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에 사은사로 갔던 수양대군이 중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0월에 수양대군은 정예 무인을 모아 김종서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죽이고 안평대군을 잡아 강화로 귀양을 보냈다. 그러고는 단종에게 가서 김종서와 황보인 등이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반역을 모의했는데 상황이 급박하여 먼저 죽였다고 보고했다. 그 다음에 여러 재상들을 급히 입궐하게 한다음 황보인등 안평대군과 김종서를 따르던 무리들을 죽였다. 이들의 시신은 곧바로 거리에 효수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계유정난이다.
세조의 큰 아들 의경세자는 2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아버지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죗값을 치른 것이라는 말들이 떠돌았다.
둘째 해양대군이 19살에 왕위를 이어 받아 예종이 되었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해서 어머니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하지만 병약해서 14개월만에 예종은 죽었다. 아들 제안군이 있었지만 나이가 4살밖에 되지 않아서 왕위를 이어받기가 어려웠다. 이때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넷째 아들 구성군이 28세로 영의정에 있었다. 왕위를 노릴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자 정희왕후는 예종이 죽은 바로 다음날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다. 그가 성종이다.
세조의 장손인 월산대군이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린 것은 그가 당대의 실세였던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이고 나이가 13살이었기 때문에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명회는 예종과 성종의 장인이다. 두 딸을 왕비로 만든 유일한 인물이다.
구성군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유배가서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을사사화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이 윤임을 중심으로 한 대윤을 숙청한 사건 문정 왕후가 자기 아들 경원군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 인종을 독살했을 가능성이 있다. 인종은 조선 왕들 가운데 가장 짧은 재위기간인 채 8개월도 왕위에 있지 못했다. 인종이 죽자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군이 명종으로 즉위했다. 문정 왕후는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충청도 사람들을 300명 이상 죽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반란의 도시 충주를 빼고 충청도를 청홍도로 바꿨다. 홍은 홍주(홍성)이다.
연산군은 내시 김처선의 고언을 참지 못하여 그를 죽이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자 그 양아들인 이공신을 연좌시켜서 처형했다. 그리고 김처선의 본향인 충청도 공주의 전의현을 폐했으며 양자 이공신의 고향인 청주목을 폐하여 이웃 고을에 예속시켰다. 그래서 충청도의 명칭에서 청주를 의미하는 청을 빼고 공을 넣어서 충공도라고 칭했다. 충청도라는 명칭은 중종 반정 후 복구되었는데 문정 왕후가 다시 청홍도라고 바꾼 것이다.
명종은 수렴청정이 끝난 후에도 어머니 문정왕후와 외숙인 윤원형의 간섭이 심해서 어려움을 겪었다. 윤원형은 정난정을 첩으로 삼았다가 부인을 죽이고 정부인으로 삼았고 정난정은 문정왕후에게 잘 보여서 정.종1품 벼슬아치의 부인에게만 내리는 정경부인이란 칭호도 얻었다. 정난정의 어머니는 상궁이었는데 승은을 입고도 후궁이 되지 않고 상궁으로 남았다. 문정왕후는 중 보우를 중용해서 불교중흥책을 펼치기도 했다.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가 죽고 2년 후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22년간의 통치를 끝내고 자기도 죽었다. 아들 순회세자가 있었지만 13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명종 때 임꺽정이 나타났고 을묘 왜변도 있었다.
선조는 중종의 서자인 덕흥 대원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서얼 출신인 선조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초기에는 호학군주로 열심히 공부했고 사림들을 등용해서 외척의 세력을 억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림들은 붕당을 만들어서 정치를 어지럽혔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한양을 버리고 평양, 여주까지 도망가서 명나라로 넘어갈 계획까지 세웠다. 한편 아들 광해군은 전란에도 침착하게 일들을 잘 처리해서 선조는 아들에게 열등 의식을 느끼게 된다. 서얼인 광해군은 계비로 들어온 인목 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자 자신도 이제는 열등감에 시달리게 된다.
광해군은 명청교체기에 중립 노선을 걸어서 실리를 취했지만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명나라에 사대를 해서 결국 정묘, 병자 호란을 맞게 된다.
