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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도 예배다. (퍼온 글입니다)

singingman 2026. 5. 19.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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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마치기 전에 광고 몇 가지 전해 드리겠습니다." 오르간 잔향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마이크에서 이 소리가 들리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핸드폰 시계를 슬쩍슬쩍 들여다보고 엉덩이를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5분, 길어지면 10분. 다음 주 야유회 장소, 청년부 임원 모집, 김 집사 부친상 발인 시각, 주방 봉사 당번표, 선교 헌금 작정 마감일. 듣고 있자면 어느새 예배 시간 전체에서 설교 다음으로 긴 시간이 이 광고에 할애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주일 예배 광고시간이 길어지면 이런 생각 한 번쯤 해 본 사람 있을거다. ‘이게 정말 예배일까. 거룩한 시간에 마을 회보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늘어놓아도 되는 걸까?’ 어떤 교회는 이런 부담을 못 이겨 광고를 예배 전에 영상으로 흘려보내거나 주보로 갈음해 버린다. 또 어떤 교회는 광고가 길어지는 것이 영적이지 못하다며 슬그머니 줄인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는 공동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모순이다. 공동체의 소식을 나누는 시간을 거추장스러워하면서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셈이다.

이 모순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오르다 보면 의외의 사실을 만날 수 있다. 광고는 한국 교회가 발명한 것이 아니다. 예배가 끝나갈 무렵 겨우 끼워 넣은 사족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광고는 2,000년 동안 예배가 한 번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가장 오래된 순서 가운데 하나다. 다만 이름이 여러 번 바뀌었고, 자리가 몇 번 옮겨지면서, 그 의미가 점점 잊혔을 뿐이다.

먼저 2세기 로마로 잠깐 시간을 옮겨 보자. 안토니누스 황제의 통치 아래, 유스티누스라는 평신도 철학자가 황제에게 변증서를 올린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무도하고 음험한 자들이 아니라고 항변하며 그가 묘사한 주일 예배 끝자락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여유 있는 자들은 각자 원하는 만큼 헌물을 가지고 오는데, 모인 것은 회장에게 맡겨졌고, 그는 그것으로 고아와 과부, 병든 자들, 옥에 갇힌 자들, 객지에서 온 나그네들, 한마디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를 보살피는 일에 사용했다"(Justin, 1 Apol. 67). 헬라어 원문에서 “회장”으로 옮긴 단어는 '프로에스토스(προεστώς)'다. 그날의 모임을 주관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장로나 감독, 주교로 번역할 수도 있다. 여하튼 그 교회의 대표 지도자를 뜻한다. 그가 헌물을 받아 누구에게, 어떻게, 얼마나 나눌지를 회중 앞에서 결정하고 알렸다. 이것이 광고의 첫 모습이다.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유스티누스의 설명에서 봉헌과 광고는 분리된 두 개의 순서가 아니다. 헌물을 모으는 행위와 그 헌물의 사용처를 알리는 행위가 하나의 흐름으로 묶여 있다. 누가 아프고, 누가 옥에 갇혔으며, 누가 도시에 막 도착해 잘 곳이 없는지를 알지 못하면 봉헌은 의미를 잃는다. 동시에 그런 이웃의 형편을 알리지 않으면 회중은 자기들이 무엇을 위해 떡과 잔을 나누는 공동체인지 잊어버린다. 그래서 초기 교회의 광고는 단순한 행정 공지가 아니라, 공동체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고, 봉헌이 헛되지 않다는 보증이었다.

