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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이도 다이어리 김경묵 새움 2024년 423쪽 ~ 10.1 본문

독서

이도 다이어리 김경묵 새움 2024년 423쪽 ~ 10.1

singingman 2024. 10. 1.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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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33년분(1418년~1450년)을 1년씩 묶어서 33꼭지의 책으로 만들었다.
세종실록은 총 163 권이다.
이도가 조선의 왕으로 살았던 33년 동안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기술, 기후 등을 망라하는 일들이 시간의 순서대로 쓰여 있다.
저자는 삼성전자에서 수석 디자이너로 일한 사람이다.

세종은 평생 소민을 위한 정치를 펼쳤고 그의 재위 기간동안 흉년이 자주 일어났지만 군량미를 헐어서라도 소민을 먹이기 위해 노력했다.
소민들은 흉년이 심해지면 곡식이 있는 지역에 자식들을 데려가서 집 근처 나무에 묶어두고 오기도 했다.
그 지역 사람들이 살려주기를 바라서이다.

조선의 왕은 신하들과 의견 대립이 있을 때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아버지 태종이 왕권을 튼튼히 하기 위해 세종의 장인을 죽여가면서 까지 노력해서 세종의 입지를 튼튼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의 부인 공비는 나중에 소헌왕후로 능호를 받는다.
아버지를 잃고 자식들을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었지만 세종의 눈에는 아주 좋은 왕비였다.

황희는 개인적인 허물이 많은 사람이지만 워낙 유능해서 평생 세종의 협조자로 일했으며 영의정을 20년 가까이 지낸 신하다.
이 시대에 중국에서 온 사신들 가운데는 우리 나라에서 환관으로 갔던 자들이 오기도 했는데 이들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황제를 등에 업고 온갖 뇌물과 물품을 요구해서 짐궤짝이 200여개나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황제의 눈치를 봐야 하는 소국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어야 했다.
여진족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와서 약탈을 일삼았다.
하지만 이들을 토벌하기 보다는 구슬려서 귀화시켜 우리 나라 국경지역에 살게 하면서 그들에게 집과 땅을 주고 여진족들이 노략질을 못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방법은 토벌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되었다.
황보인같은 신하는 성을 쌓는 일을 자기의 업으로 여기고 꾸준히 했으며 이징옥이나 김종서같은 장군들은 효과적으로 적을 잘 막아냈기 때문에 여진족들이 이 장군들을 두려워했다.
태종의 맏아들이며 세종의 큰형인 양녕은 평생 그에게 짐이 되는 삶을 살았다.
세종은 후반에 병이 많아서 힘들어했고 간혹 온양이나 이천에서 온천욕으로 치료하기도 했다.
법을 잘 만들려고 노력했고 장영실같은 천민들도 유능하면 발탁했다.

내용 가운데 일부를 적는다.

1420년 제위 2년 7월 10일.
한낮에 땡볕이 살을 파고드는 한여름에 어머니 원경 왕후는 말라리아 병을 앓다가 하늘로 돌아갔다.
어머니를 치료하기 위해 온갖 약을 처방하고 수단과 방법을 다해도 차도가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병은 귀신이 옮긴 것이기에 귀신을 피해서 몰래 숨어 다니는 술사 둔갑법을 이용하면 나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매일 밤 12시를 알리는 북이 울리면 큰형, 작은형과 함께 신하집과 친척집으로 어머니의 거처를 옮겨다녔다.
종일토록 방문을 걸어잠그고 혼자서 간병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절에가서 불공 도 하고 귀신을 쫓아낸다는 복숭아 가지를 잡고 기도를 하고, 무당에 의지해 굿을 해도 차도가 없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하늘로 돌아갔다.

옛날부터 좋은 나라는 덕망 있는 노인에게 예의를 갖추는 삼로 오경의 제도를 잘 갖춰야 한다고 했다.
3로는
1.정직하거나
2.강직하거나
3.부드럽게 나이든 노인이다.
이런 노인이 젊은이와 가까운 곳에 살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젊은이가 5경에 해당하는
1. 외모나 태도를 판단하는 방법
2. 말하는 방법
3. 보는 방법
4. 듣는 방법
5. 생각하는 방법을 묻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게 된다.
삼로 오경제도는 해, 달, 별 3개와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 5개가 서로 관계하며 움직이는 이치에서 따와서 붙인 이름이다.
노인의 경험은 최고 수준의 빅데이터다. 70살 이상의 노인은 귀천을 가리지 말고 나라에서 돌보는 제도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내가 방밖으로 잠시만 나가도 사관이 뒤를 졸졸 따라온다.
왕이 잠깐 쉬러 나갈 때는 사관이 따라오지 못하게 하는 것도 해결 방안으로 추가하고 싶다.