조선에서는 세자가 20세 이전에 왕이 되면 성인이 될 때까지 혹은 친정 능력이 있을 때까지 수렴 청정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실제로 성종은 정희왕후, 명종은 문정왕후, 선조는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당연히 14세 숙종도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고 숙종의 어머니 명성 왕후는 수렴청정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숙종은 수렴청정 없이 바로 친정을 시작했다.
갑인환국은 2차 예송 논쟁의 결과로 남인이 서인을 몰아낸 사건이다.
경신환국은 허적이 왕의 기름천막을 허락도 없이 가져간 것과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의 아들들과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 때문에 100여명의 남인을 유배나 사형시켰다.
기사환국은 장희빈이 왕자 균을 낳자 세자로 책봉하려고 했다. 서인은 왕비인 인현왕후가 나이도 많지 않은데 후궁의 자식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고언했다. 세자책봉에 반대한 서인들을 사사하거나 유배를 보냈다. 이때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도 사사를 당했고 이를 기사환국이라 한다.
갑술환국은 숙종 15년(1689년)에 기사환국 직후 숙종과 중궁 장씨의 관계는 좋았다. 그러나 이후에 숙종의 관심은 소의 최씨에게 옮겨갔다. 숙종 19년(1693년)에 최씨는 아들을 낳았다. 비록 이 아들은 오래 살지 못했지만 다음 해에 최씨는 다시 아들을 낳았다. 이가 바로 영조가 되는 연잉군이다. 이처럼 숙종의 관심이 장씨에서 숙빈 최씨에게 이동하고 있다는 것은 숙종이 장씨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바꿔 말하자면 민씨의 폐비를 후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남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고 있음을 염려한 숙종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숙종의 이러한 의중을 알아차린 서인은 민씨 복위 운동을 전개했으며 남인은 당연히 서인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숙종은 서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남인은 유배되거나 사사를 받았고 폐비 민씨를 복귀하고 장씨를 다시 희빈으로 강봉했다. 이것이 숙종 10 년(1694년)에 일어난 갑술 옥사다.
희빈 장씨는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차려놓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면서 매일같이 인현왕후 민씨가 죽기를 빌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만약 민비가 죽는다면 세자의 어머니인 자신이 다시 중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숙의 최씨를 통해 결국 숙종의 귀에 들어갔다. 숙종은 희빈 장 씨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했고 결국 희빈 장씨는 스스로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숙종은 희빈 장씨의 오빠했던 장희재를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을 국문하여 죽였다. 그리고 희빈 장씨의 죽음을 반대했던 서인의 소론측 사람들도 유배되거나 파면 당하고 서인의 노론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것을 가리켜 무고(巫蠱)의 옥이라고 한다.
문종, 연산군, 인종, 숙종은 원자로 태어나서 왕이 되었다. 숙종은 그 권리를 십분 발휘한 왕이다. 숙종은 14세에 왕위에 올랐지만 바로 친정을 실시했고 연산군은 19세에 왕위에 올랐다. 문종은 37세에 인종은 30세에 왕위에 올랐으니 어느 정도 준비가 된 왕이었고 절제력도 있었지만 숙종과 연산군은 이것이 부족해서 사화와 환국정치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숙종은 일과 공부를 열심히 한 왕이고 화폐 사용을 보편화 시켰다.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의 개축과 보수를 실시했으며 강화도를 요새화했다. 청나라가 백두산을 은근슬쩍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려고 하자 청나라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유지해서 북방의 경계가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왜인이 울릉도에 출입하자 외교 문서를 통해 울릉도를 확실한 조선의 땅으로 편입했다.
숙종은 사냥과 여색에 빠지지 않았다. 장희빈과의 관계도 여색으로 볼 수는 없고 숙빈 최씨와 명빈 박씨등 후궁을 3명밖에 두지 않았다.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 때 노론이 경종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서인측 목호룡의 고변을 빌미로 노론을 탄핵하는 것은 물론 이와 관련된 노론 쪽 인사들과 그들의 가족을 모두 사사시켰다. 이 고변에는 연잉군도 가담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연잉군은 왕위를 이을 사람이었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했다. 이 옥사는 신축년과 임인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신임옥사라고 한다.
