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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왕과 나 이덕일 역사의 아침 2013년 367/374쪽 ~3.29 본문
왕을 만든 사람들 11명을 분석한 책.
김유신은 김춘추를 왕으로 만들고 신라를 삼국통일을 이룬 나라로 만들었다.
골품제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김유신은 난관을 헤치고 당나라를 청병해서 고구려와 백제를 물리치고 통일을 이루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을 헌신했다.
바주류가 주류 사회를 바꾸었다.
고려를 건국할 때 왕건은 지방 호족들의 세력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때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홍유는 철저하게 왕에게 충성하면서 자신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지도 않고 넓은 마음으로 헌신하면서 왕을 보호하고 도왔다.
소서노는 주몽을 도와 고구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건국에도 힘을 보탰다.
주몽의 뒤를 이어 소서노의 장남 비류가 고구려의 왕이 될 것을 바랐으나 주몽의 아들 유리가 부여에서 아버지를 찾아 오자 싸우지 않고 소서노에 차남 온조를 데리고 한강 유역에 하남 위례성을 쌓고 백제를 건국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이용해서 새 나라를 세웠다.
생각의 힘으로 세상을 뒤집었다.
토지제도 때문에 고려는 망할 수밖에 없었다.
정도전은 토지 제도를 개혁하고 조선 건국의 온갖 기틀을 마련했다.
황희는 태종과 세종 시대를 거치면서 비리도 있었지만 가장 유능한 재상으로 평가된다.
세종은 뇌물이나 그의 사위를 보호하기 위해 엉터리 재판을 한 그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능력을 십분 이용했고 황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80년이 넘게 살면서 고종명했다.
그는 평생 할 말 다 하면서 살았다.
똑똑한 군주를 만난 시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김육은 대동법 시행을 위해 평생을 바쳤고 덕분에 전 세계적인 흉년이었던 경신대기근때도 대동법을 실시한 덕에 그나마 백성들이 고통을 덜 당했다.
좋은 정책을 위해 평생 노력했다.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사통해 아들을 낳고는 그 아들을 왕으로 만들려고 하다가 결국 실패한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부탁을 받고 명청 교체기에 명나라의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청나라와 싸우지만 자기의 군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악역을 자청했다.
박자청은 천민 출신이었지만 능력으로 고위직까지 오른 사람이다.
각종 건축 공사를 맡아서 완성했다.
무너질려는 경회루를 수리하라고 했더니 재건해서 아주 멋진 건물을 만들었다.
한양도성을 쌓았다.
한확은 명나라에 여동생과 딸을 팔아서 권력을 가졌다.
인수대비는 의경세자의 빈이었다가 그가 일찍 죽고 소혜왕후가 되고 왕대비와 대왕대비까지 된다.
권력을 탐하다가 연산군에게 어려움도 당한다.
세조 이후 예종이 일찍 죽자 의경세자의 장자 월산대군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둘째인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린데는 자신이 수렴청정할 의도가 있었고 또 당시 실세였던 한명회가 나중에 성종이 되는 자을산군의 장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홍국영은 정조의 총애를 받고 개혁의 선봉에 섰지만 참모의 역할만 충실히 해야 했는데 참모의 선을 넘어 자신의 나라를 만들려고 지나친 욕심을 부려서 결국 정조에게서 버림받게 된다.
분수를 알고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황희의 별명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언언시시 정승이다.
남이 하는 말마다 다 옳다고 하는 정승이란 뜻이다.
집안의 사내종과 여종이 싸우다가 황희에게 와서 서로 상대방의 잘못이라고 일러바쳤다.
황희는 사내종에게 네 말이 맞다라고 하고 여종이 오자 여종에게도 네 말이 맞다라고 동의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부인이 어찌 명철하게 판단하지 못합니까라고 힐난하자 머리를 끄덕이며 부인의 말도 옳소라고 답했다. 그래서 언언시시 정승이다
효종 시대의 조선에는 재변이 잇따랐다. 가뭄과 수해, 혹한과 혹서가 반복되고 각종 전염병도 들끓었다.