조선의 진법은 오진법이다.
변계량이 만든 독창적인 진법체계다.
오진법에는
1. 행군하는 방법
2. 진을 구축하는 방법
3. 적군과 싸우는 방법이 포함돼 있다. 그렇게 여름 내내 전국의 국민들은 농사일과 더불어 오진법 훈련을 병행했다. 아버지 태종은 느슨해진 군인의 전투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여름에 서울에 큰 물난리가 나서 성벽 몇 곳이 크게 허물어졌다.
전국에서 대규모의 인력을 모아서 보수 공사를 시작했다.
농번기를 피하다 보니 한겨울에 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큰 공사는 모두 아버지의 심복인 박자청이 맡아서 했다.

아버지는 공사를 준비할 때 공사를 책임지는 고위 관리를 불러서 3 가지를 주문했다.
1. 불을 피울 마른 장작을 충분히 마련해서 사람이 얼어 죽지 않게 하고
2. 통행을 금지하는 밤 열 시부터 새벽 4시 사이에는 공사를 중지하고
3. 의사 60명을 배치해 병원 네 곳을 지정해서 부상자를 제때 치료하라고 지시했다.
의술이 뛰어난 탄선대사에게는 중 300명을 데리고 다니면서 다친 사람을 현장에서 치료하게 했다. 그러나 특히 올해 겨울에는 서울에 전염병이 돌고 있는데도 이 명령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전국에서 성벽 노동자를 데리고 온 수령은 서로 성과를 보여주려고 혈안이었다.
병이 들거나 다친 군인을 병원에 보내지도 않았다.
그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강요했기에 한 달 반이라는 짧은 기간에 마무리했다.
그러나 공사에 동원된 노동자가 872명이나 죽었다.
이 중에는 공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죽은 사람도 수백 명이었다.
담당 관리에게 사람이 이토록 많이 죽은 이유를 물었더니 공사를 책임지고 있는 공조 참판 이천이 30만 명의 군인 중에 고작 900명 중도 죽은 것이 무슨 대수로운 일이냐고 나에게 묻듯이 대답했다.
공사를 시작할 때 땔감, 공사 시간, 병원을 아버지가 직접 챙겼던 이유가 실감이 났다.

우리나라는 닭과 돼지가 흔하지 않아서 비싸다.
조상에 제사를 지낼 때 상해서 버리기 직전의 고기를 사다가 사용하는 이유다. 그래서 암퇘지 200 여 마리를 민가에 보급하고 번식시키게 했다.
서울에 호랑이 수가 늘었다는 보고를 받고 군인을 동원해서 잡았다.
이런 조치들이 서민의 살림살이를 낳아지게 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희망한다.

1425년 1월 1일
새해 첫날 이른 아침 창덕궁 인정전에서 여진족과 아랍인(회회)도 참석하는 조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1426년 2월 16일
강원도에서 한창 군사 훈련을 하던 중에 서울에 큰 불이 났다는 긴급 보고를 받았다.
눈보라 치는 길을 뚫고 3 일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강원도로 떠나기 전에도 누군가가 고의로 불을 질러서 신신당부를 하고 떠났는데 지금 동대문으로 들어와서 본 서울의 모습은 말 문이 막히고 황망 그 자체다.
하루 만에 총 2286 채의 집이 재로 변했고 발견된 시체만 32명이고 잿더미 속에 죽어 있는 사람은 확인조차 못하고 있다.
아직도 불길이 잡히지 않고 있어서 피해 규모는 계속 늘고 있다.
한양 땅을 수도 서울로 삼은 이후에 이토록 큰 재난은 처음이다.
매서운 겨울 바람도 멈추지 않는다.

지난해부터 나라에서 하루 아침에 조선 통보로만 거래하라고 명령하고 법을 어기고 물물거래를 하다 적발되면 재산을 몰수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그 결과 그들의 가족까지 졸지에 길거리에 나앉는 거지 신세로 전락했다.
국민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황망한 일들이 불과 몇 달 사이에 벌어진 것이다.
그 가족들이 명화 강도를 본떠 화적집단으로 뭉친 것으로 짐작된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현장에 답이 있다.

