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그 난해함에 대하여
한국문화를 공부하면서 여러 종교에 대해서 나름 책을 읽었지만 유독 불교만이 어렵다고 느껴진다. 그런 난해함이 내 능력이 모자람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불교 특성 때문인지에 대해 넋두리를 하고 싶어 글을 써본다.
나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기독교와는 매우 친숙했다. 머리가 커지면서 호기심에 가톨릭이나 기타 기독교 여러 종파에 대해 공부했지만 기독교 계통의 종교관은 말 그대로 ‘대동소이大同小異’ 한 것 같다.
기독교에도 ‘위경僞經’이니 ‘외경外經’이니 하는 것도 있지만 이 내용 역시 예수를 인간으로 보는 일부 종파를 제외하고는 신에 대한 기본 생각은 같다. 특히 로마시대 창조주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위일체설이 채택되면서 그것을 중심으로 교리가 큰 변화없이 발전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한국문화를 공부하면서 불교, 유교, 도교, 대종교, 무속신앙 등 여러 종교에 대한 공부를 했지만 유교나 도교 등에 대해서는 교리나 특징이 어렵지 않게 머리에 들어왔다.
특히 유교는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지 의구심이 간다. 나는 유교가 생활윤리 즉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예禮’로 표출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오한 종교적 사유를 느낄 수 없었다. 오죽하면 최치원이 낭혜화상비문에서 불교를 ‘심업心業’이라고 했고 유교를 ‘구업口業’이라고 했을까.
유교는 당나라 때 크게 변신을 한다. 소위 주자학이라는 것으로서 불교에 대항하기 위해 ‘심학心學’... 즉 인간의 본성에 대해 더 파고들었다. 주자학보다 조금 더 불교에 더 가까워진 것이 육상산의 ‘양명학’이다. 어쨌든 유교도 일정한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불교는 아직도 모르겠다. 우선 너무 방대하다. 경전의 양도 많고 그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고 많아 종잡을 수 없을 정도다. 오죽하면 팔만대장경일까. 그리고 원시불교, 부파불교, 소승불교, 대승불교, 티벳불교, 밀교, 화엄종, 법상종, 삼론종, 선종 등등 종파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숨이 찰 정도이다.
용어도 뜻으로 번역한 의역과 발음대로 표현하는 음역이 뒤섞이고, 같은 내용을 경전마다 달리 표현하기 때문에 더욱 헷갈리게 한다. 그리고 불교 경전이 최근에는 한글로 번역되어 있지만 아직 교리에 대한 것은 대부분 한자이다. 그렇다 보니 읽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이다. 하물며 교리에 대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불교역사와 각 종파 별로 무슨 특징을 가졌는지 공부하였지만 점점 그 깊이에 짓눌려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불교는 이렇게 복잡하고 난해해졌을까.... 불교를 어떻게 정의해야할까... 이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불교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석가모니 사후 불교는 새롭게 생긴 계율의 해석을 놓고 대중부와 상좌부로 갈린다. 이렇게 갈린 두 파는 석가모니가 남긴 말에 대한 해석에 골몰하게 된다. 이 시대를 부파불교시대 또는 아비달마 불교시대라고 한다.
아비달마는 석가가 남겨놓은 말씀에 대한 연구와 해석을 말하는 것으로서, 협의의 아비달마는 부파불교의 여러 논論 즉 논서論書들을 뜻한다고 한다. 이런 논들이 만들어지고 후일에 정비되어 논장論藏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노력이 불교를 심화시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틀에 박힌 해석 방법이 교법 자체의 생생한 생명력을 잃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는 것이다.(위키백과사전)
개인적으로 불교가 원시불교에서 아비달마 불교로 넘어가면서 학구적으로 변한 것이 불교를 어렵게 한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것에서 더나가 대승불교 탄생은 불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였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근본적 차이는 구원관이다. 자신의 해탈보다는 중생의 구원을 우선하는 것이 대승불교이다. 이런 관점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부처가 되기를 거부하고 중생을 위해 희생한다는 보살사상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부파불교는 남방 쪽으로 발전하여 스리랑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에서 자기 해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승불교로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이런 과정에서 불신관도 변화해서 인간으로서 깨달은 자인 붓다를 비롯하여 여러 부처가 나오게 된 것이다. 법신, 보신, 응신(화신)불과 같은 삼신불 개념 그리고 시대의 구분에 따라 과거불, 현재불, 미래불의 개념이 나오고, 나아가 전 우주에 부처가 가득하다는 개념으로 발전한다.
이때 나온 경전들이 <반야경般若經>,<유마경維摩經>,<법화경法華經>,<아미타경阿彌陀經>,<십지경十地經> 등이다. 이 가운데 <반야경>은 대승 경전을 대표하는 경전으로, 이 경전에 실린 공사상空思想은 대승 불교의 기본적 교리로서 불교 사상의 근본 사조를 이루었다.
공사상의 기초를 닦은 대표적 인물은 남인도 출신의 용수(龍樹/Nagarjuna/150-250년경)로서 <중론송中論頌>에서 부파 불교가 지닌 오류를 논박하였다. 용수는 고타마 붓다의 근본사상인 연기설緣起說을 공의 입장에서 해명하여 공사상의 철학적으로 기초를 만들었다. 이런 공사상은 제자인 제바(提婆/Aryadeva/3세기)와 제바의 제자인 라후라발타라 등에게 계승되어 중관파가 성립되었다.
