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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와 전쟁 윤성학 k북스 2022년 348/376쪽 ~5.3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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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와 전쟁 윤성학 k북스 2022년 348/376쪽 ~5.30

singingman 2024. 5. 3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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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아시아를 알기 위해서 읽었다.

동유럽에 살던 부족을 스키타이, 중앙 아시아에 살던 부족을 사카라고 불렀다.
스키타이가 흉노가 되고 흉노는 투르크가 된다.

소그드 - 위구르 - 키르기스족순으로 실크로드의 지배자들이 바뀐다.

중앙 아시아는 오랫동안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 있었지만 소련이 해체된 후 지금은 중국의 경제적인 협력에 의해서 점점 중국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있다.

카자흐인은 청동기 시대 이후 카자흐 튀르크 유목민의 후손이 아니라 몽골 제국과 킵차크 칸국의 후예이다.

유목민과 오아시스 정주민은 공생관계이자 적대 관계이다. 중앙아시아에서 유목민과 오아시스 정주민이 결합해 위대한 문명이 발생했다.

중앙아시아가 이슬람화된 결정적 계기는 751년 중국과 아랍의 탈라스 전투이다.

영국과 러시아가 중앙 아시아 땅을 차지하기 위해 19초~20세기 까지 거의 백년간 싸운 싸움을 great game이라 한다.

튀르크 유목민의 이슬람화를 촉진한 것은 '어려서 노예로 팔려온 군인'을 뜻하는 굴람의 역할이 컸다. 9~10세기 경 중앙아시아 초원 지역에서는 튀르크족 어린이들을 붙잡아 매매하는 굴람 무역이 성행했다. 붙잡힌 어린이들은 전문적인 군 훈련소에서 노예병사로 길러졌다. 초원 출신의 튀르크 어린이들은 또한 이슬람교로 개종해야 했는데 훈련소를 마치면 노예군인 즉 맘루크가 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후에 자신들의 군사적 역량을 바탕으로 이슬람 왕조에서 지배계층이 되기도 했다. 굴람을 통한 튀르크족의 이슬람화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를 촉진했다.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을 특징짓는 것은 개인적 금욕, 검소, 신비주의 경험에서 출발한 수피즘이다. 양모를 뜻하는 수피는 그 수행자들이 양모 누더기를 입고 다녀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피즘은 이슬람의 전통적인 율법은 존중하지만 형식은 배격하고 개인의 내면적 각성과 코란의 신비주의적 해석을 강조했다. 수피즘은 금욕, 청빈, 명상 등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튀르크족 고유의 토착 신앙 요소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중앙아시아를 대표하는 이슬람이 되었다.

중앙 아시아로 내려온 튀르크 족은 처음에는 오아시스에서 정주민족의 용병으로 출발했지만 점차 지배 민족이 되었다. 튀르크의 의미는 '결혼하지 않은 무사'라는 뜻이며 중국어로는 '힘센, 강력함'을 의미한다. 튀르크인들은 환경에 잘 적응하고 다른 부족들과 잘 어울려 살았다. 유목민인 튀르크족은 알타이 산맥과 시베리아 타이가 지역, 카자흐대 초원, 페르가나 계곡, 카스피해에 이르기까지 위구르, 카롤루크, 키르기즈, 오구즈, 티무르 제국, 부하라칸국, 히바 칸국등 다양한 국가를 세우고 분열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거쳤다. 튀르크는 튀르키예와 카자흐, 우즈베크, 키르기즈, 위구르, 야쿠트, 아제르바이잔, 투바 등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이에 분포되어 있는 30 여 개의 튀르크계 종족들을 총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중앙 아시아의 원주민인 페르시아계의 소그드족은 동서양의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교류를 가능하게 만든 비단길의 중개자였다. 누에고치에서 고치를 얻어 제조한 중국산 비단은 고대시대의 옷감으로 사용되는 답답하고 무거운 동물가죽, 따끔거리는 양모, 주름이 많이 가는 린넨과 비교할 수 없었다. 맨살에 닿 는 느낌이 부드럽고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비단은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비단은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국제 통화의 기능을 가졌다. 유목 군주는 비단을 통해 외교와 교역을 주도했으며 비단의 확보를 위해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비단은 기원전 2세기부터 중앙 아시아의 소그드 상인을 통해 아랍을 거쳐 유럽에 수출되었다. 그러나 실크로도는 상품만 전달하지 않았다. 이 길을 통해 불교, 기독교, 마니교, 이슬람교 등 문명이 전파되었으며 종이, 화학등 과학기술의 교류가 일어났다.

