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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 13-09-17 본문

Temple tour

영주 부석사 13-09-17

singingman 2022. 11. 24.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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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우 선생님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때문에 이 절에 더 관심이 갔다.

무량수전에 있는 불상은 아미타불인데 수인은 석가모니불의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좀 독특한 형태이다.

최순우 선생님의 글처럼 안양루 앞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선계가 펼쳐지는 절이다.

 

이 장면을 누구는 국보 0호로 해야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무량수전 편액의 글씨가 고려 공민왕의 글씨라고

 

나도 흉내 내본다

 

 

 

배롱나무꽃이 한창이다.유학자나 스님이나 다들 이 이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 것 같다.

 

 

최순우 선생님이 그렇게 극찬한 풍경이 이 풍경이 아니었을까?

 

가족들과 함께 찾았다.

 

 

 

 

 

 

 

 

 

 

 

 

 

누하진입

 

 

 

 

 

입장료는 성인 1,200원

 

부석사 올라가는 길에는 은행이 떨어져서 냄새가 고약하다.

 

왜 여기가 태백산이지? 부석사 일주문 - 일주문은 문이 없다. 기둥만 있고, 이건 '아무나 오게 아무나 오게~~'란다.

 

단풍이 하도 좋아서

 

 

 

 

 

부석사 당간지주

 

일주문부터 이 천왕문까지가 3단으로 된 부석사의 제일 아랫단으로 사찰 건축의 기승전결 중 기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만다라 9품 중에는 하품에 속하는 지역이다.

 

부처로부터 가장 많은 설법을 들은 똑똑한 북방 다문천왕

 

서방 광목천왕은 용을 잡을 정도니까 도술이 아주 뛰어난 천왕

 

남방 증장천왕은 보검을 들고 마귀들을 한칼에 없앤다.

 

동방 지국천왕은 악기를 연주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도

 

 

 

3층 석탑

 

 

 

 

 

종루는 올라가면서 보면 지붕이 팔작지붕인데 올라가서 뒤돌아보면 아래 사진처럼 맞배지붕이다. 왜 이런 특이한 구조를 갖는가에 관해 소백산줄기를 내려다보는 전망을 위해 간소하게 했다는 설명이 있다.

 

종루에는 허락을 받은 사람들만 들어가서 사진을 찍고 있는 듯...

 

이 범종각은 1980년에 신축한 것이라고

 

 

 

종루에는 종만 빼고 목어와 운판 법고가 있다.

 

 

 

안양문이니까 이 문을 들어서면 극락이다. 그러니까 이 문을 들어서서 정면에 바로 보이는 무량수전이 극락이 되는 것이다.   무량수전의 다른 이름이 극락전이나 안양전이기도 하니까.   어떤 스님이 쓴 책에 보니까 안양이란 말이 극락이니까 안양 제일교회는 극락 제일교회가 된다는 재미있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안양문 위에 있는 부석사라는 글은 이승만 대통령의 글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안양문을 들어가서 뒤돌아보면 안양루라고 되어 있다. 누하진입이니까 극락에 들어갈 때는 머리를 숙이고 겸손하게 들어가라는 이야기?

 

무량수전 앞에 있는 이 석등은 정말 잘 생겼다. 얼마나 잘 생겼으면 국보가 될 정도일까? 얼핏 봐도 앙련에서 복련 사이의 8각기둥이 아주 늘씬하고 아름답다.

 

1994년에 우리 나라 고건축 전문가 200명에게 건축 전문 잡지 '플러스'가 가장 아름다운 건물을 물었더니 압도적으로 무량수전이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배웠는데 몇년 전 안동에 있는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건물로 밝혀졌다.이 건물을 설명할 때 배흘림 기둥과 안쏠림,귀솟음등을 많이 언급하는데 귀솟음이 착시현상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에 대해 어떤 장인은 지붕 무게 때문에 현실적인 이유에서 한 것이라고 말한다.( http://blog.daum.net/tasofhso/16138171 )

전면 5칸, 옆면 3칸으로 된 건물이고 팔작지붕에 주심포 건물이다.

'그 절이 그 절'이었던 시절에는 이 건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었다.

조선시대의 유한준은 석농화첩 발문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곧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곧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유한준 (조선 후기의 문장가.서화가)

이 기둥이 바로 그 유명한 최순우 선생님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라는 명저를 낳았다. 서양에서는 이 배흘림 기둥 양식을 엔타시스 양식이라 부른다고 한다.

 

무량수전 안에 있는 이 아미타불은 소조불상으로 소조란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진흙을 붙여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불상은 문을 열면 정면에 불상이 있는 다른 법당과는 달리 왼편 즉, 서쪽에 앉아서 동쪽을 쳐다보고 있다. 왜 이런 배치를 하고 있느냐에 설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한 두가지를 살펴보면 아미타불은 서방정토에 있는 부처니까 동쪽을 바라보고 앉으면 자연히 그 앉은 자리가 서쪽이 되니까 극락인 서방정토를 잘 묘사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무량수전 동쪽편에 따로 떨어져 있는 탑과 마주보게 하려는 배치라는 설도 있다. 아미타불인데 석가모니불의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특수한 경우다.

 

 

 

무량수전 천장은 따로 장식을 하지 않고 내부가 그대로 드러나게 두었다.

 

이 3층 석탑은 무량수전 동편에 있다.   불교에서 탑은 신앙의 대상이다. 석가모니 사후 그의 사리를 넣은 탑이 신앙의 대상물이었지만 더 이상 탑에 넣을 사리가 없어지자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만큼 절에서 탑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이야기다.

