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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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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 Article

음악 감독의 소명

singingman 2022. 10. 21.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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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감독의 소명

노래하는 레위 사람... 세마포를 입고 단 동편에 서서...나팔부는 제사장 일백이십인이 함께 서 있다가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역대하 5:12-14

친애하는 음악 목회자님.

당신은 앞의 편지에서 내가 예배에서 반드시 음악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음악을예배시간에 예배의 한 부분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을 상기할 것이다. 이 말도 사실이긴 하지만 음악이 회개나 위탁 그리고 순종과 같은 것들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그 자녀들의 사랑과 존경심,감사 그리고 찬양을 표현하는 데 사용할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라는 것을 놓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들었을 때가 예배 시간이라면 그것은 음악을 위한 시간이다. 하나님께 노래하고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로새서 3:16)라고 훈계한 것처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노래할 시간이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 노래하는 사람들 가운데 풍성하게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지게 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P.134) “풍성하게 거한다라는 말은 실제로는 집을 풍성하게 채우다라는 말이다. 이 성경 말씀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함이 꽉 찬다는 말이며 이로부터 진정한 예배가 나온다는 것을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바울은 거의 같은 교훈을 에베소 교회에도 주고 있다. 이번에는 노래하는 것과 노래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에베소서 5:18-20)

성령 충만은 바울의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다.“충만이라는 말은 실제적으로 계속해서 꽉 차 있다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교회 생활에서 음악의 역할을 높은 수준으로 설정하신 것은 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단순히 음악을 위한 음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요구와 만나는 것이라면 우리가 연주하고 노래하는 음악은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의 충만함과 하나님 말씀의 풍성함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는 음악목회의 모든 것에 기본이다. 만약 누가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풍성함에 대한 아무런 바람이 없다면 그가 아무리 뛰어난 가수이거나 음악가라 할지라도 혹은 주일 예배시 회중석에 앉아 있는 교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다.

음악 지도자의 높은 수준은 구약에서 확립된 것이다. 역대상 15:2절에서 레위인들(음악가들)은 언약궤를 옮기도록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이다.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를 택하사 하나님의 궤를 메고 영원히 저를 섬기게 하셨음이니라

레위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역대상 15-16장에서 아삽과 그의 형제들은 언약궤 앞에서 계속 임무를 수행하도록 지명 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도록 지명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역대하 5:12-14과 느헤미야 12:27-29에는 노래하는 사람들의 임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음악가들은 선택되고 지명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들의 임무를 위하여 따로 구분되었다. 민수기 8:5-14은 제사를 위한 지도자들과 담당자들을 준비한 전 의식을 묘사하고 있다. 6절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정결케 하라는 모세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는 듣게 된다.

역대하 5:11-14에서는 언약궤가 놓여 있는 성소에서 제사장들이 물러 나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P.135)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이후로는 대제사장만 일년에 단 한 번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그들이 물러날 때 모든 음악가들이 흰 세마포를 입고단 동편에 섰다.그들 중 일부는 제금을 들었고 어떤 사람들은 현악기를 들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하프를 가지고 있었다. 나팔 부는 자들과 노래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다 같이 하나로 모여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할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했다.” (14) 얼마나 대단한 광경과 음악이었을까! 그 정 중앙에는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음악가들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흥분된 일인가! 따로 구분되어서 존경스러운 임무를 부여받았고 하나님께 노래하고 연주했다. 그리고 그들은 순결함의 상징인 세마포를 입었다.

그의 음악가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신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넘어왔다. 그것은 음악적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단순한 직업이 아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음악가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요구 사항은 그들이 성령 충만한 것이다. 그들은 갈라디아서 5장에 나타난 것처럼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 보일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성질이나 자아나 조급함은 회개해야 할 죄악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기분파적인 음악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동료 음악가들이나 당신의 삶에 주어진 하나님의 소명의 중요성을 낮춰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각 개개인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 생활에서도 중요한 영향 가운데 하나다. 나는 항상 얼마나 많은 시편들이 음악 감독을 위해 특별히 쓰여졌느냐에 매력을 느껴왔다. 이 시편들은 목소리와 악기들을 위해 편곡되고 준비하고 연습시키고 회중들을 가르치도록 음악감독에게 주어졌다. 우리가 사용하도록 받은 수단은 그 자체로서 사람의 손에 주어진 가장 강력한 도구다.

