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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처럼 박현모 미다스북스 2013 개정판 3쇄 519쪽 3.19 본문
세종대왕의 정치를 자세히 연구한 책.
세종은 내자시 여종이었던 김 씨를 사랑하여 귀인의 벼슬까지 주었다.
즉 세종의 즉위하던 해에 원경왕후 민 씨가 열세 살 되던 김 씨를 뽑아 왕비 즉 소헌 왕후에게 보냈는데 김 씨의 천성이 부드럽고 아름다워 양궁을 섬기는 데 오직 근신하였다. 즉 원경 왕후와 소원 왕후 모두를 잘 섬겼을 뿐만 아니라 성품이 신중하고 부지런해서 왕비가 매사를 위임했다.
왕비의 침실을 섬기는 지밀나인이었던 김 씨는 세종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1426년 (세종 8 년)에는 성은을 입게 되었다.
이후 12년 동안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여 무려 아들 여섯과 딸 둘을 낳았다.
재위 17년에도 영해군을 출산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세종실록 17/03/20)
세종은 그런 그녀를 소의에서 귀인까지 올려주었다. (나중에 신빈으로까지 승격) 그런데 놀라운 것은 소원왕후가 자신의 시녀인 그녀가 세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김 씨를 시기하거나 미워하기는커녕 막내아들 영응 대군을 낳은 후(1434년) 신빈 김 씨에게 양육을 맡겼다는 사실이다.
세종은 신빈의 처소에 들면서도 나는 중궁의 내조에 크게 힘입었다 하면서 왕후를 존중하고 아꼈던 것이다.
김 씨 역시 왕후를 질투하지 않고 존경하면서 다복한 생애를 살았다.
세종의 화법
세종은 신하들의 말을 일단 수긍하되 곧이어 자신의 말을 주장하는 방식의 화법을 구곤 했다.
제 아무리 신하들이 왕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말을 한다 할지라도 일단 '네 말이 아름답다'거나 '그 뜻이 좋다'라는 식으로 수긍을 한다.
이것은 조선 후기에 정조가 상대방의 말을 '그렇지 않다'라고 일단 부정한 다음에 논쟁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강무의 강행 논쟁이 그 한예가 될 수 있다. 당시 형조참판 고약해는 강무란 유희에 가까우니 비옵건대 강무 일수를 줄이고 또 가까운 곳에 거둥 하도록 하시어서 백성의 힘을 쉬게 하소서라고 말했다.
그러자 세종은 일단 경의 말이 매우 옳다고 수긍한다.
그러나 세종은 강무는 유희가 아니다. 강무는 종묘를 받들고 빈객을 접대하고 무예를 익히는 일로서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다.
경의 말을 비록 옳다고는 하나 강무를 폐지할 수는 없다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왕의 조건
1. 호학 종야 독서 " 지적지도력
2. 식치 체헌의 : 창의적 아이디어
3. 접사신 : 외교능력
4. 기자유 장대 : 안정적인 왕위 계승
5. 택운량 단국본 유재지공 : 사사로움을 이겨내는 공적 태도
태종우
음력 5월 초열흘에 내리는 비.
농촌에서는 태종우가 오면 그 해에 풍년이 들 징조라고 한다.
조선 제3대 왕 태종은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잘 다스리고 노심초사하여 임종할 때 날이 몹시 가문 것을 걱정하여 내 마땅히 옥황상제님께 빌어 한바탕 비가 오게 하여 우리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리라고 했다.
마침 태종이 죽자마자 하늘은 한바탕 비를 퍼부었고 태종의 기일이 되면 비가 내렸으므로 이 비를 태종우라하였다. (연려실기술)
인재를 얻어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이 있으면 맡기지 말아야 한다.
이는 허조의 생각이자 곧 세종 자신의 신념이었다. (세종실록 01/01/11)
세종은 법가 허조와 유가 황희, 도가 맹사성과 불가 변계량 모두의 장점을 합금시킨 왕이다.
노비들의 출산 휴가 제도
세종시대 노비의 휴가 제도는 3단계로 진행되었다.
그 첫째는 출산 후 휴가 기간의 연장이다. 세종은 종래 관청의 여자 노비에게 출산 후 아이를 돌보도록 주던 휴가를 100일로 늘리도록 했다.
둘째는 출산 전 휴가 제도의 도입이다. 출산 1개월 전부터 산모의 복무를 면제해 주도록 한 재위 12년의 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세종실록 12/10/19)
셋째는 남편 노비에게도 출산휴가(산간 휴가)를 준 것이다.
세종에 따르면 그 남편에게는 전혀 휴가를 주지 아니하고 그 전대로 일을 하게 하여 산모를 구호할 수 없게 하고 있으니 이는 단지 부부로 하여금 서로 구원하게 하는 뜻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이 때문에 간혹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있었다(세종실록 16/ 04/26)면서 천하에 돌보아 줄 사람 없는 여자 노비를 진실로 가엽게 여기고 재위 16년부터는 출산을 앞둔 여종(비자) 자신은 물론이고 그 남편 즉 남자 종에게도 한 달간의 산후휴가를 주게 했다.
세종은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제생원 제도를 보완해 버려진 아이들의 사망을 막는 한편 노비의 출산 휴가를 파격적으로 계산했다.
