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북방의 초원지대에서 흥기한 흉노는 중국을 오랫동안 괴롭히면서 조공을 받기도 하면서 화친하기도 했다.
전한시대 한 무제 때에 장건은 흉노를 치기 위해 월지와 동맹을 맺으러 가다가 흉노에게 붙잡혀서 10년 이상 갇혀 있었지만 결국 탈출해서 중국에 서역의 자세한 소식을 전하고 이 정보들을 토대로 중국은 실크로드 국가들을 통제하게 된다.
한 무제 이후 흉노는 중국에게 종속되고 남북으로 나뉜다. 북흉노는 중국에 저항하고 남흉노는 중국에 종속된다.
후한 시대에 반초가 북흉노 지역의 패권을 되찾게 되고 북흉노는 결국 동쪽의 선비족과 연합한 후한에게 멸망당한다.
튀르크인들이 세운 최초의 유목 국가가 흉노 제국이다. 몽골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직선거리 7,000km의 초원과 산맥, 사막 지역을 관통하는 지역이 흉노 제국의 본거지였는데 이곳은 스키타이, 흉노, 돌궐, 몽골 등 유목 민족이 치열한 생존과 투쟁, 문명 교류의 역사를 일구어 낸 곳이다. 이 지역은 북위 40~ 60도에 걸쳐 있는 북방 유라시아 지역이다. 북방 유라시아의 초원지대와 사막지대에서는 수많은 유목 민족들이 목초와 수원 그리고 계절을 따라 동물과 함께 이동하며 양과 말을 주로 키우는 유목 생활을 하였다. 흉노는 주로 튀르크, 몽골, 만주,퉁구스 계의 부족연합체로 몽골 고원의 초원을 최초로 지배한 유목민족이다. 이들은 생활이나 전쟁에서 말을 중요하게 이용한 유목 기마민족이다.
스키타이는 유라시아 서방에 있던 이란계 민족으로 역사상 최초의 강력한 유목국가이다. 파미르고원 동쪽에서 흉노는 중국의 한과 각축을 벌인 반면 그 서쪽에서는 이란계 스키타이가 페르시아와 각축을 벌였다.
역사상 등장했던 유목민은 크게 네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인도 이란계통으로 스키타이, 사르마트, 월지 등이다. 둘째, 튀르크 계통으로 융적, 호, 흉노, 튀르크, 위구르 등이다. 셋째, 몽골 계통으로 선비, 유연, 거란, 몽골 등이다. 넷째, 퉁구스 계통으로 숙신, 읍루, 말갈, 여진, 만주 등이다.
흉노는 기원전 4세기 말에 몽골 고원에서 일어난 민족으로 유목민족 중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국가를 건설하고 기원 후 3세기까지 중국을 농락한 유라시아 내의 최대 유목 제국이었다. 기마술과 궁술에 능하고 철제 무기로 무장한 흉노는 유목 민족의 특성상 단 한 번도 정주국가를 만들지 못하였지만 중앙 아시 아 아랄해에서 티베트 고원 그리고 한반도 북부까지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며 중국의 판도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광활한 영토를 포함하는 거대한 초원제국을 건설하였다.
흉노에 쫓겨난 월지는 중앙아시아로 밀려 그곳에서 대월지를 세웠고 일부는 인도 서북부에서 쿠샨 왕조를 세웠다.
흉노의 패망 후 5세기에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이 유럽을 침공해서 유럽 문명을 피괴했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아틸라는 악마와 같은 인물이었다.
