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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권 한국역사연구회 청년사 1996년초판 1999년 초판 18쇄 278쪽 ~2.22 본문
조선 시대 사회 경제 생활을 다룬 책.
태평성대에는 호구가 늘어나기 때문에 호구의 증가를 곧 임금의 덕정 실현으로 이해했다.
조선시대의 호구조사는 군역 등 각종 역역자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등을 지난 1642년의 인구는 1543년보다 오히려 줄었다.
조선 시대의 인구 증가율은 10년 이상을 단위로 할 때 1% 미만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결혼하는 딸에게 시집 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생활교육과 함께 성교육이 행해졌다.
성교육은 아들을 낳기 위한 것이었다. 남편의 양기를 외치는 모밀, 고사리 같은 음식은 삼가야 한다는 것과 아들을 낳을 확률이 높은 날을 계산하는 법을 배웠다. 즉 월경이 끝날 무렵 깨끗한 무명 조각을 음구에 꽂았다가 떼어 보아 그 색깔이 옅으면 잉태의 적기가 지난 것이고 색이 붉으면 아직 적기에 이르지 않았으며 금빛이면 적기로, 나흘 안으로 홀수 날에 씨를 내리면 아들이고 짝수 날에 씨를 내리면 딸이 된다.
또한 이는 간지와도 상관이 있어 봄에는 갑.을 날에 여름에는 병.정날에 가을에는 경.신 날에 겨울에는 임.계 날에 씨를 내리면 아들이 되는데 월경 뒤 엿새안에 이 간지가 든 날을 구해야 하기 때문에 신부 수업 중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이 손가락 마디로 간지를 짚는 것이었다고 한다.
향교에 입학한 16세 이상의 학생을 교생이라 하였다.
서원은 향교와 더불어 양대 중등 교육기관의 하나였다.
최초의 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다.
서원의 본격적 확산은 조선 초 이래 계속 된 사림의 자기 세력 기반 구축을 위한 향촌 내에서의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구체적으로 16세기 중엽 정계에 진출해 있던 사림들이 자신들의 학문적 우위와 정치적 입장의 강화를 위해 선배 도학자들을 문묘에 제향하는 문묘 종사 운동을 전개하면서 서원이 확산되어 갔다. 도학 정치를 담당할 인재 양성을 위해 사림의 모범이 되는 학자나 선비의 충절을 마음으로부터 배운다는 위기지학으로의 전환이 강조되는 가운데 서원 설립의 움직임이 활발해진 것이다.
서원에 배향된 선현들이 살아 있을 때 세웠던 서당이 발전하여 서원으로 된 경우도 있었다.
영남지방에서는 정몽주, 길재,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정통 맥을 자부하는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서원이 많이 건립되는 경향을 보였다.
두레의 꽂인 총각대장은 두레 조직의 효율적 운영과 통솔을 맡은 사람으로 힘이 세고 영리하며 우스개의 소리를 잘하고 통솔력이 있어 군기를 잡거나 체벌도 가할 수 있는 정도의 권위가 있어야 했다. 지역에 따라 총각, 수머슴, 총각대장, 총각좌상 등으로도 불리웠다. 총각대장에게는 소동패가 소속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아직 두레에 가입하지 않는 아이들로 뒷일, 보조일을 맡는 두레의 예비대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소임 (총각소임)이라고 하여 군기 단속과 체벌을 책임진 사람을 별도로 두기도 하였고 식화주라고 하여 밥나르는 일을 맡은 사람도 있었다.
마을의 미성년자가 16,17 세가 되면 성년으로 인정받아 두레에 가입할 수 있게 되는데 이때 심사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바로 들돌(전라도는 들독, 제주도는 뜽돌)이다.
동그란 돌이면서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하며 보통 사람이 들기에는 약간 힘에 겨운 무게이다.
들돌은 대개 당산나무나 동각의 밑에 보존되어 있으며 대.중.소로 무게가 다른 둥근 돌을 모셔 신앙 대상으로 섬기는 경우도 있다.
이 들돌을 들거나 들어서 어깨 위로 넘기면 당당히 가입 자격을 얻는 셈인데 이는 노동 담당자로서 생산 활동에 참가할 자격을 인정받는 의미를 지닌다.
마을에 따라서는 7월 백중에 청장년들이 모여 힘을 겨루고 장사(수머슴)를 뽑는 과정에 이용되기도 한다.
이 경우 장사는 두레의 대표가 되거나 임금을 곱절로 받는 특혜를 부상으로 받는다.
오늘날은 열 되가 한 말이고 열 말이 한 섬이다.
조선시대에도 열 되가 한 말이지만 열 말을 한 섬이라 하지는 않았다.
15 말이 소곡평석, 스무 말을 대곡 전석이라고 하였다.
한 말의 용량은 학자에 따라서 작게는 5.1 8리터, 크게는 5.976리터로 본다. 오늘날의 한 말은 18리터쯤 되므로 조선시대의 한 말의 3 배가 좀 넘는다. 그런데 당시는 정부통제력의 한계, 기술적 문제, 상인과 관리의 농간, 시장의 미성숙 등으로 말미암아 지방 사이에 되나 말의 용량이 차이가 심하였다.
서울의 상업
시전 상인들이 독점(금난전권)으로 다른 상인들을 억압하자 나타난 것이 私商이다.
정조때 (신해년1791년) 시전상인의 독점을 플어준 것을 신해통공이라 한다.
이것은 시민들의 반발뿐만 아니라 私商들의 활동이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상들도 자기들이 주도권을 잡자 또 독점이나 담합을 해서 서민들은 살기 어려워졌다.
