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지도 리처드 니스벳 저 최인철 역 김영사 2011년 1판 42쇄 233/248쪽 ~03.07
singingman
2025. 3. 7.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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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과 서양인의 사고 차이를 실험등을 통해 밝힌 책.
중국의 음악이 대체로 단선율이라는 사실은 중국인들이 얼마나 일치를 좋아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노래하는 사람들은 동일한 선율을 동시에 불렀고 악기들도 동시에 같은 선율을 연주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리스인들은 서로 다른 악기와 서로 다른 목소리가 동시에 다른 선율을 연주하는 다성음악을 선호했다.
고대 중국인들이 고대 그리스인들에 비하여 자연 세계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은 약한 편이었지만 실용적인 정신은 뛰어났다. 그 결과 그리스 보다 훨씬 앞서 잉크, 자기, 관개 장치, 좌석 나침반, 손수레, 파스칼 삼각자, 지진계, 면역 기술, 수량적 지도 제작 기법, 외륜 보트, 방수선실, 등자쇠 등을 처음으로 또는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중국인들이 이런 것들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을 때 그리스인들은 그중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중국인이 기술 분야에서 그러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 철학자이자 중국 연구가인 도널드 먼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유교적 사고에 있어서 구체적인 행위와 관련되지 않은 즉, 실용적이지 않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앎이라는 것은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개인을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 보았고 진리를 발견하는 수단으로서의 논쟁을 중시했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 철학은 개별 사물 자체를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아 개별 사물의 내부 속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우주는 원칙적으로 단순하고 따라서 파악 가능한 곳이었다. 따라서 철학자의 과제는 사물의 독특한 속성을 파악하고 파악된 속성에 기초하여 사물을 범주화하여 그 범주의 보편적인 규칙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인들은 인간을 사회적이고 상호 의존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조화라고 생각했다. 그 조화란 도교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융합'이었고 유교에서는 '인간들 사이의 화목'을 의미했다. 중국 철학의 목표는 진리의 발견보다는 도였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추상적인 사고는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되는 실용적인 경향이 강했다. 우주는 매우 복잡한 곳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서로 얽혀 있고 그 안에 존재하는 사물이나 인간은 마치 그물줄처럼 서로 얽혀 있다고 믿었다. 이런 사고 현상 때문에 중국인들은 어떤 대상을 전체 맥락에서 따로 떼어내어 분석하는 일에 거부감을 느꼈다.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세상사를 개인이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역시 불가능했다.
동양인들은 상호 의존적인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자기를 전체 일부분으로 생각하지만 서양인들은 독립적인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자기를 전체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여긴다. 동양인들에게 있어서 성공과 성취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영광을 의미하나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개인의 업적을 의미한다. 동양인들은 인간관계 속에 조화롭게 적응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 비판을 하지만 서양인들은 개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동양인들은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인간관계의 조화를 추구하지만 서양인들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인간관계를 희생해서라도 정의를 추구한다. 동양인들은 위계 질서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집단의 통제를 수용하지만 서양인들은 형평성을 존중하고 개인의 자유를 선호한다. 동양인들은 모순과 논쟁을 회피하지만 서양인들은 법률, 정치, 과학의 영역에까지 적극적으로 논쟁을 끌어들인다.
현대의 동양인들은 고대의 동양인들처럼 세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전체 맥락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사건들 사이의 관계성을 파악하는 데 익숙하며 세상이 복잡하고 매우 가변적인 곳이라 믿는다. 또한 세상의 구성 요소들은 서로 얽혀 있고 세상 사는 양극단 사이에서 순환을 반복하는 형태로 진행되며 그러한 사건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의 협동과 조정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와는 반대로 현대의 서양인들은 고대의 그리스인들처럼 세상을 보다 분석적이고 원자론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사물을 주변 환경과 떨어진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변화가 일어난다면 한 방향으로 일정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개인이 그러한 일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의미에서 동양인과 서양인은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양인들은 작은 부분보다는 큰 그림을 보기 때문에 사물과 전체 맥락을 연결시켜 지각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전체 맥락에서 특정 부분을 떼어내 독립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낯설어 한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사물에 초점을 두고 주변 맥락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건과 사건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상대적으로 덜 민감한 편이다. 만일 그렇다면 사건의 원인을 설명하는 과정 역시 크게 다를 것이다. 동양인들은 수없이 많은 변인들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원인으로 보지만 서양인들은 사물 자체의 속성으로만 설명하려 든다.
