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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 김동진 참좋은친구 2010년 451/463쪽 ~03.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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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 김동진 참좋은친구 2010년 451/463쪽 ~03.23

singingman 2025. 3. 2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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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때 우리나라를 위해 혼신의 힘을 바친 호머 B. 헐버트에 관한 책.

그가 우리나라를 얼마나 사랑하고 우리나라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보여준다.
교육자, 선교사,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한 사람이다.
특히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언어학자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에는 육영공원 교사로 와서 한글도 연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고종의 신임을 얻어서 헤이그에 우리나라 3인(이준,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특사로 파견되기도 했고 미국 대통령에게도 특사로 보내졌지만 당시 일본과 밀약을 맺고 있던 미국은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상하이에 있는 독일 은행에 고종의 내탕금을 맡겼는데 이것을 찾으러 갔더니 일본이 은행을 속이고 이미 찾아가 버렸다.
결국 그는 특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완수한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한국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86세의 고령이 된 그가 이승만의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왔지만 일주일 만에 고령으로 우리나라에서 죽었다.
평소에 그는 '나는 웨스터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고 말해왔다.
그의 소원대로 지금 그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묻혀있다.
그 후손들은 지금도 우리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협력하고 있다.

조선 정부는 육영공원을 설립하고 세 명의 교사를 미국에 파송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헐버트가 길모어, 벙커와 함께 1886년에 조선에 왔다.

1885년에 고종은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을 설립 후원했고 또 이 해에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헤론 등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 땅을 밟았으며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을 필두로 스크랜턴 부인의   이화학당, 경신학교를 세운 언더우드 학당 등이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조선 정부는 1884년에 근대식 학교 설립을 계획하여 1886년 최초의 건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설립하였다.

1882년 미국과 조약을 맺은 이듬해인 1883년 여름에 고종은 민영익, 홍영식, 유길준 등을 보빙사로 미국에 파견하였다. 미국의 여러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1884년 여름 귀국한 민영익, 홍영식 등은 신학문 및 영어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신교육기관인 육영 공원에 관한 설립 계획을 제안했고 고종은 1884년 9월 1월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육영공원 설립 계획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연기되었다.
1년 여가 지나 정국이 안정을 되찾으면서 조선 정부는 1886년 봄 육영공원 설립 계획을 다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육영공원은 과거에 급제한 관리와 양반집 자제들에게 서양식 교육을 가르치고 장차 외국과의 교류에 크게 역량을 발휘할 인재를 배출하기 위해 1886년 9월 23일 35명의 학생으로 개교하였다.


고종의 시험 감독 에피소드


한글이 대중 의사소통의 매체로서 영어보다 우수하다고 결론지었다.

성산문의 이름이 산문인 이유는 하늘로부터 3번의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헐버트는 점찍기와 띄어쓰기를 한글에 도입했다.
'장비가 말을 타고'를 '장비 가말(가마)을 타고'로 읽을 수도 있다고 했다.
위의 글은 윤치호가 '한국소식'이란 잡지에 쓴 글이다.
윤치호의 영문 이름이 T.H.Yun이었다.

한글을 열심히 연구한 헐버트는
'한글이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문자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it is certainly one of the finest alphabets in existence)라고 한글을 정의하였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는 6,912개가 있으며 그중에서 문자가 없는 언어는 2,500개나 된다.

아리랑에 최초로 음계를 붙인 사람이 헐버트다.

헐버트는 한국의 성악 음악이란 논문에서 한국에는 상류층 양반들이 부르는 시조, 서민들이 부른 아리랑, 그리고 중간층이 부르는 군밤 타령이 있다고 한국 성악을 분류하였다.



헐버트가 채보한 문경새재 아리랑 악보



헐버트가 기록한 1890년대의 군밤타령 악보


은둔의 나라(hermit nation) 저자인 그리피스가 조선에 한 번도 와 보지 않고 조선에 대한 책을 썼다.
헐버트는 그리피스의 morning calm이라는 말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한국 소식 1896년 5월호에서 헐버트는 조선이란 말을 morning calm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선(鮮)의 의미는 조용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곱다, 아름답다, 빛을 발하다란 뜻이며 조선은 '서광이 비치는 아름다운 아침'이라는 뜻이라고 정확히 조선의 뜻을 이해했다.
굳이 영어로 번역한다면로 morning radiance나 radiant  morning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말 감탄할 정도로 조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헐버트 지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 그가 뉴 잉글랜드라는 미국 잡지에 조선을 난쟁이 제국(korea, the pigmy Empire)이라고 쓴 것에 대해서도 조선을 미개한 나라로 무시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반박했다.