다양한 식재료가 들어가는 탕평채라는 음식은 영조의 탕평책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영조는 아들인 효장 세자의 아내였던 현빈 조씨가 1751년에 세상을 떠나자 현빈 조씨의 빈소를 자주 찾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영조는 조씨의 궁녀인 숙의 문씨를 만나서 합방하고 임신을 시켰다.
사도세자는 자기 부인 경빈 박씨를 살해했고 여승을 궁으로 불러들여 음행하고 어떤 날은 나인과 환관을 하루에 6명이나 죽이기도 했다.
정조의 아들 순조의 부인은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였다. 안동 김씨가 정권을 잡았다. 순조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 아들 효명세자의 부인을 풍양조씨에서 택했다. 신정왕후 조씨다.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 세자가 4년만에 일찍 죽는다. 그리고 아들 헌종이 8세의 나이에 즉위한다. 왕실의 최고 어른인 순원 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는 계속된다.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신정왕후의 영향으로 풍양 조씨가 실권을 잡지만 헌종은 후사없이 23세에 요절하자 순원왕후는 풍양조씨가 왕을 세우기 전에 먼저 손을 써서 항렬상 헌종의 7촌 아저씨뻘 되는 강화 도령 원범을 데려와 왕으로 세우니 이가 바로 철종이다.
대원군 이하응은 안동 김씨들에게 철저하게 자기를 속이고 파락호처럼 살았다. 그러나 고종이 왕이 되자 섭정으로서 실권을 쥐고 강력하게 개혁을 했다. 민비를 들인 이유도 외척의 세력을 없애기 위해 전통적인 좋은 집안이지만 실제적인 힘이 없는 집안에서 고른 것이다. 초반에는 서로 사이가 좋았으나 민비가 임신했다가 유산하고 다시 태어난 아들은 항문이 막힌 아들인데 대원군이 보낸 산삼을 먹고 죽었다. 그후 딸을 낳았는데 이 역시 7개월만에 죽었다. 결국 시아버지에게 원망이 돌아갔고 결국 대원군은 하야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아후 민비는 건강한 아들을 낳아서 이가 순종이 되었다. 민비는 시아버지와 달리 개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신식근대인 별기군을 조직하고 구식 군대를 차별했다. 결과로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민비는 충주로 피난간다. 다시 8년 만에 복귀한 대원군은 민비가 죽었다고 하면서 시신없는 장사를 치른다. 그리고 원래의 자기 계획대로 환원했다. 민비는 몰래 고종과 연락하면서 청나라에 연락해서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 천진으로 보냈다. 이후 청나라가 간섭을 하자 일본을 등에 업은 김옥균, 박영효등이 우정국 낙성식에서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실권을 쥐고 있던 민씨 일파를 살해한다. 민비는 다시 청군에게 요청하고 김옥균등은 일본으로 도망한다. 청나라가 더욱 강력하게 간섭하자 이번에는 민비가 러시아에 요청해서 청나라를 견제했다. 그러자 청나라는 대원군을 환국시켜서 관계회복을 꾀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환국하자 바로 운현궁에 유폐되었다.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결국 동학혁명이 일어난다. 이것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결국 일본이 승리한다. 이후 일본은 대원군을 재집권시켰다. 한편으로는 김홍집 내각이 갑오개혁을 주도했다. 민씨 일파는 고종32년(1895년) 삼국간 섭을 계기로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제를 견제하려고 했고 위기에 몰린 일본은 경복궁을 습격하여 민비를 살해한 을미왜변을 일으킨다. 을미왜변과 단발령에 반발하여 일어난 각 지역의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일본군이 지방으로 내려간 틈을 타서 고종 33년 (1896년) 2월에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피난했다. 1897년에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민비는 명성황후로 추봉되었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민비를 시해하고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다. 고종은 일본의 강제적인 보호조약에 대한 무효를 선언하고 미국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밀서를 보냈으나 미국은 일본과 카스라 . 태프터 협정을 통해 필리핀과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서로 용인하는 조약을 체결한 상태여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