갑오개혁으로 사상의 독점도 없어졌다.
18세기 이전까지는 역관들이 조공을 통한 무역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청나라와는 인삼이 주요 상품이었고 역관은 인삼 80근까지 가지고 갈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다른 사람들의 것도 대신 가지고 갔기 때문에 이들의 수입은 막대한 것이었다.
당시 쌀값 수천석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당시 역관 변승업은 조선 최고의 부자였다고 한다.
특히 일본과 청나라가 국교가 막혀있었기 때문에 일본어 역관들은 중개무역으로 큰 돈을 벌었다.
하지만 1687년에 청과 일본이 국교를 수립하자 중개무역은 쇠퇴했다.
그리고 개성상인이나 의주상인들의 밀무역이 성행했다.
시전에 속한 상인은 세칭 우대사람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그 직업을 대대로 물려받았으며 각각 방이라고 하는 개별 점포에서 장사를 했다.
즉 입전에 속한 상인들은 입전 일방, 입전이방 등으로 부르는 점포에서 각각 장사를 했다.
우리가 상점을 보통 전방이라고 하는데 바로 시전의 전과 점포의 방을 합쳐 부른 데서 유래한 것이다.
한편 애초에 시전은 정식 건물을 지어 입주하였으나 시전 상인의 수가 늘면서 정식 상가 옆에 임시 건물을 지어 장사를 하는 상인들도 생겨났다.
이러한 임시점포를 가게라고 한다.
오늘날 가게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
원래 에누리란 상인이 원가에 더 붙이는 값이었다.
그런데 시장에서 물건을 팔 때는 에누리에 여리꾼(브로커)이 먹는 이문을 더 붙인 값으로 팔았다.
궁궐의 건물들은 제각각 그 기능과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규모가 달랐을 뿐만 아니라 그 위상도 달리하였다.
각 건물들은 대개 이름을 갖는데 이름 끝에는 대체로 전, 당, 합, 각, 재, 헌, 누, 정 등의 글자를 붙였다.
조선시대 궁궐에 화장실이 많이 있었다.
경복궁에는 28개의 화장실이 있었다.
왕이나 왕비는 이동식 변기를 사용하였다.

공중 용어로 똥을 매우라고 한다.
한자로는 梅花라고 쓰고 궁궐에서는 용어를 특수하게 쓰는 예에 따라 매우라고 발음한다.
왕의 이동식 변기를 매우틀이라고 한다.
농민의 한해 살이는 농사 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명절이나 생일, 제삿날 등은 모두 음력을 썼지만 한 해의 농사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정한 24 절기에 맞추었다. 조선시대 농민들은 한 해 농사 과정을 이러한 24 절기에 따라 진행함으로써 태양의 실제 움직임에 따라 나타나는 계절의 변화와 음력이 어긋나는 현상을 보완할 수 있었다.
'농가 월령'과 '농가 월령가'에 묘사된 농사일과 여타의 세시 풍속을 참고하여 24 절기에 따른 관행적 농사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입춘과 우수가 들어있는 정월의 농부들은 1년의 농사를 준비한다.
이때는 국가에서도 농사를 권장하는 데 힘을 쏟는다.
경칩과 춘분이 들어있는 2월에는 논밭의 봄갈이를 해주고 가축 기르기, 약재 캐기와 아울러 적절한 농작물에 파종을 한다. 청명과 곡우가 들어있는 3월에는 논밭에 파종을 하고 과일나무 접붙이기와 장 담그기를 하며
입하와 소만이 들어 있는 4월은 이른 모내기, 간작, 이른 보리타작 등 본격적인 농사일을 수행한다.
망종과 하지가 들어있는 5월에는 보리 타작, 고치따기, 모내기 등을 하며
소서 대서가 들어있는 6월에 농부들은 간작, 북돋우기, 삼수확, 길쌈, 두레를 통한 김매기 등의 농사 작업에 땀 흘리면서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고대한다.
입추와 처서가 들어있는 7월이 되면 김매기, 피고르기, 겨울을 위한 야채 준비 및 김장할 무,배추의 파종 등을 하며 백로와 추분이 들어 있는 8월에는 각 작물을 수확하여 한동안 뿌듯함을 가슴속에 간직하는 시기이다.
한로와 상강이 들어있는 9월에는 계절상 늦가을 추수에 온 힘을 다 쏟으며
입동과 소설이 들어 있는 10월에는 무우와 배추를 수확하고 겨울을 대비하는 작업을 한다.
대설과 동지가 찾아오는 11 월에는 메주 쑤기, 가축 기르기, 거름 준비 등을 차질없이 해나가며
소한 대한이 들어 있는 12월에는 코끝을 시리게 만드는 겨울 바람을 안고 새해 농사를 준비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여름에는 세 끼를 먹었고 겨울에는 두 끼를 먹은 경우가 많았다.
부자들은 세 끼를 먹고 가난한 사람들은 두 끼를 먹는 경우도 많았다.
김치는 넓은 의미에서 소금, 초, 장 등에 절인 채소를 의미한다.
김치의 어원인 딤채도 담근 채소란 뜻이다. 그러므로 깍두기, 오이지, 오이소박이, 단무지는 물론 장아찌까지도 김치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외국의 것으로 다꼬앙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쯔께모노, 서양의 피클, 중국의 파오차이, 독일의 자우어크라우트, 인도네시아의 아차르도 초나 소금에 절인 채소 즉,김치의 일종이다.
우리나라의 김치는 지라 불렀다.
그래서 짠지, 싱건지, 오이지 등 김치 뒤에는 지금도 지 자가 붙는다.
초기의 김치는 단무지나 장아찌에 가까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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