오늘날 타지크인 일부는 파란 눈에 심지어 하얀 얼굴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인의 흔적 때문이다. 타지크인들은 기원전 1천년 중반부터 중앙 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지속적으로 거주했던 페르시아계의 먼 후손인 것이다.

파미르 고원의 북동쪽은 톈산 산맥이, 동쪽에는 타클라마칸 사막이, 남동쪽에는 쿤룸 산맥과 힌두쿠시 산맥이 있다. 이들 지역은 평균 고도가 6100 m나 될 정도로 높고 험난한데 장건은 해발 3,700 m 지점에 있는 테렉고개(terek pass)를 넘었다. 중앙 아시아나 유럽으로 가려면 파미르 고원 북쪽에 있는 이 고개를 넘는 것이 가장 빠르다. 고선지, 마르코폴로, 칭기즈칸의 군대도 고개를 넘는 데만 12일이 걸렸다고 할 정도로 험난한 이곳을 통과해 중앙 아시아로 들어갔다. 현장이나 법현등 인도로 가는 고승들은 이 험난한 지형을 피해 파키스탄의 페샤와르로 이어지는 남쪽의 다른 고개를 이용했다.

중국의 장안에서 둔황을 거쳐 텐산 산맥을 지나 파미르 공원을 통과하는 실크로드는 텐산 북로와 텐산 남로로 나뉜다.

텐산 북로는 산시성 시안에서 시작해 간수성 둔황과 투루판과 우루무치, 이닝을 거쳐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로 연결된다.

텐산남로는 다시 둔황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측을 통과하는 서역 북로와 사막 남쪽을 통과하는 서역 남로로 나뉜다.

서역 북로는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텐산산맥 남쪽의 산록지대를 따라 트루판, 카라샤르, 쿠차, 카슈가르로 통한다. 인도 승려 쿠마라지바, 신라 승려 혜초, 삼장법사가 이 길을 따라 새로운 문명을 동아시아로 가져왔다.

서역남로는 둔황에서 누란, 미란, 체르첸, 니야, 호탄을 거쳐 카슈가르까지 연결된다. 대부분 사막인 이 길은 식수와 식량 구하기가 쉽지 않아 점차 서역 북로로 대체되면서 많은 고대 왕국들이 모래 속에 묻혔다.

텐산 남로는 당나라 때 가장 번성했다.
이 길을 통해 중국의 제지 기술과 차, 도자기 비단이 전파되었고 당의 수도인 장안은 동서문화가 융합되는 거대한 국제 도시가 되었다. 당 제국은 서역 경영을 통해 국제적인 왕조가 되었지만 이슬람 아랍 세력과의 전쟁 끝에 서역남로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텐산 북로는 초원의 아래길이라고 할 만큼 초원의 길과 많이 겹친다. 중간에 동쪽으로 몽골, 서쪽으로 카자흐스탄에 이르는 넓은 초원이 있다. 준가르 분지는 한때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을 긴장하게 만든 준가르 제국의 본거지였다.
교역 초기에는 텐산 산맥 남쪽을 지나는 길을 텐산 남로가 주로 이용되었지만 물 부족과 사막화로 쇠퇴하고 북방 민족이 이동하면서 개척한 텐산 산맥 북쪽 교역로가 주로 이용되었는데 이 길을 텐산 북로라고 한다.
텐산 북로는 실크로도의 간선도로가 되어 수많은 상인과 상품이 이동했다.