시간을 한참 돌려 중세 유럽의 한 본당으로 옮겨가 본다. 12세기, 13세기 프랑크 지역의 어느 마을 성당이라고 해 두자. 예배는 모두 라틴어로 진행된다. 성서 봉독도, 기도도, 성찬 제정의 말씀도 라틴어다. 문제는 회중석에 앉은 농부와 장인과 부녀자들은 라틴어를 단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예배 시간은 일종의 신비스러운 무성영화에 가깝다. 사제가 등을 돌리고 라틴어를 중얼거리는 동안 회중은 두 손을 모으고 종소리를 신호 삼아 무릎을 꿇었다 일어났다 할 뿐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등장한 것이 '프로네(Prône)' 또는 라틴어로 '프로나우스(pronaüm)'다. 단어 자체는 본래 그리스 신전 입구에 있던 작은 공간을 뜻했던 것인데, 여기서 신전 사제가 제사 의식 예절을 미리 고지하던 자리였다. 후에 이 단어가 서방 교회에 사용될 땐, 회중석과 성소를 갈라놓는 격자 칸막이를 뜻했다. 거기에 마을의 알림판이 붙어 있었기에 그 자리에서 행해지던 의식의 이름이 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813년 투르 공의회는 이미 모든 설교를 자국어, 즉 로마계나 게르만계의 일상어로 행하라고 결정해 두었다. 프로네는 그 결정의 구체적인 자리였다. 미사 가운데 복음서 봉독이 끝난 뒤, 사제는 라틴어로 읽은 본문을 회중의 일상어로 다시 풀어 주고, 그 위에 짧은 강론을 얹었다. 그러고는 곧장 그날의 알림을 이어 갔다. 결혼할 사람이 누구인데, 이 결혼 반대하는 사람은 지금  나서라는 결혼 공시(banns), 다음 주 미사 시각의 변경, 가난한 이를 위한 헌금 안내, 다가오는 축일의 단식 규정, 마을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죽음과 출산. 어떤 자료를 보면 거기에 사도신조, 주기도, 십계명, 짧은 회개 기도까지 들어가 있다. 한마디로 프로네는 라틴어 미사의 한가운데 박힌 자국어 섬이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통념과 달리, 중세 교회는 회중과 단절된 채 라틴어로만 굴러간 건 아니다. 적어도 한 자리에서는 분명히 회중에게 말을 걸었고, 그 말은 회중의 일상어였으며, 그 안에는 설교와 광고가 함께 들어 있었다. 좀 더 단정해서 말한다면, 우리가 지금 예배 끝에 듣는 광고는 그 중세 프로네의 직계 후손이다. 종교개혁이 라틴어 미사를 폐기하고 자국어 예배를 세웠을 때, 비텐베르크와 스트라스부르와 제네바와 캔터베리는 미사의 다른 많은 요소를 갈아엎으면서도 프로네 자리에 있던 자국어 알림만큼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독일어권 루터교 예배 의식서에서는 이것을 '압퀸디궁엔(Abkündigungen)', 곧 '알림/광고'라고 부른다. 영어권에서는 'announcements' 또는 'notices'다. 예배 순서 어디에 놓이는지 살펴보면, 거의 모든 전례 교회가 같은 자리를 가리킨다. 성찬이 끝나고 파송이 시작되기 직전이다.

독일 루터교회 예배 의식서를 펼쳐 보자. 성찬을 마치고 감사 기도가 끝나면 마지막 부분이 시작된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순서가 박혀 있다. "교회 알림, 중보 기도, 파송 선언, 아론의 축도, 파송 찬송"(『Evangelisches Gesangbuch』, Ausgabe für Bayern und Thüringen, 1994). '교회 알림'이 어디에 있는가. 축도 직전, 파송 직전이다. 내가 사역하는 중앙루터교회에선 축도 후 파송찬송 직전에 광고 시간이 자리한다. 다시 말해 광고는 예배의 마지막에 덧붙인 잡담이 아니라, 회중이 세상으로 나가기 직전에 받는 마지막 메시지다. 이 자리는 우연이 아니다. 라틴어 미사 시절 프로네가 자국어로 회중에게 말을 걸던 그 한 자리가 종교개혁 이후 의식서 안에서는 두 자리로 갈라졌다. 본격적인 자국어 설교는 말씀의 예배 중심부로 옮겨 갔고, 자국어 알림은 파송 직전 자리로 옮겨 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니까 광고는 설교의 형제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나온 쌍둥이가 시간이 지나며 한 사람은 무대 한가운데로, 다른 한 사람은 문가로 옮겨 갔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 교회에서 광고를 두고 벌어지는 흔한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어떤 목회자는 광고가 길어지는 것을 못마땅해하며 "광고는 예배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영적인 시간을 행정 공지로 흐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마음은 안다. 강단에서 사회자가 결혼식 식권 안내와 야유회 신청 마감을 5분 넘게 늘어놓고 나면, 직전 30분 동안 쌓아 올린 말씀의 무게가 솜이불처럼 가라앉는 느낌을 누구나 받아 봤을 것이다. 그러나 광고가 예배의 무게를 흐린다고 해서 광고 자체가 예배 밖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광고가 무거워지는 길과 가벼워지는 길은 따로 있다. 그것은 광고가 무엇이었는지를 잊었기 때문에 가벼워지는 것이지, 광고를 줄인다고 예배가 무거워지는 게 아니다.

광고가 본래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짚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광고는 봉헌의 짝이다. 떡과 잔과 헌물을 모은 공동체가 그 모은 것을 어디로 보낼지를 회중 앞에서 결정하고 알리는 자리, 그 결정에 동의하고 함께 짊어지자는 응답을 받아 내는 자리다. 광고는 또한 자국어의 자리다. 라틴어든 전문 신학용어든 회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미끄러져 가는 예배의 마지막 끝자락에서, 회중의 일상어로 말을 거는 자리다. 광고는 파송의 예고편이다. 잠시 후 회중이 문을 나서면 만나게 될 세상의 구체적인 얼굴을 같은 교우의 부친상으로, 신생아의 출산 소식으로, 아픈 이의 병명으로 미리 보여 주는 자리다. 이 셋이 함께 있을 때 광고는 예배가 된다.