하루는 윤대에서 임신한 여종의 고충을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노비 업무를 담당하는 책임자를 불러서 정부기관에 소속된 여종이 아이를 낳으면 백일동안 휴가를 주는 제도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또 하루는 회의 중에 나라에서 관리하는 농지의 실태와 개선 방안을 논의하다가 내가 이미 다 알고 있으니 혁신 방안을 숨김없이 진술하라고 말했다.
순간 회의 분위기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왕이 세상 돌아가는 일을 속속들이 알아가니 대충대충 일을 한 것이 그대로 보여지는 것이다.

1427년
작년에 사신 윤봉이 새황제 선덕이 매사냥을 즐긴다는 사실을 알려줬었다. 사냥용 매 해청을 잡아보내면 황제의 우호적인 마음을 얻는데 보탬이 될 것이라는 조언도 했다.
그런데 해청은 잡기도 어렵고 중국까지 먼 길을 산 채로 건강하게 가져가는 것은 더욱 힘들다.
그래서 먼저 그림을 그리는 도화원에 조선에 사는 7 종의 해청을 그리게 하여 전국에 배포하고 포상금을 걸었다. 그렇지만 역시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다.
윤봉에게 자신 있게 말했는데 걱정이다.
이 와중에 윤봉과 백언 그리고 창성까지 3명의 사신이 한꺼번에 서울에 왔다. 자신이 가지고 온 새 황제의 요구 사항은 전쟁용 말 5000 마리와, 처녀와, 요리하는 여종과 환관(내시) 후보자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세종 때 성추문이 많았다.








4월에 온 중국 사신 2명은 특별했다.
옷과 같이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선물을 사양하며 받지 않았고 술자리에서도 예의를 갖추었고 과한 언행을 삼갔다. 이렇게 두 사신은 조용히 업무를 마치고 돌아갔다. 그리고 나서 창성, 윤봉, 이상 세 명의 사신이 7월에 와서 10월에 돌아갔는데 이 셋이 머문 세 달여 동안 조선은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황제 선덕의 권력을 앞세운 세 사신의 욕심과 횡포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조선 땅에서 이동할 때 가마를 타고 편히 이동하려 했다.
사신을 태운 가마를 맨 장정거리의 노고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세 사신이 요구한 선물은 밥그릇부터 희귀한 동물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많았다.
구하기 어려운 진기한 물건까지 섞여 있었다.
사실을 따라온 수행원들까지도 저마다의 몫을 챙기려고 혈안이있다.
불필요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사신과 수행원이 요구하는 물건을 모두 주게했다. 사신 윤봉은 그의 지인을 관직에 임명하거나 선물을 주면 중국의 정세와 황제의 근황을 말해준다.
중국에 돌아가서도 조선의 입장을 대변해 준다.
이처럼 윤봉은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은 사신이다.
한 예로 새 황제가 상스러운 동물을 길들이는 것을 좋아한다고 알려줬다. 그래서 쌀 30 석의 현상금을 걸고 잡은 검은 여우와 흰 기러기를 중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사신이 데려간 처녀 중에 한 명인 한 씨가 서울을 떠나던 모습이 마치 장례식 같았다고 한다.
한씨는 지난해 몸이 아파서 데려가지 못한 기구한 집안의 막내딸이다.
가는 동안에 사신은 그녀의 손을 잡기도 하고 밤에는 한방에서 잠을 자자고 요구했다고 한다.
저들이 황제의 내관이지만 무례하고 추잡스럽기가 이보다 더한 자들이 없다.




1428년
5월 1일부터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폭우가 퍼부었다.
경기도 과천의 관악산은 불성봉이 무너지며 절을 덮쳐서 5 명이 죽었다. 경상도 성주에서는 나무가 부러지면서 민가를 덮쳐서 3 명이 죽었다.
특히 함경도는 수백 채의 집이 떠내려가고 사람이 죽었으며 대규모의 농지가 쓸모 없게 됐다고 보고했다.
폭우가 휩쓸고 지나간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이 떠 않았다.
곡식이 여무는 7월이 되니 이번에는 메뚜기 때가 몰려와서 논과 밭을 새까맣게 뒤덮고 마구먹어 치워버렸다.