음악이 성령의 영향하에서 사용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길을 준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의 마음 깊숙히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게 한다. 그것은 사람의 굳은 마음과 그에게 대항하는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그것은 고민하는 영혼을 위로하고 억눌린 영혼을 평온하게 만들며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준다. 그것은 다른 방법으로는 도달하지 못했을 존경과 축하의 높은 경지로 사람을 인도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장 영광스러운 선물 가운데 하나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백성들의 교화를 위해 사용하도록 음악 감독인 당신의 손에 주신 것이다.

(p.136) 음악은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시는 고속도로의 역할도 하지만 최대의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이런 힘이 적에 의해서 사용될 수도 있으며 그는 그것이 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악을 위해서도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육신의 통제하에 있는 음악은 교회 생활에 심각한 손해를 입힐 수 있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훼손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음악감독으로서 당신의 책임은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음악을 선택하고 성가대와 앙상블을 연습시키고 예배를 인도하며 그 외의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이 기본적인 책임 외에도 간혹 간과되는 가장 중요한 소명이 있다. 나는 그것이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의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점에 주의하지 않고는 아무리 당신의 프로그램이 탁월하고 성공적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실패로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진정한 목회가 무엇이지, 진정한 예배는 무엇인지, 그리고 예배를 이끌어 가는 사람으로서의 그들의 소명과 책임이 무엇인지를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당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지도해야 할 당신의 책임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성악가나 음악가들은 좋은 일보다 더 많은 해를 끼칠 수도 있다. 자신들을 단순히 종교음악의 연주자로만 생각하는 교회 음악가들은 자기를 단순한 대중 연설가로 생각하는 목사보다도 더 좋지 않다. 그는 세련된 화술을 구사할 지는 몰라도 영적인 것이 결여되어 잇다. 연주가들은 그들의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줄 수도 있고, 청중의 박수 갈채를 받을 수도 있고 그들이 하는 것을 즐길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의 근본적인 책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이룩할 수 없으며 그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는 시선이 멀어지게 된다.

이런 음악의 특성 때문에 음악 목회자의 소명에는 하나님 중심보다 사람중심으로 될 요소가 원래부터 있다. 음악의 특성과 기질 때문에 이 분야의 재능을 받은 사람들에게 따라 다니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쉽게 자아와 경쟁심과 질투심을 자라게 하는 모태가 되기도 하며 교회 안에서 중요한 갈등의 산실이 되기도 한다. 나는 교회의 음악 목회가 전투과로 언급되는 것을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루시퍼가 천국에서 추방되었을 때 성가대석에 떨어졌다고도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우리는 웃겠지만 얼마나 종종 이 말이 사실인지 가슴 아파해야 한다.

어떤 곳에서는 음악분야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교회음악 목회가 너무 중요해져서 다른 사역들은 그 주위에서 서성거려야 하는 교회도 보았다.(p.137) 부끄럽게도 많은 교회에서는 성가대 연습이 기도회 모임 시간 동안 열린다. 이것은 노래나 연주가 기도보다 더 중요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흥회 때 실제로 찾아오셔서 음악만을 제외한 교회의 모든 분야에 은혜를 줄 수 있는 교회도 있다.

매체의 특성 때문에 영적인 면보다 육적인 면에 더 영향을 끼치는 요소도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성악가들이나 음악가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의 재능을 사용하기 보다 인간의 재능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되는 간혹 있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음악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떤 헌신도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무리 듣기나 하기는 좋아도 영적으로나 지속적으로 유익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의 감정을 고조시킬 수는 있을 지는 모르고 설교자와 회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게 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우리의 소명에 실패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한 것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보다 우리에게로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면 우리의 임무에 실패한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람으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복음의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우신 기준이 우리 모두가 얻으려고 애쓰는 기준이 되기 바란다.

p.138

말과 음악의 힘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는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혹은 사람들의 사고 방식에 적합한가? 심지어는 결과를 좋아할까 싫어할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볼 때 하나님의 기준에 적합한가가 되어야 한다.

 

친애하는 음악 감독님께

당신에게 보낸 내 마지막 편지에서 음악의 고유한 힘에 관해서 언급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음악은 도덕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 음악 자체는 내적으로 선이나 악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음악은 중립이지만 사용하는 사람들이 선한지 악한지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 이 말도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면에서는 음악은 그 작은 희고 검은 음표들이 결합되어 작곡가가 의도하는 세계관이나 메시지를 담은 소리를 내게 되는 순간 더 이상 중립적이지 않다. 음악 그 자체가 말로는 나타낼 수 없는 진술이 된다.