453년 젊은 여성 일디코와 결혼식을 치른 날 밤에 60세의 나이로 아틸라는 급서했다. 세 아들이 노력했지만 아틸라 사후 16년 만인 469년에 아틸라의 죽음으로 훈제국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2008년에 방영된 KBS <역사 스페셜>에서는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던 김일제(기원전 124년~ 기원전 86년)가 신라 김씨의 조상이라고 소개했다. 이 사실을 근거한 역사적 유물로는 1967년 경주에서 발견된 문무대왕릉비 와 1954년 섬서성 서안에서 출토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의 명문을 들었다. 김일제는 흉노왕의 태자로 비록 한 나라 군사에 잡혀 노예가 되었으나 충성을 다한 공으로 투후란 높은 벼슬을 받았고 한 무제로부터 김씨성을 하사받은 인물이다. 사회 일각에서는 신라 왕조 김씨가 혈연적으로 흉노의 김일제와 연관이 있는지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흉노 무덤인 쿠르간과 신라의 황남대총 같은 고분에서 나타나는 적석 목각분간의 연관성 여부에 대해서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1994년 독일 공영 TV인 zDF 방송은 다큐멘터리 시리즈 '스핑커스 역사의 비밀'의 <잃어버린 고리 찾기>에서 375년 유럽을 강타하여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하게 한 훈족을 집중적으로 취재 방영 했다. 이 방송은 훈족의 서방 이동로에서 발굴된 유물과 우리나라의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등을 비교 검토하면서 훈족의 원류가 아시아의 최동단의 한국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이 프로에 참여한 옌스 페터 베렌트 연출가와 아이케 슈미트 미 코넬대 교수는 한민족과 훈족이 연관되는 특성으로 몽골반점, 복합궁, 편두, 동복(청동솥) 등을 들었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일으킨 민족이 한국인일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돌궐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무렵 돌궐은 몽골계 유목국가인 유연에 복속되어 있었다. 유연은 몽골과 중앙아시아 동부에서 강국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386년에 튀르크계인 타브가치가 세워졌는데 타브가치는 불교를 받아들인 후 한화되어 북위라는 이름으로 존립을 계속하였다. 북위는 534년에 동위와 서위로 분리되었다. 동위는 550년에 멸망하여 북제가 되었고 서위는 557년에 북주가 되었다. 서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350년대 유연에서 독립하여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세워진 에프탈이 세력을 이란과 아프가니스탄까지 넓히고 있었다. 현재 이란 지역에는 페르시아의 사산조가 있었다. 아시아의 서단에는 동로마 제국이라 불리는 비잔티움 제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돌골 제국은 흉노 제국 멸망 후 광대한 몽골과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 분산된 튀르크계 여러 부족들을 통합한 초원의 대국가였다. 유라시아 초원이 흩어져 있는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제국을 건설한 지도자는 튀르크계 부민(Bumin 또는Tumen)이었다. 그는 552년 서위와 연합하여 초원의 강국 유연을 멸망시키고 초원의 지배자가 되었다.
중국 주서 이역하의 기록에 의하면 돌궐은 흉노족의 후예이며 돌궐의 기원 신화도 흉노와 같이 늑대와 연관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돌궐의 조상은 늑대와 결합하여 10명의 남자 아이를 낳았으며 이들은 모두 장성하여 성(姓)을 가졌다. 이는 몽골족과 같은 북방 유목 민족들이 갖고 있는 설화에서 보는 것처럼 초원의 강자인 늑대에 대한 유목민들의 토템 신앙을 반영한 것이다. 늑대로부터 나온 아들이 부족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중국의 북위가 동서로 분열되고 유연이 약화되는 정세 아래 북방 초원의 주 세력이 유연에서 돌궐로 교체되고 서위가 소그드인을 돌궐에 외교사절로 파견하면서 545년경 튀르크계 지도자 부민이 초원의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등장했다. 돌궐은 먼저 유연과 에프탈의 틈에 끼어 점차 약체화되었던 고차를 546년에 격파하고 병합했다. 그 후 6년 후인 552년에 그는 서위와 연합하여 유연을 멸함으로써 흉노에 이어 초원의 새로운 최강 패자가 되었다. 부민은 카간이라는 칭호로 돌궐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돌궐 제국원 기원후 1세기 중반경 흉노가 붕괴된 뒤 실로 500년 만에 유목민을 통합하고 출현한 국가였다. 그런데 그 영역은 훨씬 더 커졌다. 과거 흉노의 경우 서쪽 경계가 대체로 파미르 고원 정도까지였는데 돌궐의 범위는 서쪽으로 더욱 확장되어 카스피해와 흑해까지 미쳤으니 실로 유라시아 대제국이었고 당시 동아시아의 당제국, 서아시아의 압바스 칼리프 조, 유럽의 비잔티움 제국과 함께 유라시아의 국제 질서를 좌지우지했던 큰 기둥이었다.