요즘 서울은 2 년 전의 대화재 이후로 도로를 넓히는 공사가 한창이다.
길을 넓히기 위해서는 집을물고 길을 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반드시 공정하게 진행하라고 수차례 당부했다.
그런데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힘 없는 서민의 집은 가차없이 허물어서 곧은 길을 만들었지만 고위 관리의 집은 허물지 않아서 구부러진 길도 있다.
내가 이 점을 질책하려 했더니 신하들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다.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성균관의 학생 수가 적어도 200명은 되어야 하는데 100명을 채우기도 버거운 현실이다.
또한 전문 분야 기술을 익힌 사람도 부족하다.
한 예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 약재 종류, 농사법, 예절과 같은 행동을 설명할 때 더없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관청에 소속된 화가 또한 정원이 40명인데 겨우 20명뿐이다. 그래서 도화원에 오래 근무한 화가에게 급여를 받는 관직을 주게 했다.
그림만 그려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12월 13일 중국의 사신으로 갔던 이인이 네 달 만에 돌아왔다.
그가 가지고 온 소식을 듣고 나를 비롯해서 모든 신하들이 환호성을 지를 정도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중국에 갈 때 2개의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갔는데 모두 해결하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선물 목록에 적힌 외교 문서를 황제가 본 후에 긍정적인 답변을 문서로 받아오는 것이었다.
황제의 대답은 "앞으로도 중국에서 보내는 사신이 조선에 도착하면 조선의 왕은 예를 갖추어 대접하라.
그러나 오직 황제 직인이 찍힌 문서에 적힌 물품만 보내고 다른 요구는 모두 거절하라 조선이 중국을 대하는 예는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조선의 왕은 염려하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 두 번째는 금은 세공을 면제하기로 한 것이다..




1430년
4월 17일 스승 이수가 57살로 술에 취해서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죽었다.
오래 전에 이수가 국가고시 1 차 시험에서 수석으로 합격했을 때 태조가  그의 탁월함을 알아보고 불렀다.
그렇지만 사양하고 공부에 전념했다.
다음 해에 비서실장이 태종의 편지를 가지고 찾아가서야 관직에 나왔다.
그렇게 내 스승이 됐다.
스승은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고 한결같이 느그럽게 처신했다.
어디를 가든 아래 사람을 먼저 대접해주는 그런 참 스승이었다.
언제나 배우고 묻기를 좋아했고 말을 절제하고 공손했던 스승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서 문정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스승은 그렇게 술과 글과 더불어 자신만의 세계를 즐겼던 사람이다.
그런 스승이 아내에게 빚만 남기고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빚을 모두 탕감해줬다.
6일 뒤에 변계량이 62세로 죽었다. 변계량이 누구인가 그는 칼과 활이 난무하는 시대에 글 하나로 세상의 무게를 가늠하고 조율한다는 문형 대제학의 자리를 20년이나 맡아온 사람이다.
변 계량을 글이 있었기에 중국과의 외교 기틀이 잡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부정한 것을 멀리했고 인재를 선발할 때는 한결같이 공정했던 사람이다. 변계량은 스승이 죽던 날에 병으로 퇴직했었다.
한꺼번에 조선의 참선비 2명을 잃었다. 11월 20일 사헌부에서 또 황희를 고발했다.
올해는 유난히 말도둑이 많아서 말에 관한 사건에 민감이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황해가 일천 마리나 되는 말을 얼어 죽게 한 관리의 죄를 감면시키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황희가 일에 집중할 때 지켜보면 일반 신하와 다른 점이 있다.
황희는 공정한 것보다 최선의 대안을 찾는데 집중하는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이익을 챙길때도 마찬가지다. 결국 황희를 파면했지만 계속 내칠 수는 없다. 내가 바라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의 특별한 재능을 국가와 국민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황희에게는 나에게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나는 복잡하게 얽힌 사건을 처리하거나 처지가 불쌍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머뭇거리거나 우유부단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황희는 언제나 단순하면서 명쾌한 판단을 놓치지 않는다.
영의정이 되고도 변함이 없다.
하루는 형조가 노비 관련 사건을 처리하는 업무를 한성부와 나눠서 맡자고 했을 때 황가 나서서 형조로 일원화된 지금의 제도를 바꾸면 안 된다고 정리했다. 영의정에 취임하기 전날에도 내가 중국 사신 윤봉에게 선물을 주겠다는 말을 듣고는 서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날 황희의 조언이 없었다면 조선의 왕이 사신에게 선물을 주고도 가벼운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처럼 황위의 말은 언제나 간단하고 분명해서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의 말에는 보편적 원칙이 있고 그 원칙을 넘어서지 않으니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유익한 결과를 만드는 방안까지 제시한다.
황희를 시기하는 신하들이 그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게 되는 이유다.
나 또한 그를 가까이 두고 멘토에게 질문하듯 일을 의논하고 싶어진 이유다.

