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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영주 부석사 13-09-17 본문
최순우 선생님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때문에 이 절에 더 관심이 갔다.
무량수전에 있는 불상은 아미타불인데 수인은 석가모니불의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좀 독특한 형태이다.
최순우 선생님의 글처럼 안양루 앞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선계가 펼쳐지는 절이다.
전면 5칸, 옆면 3칸으로 된 건물이고 팔작지붕에 주심포 건물이다.
'그 절이 그 절'이었던 시절에는 이 건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었다.
조선시대의 유한준은 석농화첩 발문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곧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곧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유한준 (조선 후기의 문장가.서화가)
아래 벽화들은 그러니까 다시 그린 것들이라고...
이 그림들은 아래 설명을 보면 이해가 가는 그림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갔을 때 양주(陽州)에 이르러 병을 얻어 양주성의 수위장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머물러야 했다.
그때 그의 딸 선묘(善妙)낭자가 의상에게 연정을 갖게 되었다. 의상의 나이 37, 선묘의 나이 17살쯤이다. 하지만 의상은 법도로 대하여 제자로 삼았다.
선묘낭자의 정성으로 몸이 완쾌된 의상은 다시 길을 떠나 종남산 지상사에서 10년을 공부하고 671년 급거 귀국하는 길에 선묘의 집을 찾았지만 만나지 못하고 뱃길로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선묘는 비단 선물을 챙겨 산동성(山東省) 해안으로 달려갔으나 의상이 탄 배는 까마득히 멀어져 간 뒤였다. 선묘는 들고 있던 선물을 의상의 배를 향해 던지며 “원컨대 이 비단이 의상대사님께 이르도록 해 주옵소서” 하니 해풍이 크게 일어나면서 던진 선물이 의상이 탄 배 안으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자신도 용이 되게 축원을 하고 바다로 몸을 던지니 과연 용으로 변해 의상의 배를 호위해 무사히 배가 신라에 닿았다. 그 덕에 당나라의 침략을 사전에 막아낼 수 있게 됐다.
신라로 온 선묘낭자는 다시 의상의 꿈에 나타나 500명의 이교도들을 제압할 방법을 일러주었다. 다음날 아침 의상은 선묘낭자가 시키는 대로 지팡이를 한 번 두들기니 커다란 바위가 공중에 떠올랐다 내려앉았다. 용으로 화신한 선묘낭자가 들어올린 것이다. 이를 두 번, 세 번 이어서 반복하자 겁먹은 이교도들이 일제히 의상대사에게 무릎을 꿇고 함께 절을 짓는데 앞장섰다.
그렇게 공중에 세 번 뜬 바위가 무량수전 서쪽 산비탈에 있는 ‘부석(浮石)’ 바위다.
(위의 글은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40421000060&md=20140424005937_BL 에서 복사해 옴)
아래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권에 나온 글들을 발췌한 것이다.
남한 5대 명찰
서산 개심사, 강진 무위사, 부안 내소사, 청도 운문사, 영풍 부석사
건축잡지 플러스가 1994년에 건축가 200여명에게 ‘가장 잘 지은 고건축’을 물었더니 부석사가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절도 좋지만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내려다보는 일망무제의 경치가 압권이다.(유홍준은 이 경치를 국보 0호로 하자고 말한다.)
일주문에서 무량수전까지 올라가는 계단이 9품 만다라(하품 하생, 중품 중생, 상품 상생)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안양문과 안양루는 무량수전과 같은 이름이니 극락으로 이르는 문이고 무량수전이 이름ㅁ대로 하면 극락의 위치가 된다.
무량수전 현판 글씨는 고려 공민왕의 것이고 안양루 앞에 걸린 부석사라는 글씨는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고 쓴 글이라 한다.
택리지에서 이중환은 1723년에 이곳을 답사하고 부석에 관해 기록했다.
부석이 노끈을 넣어도 드나드는 것을 부면 공중에 떠 있는데 그 이치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선묘는 의상이 당나라에서 공부할 때 마음을 주고 의상에게 반했으나 마음을 얻지 못하자 스님께 귀명하여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소원하였다.
화엄학을 다 배우고 귀국하는 의상에게 옷과 집기들을 주려고 선창가로 갔으나 이미 의상이 떠나버려서 옷과 집기들을 바다에 던지고 내 몸이 용이되어 저 배를 무사히 귀국케 해달라고 빌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이 선묘 목조상을 만든 것은 일본인들이다.
일본 교오또 박물관에 가면 지금은 페사된 옛날 선묘사에 있었던 이 목조상이 있다.
삼층석탑이 무량수전 앞에 있지 않고 그 오른쪽 조사당가는 길에 있다.
왜 이런 특이한 위치를 하고 있을까?
혹시 무량수전 안에 있는 아미타불이 남쪽이 아닌 서쪽을 보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
내 생각에는 아미타불은 서방정토에 있는 부처니까 동쪽을 바라보고 앉으면 자연히 앉은 자리가 서쪽이 되고 그것은 서방정토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최순우 선생은 부석사를 이렇게 묘사했다.
" . . .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도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루,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도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 . . 기둥의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 .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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