무칸 카간 시대에 중국은 북주와 북제가 경쟁 관계에 있었다. 돌궐은 이 두 나라를 이용해서 많은 부를 취했다. 557년에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켰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돌궐이 비잔틴으로 비단 수출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어서 비잔틴과 동맹을 맺었고 또 622년에 이슬람교가 창설되었다. 630년대 후반 아랍의 공격으로 사산조 페르시아는 651년에 망했다.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통일하고 돌궐은 수나라의 획책으로 동서로 분열되어 서로 싸웠다. 결국 돌궐은 수나라에 머리를 숙였다.
당나라가 동돌궐 기마군단의 도움으로 수나라의 수도 장안을 점거했다. 수나라는 612~614년 간 세 차례나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그 영향으로 결국 건국 38년 만인 618년네 멸망했다. 동돌궐은 630년에, 서돌궐은 659년에 각각 당에 복속되었고 당나라는 이곳의 각 지역에 도호부를 설치하여 지배하였다. 서돌궐은 660~ 681년간 중국의 지배하에 놓여 중국은 서돌궐의 카간을 형식적으로 임명했다. 동돌궐이 멸망한 630년부터 서돌궐이 중국의 지배를 받은 681년까지의 51년은 돌궐 제국이 주권을 상실하고 내부 분열로 단합이 마비되어 사실상 군주가 없는 암흑의 시대가 되었다.
682년 쿠틀룩이 제 2 돌궐을 건국한다. 제 2 돌궐은 카프간 카간 때 전성기를 누렸다.
빌게 카간이 삼두 정치를 통해 돌궐의 과거 전통을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중국의 끈질긴 견제와 이간책, 유목 부족들의 도전 앞에서 제 2 돌궐은 카를룩, 위구르 바스밀 연합 세력이 돌궐의 약세를 노려 돌궐을 정벌함으로써 744년에 역사에서 마감되었다.
돌궐 이전의 스키타이, 흉노, 유연등은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지 않았다.
흉노~유연(돌궐계가 아니다)~돌궐~위구르~셀주크~오스만~튀르크 순으로 초원의 튀르크족 제국이 이어졌다.
위구르족은 조상 설화에 따르면 돌궐의 늑대 조상 설화와는 달리 나무에서 태어난 5명 가운데 막내 부우한이 지도자가 되었다는 수조(樹祖)설화를 가지고 있다.
위구르는 740년대 초에쿠틀룩 빌게 퀼 카간이 건국했다. 화번공주란 이웃 번국간에 평화를 담당하는 공주란 뜻으로 중국에서 이민족 군주에게로 시집간 황실 공주다.
안록산의 난은 위구르의 도움으로 진입되었으나 위구르의 약탈 행위는 극심해서 당나라 사람들의 거센 반감을 샀다.
위구르 제국은 내부 분열과 마니교로 인한 전사의 성격을 상실해서 100년 정도 지속하다가 840년에 망했다.
위구르인들은 반유목, 반정착 생활을 한 사람들이다. 유목생활의 거친 삶을 마치고 정주생활의 풍요로움으로 생활의 모드를 수정한 사람들이다. 그 과정에서 초원에서 살았던 그들의 선조들에게 잠재되었던 문화적 유전자로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 최고의 지능집단이 되었다. 본향을 떠난 위구르인들은 자기가 살던 곳에서 무지한 사람들을 일깨우는 계몽자 역할을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몽골에서 보여주었던 그들의 재능과 능력이었다. 우리나라 덕수 장씨,경주 설씨,임천 이씨가 위구르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승화 교수의 조선 불교 통사에 따르면 고려 개성에는 예궁이라는 이슬람 사원이 건립되었다. 마니교와 불교를 거쳐 최종적으로 이슬람을 수용한 위구르 상인들이 고려에 많이 들어왔다는 방증이다.
1040년에 셀주크 튀르크가 건국된다. 위구르가 멸망한 840년부터 200년 동안 위구르인들은 흩어져서 살았다. 그리고 아랍반도 근처에 네 개의 작은 나라들을 세웠다. 카라한과 가즈나가 존재감이 있다. 가즈나 왕조는 마흐무트 술탄 때 전성기를 이르었고 이슬람을 국교로 했다. 그는 인도 북부도 점령하고 술탄이란 명칭도 압바스 칼리프 왕조로부터 최초로 부여받았다.