음악가들이나 작곡가 자신들의 진술에 의하면 최근 40년간의 많은 세속 음악들은 국가나 교회, 가정의 권위에 반항해서 태어났다. 그것은 간혹 지금까지도 전통을 대표하는 어떤 것이라도 뒤집어엎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것은 서구 사회가 기초하고 있는 유대-기독교적인 원칙들을 조롱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균형을 깨트리려는 매우 성공적인 노력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 드럼 장단에 맞춰 행진을 해 왔다. 이 음악은 오락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 영적인 힘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종교가 되었다. 실제로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전통적인 종교와 마찬가지다.

(p.139) 스코틀랜드의 시인 칼라일(Carlyle)은 언젠가 내게 한 나라의 음악을 만들게 하라 그러면 누가 그 나라의 법을 만들든지 개의치 않겠다. 내가 그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라고 했다. 상당 부분 이것은 우리 나라에도 사실이다. 젊은 세대에 의해서 사회적 신분에 대한 온순한 반동으로 시작된 것이 마약으로 이끌리고 그에 의해서 자라는 삶의 방식이 되었다. 수년간 그 둘은 나란히 나아갔다. 쓰여지고 녹음된 음악은 더 이상 이런 반역과 생활방식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개발하고 마음에 정착시키는데 불확실한 용어들로 표현하지 않았다. 당신은 그 음악이 말하고 있는 것을 알기 위해서 더 이상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 메시지는 크고 분명했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신이 되어서 그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절하고 예배하게 되었다. 음악은 신이 되었고 이 신에 대한 어떤 도전도 성공하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것은 협상할 수 없는 영역이고 죽기까지방어될 것이다. 그것은 매우 개인적이다. 어떤 주제라도 토론할 수 있지만 내 음악만은 안 된다.

더 나아가기 전에 나는 이 마지막 10년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 쓰여졌다는 말을 하자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가장 아름다운 음악과 서정적인 가곡들의 일부가 이 기간동안 작곡되었다. 나는 음악이 1940년대나 그 이전의 소리가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당김음을 거부하지도 않고 기타나 드럼은 교회 생활에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판단하고 음악에 관한 일방적인 태도는 삼가야한다.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살제로 반역적인 세계가 보증하는 음악이라면 이것은 그 자체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모든 세대는 그 세대의 음악을 가지고 있었다. 패트리샤와 내가 사역을 시작하던 때를 회상해보면(그 때 우리는 젊었다) 우리가 사용하던 음악의 상당 부분은 날카로움이 있었다. 또 어떤 음악들은 동료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던 것보다 더 격렬한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실제로 전통주의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한 음악은 균형이 깨진 것은 아니었다. 그 음악은 가사가 말하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메시지와 음악 사이에 정직한 결혼이 있었다. 선율과 화음이 결코 리듬에 정복당하지는 않았다. 리듬은 음악의 전진을 결국 도왔고 결코 주도세력이 되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 주도세력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가사였다. 그러나 그것은 같은 말을 하는 음악과 결합되어서 그것은 강력한 매체가 되었다. 강한 리듬이 없이 노래가 실제로 그것을 만들었다. (p.140) 한편 오늘날은 연주되고 듣는 음악 가운데 얼마나 많은 노래들이 휘몰아치고 큰 리듬에 종속되어 있나하고 생각해 본다. 최근까지는 선율과 화음과 리듬 사이에 건전한 균형이 항상 있어왔다고 생각된다.

친애하는 음악감독님, 최근에 내가 당신에게 보낸 편지 첫머리에서 말한 것을 다시 한번 말하면 당신은 당신의 손에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가장 강력한 도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수천년간 하나님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세속에서도 인식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음악은 영혼의 열정을 직접적으로 나타낸다. 사람이 저속한 열정을 나타낸 음악을 들으면 그 사람도 저속한 열정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오래동안 저속한 열정을 일으키는 그런 음악을 습관적으로 듣게되면 그의 인격도 그런 형태로 만들어진다. 간단히 말해서 나쁜 종류의 음악을 들으면 그도 나쁜 종류의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생활 가운데서 음악의 놀라운 힘을 처음으로 생각하는 세대는 아니다. 아마도 전 역사 가운데 개인의 인격에 미치는 음악의 영향에 대해서 가장 많은 관심이 주어졋을 것이다. 음악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과 접촉하고 있다. 내 아내 패트리샤는 이 분야를 연구해 왔다. 이 편지에서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연구에서 발견한 몇가지만 말해보자. 그 가운데 하나는 음악은 인간에게 중요한 생리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애틀랜타에 있는 죠지아 침례교 의료센타의 의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미숙아나 몸무게가 적게나가는 아기가 음악을 들으면 몸무게도 빨리 늘고 산소도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생후 11일 된 아기들에게 한 시간과 한 시간 반 동안 매일 주의 깊게 보살피면서 음악을 들려주고 음악을 듣지 않은 아이들과 16일간 비교해 보았다.

