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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산천재 24.04.04 본문

역사 문화 유적지 관광지

산청 산천재 24.04.04

singingman 2024. 4. 4.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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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유적지를 찾아왔다.
산천재는 그가 61세에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72세에 죽을 때까지 평생 살았던 곳이다.
지리산을 너무 좋아해서 천왕봉을 직접 올라가기도 하고 12차례나 지리산을 유산했던 그는 여기서 천왕봉을 바라보면서 평생을 살았다.

그는 실천적인 학풍을 가졌고 그 덕분에 그의 제자들에게서 임진왜란 때 의병장들이 많이 나왔다.

그의 시대에 4대 사화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산림에 은거하면서 제자를 기르고 조정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정치 일선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주자학 일변도였던 당시의 상황과는 달리 개방적이어서 여러 학문을 두루 연구하였다.


조식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絲里)에는 산천재, 별묘, 신도비, 묘비가 있고, 원리(院里)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
현재 건물의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에 세웠고, 앞면 5칸, 옆면 2칸의 현재 건물은 1926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세심정은 선조 15년(1582)에 처음 세웠다.






뒷면의 글은 남명 사상의 요체다.

남명 사상의 요체

내명자경(內明者敬) : 안으로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는 것이 경(敬)이고
외단자의(外斷者義) : 밖으로는 밝고 올바름을 실천 단행하는것이 의(義)이다.








산천재 출입문



남명 조식(曺植,1501~1572)선생이 61세이던 명종 16년(1561년)에 산천재를 짓고 앞뜰에 심은 매화로 그의 이름을 따서 남명매로 불린다.


지금은 꽃이 다 졌지만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보니 아래와 같다.

 


우음(偶吟)/우연히 읊다


주점소매하(朱點小梅下)
작은 매화 아래서 책에 붉은점 찍다가

고성독제요(高聲讀帝堯)
큰 소리로 요전을 읽는다

창명성두근(窓明星斗近)
북두성이 낮아지니 창이밝고

강활수운요(江闊水雲遙)
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 떠있네.


전면 3칸 측면 2칸의 산천재



산천이란 주역 대축괘의 괘상으로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그 덕을 새롭계 한다."는 뜻이라고.




남명의 사상을 압축한 '경'과 '의'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
/덕산계정의 기둥에 쓰다


청간천석종(請看千石鐘)
청하건데 천근이나 되는 저 종을 보게나

비대구무성(非大扣無聲)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네

쟁사두류산(爭似頭流山)
두류산이 그렇지 아니한가


천명유불명(天鳴猶不鳴)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네




주련이 걸려 있다.

은하십리끽유여(銀河十里喫猶餘)
흰 물줄기 십리로 뻗었으니 마시고도 남음이 있네.



백수귀래하물식(白手歸來何物食)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지애천왕근제거(只愛天王近帝居)  
옥황상제가 사는 곳 가까이 있는 천왕봉만을 사랑했네



춘산저처무방초(春山底處无芳草)
봄날 어디엔들 방초가 없으리요마는


남명문집 목판은 총 185매이며, 지금은 남명기념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굴뚝





남명 선생은 앞 뜰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 볼 수 있는 이곳에 산천재를 지었다는데 오늘은 날이 흐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지리산 친왕봉을 배경으로

 

출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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