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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이야기 일본사 우리미래역사체험학습 강사진 외 엮음 하동심,최주영 그림 청솔 1998년 초판, 2011년 2판 1쇄 ~12.1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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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일본사 우리미래역사체험학습 강사진 외 엮음 하동심,최주영 그림 청솔 1998년 초판, 2011년 2판 1쇄 ~12.19

singingman 2024. 12. 19.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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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쓰고 그림까지 넣은 간략한 일본사.

일본은 빙하기가 끝나면서 아시아 대륙에서 떨어져 나갔다.
조몬 시대와 야요이 시대를 거쳐 야마토 정권이 최초의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일본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마지막 빙하시대 무렵이다.
기원전 일 만 년을 전후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형성된 일본 열도는 돌을 능숙하게 다루는 신석기 시대가 되면서 조몬 문화를 꽃피온다.
대륙에서 청동기와 철기가 들어오면서 조몬문화는 세련되고 강한 야요이 문화로 발전한다.
현대 일본 사람들의 특징은 야요이 시대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야요이 시대 말기부터 등장한 소국들이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고분시대를 거치며 점차 통합된다.
이것이 연합국가인 야마토 국가이며 이 연합 정부의 정치 권력을 야마토 정권이라고 한다.
통일 국가의 최고 지배자는 대왕이다. 6세기 무렵 신흥 호족인 소가 씨의 세력이 대왕을 능가할 정도로 강력해진다. 스이코 천황의 섭정이 된 쇼토쿠 태자는 신하들을 다스리기 위해 조정 내의 관직을 12 계급으로 나누고 유교적 덕목을 강조한 17 조 헌법을 만들어 관료제를 확립했다.
소가 씨의 횡포가 극의 달하자 황실 중심의 대개혁인 다이카 개신을 단행했다.
이를 계기로 토지와 백성이 국가 소유라는 공지 공민제와 법률에 의한 율령 정치가 시행되었다.
또한 왜 대신 일본을 정식 국호로 하고 대왕 대신 천황을 공식 명칭으로 정하면서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국가가 완성된다. 나라 시대에는 귀족과 승려가 황족을 능가할 정도로 권력을 가지는 시기다. 다이카 개신 이래 천황의 혈통인 황자가 세습하여 정치를 담당하게 되었으나 얼마 후 승려와 후지와라 씨가 실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싸움을 벌인다.
8세기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중심으로 한 귀족 중심의 불교 문화가 꽃을 피웠다. 헤이안 시대에는 대륙문화에 의해 축적된 문화가 일본 고유의 학문과 문화로 발전한다.
특히 가나 문자가 탄생하면서 일본 고대 문학이 크게 발전한다.
헤이안 시대 이후에는 장원을 경제적 기반으로 한 귀족인 후지와라 가문이 중앙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지방에서는 무사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쇼토쿠 태자는 고대 문화를 발전시키고 천황 중심의 강력한 고대 국가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신격화되어 지금까지 일본인들에게서 추앙받고 있다.


707년에 몬모 천황의 어머니가 겐메이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그녀는 중국 당나라 수도 장안을 모방하여 나라 지역에 후지와라 궁의 4 배에 이르는 거대하고 화려한 새로운 수도를 만들었다. 이 수도의 이름이 헤이조쿄이다. 710년부터 약 70 여 년 동안 헤이조쿄가 정치 중심이 되는 이 시대를 '나라 시대'라고 한다.

간무 천황은 나가오카쿄에서 교토로  천도했다. 지금까지의 불안에서 벗어나 영원한 평안을 바라며 교토의 새로운 수도 이름을 헤이안쿄라고 하였다. 교토의 헤이안쿄는 794년부터 약 400 여년 동안 정치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이 시기를 '헤이안 시대'라고 한다.

중세 일본은 무사시대다 가마쿠라 막부에서부터 도쿠가와 막부까지 쇼군이 정치를 하고 천황은 실권을 잃었다.