이런 경우 유학자들은 천명을 받은 임금이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에 하늘이 재변을 내려서 견책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한나라 동중서의 천인감응론이었다.
그래서 유교 국가 조선도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임금이 혹시 정치를 잘못하지 않았는지 수성했던 것이다.
목욕 재개하고 하늘의 제사를 지내거나 죄수를 방면하거나 고기를 먹지 않고 반찬까지 수를 줄이는 소선을 행하는 것 등이 수성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김육은 수성의 길은 백성을 보호하는 정사를 시행해서 그들의 삶을 편안케 해주는 것뿐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소선등이 소극적인 수성 방법이라면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적극적인 수성 방법이었다.
대동법의 확대 시행이 적극적인 수성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대동법의 실시를 둘러싸고 서인이 둘로 갈렸다.
한당과 산당이 그것이다.
한당은 대동법 실시를 적극 주장했고 산당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한당의 당수는 잠곡 김육이었고 산당의 당수는 송시열의 스승 김집이었다.
김육이 한강 이북에 살았기 때문에 한당으로 불렸고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이 회덕 ,연산 같은 지방에 살았으므로 산당으로 불렸다.
원뿌리는 같은 서인이지만 대동법에 대한 입장 차이를 둘러싸고 분당된 것이다.
토지를 많이 소유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세금을 많이 내야 하니까 대동법을 반대했고 서민들은 세금을 적게 내도 되니까 찬성했다.
효종과 현종 때는 극심한 천재 지변에 시달렸다.
특히 현종 11년(1670) 경술년과 12년 (1671년) 신해년에는 경신대기근이라 불리는 역사상 유례없는 천재 지변이 닥쳐 굶어 죽는 백성들이 속출했다.
이때는 몰랐지만 16~19세기는 세계적인 소빙기였다.
대동법 논쟁이 치열했던 데는 이런 시대 상황도 있었다.
계속되는 흉년으로 줄어든 수입에 대한 분배 문제가 정국의 현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반대의도 대동법이 확대 실시되면서 백성들은 절대적 빈곤에서 차차 벗어나게 되었다.
경신 대기근을 극복하는데 대동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대동법이 단순히 백성들의 생활만 개선시켰던 것은 아니다.
대동법은 조선의 경제 전반과 신분제까지 영향을 미쳤다.
대동법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야는 경제였다.
이 법이 실시됨으로써 조정은 과거 공납으로 받던 물품을 충당하기 위한 새로운 체제를 수립해야 했다.
그래서 관청에 이런 물품을 납품하는 공인이란 직업이 생겨났다.
공인들은 납품할 물건값을 선불로 받는 특혜가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자본을 축적한 일부 공인들은 선대제로 수공업자를 지배하기도 했다. 수공업자들에게 자재값을 미리 대주어 물품을 제작하게 했던 것이다.
이는 상인의 자본이 수공업자를 지배했다는 뜻으로서 자본주의 초기에 나타나는 상업자본주의의 원초적 형태였다.
고려사 후비 열전은 천추태후에 대해 김치 양과 사통해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고 대량원군(현종)을 죽이려 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명나라 연왕 주체는 1402년 내전에서 승리하고 즉위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화에게 62 척의 대선단과 2만 7800 여명의 대군을 주어 대항해를 시키고 세 차례나 몽골을 직접 정벌했는데 적 1000명을 죽이고 아군 800명을 잃었다는 격렬한 전투였다.
연산군 시대에 현재의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부근에 종교가 있었다. 이 다리 이름 때문에 종교 감리 교회라는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닐까?
홍국영은 군주를 보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군주를 조종하려 했다.
그는 자신의 나라를 꿈꾸었고 자신을 위한 정치를 했다.
그 결과 명분도 잃고 실리도 잃었다. 대의가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위해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고도 형장 아래가 아니라 시골에서 고종명할 수 있었던 것만도 큰행운이었다.
참모는 권력이 커질수록 겸손하고 매사 조심해야 한다는 경우를 홍국영은 후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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