1433년
음악 분야는 놀랄 만한 변화가 시도되고 있다. 그 변화의 하나로 1월 1일 경복궁 근정전에 쏟아진 공식연회(회례연)에서 처음으로 향악을 대신해서 아악을 연주했다.
3 년전에 신하 박연의 장문의 보고서에 감동해서 향악을 아악으로 바꾸도록 지시했었다.
그동안 박연의 사명감을 가지고 악기와 악보 등 부족했던 많은 부분을 지속적으로 갖춰 왔기에 이룬 멋진 성과다.
악기의 모양은 중국에서 따라한 것이 다수였다.
그러나 소리의 원리와 음율은 조선의 것을 발전시켜서 맑고 아름다운 연주를 해냈다. 박연이 탄생시킨 아악은 중국의 아악과 분명히 다르다.
아악에 대한 박연의 열정과 진정성 또한 남들과 다르다.
조선의 신기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결국 기술의 변화는 사람의 의지와 신념이 만드는 것인가 보다.
새로 만든 여러 악기 중에 편경이 있었는데 한 개의 음이 높게 들렸다. 박연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편경 하나가 조금 덜 다듬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나도 박연과 음악을 논할 자격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즐거운 날이다.
(세종이 절대음감이거나 음악성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다.)

나는 왕이 되던 날 국민이 원하는 것에 부합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었다.
그 결과로 국민이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며 사는 그런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했었다. 내가 먼저 솔선수범하고 나서 신하에게 지시하는 변역 방식의 정치를 지향해 온 이유다.
변역은 내가 먼저 바뀌고 나서 남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행동이다. 그래서 정치인에게 변역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정치를 하려고 마음을 먹은 사람은 반드시 갖춰야 하는 기본 태도다. 옛날 중국 한 나라의 황제 2명은 풍속을 변역 시켰더니 국민과 믿음이 두터워졌다고 했고 당나라 태종은 먼 곳에서 빈 손으로 온 손님일지라도 후하게 대접하니 관계가 좋아졌다고 했다.
이처럼 변역하는 정치는 덕과 예를 갖춰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다.

1436년
하경복과 나의 인연은 특별하다.
그는 나의 거듭된 부탁으로 젊어서부터 줄곧 국경을 지키는 임무을 맡아왔기에 모친이 늙도록 얼굴조차 잊고 살아왔다. 아내가 지어주는 밥이며 아이들을 키우는 즐거움도 잊고 살아왔다.
그런 그가 어느덧 60살이 됐다.
그렇게 하경복을 고향집으로 보내고 오래전에 그와 주고받은 편지를 꺼내 읽었다.
하경복이 '뼈에 세계 보답하겠다'라고 적힌 대목에서 다시 눈길이 멎었다.
국경의 다른 장수들 또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치고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일 것이다.
사기를 충전할 대책이 절실하다.
우선 군대의 오래된 관습대로 군부대에 기생을 두어 아내가 없는 사람을 위로하게 했다.

4월까지 딱 한번 비가 내렸다. 6월에 또 한번 비가 내렸다. 그렇게 반년 동안 비를 본 날이 탄 이탈뿐이다.
기우제라는 기우제는 안 해본 것이 없다. 1. 호랑이 머리를 물속에 넣는 기우제
2. 풍운뢰우단 삼각산 같은 기운이 센 곳에서 피는 기우제
3. 무당이 굿을 하고 중이 불공을 하는 기우제.
4. 광화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어 찬 기운이 들어오게 하는 기우제
5. 도마뱀을 가둬놓고 어린아이가 비는 기우제
6. 각종 용을 그리거나 만들어 놓고 수시로 비는 기우제
이 외에도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고 죄인을 석방했고 전국의 용하다는 곳을 찾아다니며 수시로 기우제를 지냈다.