이 점에서 한국 교회의 오랜 관행 한 가지를 짚어 볼 수 있다. 한국 개신교 예배에서 광고는 거의 예외 없이 봉헌 바로 다음에 자리한다. 설교, 봉헌, 광고, 축도. 이 순서는 일견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세기 미국 부흥회 양식과 한국적 응용이 만든 비교적 새 자리다. 전례 교회의 의식서들이 광고를 파송 바로 앞에 두는 것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어디에 두는 것이 옳다는 식의 단죄는 부질없다. 다만 그 자리에 광고가 놓인 이유가 무엇인지는 한 번쯤 물어볼 만하다. 봉헌 뒤에 광고를 두면 광고는 자연히 '돈을 잘 거두기 위한 후속 안내'의 성격을 짙게 띠게 된다. 다음 주 회비를 안내하고, 작정 헌금 마감을 알리고, 부서별 모금 결과를 보고한다. 광고가 봉헌의 부속물처럼 흐른다. 반면 파송 앞에 광고를 두면 광고는 '세상으로 나가는 회중에게 주는 마지막 정보'의 성격을 띤다. 다음 한 주 동안 교회가 기억해야 할 이웃의 얼굴, 다음 한 주 동안 우리가 함께 짊어져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자리가 된다. 같은 광고라도 자리가 달라지면 의미가 달라진다.

우스갯소리일지 모르겠지만, 봉헌의 그림자 안에서 광고는 늘 돈 이야기, 행정 이야기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파송의 그림자 안에서라면 광고는 사뭇 달라진다. 같은 부고 소식이라도 봉헌 다음에 들으면 조의금 안내로 들리고, 파송 직전에 들으면 다음 주일까지 같이 기도할 한 사람의 이름이 된다.

종교개혁자들이 이 순서에 대해 별 말이 없었던 까닭은 파송 전 광고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따로 변호하거나 비판할 거리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루터는 1526년 『독일어 미사와 예배 순서』에서 예배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회중을 위한 짧은 권면과 기도를 두라고 말한다(WA 19, 113-115). 그 권면과 기도 안에는 자연스럽게 그날 공동체가 짊어진 사정이 담겼다. 칼뱅의 『제네바 예식서』(1542)도 같은 자리에 회중을 위한 일반 기도와 알림을 두었다. 부처의 스트라스부르 예식서도 마찬가지다. 광고는 종교개혁자들에게 따로 떼어 옹호하거나 비판할 거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임에 따라붙는 자명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다만 종교개혁자들이 한 가지 분명히 한 것이 있다. 광고는 회중의 언어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라틴어 미사가 회중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었던 그 폐단을 광고만큼은 절대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광고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리다. 거기에는 라틴어도, 전문 신학 용어도, 영어도, 외부 손님은 알아듣지 못할 교회 내부 농담도 들어갈 자리가 없다. 광고가 회중의 일상어를 잃는 순간, 광고는 더 이상 광고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라틴어 미사일 뿐이다.

그래서 광고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첫째도 짧게, 둘째도 짧게, 셋째도 짧게가 아니다. 길이는 부차적이다. 광고를 잘하기 위해 정말 물어야 할 질문은 따로 있다. 이 광고가 회중을 한 주간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줄 정보인가. 이 광고가 봉헌에서 모은 헌물의 사용처를 명료하게 보고해 주는가. 이 광고가 회중이 알아듣는 일상어로 전해지고 있는가. 이 셋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면 그 광고는 길어도 예배다. 셋 중 하나라도 그렇지 못하다면 그 광고는 30초여도 예배가 아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광고가 자주 가벼워지는 까닭은 이 세 질문을 사실상 묻지 않기 때문이다. 광고가 정보 전달이 아니라 사회자의 임기응변이 되고, 봉헌과 기도의 제목이 아니라 헌금 독촉이 되며, 회중의 일상어가 아니라 교회 내부의 은어가 될 때, 광고는 예배의 한 자리에서 슬그머니 빠져나간다. 이때 회중이 광고 시간에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은 회중의 영성 문제가 아니라 광고를 그렇게 만들어 놓은 강단의 책임이다.

다음 주일, 광고 시간에 유심히 들어보자. 거기에 누구의 이름이 호명되는지, 그 호명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청하고 있는지, 우리가 모은 헌물이 어떤 얼굴들에게로 흘러가는지를 한 번 따라가 본다면, 광고가 본래 예배였다는 사실이 새삼 다가올 것이다. 2,000년 전 교인들이 함께 모은 헌물을 옥에 갇힌 자와 객지의 나그네에게 나누어 주었듯, 우리도 예배가 끝난 뒤 누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할지 한 번쯤 떠올려 봐도 좋겠다. 광고는 예배 끝의 사족이 아니라 예배의 마지막 심호흡이다. 그 호흡으로 회중은 세상의 문을 연다.

글. 최주훈 목사 (중앙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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