고래로부터 중앙아시아 북쪽 고원지대는 다양한 민족의 탄생지였다. 서쪽에서 이동한 스키타이가 여기서 흉노로 탄생했고 그들의 피를 이어받은 돌궐은 오늘날 튀르크의 원류가 되었다.
이 지역은 유목만이 가능한 철저한 고립 지역이었으며 여기서 장기간 거주한 부족이 몇백 년이 지나면 하나의 고유한 민족으로 탄생한 것이다.
유라시아 튀르크의 조상격인 돌궐은 중국의 수.당 시기에 유라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했다. 6세기 중반 카스피해에서 만주 지방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강력한 유목 제국이 출현했다.
이 제국을 건설한 사람은 자신을 튀르크라고 불렀고 중국의 사료에는 돌궐로 기록되었다. 돌궐은 튀르크의 중국식 음역이다. 우랄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튀르크족의 조상은 흉노였으며 텐산 산맥을 경계로 그 동쪽에는 동튀르크, 서쪽에는 서튀르크가 살면서 초원을 따라 이동하면서 거주했다. 튀르크족의 인종적 특징은 크게 황색 피부와 머리의 위쪽이 길고 좁다. 몽골로이드 특징을 가진 튀르크는 서쪽으로 갈수록 황인종보다 백인종의 분포도 높다. 이들은 흰색 피부, 짙게 빛나는 눈동자, 둥근 얼굴, 강건하고 균형 잡힌 몸매와 작은 얼굴이 유럽 인종에 가깝다. 예를 들자면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은 유럽형의 특징을 가진 튀르크라고 한다면 카자흐스탄은 동양형
의 튀르크이다.

탈라스 전투는 중국의 시각에서는 역사적인 전쟁 치고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신당서 본기에 단 한 줄 '고선지가 대식과 탈라스에서 전쟁을 벌였으나 패했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군사적으로 큰 의미를 두지 않은 전투임이 분명하다. 전투의 시작은 팽팽했지만 카를루크 족이 전투 시작 후 며칠 만에 아바스 칼리파국에 합류하자 승패가 갈렸다. 튀르크족인 카를루크족은 전투 중에 배신하여 당군의 배후를 갑자기 공격했다. 후방의 카를루크족이 떨어져 나간 상황에서 당군은 포위되었고 비참한 패배를 당했다. 이슬람 쪽 기록인 <이븐 아시르 연대기>에는 '아바스군은 당군 5만명을 죽이고 2만명을 포로로 잡았다'라고 되어 있다. 고선지는 부하 몇백 명만 데리고 허겁지겁 퇴각하여 생존했다. 살아남은 당나라 전쟁 포로들은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로 보내졌다. 러시아의 동양사학자 바실리 바르톨트는 '이 역사적인 날이 중앙 아시아의 운명을 바꾸었다'라고 했다. 이때부터 중앙 아시아는 중국이 아니라 이슬람 세력이 장악한 땅이 된 것이다.

아바스 칼리파 국의 7대 칼리파인 알 마몬의 너그러운 종교 정책과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는 지식 폭발의 시대를 열었다. 이슬람 르네상스는 헬레니즘의 재발견에 박차를 가했고 알 마몬의 후원으로 번역된 고전들은 유럽 르네상스의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 권력자와 부자는 지식인을 후원하는 게 미덕이자 의무였다. 알 마몬 이후 아바스 칼리파국은 연속적인 내전과 반란으로 급격하게 쇠락하였지만 이슬람 문명은 황금시대로 들어섰다. 변경의 일개 영주에 불과했던 사만 원 왕조는 차근차근 주변 페르시아계 토호들을 굴복시키고 아랍계 총독과 관료들을 제거하거나 복속시키면서 성장했다. 사만 왕조는 이스마일 1세 시기에 사실상 아바스 칼리파국으로부터 독립하였으며 트란스 옥시아나 전역을 장악하고 그 근거지를 부하라에 두었다. 사만 왕조의 수도 부하
라는 운하를 통해 도시 전체의 상수도들을 공급하였으며 넓은 포장도로와 커다란 사원, 화려한 궁전과 정원들을 뽐내며 품위 있는 도시 생활이 가능했다. 그러나 10세기 부하라를 세계의 수도로 만든 것은 다양하고 수준 높은 문화와 지식 인프라에 있었다.  이 도시에는 공공 도서관과 서점들이 곳곳에 자리 잡았고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번역들이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구하지 못할 고대 그리스 고전은 없었다. 사만 왕조는 중앙아시아에 빛나는 계몽의 시대를 열었다.

튀르크족이 당시 중앙 아시아의 정주민족의 용병이 되는 과정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게 관례였다.

