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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권 한국역사연구회 청년사 1996년 초판 99년 초판 16쇄 284쪽 ~2.2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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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권 한국역사연구회 청년사 1996년 초판 99년 초판 16쇄 284쪽 ~2.26

singingman 2025. 2. 26.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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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은 정치, 문화 생활을 다루고 있다.
어린 왕은 왕노릇을 수렴청정을 통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성장해서 직접 통치할 때까지는 어머니나 할머니가 실제적인 통치자였고 따라서 당연히 외척이 득세할 수 밖에 없었다.

김조순은 순조의 장인이었기 때문에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기보다는 김상헌의 후예로서 17세기 중반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정치 핵심을 이루던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외척이 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 권력은 적어도 외형상으로 비변사라는 국정 최고 기관을 장악함으로써 행사되었다.
김조순에 대한 평가가 당시의 것이던 후대의 것이든 대개 그 가문의 위세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점도, 19세기 전반의 세도 정치를 수행한 외측들은 철저히 조선 후기 정치 체제의 테두리 안에서 배태되고 성장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조선왕의 묘호 중에 조와 종은 어떤 차이가 나는가?
이를 엄밀히 나누기는 어렵지만 창업을 한 왕에게는 조자를 붙이고 수성한 왕에게는 종자를 붙였다.
그 근거는 예기에 공이 있는 자는 조가 되고 덕이 있는 자는 종이 된다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원칙적으로 격에 있어서 조와 종의 차이를 두지 않았지만 현실적으로는 종보다 조를 높게 받아들였다.
조선 후기에 종에서 조로 바꾼 경우가 간간이 있던 데서 이러한 점을 알 수 있다.

경종을 뒷받침하고 있던 소론은 노론의 처사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결국 경종은 1721년(경종 1년) 소론의 뜻을 받아들여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4대신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을 처벌하였다.
또한 소론은 이듬해 옥사를 일으켜 노론을 정치일선에서 몰아냈다.
이 두 사건을 일컬어 신임 사화라 한다. 경종 연간에 일어난 신임사화에 대해 노론과 소론은 각각 자신들의 입장에서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즉 노론은 경종 연간에 노론이 영조를 왕위 계승자로 확립시키려 했던 자신들의 입장이 옳다는 것이었고 소론은 노론의 이런 행위가 경종을 배반한 것이었고 이를 막으려 한 자신들의 행동이 옳았다고 보았다.
신임 의리는 이를 일컫는 말이었다.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은 엄청난 뇌물을 챙겨서 돌아갔다.
재조지은의 나라여서 조선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고 사신들의 탐욕이 거기에 더해졌다.

몽골제국은 원활한 통치를 하기 위해 40킬로미터마다 여관과 말이 딸린 '참'을 설치했다. 우리말 '한참'은 '참'과 '참'사이의 거리를 말한다. "한참가야 한다"는 말은 40킬로미터 즉, 백리를 가야한다는 의미다 

신임사화
경종 때 소론의 지지를 받는 경종과 노론의 지지를 받는 연잉군(영조) 사이에 일어난 사화로 연잉군의 세제책봉과 대리청정을 주장하던 노론 4대신(김창집,이이명, 이건명, 조태체)을 처벌한 사건과 이듬해 소론은 옥사를 일으켜 노론을 정치일선에서 몰아낸 사건이다.


지구가 방형이 아니고 둥글다면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없다.
지리 지식이 중국이나 조선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심이 되자 조선은 자기들이 중화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일본과 베트남도 했다.

판소리는 대체로 전라도 지방에서 유행하던 서사무가를 개조한데서 유래했다.
전라도의 세습무는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계성되고 남편이나 아들은 악공 노릇을 하며 굿을 하는 것을 거들었는데 이 무리 가운데 판소리를 하는 사람도 나오게 되었다.
소리에 능력이 있으면 소리 광대가 되었고 성대가 나빠서 창을 하는데 적합하지 않으면 고수가 되었다.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옷을 입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도 누구나 공통적으로 입는 기본적인 의복은 있었다.
현재 우리가 입는 한복을 살펴보자.
남자는 바지,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고 여자는 치마,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는다. 즉 상의, 하의, 외투라는 3 가지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전통적으로는 유(상의), 고(하의),
포(외투)라고 하였다.

주자학과 성리학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우리가 흔히 주자학이라 부르는 것은 엄격히 말하여 성리학의 일부에 불과하다. 성리학은 원래 '성명 의리의 학'의 준말이다.
성리학은 중국 송대의 사대부층에 의하여 새로운 유학 사상 체계로 성립되었다.
당말. 송초를 거치며 역사의 전면에 나타난 사대부들은 이전의 유학이 가지고 있지 않았던 우주론, 존재론, 인성론 등의 치밀한 철학적 기초를 마련하면서 유학을 재해석하였다.
유학을 선진 유학, 한당 유학 등 시대에 따라 나눌 경우 바로 송명시대 유학을 가리켜서 성리학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학자와 경향에 따라서도 성리학은 다양한 명칭을 갖는데 정주학, 주자학, 육왕학, 양명학, 이학, 도학, 심학, 신유학 등의 명칭이 그것이다.
정호, 정이 형제와 주희, 육구연, 왕수인이 이 학문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들은 또 나름대로 이 또는 심에 더 치중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 가운데 주로 송대에 일어난 송학, 정주학, 주자학, 이학, 도학이 한 계통이고 주로 명대에 일어난 명학, 육왕학, 양명학, 심학이 또 다른 한 줄기를 이룬다.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적으로 전자인 정주계의 이학이 크게 발달하고 후자인 육왕계의 심학은 별로 발달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는 정주계의 이학 가운데서도 주자학이 지배사상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성리학이라고 하면 대부분 주자학을 가리키게 되었던 것이다.

동양에서 음악은 미학과 예술의 대상이라기보다 인격수양과 사회 통합의 도구였다.
옛 사람들은 일반적인 소리를 성(聲)으로 부르고 이 소리를 꾸민 것이 음(音)이며 음이 최고로 좋게 표현되어 천리에 일치된 상태를 즐거움 악(樂)이라고 하였다.

명종이 어려서 중종의 3번째 부인이었던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할 때 불교를 적극 옹호하고 궁중에서 불교를 지원했다.
유림들과 신하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승려들을 양성하고 봉은사와 봉선사를 선.교 양종의 중심사찰로 키우고 보우대사를 봉은사 주지로 임명했다.
보우는 요승이라는 주장도 있다.
춘천 청평사와 양주 회암사도 중창하고 주지를 지냈다.
그는 나중에 제주 유배가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