3월 12일 강원도에서 봄 군사 훈련을 하던 중에 57세로 윤회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윤회는 10살 때 중국의 역사책 통감 강목을 통째로 외울 정도로 천재로 불렸다. 재작년에 방대한 분량의 '자치통감훈의'를 출판하는 팀을 꾸렸을 때 그를 팀장으로 삼았었다.
당시 그는 중풍으로 몸이 불편했지만 장장 21 달 동안이나 아픈 몸을 참아가며 자치통감훈의를 출판해 냈다. 그리고 보름만에 눈을 감은 것이다.

태조 실력을 모두 읽었다.  
태조 시대 역사인 태조실록을 내가 본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하가 태조 실록을 순순히 내 앞에 가져온 진짜 이유를 모르겠다.
내가 태조실록을 꼭 보아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하고 설득해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신하의 실수로 여겨진다. 내친김에 태종실록까지 가져오라고 했지만 이번에는 접근조차 못했다.
나 또한 왕이 실록을 읽으면 공정성을 훼손할 여지가 있기에 왕이 실록을 못 보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태종 실록에 어떤 내용이 쓰여 있는지 궁금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의정부의 권한이 커지니 사헌부에서  의정부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사헌부에서 의정부의 고위관리를 직접 불러서 조사하려 했는데 의정부에서 이를 막았다.
또 하루는 의정부에서 사헌부의 문서를 기록하는 하급관리에게 조사 관련 문서를 가져오게 했는데 사헌부에서 거부했다.
두 조직이 서로 역할에 충실하면서 팽팽하게 대립 구도가 만들어졌다. 비리와 부정이 섞이지 않으려면 행정과 사법을 추구하는 두 부서의 견제가 멈추지 않아야 한다.
서로를 견제하면서 자기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신하들이 있어 듬직하다.

1441년
3월 17일 아내와 함께 충청도 아산 온천으로 출발해서 3 일만에 도착했다. 눈병이 났는데 온천이 효과가 있다고 해서 급하게 서둘러 온 것이다.
눈병이 심각해진 원인은 내가 잘 안다. 하루아침에 생긴 병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을 읽은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7년 전에 자치통감훈의 책을 출판할 때 일 년여 동안 쪽잠을 자가며 등불에 의지해서 원고를 보느라 눈을 혹사시킨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늦은 밤까지 일하기를 반복해서 병이 깊어진 것이다.
내 나이가 45살 밖에 안 됐는데 벌써 두 눈이 흐릿하고 아파서 지팡이를 짚지 않고는 걸어 다닐 수조차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15일 정도 온천에 몸을 담그니 밤에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눈이 밝아졌다. 아내의 병도 많이 좋아졌다.
70살이 넘은 박후생이란 노인이 알려준 온천하는 방법을 그대로 따른 덕분이다.
그 노인에게 중군 부사직을 주는 것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황희와 허조의 자식들을 비교하게 됐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다' 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는다.
대쪽 같은 신념으로 살았던 허조와 거의 모든 일에 해결 방안을 제시하던 황희의 성품을 자식들이 쏙 빼닮았기 때문이다. 속담에도 '아들은 아버지 훈계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뒷모습을 따라한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허조는 언제나 동료들의 의견을 대변하듯 왕에게 끝까지 따지고 반영시키니 동료들과 관계가 원만했다.
허조의 자식들 또한 내가 빈틈을 보이면 아버지 허조처럼 어김없이 나타나서 따진다.
이에 반해 황희는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회의 때마다 탁월한 아이디어로 왕에게 칭찬을 들었다.
이런 황희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동료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황희의 아들들 사건 처리 과정에서도 가볍게 넘겨도 될 만한 것들까지 물고 늘어진 듯하다. 마지막까지도 황보신이 벌을 받았으니 그의 아들은 법대로 과거시험을 볼 수 없게 한 것이 옳다 라고까지 주장했다.
이 법은 이미 예외 조항이 있는데도 무리한 주장을 한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한여름 무더위 때는 영의정 황희를 늦게 출근하게 배려했고 황치신은 한성부윤으로 복직시켰다.
이후로 황희 가족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말에는 일절 대꾸하지 않고 있다.