750년에 시작해서 약 1150년까지 지속한 계몽의 시대는 중앙아시아가 세계의 지적 허브로서 약 500년 동안 문화적 전성기를 누리는 황금기였다. 당시 중앙 아시아는 지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동서의 교량 역할을 하며 고대와 근대 세계를 연결하는 위대한 고리였다. 인도와 중국, 중동의 문화적 진술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이후 중동과 유럽의 지적 활력을 전수했다. 언어와 인종, 민족, 지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중앙 아시아의 주민들은 매우 다원적인 하나의 문화권에 속해 있었고 세속 및 종교 영역 모두에서 풍부하게 축적된 문화적 지적 경험은 다양한 과학적 발견과 새로운 지식을 창조했다. 서구의 르네상스보다 500년이나 앞서 알 라지, 알 파라비, 알 킨디, 알 콰리즈미, 이븐 시나, 알 비루니 등 중앙 아시아의 사상가와 예술가들은 개인을 발견했고 미래에 도래할 과학 혁명의 선각자가 되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사막의 경우 담수를 구하기는 쉽지가 않다. 상류인 고지대에서 하류인 저지대로 담수가 흐르는 도중에 건조한 환경 때문에 말라버리고 설사 가능해도 모래에 포함된 염분이 녹아있어 농수로 적합하지 않다. 고대 페르시아에서부터 고지대 수원의 지하부터 수십 km에 달하는 수로를 건설하고 그 위쪽에서부터 아래로 통로 겸 우물을 만들고 터널을 관리하며 그 지하수를 이용하는 것이 카나트이다. 긴 지하 수로를 뚫은 투루판 카나트의 총 연장 길이는 무려 5000km에 이르렀고 깊이는 100 m가 넘었으며 항상 같은 양의 물이 흐를 수 있도록 온도는 38도를 유지했다. 심지어 카나트는 도시 전체 바로 밑을 통과했는데 이것은 중세 공학 기술의 경이라고 할 수 있다. 카자흐스탄의 튀르키스탄 시에는 케루엔 사라이라는 지하 수로가 있는데 여기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처럼 도시 밑의 지하 수로를 따라 문화 궁전에서 카라반 대상들과 남쪽에서 올라온 농경민들이 서로 과일과 곡물, 가축을 교환하는 시장으로 이동할 수 있다. 척박하고 메마른 땅인 중앙 아시아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카나트 덕분이었다. 카나트가 목화 농사를 가능하게 만들어 중앙 아시아인들은 일찍 섬유와 종이를 사용할 수 있었다. 종이는 사마르칸트등 제지 공장에서 생산되어 널리 사용되었고 지식인들은 유력자들이 만든 공공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볼 수 있었다. 또한 지식인들은 종이를 통해서 서신을 교환했는데 논문의 아버지 프랜시스 베이컨이 17세기에 비로소 시작한 서신록이라는 종이 문명을 이미 9세기에 달성한 것이다.

카나트가 낳은 위대한 중앙아시아 문명은 칭기즈칸과 그 후예들로 인해 무너졌다. 몽골군은 부하라와 구르간지에서 물을 공급하는 댐을 파괴하고 도시를 파괴하는 과정에서 도서관도 파괴했으며 장인이 아닌 지식인들을 말살했다. 몽골의 침입 이후 중앙아시아 대도시는 철저하게 파괴되었지만 간신히 살아남은 이 문명은 16세기 티무르 제국을 꽃피게 했다. 그러나 1550년 시작한 소빙하기에 숲이나 초목이 파괴되고 하천 유량의 변화 폭이 상승하였다. 건기의 장기화와 사막화를 초래하여 농업 생산성이 하락하였으며 오아시스 경제는 크게 쇠퇴하고 중앙아시아의 찬란한 문명도 막을 내렸다.

가자나 왕조의 군사와 전술 또한 유목부대의 전통과는 상당히 차이를 보인다. 가즈나의 핵심은 튀르크이지만 후대로 갈수록 아프가니스탄의 원주민들이 참여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푼자브 지역을 정복한 후에는 힌두교도도 군대에 동원되었다. 카즈나 왕조는 인도를 침략하고 수백 마리의 전투용 코끼리를 사로잡았다. 그들은 전투에서 코끼리 부대를 활용한 최초 이슬람 국가였다. 쇠줄로 연결되고 화려한 장신구를 매단 코끼리 등 위의 화살부대는 기마군단을 외형적으로 압도했다. 그러나 셀주크 유목 전사들은 코끼리에 압도되지 않고 카즈나군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다.