발티모어에 있는 성 아뉴스 병원에서 클래식 음악을 엄선해서 환자들에게 들려 주었더니 통증이나 불안 때문에 약을 필요로 하던 사람들의 요구가 크게 줄었다. 한 의사는 30분 가의 음악이 발리움(Valium) 10mg과 같은 효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음악은 또한 뇌와 어린 아이들의 학습능력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1996219일자 뉴스 위크지에 교육에서 음악의 긍정적인 힘을 나타내는 왜 학교는 생물학을 포기하는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 라이넬 핸코크(Lynnell Hancock)플라톤이 음악은 교육을 위한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필수적인 수단이라고 말했다. 이제 과학자들은 그들이 믿기로는 왜 음악이 뇌가 더 높은 사고형태를 가지도록 훈련시키는지 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구진과 어빈(Irvine)은 두 그룹의 미취학 아동들을 통해서 음악의 힘을 연구했다.(p.141) 한 그룹은 매일 피아노 레슨을 받고 또 매일 합창을 했고 다른 그룹은 하지 않았다. 8개월 후에 음악적 나이로는 3살이 된 이들은 수수께끼를 노련하게 풀었으며 세상을 정확하게 보는 능력인 공간지능이 또래들보다 80%나 높았다. ‘조기 음악교육은 어린 아이의 논리적인 능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어빈 고든 쇼(Irvine physicist Gordon Shaw)는 말한다. ‘그러나 음악 교육은 종종 학교 예산이 줄어들 때 제일 먼저 깍이는 장식품이 되고 있다.’ 음악 감독이며 어린이 성가대의 감독이기도 한 당신은 아이들을 가르칠 때 그들이 배우는 노래를 통해서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으며 아이들의 배우는 능력과 합리적인 사고에 공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음악을 주신 한 이유가 아닐까?

우리 생활에서 음악이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영역은 정서적인 영역이다. 정서의 영역은 그것이 기호나 양식과 만나게 될 때 아마 가장 영향력이 커진다. 모든 사람은 특정 양식에 대한 기호를 가지고 있다. 만약 누가 당신에게 왜 그런 종류의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많은 경우의 대답은 느낌이 좋다고 말할 것이다. 음악은 우리 정서에 거대한 힘을 미친다. 나는 이 점을 내가 보낼 편지의 아드레날린 고조냐 성령이냐?(Adernaline Highs versus the Holy Spirit)"에서 언급하겠다.

많은 과학적인 연구들이 음악이 사람들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언급해 왔다. 그러나 이 점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성경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음악이 행동에 미치는 힘과 독특함을 알 수 있다. 특히 영적인 분야에서는 더 그렇다. 사무엘상 16:14-18, 23절에서 우리는 악령에게 고통받는 사울의 이야기를 읽는다. 그의 신하가 수금 잘 연주하는 사람을 추천하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음악이 그에게 미칠 긍정적인 효과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아버지의 양을 치고 있던 다윗이 부름을 받앗다.“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23)

1613절에 의하면 다윗은 이미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었다. 그의 노련한 연주가 상황을 호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가 선택하고 연주한 음악에는 악령을 물리치는 힘이 있었다. 단순히 재능있고 노련한 음악가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 자체로도 강력한 도구인 음악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종의 손에서 사용될 때 더 큰 힘을 가지게 된다.

(p.142)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음악이 가질 수 있는 강력한 영적인 힘을 볼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음악은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 사용되었다. 역대상 25:1절은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령한 노래는 어떤 번역에는 예언하다로 되어있다-역자 주)

음악은 그 자체가 언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다. 그것은 메시지를 전달할 가사를 꼭 가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음악이나 노래의 편곡이 원래의 텍스트와 동일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지 분별해야 할 때 특별히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한다 몇 년 전에 있었던 경험을 예를 들어 이야기하고 싶다.