왕이라는 글자에는 왕의 무한한 책임이 담겨 있다.
가로선 세계는 위에서부터 하늘, 사람, 땅을 상징하는데 이 셋의 가운데를 반듯하게 관통하는 세로선이 왕이 있어야 할 위치이며 해야 할 역할이다.
그래서 왕은 국민이 의지할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하고 왕이 그곳에서 무한한 책임을 가지고 세상 모든 일에 관여하고 중재하고 결정해야 한다.

얼마 전에 경복궁에서 멀지 않은 연희궁을 수리하게 했다. 연희궁은 왕이 서쪽으로 행차할 때 거쳐는 궁궐이라 해서 서이궁이라 불렀는데 내가 행복이 넘치는 궁궐이라는 뜻을 담아서 연희궁이라는 새 이름을 지었다.
이제는 한적한 곳에서 조용히 지내고 싶다.
연희궁은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다.

수양대군인 세조는 아주 유능했다. 그래서 세종은 수양이 혹시라도 왕권에 대한 욕심을 가질까봐 걱정을 많이 했다. 이름을 바꾸어 가면서까지 한 것도 그런 이유다.
결국 그는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지금 국가에서 소금을 전매하려는 목적은 하나다. 오로지 가난한 서민에게 나눠주는 식량창고(의창)에 곡식을 채울 비용을 버는 한 것 한 가지뿐이다.
지금 국가의 재정 상황으로는 더 이상 의창에 곡식을 채울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왕으로 있는 한 '국가는 서민과 이익을 다투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8월 20일 소금을 관리하는 부서인 의염색을 운송부서인 전원색과 통합하고 확대 개편했다.

죽은 아내 이름을 소헌이라 정했다.
아내가 살아서 불리던 이름이 공비였다. 겸손하고 예의 바른 아내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죽은 뒤에 불릴 아내 이름은 내가 직접 정하니 기분이 이상하다.
소헌은 밝음을 일깨워주는 사람이란 뜻이다.
실제로 아내는 왕인 나보다 더 아랫사람을 믿어주던 왕비였다.
한 예로 공비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후궁에게 맞게 기르게 했을 정도였고 후궁 또한 정성껏 길렀다.
온갖 탐욕이 넘치는 궁궐에서 이런 사례는 없었다.
그렇게 아내는 후궁들과 믿음을 쌓고 정을 쌓으며 살았던 왕비였다.
믿음을 한자로 신이라 쓰는데 이 글자에는 믿음을 연결하는 방법이 담겨 있다. 사람에게 말을 바르게 하는 방법이 상대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좋은 방법이라는 글자다.
아내는 글자 그대로 후궁에게 말 한마디를 해도 겸손하게 했다.

내가 추억하는 아내는 평소에 믿음을 주는 말로 정을 쌓으며 살았고 나에게 모범을 보이던 사람이었다.
잔소리도 잘난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왕의 처신하는 도리의 바탕이 되는 정을 아내에게 배웠다라고 누구에게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 정은 훈민정음 사용 설명서 (해례본)에 나와 정인지가 적은 정과 그 뜻이 연결돼 있다.

훈민정음은
1. 28개 문자만으로 모든 말을 글로 적을 수 있고
2. 무식한 사람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고 3. 글을 읽으면 바로 뜻을 알 수 있고
4. 재판할 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 수 있어 억울하지 않고
5. 어느 누구와도 소통이 되고
6. 바람, 학,  닭, 개의 소리도 글로 적을 수 있고
7. 보기를 들어서 풀이한 사용 설명서를 보고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는 그런 쉬운 문자다.
그동안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산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젊은 학자들의 고생이 있었기에 완성할 수 있었다.
이들은 세자와 더불어 조선의 다음 시대를 이끌어갈 믿음직한 인재들이다.
세자와 자식들 또한 그동안 알게 모르게 고생이 많았다.  
12월 26일 하급 공무원을 선발하는 시험에 처음으로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으로 지정했다.