셀 주크 제국의 셀주크는 제국의 시조인 부족장의 이름이다. 셀주크 제국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오구즈 야브구' 부족국가부터 풀어나가야 한다. 국가의 시조인 셀주크가 오구즈 야브구 국가에서 나와 셀주크 국가를 세웠고 그의 아버지 두칵 베이가 오구즈 야브구 부족국가의 군 수장을 했기 때문이다.
셀주크 말기의 사회 혼란을 불러 일으킨 하산 사바흐 사이비 교주의 바트니리크 사건: 교도들에게 환각제를 마시게 하여 기절한 상태로 반라의 여인들과 꽃으로 치장한 장소로 옮긴 후 거기가 천국이라고 속이고 다시 기절시켜서 원래의 장소로 데려온다. 이들은 자기가 천국에 갔다 왔다고 믿고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내었다.
멜리크샤 이후 카라키타이가 힘을 키웠다. 사마르칸트 근처 카트반 사막에서 셀주크 제국과 전쟁을 했다. 이 전쟁에서 셀주크 제국은 졌다. 그리고 셀주크 제국이 망하는 결정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셀주크 제국 내 다수를 구성하고 있던 오구즈족들이 악화되는 민생과 과도한 세금을 반대한다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술탄가를 중심으로 한 대부분 지배층들이 왕권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고 이를 위해 투쟁함으로써 중앙 집권적인 통치 체제가 허술해지고 국력이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술탄인 센제르가 1157년에 죽으면서 셀주크 제국의 땅 대부분은 화레즘샤의 통제 아래 들어갔다.
아나톨리아 셀주크 제국은 1077년에 쿠탈므쉬올루가 쉴레이만샤 1세로 술탄에 등극하고 아나톨리아 셀주크의 건국을 선포했다. 아나톨리아 셀주크는 1318년까지 241년간 존속했다. 쉴레이만 샤는 1086년 시리야 셀주크와 전투하던 중 강을 건너다 사망했다.
셀주크 시대의 오잔이라 불리는 시인들이 코푸즈 또는 최위르라는 악기를 들고 다니며 자연, 전쟁, 일상 생활 등과 관련한 시를 낭송해 주었다. 이들 시인들이 이끈 대중문학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전설이었다. 그들은 이슬람 세계의 영웅을 튀르크 전설의 구성 요소들과 융합하여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냈는데 대표적인 것은 튀르크인들이 비잔티움 제국과 싸운 이야기를 담은 바탈 가지 전설이다. 또 다른 문학 장르 중에 타사부프 문학이라는 것이 있다. 타사브프는 일종의 종교적 명상을 말하는데 13세기에 이슬람의 여러 종단들이 많이 나타나 시를 통해 쿠란을 해석하거나 종교 교리를 설교하는 수피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 수피들은 바바 또는 데르비쉬라고 불렸다.
타사부프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메블라나 젤랄레딘 루미라는 수피가 있었다. 그는 콘야에서 메블라나 총단을 창시한 사람으로 명상과 기도의 영성교육과 궁극적으로는 회전 춤을 통해 신과의 합일을 경험하는 것을 가르쳤다. 종교적인 관념과 인간의 깊은 사랑을 강조하는 메블라나 종단은 세마라는 회전춤을 통해 영성의 극치와 몰아를 경험하고 신과 합의한다는 독특한 수피즘 체계를 만들어 민중에 파고들었다.
셀주크 제국이 망하고 오구즈족의 에르투룰과 그 아들 오스만 베이가 오스만 제국을 창설하게 된다. 1299년에 아나톨리아 셀주크로부터 독립을 선포해서 오스만 국가가 탄생했다.
일드름 바예지드가 예니체리 군대를 몰고 콘스탄티노플을 중복한다. 오스만 군대는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가 이끄는 여러 유럽연합군과 도나우 강변의 니코폴리스에서 대격전을 가졌다. 이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결정적으로 승리한다. 하지만 몽골 제국의 후예인 티무르 때문에 콘스탄티노플 정복은 미루어진다.
티무르와 바예지드의 두 나라 군대는 1402년 앙카라 근처 추부크 평원에서 전투를 하게 되고 이 전투에서 오스만국은 바예지드 술탄이 생포되고 티무르 군대에 참패한다. 바예지드 술탄은 1403년에 아크세히르에서 원인모를 이유로 사망했다.