세상은 복잡한 곳이라는 동양인들의 생각이 어쩌면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서양인들은 지나치게 단순한 모델을 가지고 세상을 파악하는 약점이 있지만 반면에 동양인들은 수없이 많은 인과적 요인들 모두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니 예외적인 사건이 발생해도 그리 놀라워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서양인들의 단순한 세계관은 적어도 과학의 영역에서는 유용한 시각이다. 왜냐하면 단순한 모델은 검증이 쉽고 따라서 개선의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에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이론은 검증을 통해 대부분이 오류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중국의 물리학 이름들과는 달리 검증이 가능한 단순한 형태였기 때문에 이후의 검증 과정을 통하여 올바른 물리학 원리들이 확립되는 토대가 되었다. 반면 중국인들은 거리가 멀리 떨어진 곳으로도 힘이 전달될 수 있다라는 원리를 서양인들보다 먼저 이해해 놓고도 그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을 증명한 이들은 처음에는 그것을 믿지 않던 서양인이었다. 서양인들은 서로 인접해 있는 물체들 사이에서만 마치 당구공들처럼 접촉에 의해 힘이 전달될 수 있다라는 단순한 모델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떨어진 물체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의 원리를 알아냈던 것이다. 서양인들이 학에서 거둔 성공과 인과적 설명에서 범한 오류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 뿌리란 다름 아닌 개인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모델을 만드는 자유, 그리고 그 모델을 이용하여 결과로부터 원인을 추구하는 자유이다. 그러나 그들의 모델은 사물과 사물의 속성에만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는 탓에 맥락의 역할을 놓치고 있다. 따라서 맥락이 중시되는 상황에서 맥락을 무시함으로써 기본적 귀인 오류와 같은 오류를 범하고 인간 행동의 예측 가능성을 과대 평가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서양인의 단순성 추구 경향과 동양인의 복잡성 추구 경향은 인과관계에 대한 접근 방식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세상을 바라보고 조직하는 방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른 사람에게 차를 더 청하는 상황에서 동양과 서양의 언어적 차이가 잘 드러난다. 중국인들은 '더 마실래(drink more?)'라고 묻지만 미국 사람들 '차 더 할래(more tea?)'라고 묻는다. 중국인들의 관점에서는 그 상황에서 마시고 있는 것은 분명 '차'이기 때문에 명사엔 차를 문장안에 포함시킬 필요가 없지만 미국인들은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동사인 drink를 포함시킬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동양인들은 세상을 관계로 파악하고 서양인들은 범주로 묶일 수 있는 사물로 파악한다. 이러한 차이는 아이를 양육하는 방식에서의 문화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동양의 어린이들은 관계에 주목하도록 양육되고 서양의 어린이들은 사물과 그것들이 범주에 주목하도록 양육된다. 여기에 덧붙여 언어의 문화 차이 또한 일정 역할을 한다. 세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나타나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지식을 조직화하는 방법에만 그치지 않고 논리적 추론 방법에도 매우 상이한 차이들을 만들어 낸다.
동양인들은 타협에 의한 해결책과 종합적인 주장을 선호하며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모순된 주장을 자연스럽게 모두 수용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또한 스스로의 선택을 정당화해야 할 때에는 명백한 원리에 의존하기보다는 절충점 혹은 중도적 입장을 추구한다. 비 모순의 원리에 충실한 미국인에게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다. 그러나 비모순에 대한 혐오에 가까운 미국인들의 반응은 때로 불필요하게 극단적인 판단을 내리게 만든다. 이러한 경향성은 동서양 철학자 모두가 염려하는 서양의 극단적인 논리주의의 병폐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이 자유, 개성, 객관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원인은 그리스의 독특한 정치 형태 즉, 도시 국가 형태의 정치 구조와 공회 정치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는 해안가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다른 나라와 빈번한 접촉이 있었고 도시 국가였기 때문에 다른 도시들의 주장들과 종종 접해야 했다. 무역을 통해서 다른 민족들을 만났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하고 각각을 인정해야 할 그런 상황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동일한 한족이 같은 농경사회에 살았기 때문에 다른 의견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다른 주장을 내세웠다가는 주위로부터 제재를 당했기 때문이다.
동서양 두 문화의 사고방식의 기원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 즉, 두 사회의 생태 환경이 경제적인 차이를 가져왔고 이 경제적인 차이는 다시 사회 구조의 차이를 초래했다. 그리고 사회 구조적인 차이는 각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규범과 육아 방식을 만들어냈고 이는 환경의 어떤 부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주의 방식은 우주의 본질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민속형이상학)을 낳고 이는 다시 지각과 사고과정(인식론)의 차이를 가져왔던 것이다.
영어의 school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schole가 여가를 의미한다는 것만 보아도 기본 원리를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그리스인들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여가란 다름 아닌 지식을 추구하는 자유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