벨기에의 브뤼셀에 있는 하드 락(hard rock)" 몇몇 라디오 방송국에서 매주 2시간씩 진행하는크리스챤락 음악을 진행해 달라는 부탁을 해 왔다. 이 방송국들은 기독교 세계에도 그들의 음향(Their sound)"과 잘 어울리는 음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레코드 가게에서는 구할 수 없는 새로운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잠재된 청중이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이 프로그램을 이 나토(NATO)의 점점 늘어가는 영어권 사람들을 위해서 영어로 방송하기를 원했다. 나는 그 방송국의 음향(Sound)"에 충실하기만 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누구와 인터뷰하든지 어떤 간증을 하든지 어떤 자료를 제공하든지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나를 이들 방송국에 초청하는데 출발점이 된 브뤼셀 국제침례교회에서 이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동안 전화 상담자 까지 두어가면서 기도하도록 후원을 했다.

이 프로그램이 몇 달 진행된 후 그 방송국들은 음악이 너무 하드(Hard)”하지 않다고 내게 알려왔다. 그들은 내가 기독교인 체육인들과 인터뷰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하나님에 관해서 이야기하거나 자유롭게 자료를 제공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문제는 음향에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음향의 크리스챤 락이 매우 많이 있었지만 내가 그들이 원하는 음향에까지 나아가지 않았다는 그들의 말은 사실이다. 수백장의 솔로와 그릅의 앨범들을 조사하면서 나와 아내는 더 이상 넘어서는 안 될 어떤 지점이 있다는 확신에 도달했다. 나는 이미 나의 개인적인 취향을 상당히 넘어서 있었다. 상담자와 기도자들을 만나본 후 나는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당신들 가운데 내가 이들 세속적인 방송국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비난하기 전에 나와 본질적으로 같은 일을 불어로 하던 두명의 벨기에 크리스챤에게서 배운 점을 말하게 하라. (P.143) 더 이상 이 일을 계속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후 이 두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들이 2년 이상 이 일을 계속하면서 얻은 반응이 어떤 것이었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그들의 복음 제시가 매우 명확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도 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전화 상담자를 두었고 성경과 자료들을 제공했다. 그러나 각 프로그램이 하드,메탈 크리스챤락으로 꽉 차면서 그들이 내게 말한 것은 완전히 놀라운 것이었다. 주께서는 전화로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말씀해 오셨다는 것을 알지만 2년 간 단 한 사람만 접촉을 해 오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나는 많은 생각을 해 본 후 음악의 강력한 메시지가 가사의 메시지를 제압해버렸다고 결론내렸다.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있을까? 그들의 프로그램은 청취자가 매우 많은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청취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음악을 사랑하는 동안 복음에는 접촉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적 메시지를 가진 음악이었다.

음악은 언어다. 교회에서 사용할 음악을 선택할 때 우리는 가사의 메시지를 없애버리는 음악을 선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은사 가운데 하나가 분별의 은사다.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빌립보서 1:9-10). 확대 해석한 번역(The Amplified Version)에는 너희가 무엇이 활기찬 것인지 깨닫도록 배우고...가장 높고 가장 좋은 것을 깨닫고 그리고 도덕적인 차이점을 분별하며라고 번역하고 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가 좋아하지 않는가에 따라서 음악을 선택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삶의 다른 영역에서는 성경에서 배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좋아하는 것도 하지 않는 많은 것들이 있다. 우리는 타락한 인간성과 우리에게 미치는 죄의 영향력의 실체를 고려하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선하고 오래된 인간 본성이 오래 됐을 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선한 것은 아니며 그래서 우리는 좋아한다고 해서 아무 것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성경에서 명백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까? 빌립보서 19절에서는 하나님과 서로간에 대한 사랑에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점점 더 풍성하게 된다고 추정된다. 빌립보서의 다음 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P.144)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함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결정과 선택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다. 특히 우리가 그를 가장 영화롭게 하는 음악-그가 누구인지를 가장 잘 연주하는 음악-을 선택하려고 할 때는 더욱 그렇다.

 

(P.145) 편지 28

아드레날린 고조냐 성령이냐?(Adrenalin Highs or The Holy Spirit?)

올바른 생각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를 하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노래할 때 그들의 마음을 닫아 버린다. 사도 바울은 영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 성령 안에 있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아무런 생각도 없는 예배나 축하는 공허한 드림을 낳을 뿐이다.