바예지드의 5명의 아들들 가운데 메흐메다 첼레비가 다른 형제들을 살해하고 수도인 에디르네에서 1413년에 메흐메드 1세로 술탄이 되었다. 매흐메드 이후 무라드 2 세가 십자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헝가리에 승리함으로써 발칸 반도로 들어가는 거점을 확보했다. 1448년 제 2차 코소보 전투 승리는 오스만이 발칸 반도를 완전히 정확하게 만들었다.
무라드 2 세를 이어 메흐메드 2 세는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위해서 준비했다. 그는 돌마바흐체에서 베이올루를 연결하는 작은 산과 같은 언덕을 배와 대포를 끌고 넘어가서 골든 혼에 내려놓았다. 이렇게 해서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무너뜨리고 전투에서 승리하게 된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유럽에서 중세가 종식되고 세계는 근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된다.
맘루크 조(1250~1517)는 노예 부대로 구성되어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치한 왕조다. 맘루크는 이슬람교로 개종한 노예라는 뜻이다. 맘루크조는 1517년에 오스만 제국 군대에 패배하여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
데브시르메 제도는 비무슬림 청소년들을 몸가짐, 활력, 지능, 신앙심, 체력 등의 시험을 거쳐서 예니체리 군대에서 군 간부가 되거나 술탄 정부의 대신이나 관리가 되도록 하는 제도다. 이들이 후에 예니체리 부대의 중요 인물들이 되었다. 나중에 예니체리는 술탄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따라서 예니체리도 전투에 나가지 않다 보니 전리품을 얻을 수도 없었고 또 국고의 고갈로 월급이 줄어들자 술탄을 위협하고 심지어는 폐위시키기도 하는 세력이 되었다. 제 30대 술탄 마흐무드 2세 때인 1826년에 예니체리 제도는 폐지되었다.
슐레이만 1세는 어렸을 때 '정의의 순환'이라는 법칙을 배웠다.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고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라가 부유해야 하고 나라가 부유하기 위해서는 백성이 잘 살아야 하고 백성이 잘 살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법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어느 것 하나라도 무시되면 나라는 망한다 라는 것이다.
쉴레이만 1세가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를 제압하자 당시 유럽 최대의 세력이었던 합스부르크가와 충돌하게 된다.
1538년 9월 28일 신성동맹 연합 함대와 오스만 제국의 함대는 그리스 북서쪽 프레베자에서 해상전투로 맞붙었다. 오스만 제국 함대는 하이레딘 바르바로싸 (붉은 수염)이 제독이 되어 이끌었고 신성동맹 연합군 함대는 신성 로마 제국 카를 5세 황제에 의해 발탁된 역시 해적 출신의 안드레아 도리아 제독이 지휘했다. 이전투에서 오스만이 연합군 함대를 압제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오스만 제국은 600년 넘게 유지되면서 광활한 영토에 스무 개의 다민족, 네 개의 종교가 공존한 제국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정복을 통해 편입된 다양한 민족에게 그들의 문화적, 종교적 자치성을 보장해 주었다. 오스만 제국 내에서 이민족에 대한 자치 공동체를 밀레트 제도라고 한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움마라는 공동체가 있는데 밀레트는 이런 개념에서 유래하였다. 밀레트는 국가라는 의미의 아랍어 밀라에서 나온 것으로 종교 집단이라는 의미다. 오스만 제국에서 대표적인 4개의 밀레트 제도는 무슬림, 그리스 정교도, 아르메니아 그리스도교, 유대교 자치 공동체였다. 통치 정점에는 술탄이 있지만 각 밀레트는 종교 수장이 통치하였다.
1570년 베네치아를 주축으로 한 유럽 함대가 오스만 함대와 싸워서 크게 이겼다.
탄지마트 개혁 1839~1876년 까지 37년간의 기간을 탄지마트 개혁기간이라 부른다. 이 때 헌법이 제정 공포되고 상.하 양원제가 실시되었다. 비무슬림들도 관리가 될 수 있고 각종 교육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7 1차 세계 대던에서 오스만은 독일, 오스트리아와 한 편이 되었다가 프랑스, 영국, 러시아의 연합국에게 패배하고 발칸반도의 모든 나라를 다 잃었다.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새로운 세력이 튀르크 공화국을 만들고 그는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로서 오스만 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