12세기 중반에 조정의 내분을 둘러싸고 중앙에서 큰 난이 자주 발생하였다.
중앙의 군사로는 상대를 제압하기 힘들던 중앙 귀족들은 장원을 지키던 지방 무사들을 수도로 불러올렸다.
지방에서 귀족들의 심부름만 하던 무사들이 약화된 귀족 세력을 대신하여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무사로서 제일 먼저 정권을 장악한 것은 미나모토 요리토모이다.
요리토모는 1183년에 가마쿠라에 무사 정권인 막부를 열고 쇼군이 되어 무사정치의 기초를 다졌다.
가마쿠라 막부는 천황이 있는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간토 지방을 기반으로 했으며 주군과 종자 사이에 강한 사적 연대를 근간으로 삼았다.
미나모토 가문은 삼대에서 멸망하고 그 뒤를 이은 호조 씨에 의해 무사풍의 문화가 만들어진다.
중흥을 꾀하던 천황의 세력이 새로운 쇼군 아시카가에 의해 좌절되면서 조정이 둘로 나뉘게 되는 남북조 시대를 맞게 되고 이 과정에서 무로마치 막부가 생기게 된다. 귀족 세력의 거점인 교토를 정권의 소재지로 삼은 무로마치 막부는 황실의 권위를 낮추고 쇼군의 권위를 높이는 데 힘썼다. 하지만 무로마치 중기가 되면서 무사 세력 내부의 분열과 각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봉기가 이어지면서 사회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막부의 지배 능력은 점차 줄어든다. 1467년 쇼군의 후계자 문제로 일어난 오닌의 난 이후 전 국토가 전쟁에 휘말리는 전국시대가 된다. 전국 다이묘들이 자신의 지배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벌인 하극상 풍조는 더욱 확대돼 갔고 무로마치 막부의 통제력도 약화되었다.
이를 틈타 각지에서 할거하던 전국 다이묘들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오다 노부나가다.
1573년에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킨 노부나가는 아즈치에  드높은 자신의 성을 쌓고 철포를 무기로 하여 거침없이 천하 통일을 향해 달려갔지만 신복의 배신으로 미완의 생을 마감한다.
노부나가의 발판 위에 전국시대 일본 열도를 통일로 이끈 사람은 노부나가의 최하위 심부름꾼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의 실력자로 떠오른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씨의 측근들을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한 이 에야스는 에도에 새로운 막부를 열었다. 에도 막부는 이전의 막부 시대에 비해 중앙집권적 성격을 강화했다.
쇼군의 강력한 통치 아래 각 지방의 다이묘들은 막번 체제 속으로 흡수되어 막부의 명령으로 움직였다.
다이묘들을 직접 통제하기 위한 기본 법제인 무가제법도 만들고 에도에서의 정기적 인질생활을 의무화한 참근 교대 제도 또한 시행했다.
이러한 일련의 막번체제 확립은 3대 쇼군 이에미쓰 시대가 되면 완결된다.
한편 16세기 중반부터 서양 상인과 천주교 선교사들이 몰려들어 일본에 서양 문명과 천주교를 전파한다.
한동안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만 천주교 금지 정책을 실시하면서 200년 가까이 쇄국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쇄국으로 인하여 막부의 권리가 한층 강화되었으며 상공업의 발전으로 도시가 발달하면서 에도와 오사카는 문화의 꽃이 피는 겐로쿠 시대를 맞이했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이었던 무사층은 관료화와 빈곤화의 과정을 겪고 농촌에서도 가난을 탈피하려는 농민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더구나 유럽 제국의 세력이 일본으로 진출해 오면서 막부는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여러 번에 걸친 개혁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인 어려움에 허덕인 막부는 결국 페리 제독의 위협으로 쇄국 정책을 끝내고 개항을 하게 되었다.
막부의 개항에 대해 조정과 지방 다이묘들의 반대 거세지면서 조정과 다이묘들이 연합을 하였다.
막부는 조정의 협력을 구하였으나 도움을 받지 못하고 결국 세력을 키운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군대에 의해 에도 막부는 붕괴되고 천황 중심의 시대가 다시 시작된다.