 

친애하는 음악 감독에게

수년 전에 나는 크리스챤 정신과 의사에게서 인간의 행동에 미치는 아드레날린의 영향을 자세히 연구한 책을 한 권 받은 적이 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 책은 아드레날린 중독이 마약 중독과 같은 증상을 낳는다고 했다. 나도 개인적으로 그 연구와 관련이 있는데 나도 한 때 아드레날린 중독이었다.

내 인생에서 그 때 나는 육상선수였다. 나의 연습은 건강상의 이유로 죠깅의 상태를 넘어섰다. 나는 최소한 일주일에 40마일을 달렸다. 나의 달리는 습관은 내게는 너무나 중요하고 필요하게 되었고 거의 모든 것이 달리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나는 달리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하려고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않고는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우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의 모든 증상을 다 가지고 있었다. 나는 목회에도 열심이었지만 내게 있어서 죠깅은 하나님과의 Q.T(Quiet Time:성경을 읽고 조용히 묵상하며 기도하는 시간-역자 주)보다 더 중요했다. 밤에 잠자리에 들었을 때 다음 날 아침 달리기 위해 일어나는 것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연달아 이틀 아침을 달리지 못하면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당신은 내가 아드레날린 고조라고 불릴 수 있는 달리기로 인한 정신적 고조를 중단하는데서 오는 허탈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146) 그 연구는 음악이 인체에 ,특히 아드레날린 상태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분야다. 많은 교회음악 지도자들은 음악이 사람들에게 특히 그들의 정서에 미칠 수 있는 강력한 영향력에 대해서 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바로 앞의 편지에서 음악은 그 자체로서 인간 영혼에 강력하게 말하는 언어라는 확신을 말한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것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심지어는 1600년대에 작곡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는 목표는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음악은 인간 영혼의 표현이기 때문에 영혼에 영향을 미친다. 똑같은 방법으로 그것은 정서에도 강력하게 말한다. 왜냐하면 영혼은 정서의 자리(Seat of Emotions)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서는 다양한 심리적 징후를 낳는 음악에 의해 움직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몇 개월 전에 선교 지도자그룹을 위한 국제회의에서 이런 상황을 보았다. 어느날 저녁 근처 도시에서 온 성가대가 예배의 한 부분을 인도했다. 어느 한 시점에서 그 지도자가 단순하고, 재미있어서 외우기 쉽고 리드미칼한 합창곡인 주여, 우리는 당신을 보기 원합니다.”라는 노래를 가르쳤다. 이 노래를 몇 차례 부른 후에 나는 횟수를 세기 시작했다. 이 똑같은 악절을 성경말씀으로 강조도 해 가면서 거듭 거듭 불렀다. 무려 18번이나 전조도 해 가면서 불렀다. 노래가 끝났을 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어서서 고조된 정서를 가라앉히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이 그룹은 보수적인 그룹으로 생각되었다. 쉴 틈없는 비트로 반주를 하면서 가사나 선율을 계속해서 반복하면 보통 진지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아드레날린 고조로 인도했다.

우리 교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이런 유형의 끊임없는 반복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그것은 중독증상의 아드레날린 고조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제 정신이 아니게 하며 최면술등에 쉽게 걸리게 만든다. 그의 저서 가짜 부흥에서 저자와 강사 하네그라프(Hank Hanegraaff)는 이런 유형의 반복에 내재해 있는 위험을 나타내 보여주는 강력한 예를 들어가면서 토론을 했다. 사람들을 조종하기 원하거나 잘못되게 인도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 위력을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것 같다.

당신은 그 노래의 가사와 음악이 노래하는 사람들을 거의 최면술에 걸리게 할 정도로 주여, 우리는 당신을 보기 원합니다와 같은 노래를 얼마나 자주 듣거나 불렀나?

만약 음악이 충분히 리듬적이라면 전 회중을 정서적인 찬양고조에 다다르게 할 수 있다. (P.147)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를 보기 원하는 것이 주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더 나타내 보이고 싶어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주께서 거듭 거듭 말씀하고 계시는가?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교훈을 주셨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7-8). 이런 유형의 반복에 우리가 참여할 때 염불하는 것 같은 챤팅(Chanting)은 이방인과 같이 하는 죄를 짓는 것이냐? 정말로 우리는 어느 정도는 같은 것을 계속 반복함으로 하나님의 주의를 끌려고 하는 것이냐, 아니면 사실은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정서의 고조를 위한 것이냐?