 

역광에 찍었더니 사진이 이렇게 나온다. 유홍준이 국보 0호로 하자는 이 좋은 경치를 제대로 찍을 수가 없다.

 

 

 

응진전에는 나한들이 다 있다.

 

 

 

자인당에는 석가모니불을 가운데 두고 비로자나불 불상이 양옆에 있다.

 

단하각이 어떤 전각이냐고 스님에게 무어봤더니 단하라는 성인을 모셨다고 한다.

 

이 사람이 단하?

 

 

선비화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택도없는 말을 믿고 이 나무를 잘라가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볼 수도 없게 이렇게 막아놓은 스님들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 치고는 너무 가는 것 아닌가?

 

아래 벽화들은 그러니까 다시 그린 것들이라고...

이 절의 창건설화와 관련해 중요한 인물인 선묘낭자를 여기서 만난다.

 

중국에 유학 온 의상을 사모한 중국여인 선묘

 

이 그림들은 아래 설명을 보면 이해가 가는 그림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갔을 때 양주(陽州)에 이르러 병을 얻어 양주성의 수위장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머물러야 했다.

 

그때 그의 딸 선묘(善妙)낭자가 의상에게 연정을 갖게 되었다. 의상의 나이 37, 선묘의 나이 17살쯤이다. 하지만 의상은 법도로 대하여 제자로 삼았다. 

 

선묘낭자의 정성으로 몸이 완쾌된 의상은 다시 길을 떠나 종남산 지상사에서 10년을 공부하고 671년 급거 귀국하는 길에 선묘의 집을 찾았지만 만나지 못하고 뱃길로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선묘는 비단 선물을 챙겨 산동성(山東省) 해안으로 달려갔으나 의상이 탄 배는 까마득히 멀어져 간 뒤였다. 선묘는 들고 있던 선물을 의상의 배를 향해 던지며 “원컨대 이 비단이 의상대사님께 이르도록 해 주옵소서” 하니 해풍이 크게 일어나면서 던진 선물이 의상이 탄 배 안으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자신도 용이 되게 축원을 하고 바다로 몸을 던지니 과연 용으로 변해 의상의 배를 호위해 무사히 배가 신라에 닿았다. 그 덕에 당나라의 침략을 사전에 막아낼 수 있게 됐다.

신라로 온 선묘낭자는 다시 의상의 꿈에 나타나 500명의 이교도들을 제압할 방법을 일러주었다. 다음날 아침 의상은 선묘낭자가 시키는 대로 지팡이를 한 번 두들기니 커다란 바위가 공중에 떠올랐다 내려앉았다. 용으로 화신한 선묘낭자가 들어올린 것이다. 이를 두 번, 세 번 이어서 반복하자 겁먹은 이교도들이 일제히 의상대사에게 무릎을 꿇고 함께 절을 짓는데 앞장섰다.

그렇게 공중에 세 번 뜬 바위가 무량수전 서쪽 산비탈에 있는 ‘부석(浮石)’ 바위다.

 

(위의 글은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40421000060&md=20140424005937_BL 에서 복사해 옴)

이 돌이 바로 이 중환이 택리지에서 돌이 공중에 떠 있다고 사기친 부석

 

이 경치들이 정말 좋지요?

 

일망무제 - 이 시원한 풍경을 어찌 안 볼 수 있으리요.

 

아래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권에 나온 글들을 발췌한 것이다.

 

 

남한 5대 명찰

 

서산 개심사, 강진 무위사, 부안 내소사, 청도 운문사, 영풍 부석사

 

 

 

건축잡지 플러스가 1994년에 건축가 200여명에게 ‘가장 잘 지은 고건축’을 물었더니 부석사가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절도 좋지만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내려다보는 일망무제의 경치가 압권이다.(유홍준은 이 경치를 국보 0호로 하자고 말한다.)

 

일주문에서 무량수전까지 올라가는 계단이 9품 만다라(하품 하생, 중품 중생, 상품 상생)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안양문과 안양루는 무량수전과 같은 이름이니 극락으로 이르는 문이고 무량수전이 이름ㅁ대로 하면 극락의 위치가 된다.

 

 

 

무량수전 현판 글씨는 고려 공민왕의 것이고 안양루 앞에 걸린 부석사라는 글씨는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고 쓴 글이라 한다.

 

 

 

택리지에서 이중환은 1723년에 이곳을 답사하고 부석에 관해 기록했다.

 

부석이 노끈을 넣어도 드나드는 것을 부면 공중에 떠 있는데 그 이치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선묘는 의상이 당나라에서 공부할 때 마음을 주고 의상에게 반했으나 마음을 얻지 못하자 스님께 귀명하여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소원하였다.

 

화엄학을 다 배우고 귀국하는 의상에게 옷과 집기들을 주려고 선창가로 갔으나 이미 의상이 떠나버려서 옷과 집기들을 바다에 던지고 내 몸이 용이되어 저 배를 무사히 귀국케 해달라고 빌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이 선묘 목조상을 만든 것은 일본인들이다.

 

일본 교오또 박물관에 가면 지금은 페사된 옛날 선묘사에 있었던 이 목조상이 있다.

 

 

 

삼층석탑이 무량수전 앞에 있지 않고 그 오른쪽 조사당가는 길에 있다.

 

왜 이런 특이한 위치를 하고 있을까?

 

혹시 무량수전 안에 있는 아미타불이 남쪽이 아닌 서쪽을 보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

 

내 생각에는 아미타불은 서방정토에 있는 부처니까 동쪽을 바라보고 앉으면 자연히 앉은 자리가 서쪽이 되고 그것은 서방정토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최순우 선생은 부석사를 이렇게 묘사했다.

 

" . . .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도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루,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도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 . . 기둥의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 .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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