나 신도들의 인사에는 언제나 오른손으로 답례했고 오른쪽으로 누워서 잠을 잤다. 열반할 때도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른쪽에 대한 이와 같은 중시는 부처님이 태어난 인도의 습속에서 연유한다. 오른쪽은 만물의 중심인 태양이 도는 방향이고, 오른손은 밥을 먹을 때 쓰는 손이다. 상서롭고 또한 요긴하다. 오른쪽에 대한 차별 대우는 나아가 인도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통용되는 풍습이다. 오른쪽을 뜻하는 영어 '라이트right'는 '정의' 또는 '권리'라는 아름다운 가치로도 번역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른쪽은 옳은 쪽이다. 심지어 오른손을 바른손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왼손잡이를 흉보면서 그랬다.
반면 중국에서는 왼쪽을 우선한다. 좌우左右라는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자에서는 대등한 개념이 나올 경우 선행한 글자가 응당 손 위다. 일월, 용호, 남녀, 천지 등의 어휘가 이에 값한다. 더불어 그래서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다. 체와 용의 관점에 입각해 정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한결 귀하게 치는 사고방식에서 유래 한다.
여하튼 오른쪽에 대한 편애문화는 그만큼 오른쪽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자기의 오른쪽을 홀대한다는 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기꺼이 내주겠다는 속뜻을 갖는다. 편단우견과 우슬지는 하심과 겸양의 다른 이름이다. 몸의 오른쪽을 내보이고 낮추는 일은 자존심을 버리고 진심을 다해 당신을 응대하겠다는 표현인 것이다. 해인총림 해인사 율원장 서봉 스님은 “부처님 역시 설법을 할 때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며 최선을 다해 가르쳤다”며 “인도의 고유한 관습에 종교적 엄숙성에 대한 인식이 투영되면서 편단우견이 수행자들의 일반적인 복식으로 정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편단우견은 '노출'이기도 하다. 중국 남북조시대에 발간된 『홍명집』에 수록된 ‘사문단복론'에는 편단우견에 대한 중국 스님들의 거부감이 나타난다. 아무리 불교 전통이라지만 너무 야하다는 지청구다. 더불어 무더운 인도와 달리 겨울이 뚜렷한 기후에서는 동상에 걸리기 십상이란 푸념이 일었다. 결국 가사 안에 장삼을 입는 충안을 만들어냈다.
오른손잡이가 절대다수인 사회에서 오른손은 누구나 빈번하게 쓰는 손이다. 오른손이 편해야 인생이 편하다. 사실 편단우견은 실용주의적 결정이기도 했다. 1019년 중국 북송시대에 도성이 지은 『석씨요람』의 주장이다. “율에 이르기를 일체 공양은 모두 편단이다. 이는 집작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소매를 걷으면 물건을 집기도 쉽고 일하기도 수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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