사랑하는 감독, 하나님이 당신의 지도하에 맡기신 사람들의 정서를 어떻게 연주할 것인지 주의하고 주의하라. 당신의 사람들이 교회에 예배하러 와서 찬양에 의한 정서의 고조에 너무 익숙해 있어서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면 그 예배가 공허한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더 높은 정서의 고조를 찾아서 이 그룹에서 저 그룹으로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찾아다닌다. 비극은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 강렬한 정서적인 반응에 지나지 않을 때에도 그것이 성령이라고 믿도록 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편지가 내 경우와 마찬가지로 영혼과 마음사이에 균형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것인가를 생각나게 해 주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사용하도록 주신 이 놀라운 선물-음악의 선물-의 고유한 힘을 항상 깨닫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주께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하신 말씀을 항상 우리 앞에 두어야 한다:“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24)

 

편지29

성과 속의 구분(Discerning between the Holy and the Common)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라.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브리서 12:28-29)

사랑하는 음악감독

지난 몇 년간 북미 교회에는 혼란스러운 경향이 있었고 그것은 자라고 있는 것 같다. 많은 교회들은 불신자들이 교회 성가대나 오케스트라에 참여하는 것을 점점 허용하거나 심지어는 초빙하기까지도 한다. 따라서 나는 이런 질문들을 많이 받게 되었다. “우리 교회 예배 인도자들에 불신자들을 포함해도 되느냐?”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이며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적절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문제가 왜 일어나며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실 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미 몇몇 다른 편지에서 지적한 것처럼 최근에 우리 교회에서 예배관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한때는 하나님과 그의 요구가 우리 예배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는데 지금은 인간과 그의 요구가 간혹 중심적인 것처럼 보인다. 많은 예배인도자들은 지금은 일종의 두려움-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두려움이 아니라 인간들이 스스로 즐기지못할까봐 두려워하는-에 의해 조종되고 동기유발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훔치고 있고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려고 하는 것과 온전한 그의 것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다.

(p.149) 복음으로 세상과 접하고 목회하려는 우리의 열심 때문에 사람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한다고 우리는 확신했다. 오늘날 서양 복음주의 교회의 좌우명이 사람이 가장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근사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역행했다. 차라리 우리의 예배의식(Service)-하나님께만 집중되어야 할 예배의식이-예배를 하나의 도구로 보는 우리의 예배(Worship)에서 나오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그 자체로서 매우 중요한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목표에 이르는 한 수단으로 보고 있다.

성경은 사람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는한 실제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다.-가룟유다. 예수님의 발에 부어지는 향유의 낭비에 대해 그가 얼마나 화를 내었는지 기억하라. 이 향유는 매우 비싼 값에 팔려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발에 부어지는 향유가 낭비라고 생각지 않으셨다. 더군다나 식사 준비할 시간에 마리아가 그의 발 옆에 앉아있는 것을 시간낭비라고 생각지 않으셨다. 사실은 마리아가 더 좋은 것을 택했다고 칭찬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 혼동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의 요구보다 더 우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유일하게 적절한 선물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말함직한 표현은 교회는 먼저 다른 사람을 위해 살고, 그 다음에 교회는 하나님을 위해 산다일 것이다.

예배의 지도자들인 우리는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인가?”가 아니라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하는 것이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소명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종종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향한 사랑을 더 많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는 사람을 의식하는 결과를 낳게되었다. 인간중심의 예배는 하나님의 속성 자체와 맞지 않는다. 우리가 예배에서 무엇을 하는가에 가치를 두게 될 때 그것은 하나님에게보다는 인간에게 가치를 두는 결과를 낳게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를 만나라고 우리에게 주신 바로 그것을 악용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성()이 속()이 되는 한 영역이다.