또한 의료제도를 개선해 질병으로 사망하는 경우를 줄이려 노력했으며 감옥에서 억울하게 병들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없도록 법규를 마련했다.
무엇보다 농사직설 편찬 등 우리 실정에 맞는 농업을 개발하는가 하면 대규모 북방 사민과 개간척 사업을 통해 농업 생산량을 증대시켰다.
그 결과 토지 1 결당 쌀 생산량이 최고 4 배가량 증가하는 등 나라의 경제 사정도 좋아졌다.
세종은 앙부일구를 만들어 도성 가운데 내어 놓았다.
무지한 백성들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지 않도록 우리말에 일치하는 글자를 창제해 배울 수 있게 한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세종이 앙부일구 즉 해시계를 만들되 백성들이 보는 혜정교와 종묘 앞에 놓도록 하여 해시계 시신을 그려서 무지한 자로 하여금 보고 시각을 알게(세종실록 19/04/15)한 세종의 의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이것은 권력과 돈을 가진 세력이 정보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공유하겠다고 하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세종은 나라가 어려울 때 공무원의 급료를 줄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 그는 자기의 아들이나 가까운 친인척의 급료를 먼저 줄였다.
아악은 본시 우리나라의 성음이 아니고 실은 중국의 성음인데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연주하여도 마땅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을 듣고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과연 어떨까 한다.
우리나라가 동쪽 일각에 위치하고 있어 춥고 더운 기후 풍토가 중국과 현격하게 다른데 어찌 우리나라의 대로 황종의 관을 만들서야 되겠는가 (세종실록 12/09/11)
술에 대한 경계
술의 해독은 크다.
어찌 특히 곡식을 썩히고 재물을 허비하는 일뿐이겠는가.
술은 안으로 마음과 의지를 손상시키고 겉으로는 위엄을 잃게 한다.
혹은 술 때문에 부모의 봉양을 버리고 혹은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한다.
술의 큰 해독은 나라를 잃고 집을 패망하게 만들며 작은 해독은 성품을 파괴시키고 생명을 잃게 한다.
그것이 삼강오륜을 더럽혀 문란하게 만들고 풍속을 퇴폐하게 하는 점은 이루다 열거할 수가 없다.
우선 그중에서 몇 가지 경계할 것과 본받아야 할 것만을 취득하여 말하겠다. 상나라의 주왕과 주나라의 여왕은 술로 그 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며 동진의 풍속은 술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
정나라의 대부 백유는 땅굴을 파서 집을 만들고 그 속에서 밤에 술을 마시다가 자석에게 불태워져 죽었으며 전한의 교위 진준은 매양 손님들과 크게 마시기를 좋아하여 손님이 오면 문득 손님이 떠나가지 못하도록 문을 닫고 타고 온 수레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더니 흉노에게 사자로 갔다가 술에 취하여 살해되었다. 후한의 사예 교위 정충은 자주 제장들에게 찾아다니면서 술을 먹더니 창자가 썩어서 죽었으며 진나라의 상서 우복야 주개는 술 한 섬을 거뜬히 마셨는데 한 번은 옛 술친구가 왔으므로 함께 즐겨 술을 마시고 몹시 취했다가 술이 깨서 손님에게 가보게 하였더니 손님은 이미 갈비가 썩어서 죽어 있었다고 한다.
후위의 하후사는 성질이 술을 좋아하여 상중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하며 좋은 막걸리를 입에서 떼지 않으니 아우와 누이는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는데 마침내 술에 취한 채 혼수상태로 죽었다. 이러한 일들은 진실로 경계해야 할 일들이다.
집현전 응교 권채 인간 돼지 사건
권채가 자기 아내와 함께 자신의 종을 학대한 사건을 접한 세종이 개탄하면서 한 말이다.
형조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권채는 여종 덕금을 첩으로 삼았는데 그의 아내가 이를 질투해 덕금을 인간 돼지로 만들어 버렸다. 즉 권채 아내 정 씨가 덕금이 다른 남자와 간통하고 도망친 것을 붙잡아 왔다고 말하자 권채는 여종의 머리털을 자르고 매질하고는 왼쪽 발에 고랑을 채워서 방에 가두라고 했다.
다른 날 정 씨가 칼로 덕검의 목을 배려하자 다른 여종 녹비는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니 고통스럽게 저절로 죽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정 씨는 그 말대로 음식을 줄이고 핍박해 스스로 오줌과 똥을 먹게 했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덕금이 오줌과 똥 안의 구더기를 보고 먹으려 하지 않자 정 씨는 침으로 항문을 찔러 그 고통을 참지 못해 구더기까지 억지로 삼키게 하는 등 수개월 동안 침학했다. (세종실록 09/08/24)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실을 안 세종은 비록 계집종일지라도 이미 첩이 되었으면 마땅히 첩으로 대우해야 할 것이며 그 아내 또한 마땅히 가장의 첩으로 대우해야 할 것인데 그의 잔인 포악함이 이 정도니 어떻게 그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세종실록09/09/04) 라고 권채의 아내를 꾸짖고는 의금부 제조 신상에게 권채를 형벌로 심문해서라도 자백을 받아 내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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