헐버트가 본 한민족의 특성
첫째 한민족을 이상과 실용이 알맞게 조화된 합리적 이상주의자로 보았다.
둘째 적응성이 뛰어난 민족으로 보았다. 셋째 한민족은 인정이 많은 민족이라 했다. 넷째 강한 자존심을 지적했다.
다섯째째 한민족의 진실성은 동양인의 표준을 이루고 있고 동양인의 진실성은 그 정도가 높지 않다고 했다.
여섯째 파벌 싸움의 폐해를 지적했다.

헐버트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한민족이 근본적으로 두뇌가 우수하고 성공 잠재력이 무한한 민족임을 발견하였다.
그는 교육 투자에서 가장 성공할 수 있는 나라가 한국이라고 했다.
한민족의 잠재력을 담보하는 말이다.
또한 그에게 한민족은 합리적이고 우호적이며 한번 결심하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근성을 가진 민족이었다.
그러나 한민족은 민족적 우수성을 활용하지 못할뿐더러 민족의 강점도 응집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불만을 표했다. 헐버트는 한민족의 장점을 살리지 못한 큰 이유로 지정학적 위치와 관료들의 이기적인 태도를 들었다.

한국의 세계적 발명품 5 가지
첫째 조선 태종 시대의 이동식 금속활자를 한국이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
둘째 거북선이라 불리는 철갑선을 세계 최초로 한국이 발명하였다.
셋째 한국이 현수교를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고 했다.
넷째 한국이 세계 최초로 폭탄을 만들었다고 했다.
헐버트는 임진왜란 첫해가 지나기 전에 조선군이 적들을 꼭 물리쳐야 한다는 강한 신념에서 폭탄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 폭탄은 몸체와 함께 성벽 너머까지 날아갔고 일본 병사들이 떨어진 물건이 무엇인지 조사하려 달려들자 폭탄이 폭발해 몸이 찢어지거나 유황 연기로 숨 막혀 죽었다고 했다.
발명의 비법은 남아 있지 않으나 그때 쓰던 대포가 서울 남쪽을 수리하는 남한산성의 창고에 아직도 남아 있다고 했다.
조선 선조 때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를 말한다
다섯째 한국은 순수한 소리글자인 한글을 만들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일제가 고종을 시해하려고 하자 선교사 3인이 한조가 되는 불침번을 서기도 했다.

일본은 1905년 11월 이래 군사용이라면서 어마어마한 한국인들의 땅을 시가의 8 분의 1의 값에 몰수해 갔다. 많은 한국인이 나에게 토지 권리 서류를 들고 와 1푼에 땅을 사달라고 요청해 왔다. 부동산 명의가 자신들 이름으로 되어 있으면 일본인들에게 땅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250만 평의 땅을 군용으로 몰수하여 일본 상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도 있었다.
한 일본인이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하니 6,000엔 상당의 기와집을 내놓으라고 한국인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보상으로 120엔 만 준다고 하자 한국인은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한국인은 일본 막사로 끌려가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 한국인은 결국 자살했으나 일본은 오히려 비웃기만 했다.
영국이나 미국인의 땅에도 일본인들이 침범했으나 저항하지 못했다.

헐버트와 이상설, 이준은 구국 운동을 앞장서서 전개했던 감교 상동교회를 통해서도 잘 아는 사이였다.
상동교회 안에 있던 청년들의 신앙단체인 상동청년회에서 이준, 주시경 등이 크게 활약하였다.
이상설, 민영환은 정부의 상위 관직에 있는 사람들로서 상동 청년회 후원자 역할을 했다.
상동 청년회는 1904년부터 중등 교육기관으로 상동청년 학원을 두었으며 이 학원에서 주시경은 한글을, 전득기는 성경을, 스크렌턴 부인은 영어를 헐버트는 역사를 가르쳤다.
따라서 헐버트, 이준, 이상설  3인은 상동교회를 통해 이미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