1447년
평안도는 태종때 비축해 둔 군량미가 100만석이 넘었는데 내가 왕이 될 무렵에 거의 다 소비됐다.
그리고 지금까지 거듭된 흉년으로 곡식 창고가 텅텅 비었다.
어떻게든 이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아야 한다.
올해는 다행히 황해도를 제외하고는 조금 풍년이 예상된다.
5월이 되니 논에 누에처럼 생긴 해충이 급증했다.
벼를 갉아먹어서 남아 있는 알맹이가 거의 없을 지경이다.
6 월에는 최근 1년 동안 전국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4000명을 넘었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서울 안에서도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457명이나 되고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사람도  1000명을 넘어섰다.
길가 여기저기에 시체가 나뒹굴고 밤이면 여우와 삵의 먹이가 되고 있다.
11월 서울 거리의 풍경이 이처럼 을씨년스럽고 휑하다.
병원 시스템이 갖춰진 서울이 이정도인데 지방은 불을 보듯 뻔한 처참한 상황일 것이다.
특히 국경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살려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단정지어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하루는 평원도 맹산에 사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도망치는데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마을 하나가 통째로 없어질 정도였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특히 도망치는 중에
1. .옷이 헤지고 찢어져서 알몸이 된 사람은 비옷(도롱이)으로 겨우 알몸을
가렸고
2. 흙을 주워 먹으며 배를 앓았고
3. 나무나 돌에 치어 넘어져서 죽었고
4. 전염병에 걸려서 죽기도 했고
5. 겨우 살아서 중국으로 도망친 자도 있었는데 그 수가 몇 천 명인지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행성은 국경 강을 따라 길고 높게 세운 벽이라면 읍성은 집 마당에 둘러친 탐장에 비유할 수 있다.

황보인은 국경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귀찮은 관리자이지만 왕에게는 믿음직한 신하다. 올해도 황보인은 어김없이 8월부터 한 달 동안 함경도에서 행성과 읍성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예전에 하삼도에 최윤덕이 있었다면 지금 국경에는 황보인이 있다.  
둘의 공통점은 성을 쌓는 전문가다.

1448년
15년 전에는 창덕궁 옆 문소전 한 켠에 불당이 있었고 중 7명이 상주했었다. 태조의 지시로 태종이 지은 불당이었다. 문소전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그 불당을 헐어버렸다.
문소전 옆 빈땅에 내불당을 새로 짓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그런데 찬성하는 신하가 한 명도 없다. 다음날 비서실장(도승지) 이사철과 긴밀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장관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려고 온 것이다. 밥과 술을 배불리 먹여서 보냈다.
감사원과 집현전에서 또 찾아왔다. 이번에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돌려보냈다.
그리고 당장 공사를 총괄할 관리를 임명하고 군인 200명을 동원해서 공사를 시작했다.
반대의견을 한쪽 귀로 흘려버리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밀어붙인 것이다.

조선은 유교를 높이고 불교를 누르는 숭유 억불을 나라의 기본 사상으로 운영하고 있다.
왕 또한 변함없이 지키고 있다.
그럼에도 왕이 궁궐 안에 불당을 짓는데 집착하는 이유는 하나다.
말년에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만큼 아픈데 아들이 두 명이나 죽고 아내까지 죽어서 마음을 둘 데가 없기 때문이다. 불교가 우울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줄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반대하는 신하가 서운하다.
12월 5일 우여곡절 끝에 경복궁 안의 새 불당이 지어졌다.
5일 동안 경찬회를 열었다 경찬회는 법당이나 불상을 새로 만들었을 때 하는 불교의식이다.
경복궁에 중이 들어오고 불경 소리가 퍼지고 음식과 사람이 한가득이다.
모처럼 경복궁이 북적이니 나도 즐겁다. 정분, 민신, 이사철, 박연, 김수온과 같은 불교를 믿는 신하들은 하루 종일 중들과 뒤섞여서 뛰고 돌기를 쉬지 않는다. 한겨울인데도 온몸이 땀에 젖었고 피곤한 기색이 조금도 없다.
그동안 불교를 믿는다고 말하지 못하고 어찌 참아왔을까?
이들 중에  이사철은 비서실장이고 김수호는 중 신미의 동생이다.

배를 만드는 일과 성을 쌓는 일을 맡은 두 관리의 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일과 업의 차이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자기가 하는 일을 업이라 여기는 사람은 일을 즐기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다. 황보인이 비록 63살이나 된 늙은이지만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싱싱하고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다.
이에 반해 평범한 일을 끝내고 만족하는 사람은 대체로 본인에게 돌아오는 보상만큼의 일 이후에는 모두 가욋일 이라고 여기며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높은 자리까지 승진하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고위 관리 승진은 자신의 일을 업으로 여기는 신하에게 주어지는 보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