중앙아시아를 침략한 제국 가운데 몽골만큼 잔인한 나라는 없었다. 대부분의 도시에서 몽골군은 젊은 여자들과 아이들은 포로로 끌고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죽였다. 심지어 몽골은 항복하는 사람들을 살려준다고 약속하고는 투항하면 무장을 해제한 후 조직적으로 죽여버리거나 포로를 화살받이로 사용했다. 몽골이 씨를 말리는 살륙에 집착한 이유는 살인을 유희처럼 즐겼기 때문이 아니다. 몽골은 항상 소수였고 어느 지역을 점령해도 주둔군을 둘 수 없었고 정주민 또한 믿을 수 없었다. 극도의 잔인함과 공포만이 소수가 다수를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칭기즈칸 또한 초원 유목민의 후손이자 유목민의 전술을 그대로 중앙 아시아에 적용했다. 그는 공포를 통치방법으로, 학살을 정교하고 조직적인 제도로 만들었으며 집단적 처형은 전술의 일부였다.

티무르 제국의 아미르이자 '이슬람의  검'이며 유라시아 대륙의 실질적인 제왕인 팀무르는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지막 동방 정복 전쟁 전에 죽었다.

130여 년의 짧은 존속 기간이었지만 티무르 제국은 몽골을 이어 중앙아시아 전역을 통일한 대제국으로 동서 실크로드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가 죽고 난 뒤 티무르 제국은 혼란기에 빠져들게 되지만 바로 붕괴하진 않고 백 년 이상을 지탱했다. 이 제국은 사실상 티무르 개인의 탁월한 재능 하나로 세워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존속 기간도 긴 편이다.

300년 이상 서투르키스탄을 지배한 우즈베크 3 칸국은 러시아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하지 않고 무너진 이유는 상호 불신과 반복 대립하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목민족적인 전통이 뚜렷이 남아 있는 3칸국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민족이 아니라 씨족 내지 부족에 두고 있었다. 예를 들어 현재 카자흐스탄의 경우 지역적으로는 세계의 주즈로 분열되어 있지만 더 중요한 단위는 씨족이다. 루(Ru)라고 불리는 카자흐스탄의 씨족은 약 20여 개가 있으며 이들은 7대까지 조상을 같이 하면 결혼을 금지한다. 같은 루끼리는 정치적으로 강력하게 뭉치며 이들은 국가와 사회 외부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오늘날 카자흐스탄의 정치와 엘리트를 이해하려면 루와 주즈를 반드시 알아야 할 정도로 씨족과 지역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러시아 제국이 지배한 서투르키스탄에는 무슬림 사회 전반의 근대적 개혁을 꾀하고 나아가 민족의식의 고취와 정치적 각성을 통해 러시아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을 꿈꾸었던 중앙아시아 무슬림의 근대적 개혁 민족 운동인 자디드 운동이 발생했다. 자디드는 아랍어로 '새로운 방식'을 의미하는데 일종의 문화 계몽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운동은 통신과 교통의 현대 기술과 함께 정기 간행물, 잡지, 신문 등을 통한 대중 간행물을 중시했다. 1910년 기준 타지키스탄의 자디다학교가 10개, 코칸트에는 16개나 있었으며 <진보>, <후르시드> 등 잡지를 발간하였다. 자디드 운동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는데 소비에트 혁명을 전후로 많은 자디드 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로 전향했다.

타지키스탄 내전은 제국주의나 공산당이 인위적으로 그어준 지리가 재앙이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 사례이다. 스탈린에 의해 인위적으로 그어진 타지키스탄 국경은 타지키스탄의 정체성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고대와 중세에 걸쳐 실크로드의 상인이자 찬란한 계몽 문화를 주도한 소그드인들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타지크인들은 칭기즈칸의 침략과 티무르 제국, 우즈베크 3 칸국 이후 변방으로 밀려났다. 타지크인은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우즈베키스탄 영토로 할당한 사실에 대해 매우 고통스러워했는데 그들에게 이 두 도시는 프랑스의 파리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스탈린이 만든 타지키스탄 지리는 타지키스탄의 오랜 정체성을 훼손했고 이것이 타지크인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내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내전의 결과는 타지크인의 마음에 들지 않지만 공산당을 내세우던 라흐몬이 민족주의자로 표변한 것은 타지키스탄 정체성을 오히려 잘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제국주의의 무덤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소련, 영국, 미국이 차례대로 이 나라와 전쟁을 했지만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한 번도 어느 나라도 전쟁에서 성공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