용수 이후에 <승만경勝鬘經>,<해심밀경解深密經>,<능가(楞伽經> 등이 나타났다 특히 <해심밀경>의 유식설唯識說은 270년과 480년 사이에 미륵(彌勒/Maitreya/ 270-350), 무착(無着/Asanga/300-370),세친(世親/Vasubandhu/4세기 경) 등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유가행파가 확립되었다.(위키백과사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은 270여자로 구성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 나오는 공사상의 대표적인 표현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없다. 즉 자기 자신도 없다는 것이 공사상이다. 공에 대한 해석은 단순히 비었다는 뜻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고 공허하다는 비관적 관점도 아니라고 한다.
다음으로 유식사상은 자기를 포함하는 모든 존재는 마음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알게 한 것이므로 오직 마음만 있고 외적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런 마음까지도 부정하는 것이다.(인터넷 다음 백과사전) 유식사상은 사람 감각기관의 인식작용이 어떻게 인간 정신까지 지배하는지에 대한 연구이다. 따라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우 깊은 논리와 이해가 필요하다.
어쨌든 7세기는 이 두 가지 불교사상이 서로 활발하게 논의를 하면서 더 깊게 발전해갔다고 한다.
밀교는 7세기 중엽에서 성립하였는데 밀교는 원시불교 당시부터 전해오던 것으로 진언眞言 이나 다라니陀羅尼를 외우면서 마음을 통일하고 부처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7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러한 사상이 종합되어 <대일경大日經>,<금강정경金剛頂經>과 같은 경전이 만들어지면서 밀교가 되었다.(위키 백과사전) 이런 밀교가 티베트로 들어가 발전하면서 티베트불교가 되었고 나가서 라마교로 발전하게 된다.
불교는 중국에 들어와 새롭게 변신한다. 선종의 탄생이다. 나는 선종禪宗이 철저하게 중국화된 불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선종은 선종 이전의 불교와는 완전히 다른 종교이다. 아마도 이런 정도 차이를 보였다면 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이단이라고 몰아붙였을 것이다.
어쨌든 선종으로 인해 불교가 이해의 종교에서 경험의 종교로 바뀐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선종이 중국에서 탄생하게 된 것은 인도인들만큼 철학적 사고에 익숙하지 않은 중국인들이 복잡한 불교를 경전을 통해 머리로 이해하기 보다는 마음으로 이해하려 한 것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선종 또한 이해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알듯 모를 듯한 말을 뇌까리는 것을 ‘선문답禪問答’이라고 할까. 스승과 제자만의 경험의 공유... 이것 공유를 다른 사람은 결코 느낄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선종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에서는 자신의 스승을 높이 받들고, 가장 최고의 선을 조사선祖師禪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불교는 종교이기도 하지만 철학, 심리학, 윤리학, 논리학 등등 인간 모든 것을 연구한 학문으로 봐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가장 기본이 되는 이념인 사성제四聖諦 즉 ‘고집멸도苦集滅道’의 근원을 찾아가다 보니 인간을 근본에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종교적 의미가 덧씌워지고 나니 더욱 복잡하고 난해해진 것이 아닐까.
이것이 기독교와의 근본적 차이가 아닌가 한다. 기독교가 경험의 종교라고 한다면 불교는 이해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가 신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라면 불교는 인간을 이해해가는 종교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부파불교에서 시작된 다양성은 불교역사 내내 더 확대되었다. 그렇다보니 불교 교리가 매우 복잡해져서 스님들도 헷갈렸던 것 같다.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부터 교상판석敎相判釋이 있었다. 즉 여러 종파의 교리를 비교하여 어떤 종파가 우월한지 판가름했던 것이다.
스님들조차 이러했으니 우리 같은 범부들이야 말해무엇하겠는가.
불교 특징 중 두드러지는 점이 이 교상판석에서 나타난다. 여러 종파를 비교분석했지만 불교에서는 우열은 있으되 어떤 종파가 이단이라고 한 적은 없다. 모든 종파가 불교의 범주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경전이 있음에도 그것을 기독교처럼 정경과 위경이라고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석가모니가 설법한 말에 가장 가깝다는 <아함경阿含經>, <法句經>을 제외하고는 모두 위경이라고 봐도 된다. 그러나 불교에서 <아함경阿含經> 외의 다른 경전을 위경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이 가능한 것은 불교에서는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근기根機라고 하는데 이런 능력에 따라 불교에서는 각각 다른 해탈로 가는 길을 보여준다. 이것을 불교용어로 방편方便이라고 하는데, 어떤 불교교리도 사람의 근기에 따라 방편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불교의 큰 장점이 아닌가 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 불교 내에서 불교 다른 종파와 논쟁은 있어도 이단으로 몰아세우는 일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포용성은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불교에서는 인간고통의 시작이 무명無明상태, 즉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에서 비롯되는 미혹의 상태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도 불쌍한 중생이라는 자비심으로 무지를 깨우치는 것에 힘을 쏟을 뿐, 적으로 삼지는 않는 것이다.
내 기억으로 불교를 믿는 지역에서는 신을 믿는 기독교나 이슬람교처럼 종교로 인한 분쟁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포용성 때문에 불교가 너무 광범위해져 어렵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불교가 어려운 근본적인 문제는 내 능력의 한계 때문이다. 불교는 수많은 천재들에 의해 지금 모습으로 발전해왔다. 앞서 소개한 용수, 무착, 미륵, 세친 등은 당대에 천재로 불렸던 분들이다. 그런 분들의 깊은 생각을 나 같은 범부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선종의 맥을 이어온 선사들도 그 못지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분들이다.
불교관련 서적을 읽을 때마다 그런 분들의 위대성에 늘 감탄하다. 한마디로 신이 나에게는 위대한 선각자들과 같은 머리도 하다못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집념조차도 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늘 그 주변만 맴도는 것이 아닐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