서양 군대의 위력을 알게 된 지방 다이묘를 중심으로 막부 타도 운동과 함께 천황 중심의 정치 체제로 돌아간다는 왕정복구가 선언된다.
정부는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부유한 나라 만들기에 고심하며 쇄국을 폐지하고 외국의 문호를 개방하였다.
일본은 서양의 선진 문화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근대 국가로 나아갔다. 그러나 황실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많은 세금을 부과하자 힘들어진 국민들 사이에는 자유 민권운동이 일어나고 국회 개설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는 국민의 권리보다는 국가의 권리를 강화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부국강병을 목표로 근대화에 힘썼던 일본은 전쟁을 치르면서 군국주의 제국주의 길로 가게 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아시아의 부강한 나라를 부상하였고 산업발달로 제품 생산이 늘어나자 해외 시장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조선을 사이에 두고 남진 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와 충돌하여 러일 전쟁이 일어나지만 오랫동안 준비한 일본의 승리로 끝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륙으로의 침략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본은 세계 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무역의 호조를 보이면서 산업을 발달시켰다.
메이지 시대가 끝나고 다이쇼 시대가 되자 안정된 산업을 바탕으로 대중문화가 발전하였다.
그러나 세계 경제공황의 여파로 국내 사정이 악화되고 점차 서구 열강들과 충돌하기 시작하면서 대륙 침략의 열기가 높아졌다.
군부의 힘이 막강해지면서 일본 내에서는 한 나라에 하나의 정당만을 인정하는 전체주의가 만연하였다.
군부는 1931년에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식민지화하고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2 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일본은 대동화 공영권을 꿈꾸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지만 결국 원자 폭탄의 투하로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전쟁에서 패한 후 일본은 맥아더 연합국 총 사령부의 통치 하에서 국가 회복의 길로 나아간다.
전쟁을 주도했던 책임자 100여 명을 체포해 군사 재판을 받게 하고 천황으로 하여금 보통 인간임을 선언하게 하였다. 일본 국민들은 주권과 기본권을 보장받게 되었고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평화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일본은 민주국가로 향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한편 세계는 2 차 세계대전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 진영으로 첨예한 대립을 벌인 냉전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공산주의 국가가 세력을 넓혀가는 것에 위협을 느낀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아시아 극동 지역의 안보를 위해서 일본을 우방으로 만들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1951년에 일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48개국 연합국과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미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주권을 회복하게 된다.
이어 국제연합에도 다시 가입하면서 국제사회로 복귀하게 된다.
미 일 안전보장 조약에 따라 미국과 유대관계도 돈독해지고 군사력도 증가되었다.
또한 근면과 끈기로 열심히 일한 덕분에 일본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고도성장을 하게 되었다.
전쟁 없는 평화스러운 세상을 바라는 기원을 담아 붙인 아키토 천왕의 연호 헤이 세이를 마음에 새기며 일본은 앞으로 국제적으로 협력하며 세계 평화에 이바지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용어 정리

마쓰리:
우리말로 축제라고 하며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다.
현재는 지역 놀이 문화로 자리잡아 일본하면 마쓰리가 떠오를 정도로 전국에서 열리고 있다.

이와이의 난
527~ 528년에 규슈 지역의 이와이가 신라의 사주로 일으킨 반란.

아마테라스
일본에서 천황의 가계가 유래했다고 하는 태양의 여신.

아스카 문화
7세기 전반에 백제의 영향을 받은 일본 최초의 불교 문화.

시텐노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쇼토쿠 태자가 모노노베 씨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오사카에 지었다고 한다.

호류지
쇼토쿠 태자가 아버지 요메이 천황의 명복을 기원하며 지은 사찰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현재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헤이안 신궁
794년에 수도를 나라에서 헤이안으로 옮긴 후 1100년이 지난 것을 기념하여 1895년에 교토에 지은 신궁이다.

관백
천황을 대신하여 정무를 총괄하는 일본의 관직.

섭관정치
섭정 또는 관백이 주도해서 행한 정치 형태.

뵤도인
교토 부 우지 시에 위치한 불교사원으로 헤이안 시대의 대표적인 귀족이었던 후지와라 씨의 후원으로 세워졌다. 우아하고 귀족적인 건축물로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고케닌
막부 시대에 쇼군과 주종 관계에 있었던 무사의 총칭.

슈고
지방의 군사와 민정을 감독하는 지방관

지토
막부가 임명한 토지 관리인

싯켄
가마쿠라 막부에서 쇼군을 대신해서 실제 정치를 총괄하던 직책

오닌의 난
쇼군의 후계자 문제로 일어난 전란으로 전국시대의 서막을 열게 된 사건

조닌
에도 막부 시대에 도시에 거주한 상공업자

도지마 다이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도쿠가와의 신하가 된 다이묘

데라코야
평민의 자녀들에게 읽고 쓰기 등 기초 교육을 하기 위해 전국 사원에 세워진 학교


톈구
일본 전설 속의 요괴로 얼굴이 붉고 코가 기다랗고 컸커서 사람들 사이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로주
에도 시대에 쇼군 직속으로 막부의 정치를 총괄하던 관직

오시오의 난
오시카의 중간 관리였던 오시오가 빈민 구제를 위해 일으킨 민중 반란

시모노세키전쟁
외국 배에 포를 쏘았다가 무력하게 패한 일본은 이 전투에서 서양군사력의 막강함을 깨닫고 외교 정책의 변화를 꾀한다.


대정봉환
1867년에 에도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정권을 천왕에게 반환한 일

화족
1869년 일본 왕실에서 중세의 봉건 영주 제도를 없애고 그 대신 귀족 작위를 하사하면서 창설한 귀족 계급을 총칭하는 말


세이난 전쟁
근대적 장비를 갖춘 정부의 징병 군인에게 대항한 무사들 최후의 무력항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