진정한 예배는 예배자의 숭배가 표현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특성아 항상 반영되어야 한다. 챨스 웨슬리(Charles Wesley)거룩함이 거룩함으로 인도한다고 적절히 말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이 느낌과 필요에 집중될 때 우리는 거룩함으로부터 돌아서서 속()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P.150)우리 주 예수님에 따르면 가장 크고 첫째되는 계명은 네 마음을 다 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신 것이고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39)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 순서를 뒤바꾸었다. 사람의 욕구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요구를 무시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에스겔 44:10-23에서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사독의 아들들과 사람들 앞에 서서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레위의 아들들의 차이점을 읽을 수 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더 고귀한 사명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이것은 결코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거나 그들의 요구는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갈보리의 사건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 누구라도 사람을 돌보지 않으려는 핑계로 하나님의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부모들에게 이런 자세를 보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난하면서 이 점을 분명히 했다(마가복음 7:11). 사람도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에스겔서의 이 귀절에서 사람이 무시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성과 속 깨끗함과 부정함의 차이점에 관해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을 가르친 것은 레위 사람 사독의 아들들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레위사람들은 사람들이 예배하기 원하는 방법을 따랐기 때문에 그들의 책임은 문지기와 번제물 잡는 것과 사람들 앞에 서서 그들을 섬기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이 레위의 이 아들들에게 내게 가까이 나아와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며 또 내 성물 곧 지성물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이 자기의 수욕과 그 행한바 가증한 일을 담당하리라”(에스겔 44:13)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배에서 거룩한 것을 세속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한편 사독의 아들들에게는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그들이 내 성소에 들어오며 또 내 상에 가까이 나아와 내게 수종들어 나의 맡긴 직분을 지키되”(에스겔 44:15-16) 라고 했다. 이 모든 축복은 사람들이 예배하기 원하는 방법을 거절한 결과로부터 온 것이다! 사독의 아들들은 하나님만의 것인 예배를 속된 것으로 만들거나 더럽히기를 거절했다. 거룩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경외할만한 것이다. 더구나 예배의 인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더 경외심을 가지고 해야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교회 음악목회에 불신자들을 포함하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방법을 통해서 불신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바램에서 하는 것이다.(P.151) 나도 이런 일련의 생각을 이해하고 또 이런 재능 있는 사람들의 능력이 음악의 질을 현저히 높여준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이것이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들을 낮추는 하나의 신호가 된다는 것도 안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말한다. 성가대원들과 반주자들은 예배인도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배를 인도하는 일에 세상을 초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부르시는 것을 세속적인 것으로 만들게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찬양의 제사를 인도하는 일과 그를 경배하는 일에 참가시키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 사실은 그가 이미 이 점에 관해서 말씀하셨다.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에스겔서의 몇 구절로 돌아가 봐야한다: “대저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내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전을 더럽히므로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케하는 것이 되었으며 너희가 내 성물의 직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내 성소에 사람을 두어 너희 직분을 대신 지키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에스겔 44:7-9).

나는 이것은 자기를 위해 한 말이라고 믿는다. 레위인들은 불신자들을 제사드리는데 참여하게 해서 성소를 더럽혔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강등되었다.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예배인도의 책임을 맡겨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꼭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그것이 마치 속된 것인 것처럼 다루는 것은 아닐까?

예배에서 그의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예배의 분야에 관계없이 놀라운 특권이며 책임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에 그 무엇이라도 고의로 방해가 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된다. 히브리서 12장에서 저자는 우리를 얽어메기 쉬운 것들을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여진 경주를 인내를 가지고 예수를 바라보며 달려갈 것을 권한다. 그는 또 하나님의 훈련과 우리가 살도록 부름 받은 거룩한 삶에 관해서도 말한다. 그는 또 모세가 하나님에 대해 가졌던 경외심과 두려움을 말하며 새 언약의 중보이신 하나님이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는 그러므로...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브리서 12:28-29)고 말함으로 믿음의 부르심과 거룩함으로의 부르심으로 요약했다.

(P.152)하나님의 거룩한 빛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의 빛 안에서, 우리가 흔들릴 수 없는 천국을 받음의 빛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빛 안에서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히브리서 12:26)고 하신 사실의 빛 안에서 우리는 우리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경외심과 떨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는 소멸하는 불이시다. 우리는 거룩한 것을 속된 것으로 바꾸는 죄를 범치 말자.

 

 

(p.165) 편지 32

예배에서 연속성의 확립

물이 흐를 수 있도록 홈통을 자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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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인도자의 역할은 예배자들을 행복하게 하거나 그들에게 자신들의 능력을 인상깊게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어디에 와 있고 어디로 가는지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을 포함한다.

 

친애하는 담임목사와 음악감독에게

예배의 문맥에서 물이 흐를 수 있도록 홈통을 자르기에 관해 쓰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문장은 루이스(C. S. Lewis)에게서 나왔으며 예배인도자들의 책임-예배에서 연속성의 확립- 중 종종 간과된 부분을 서술한다. 수년간 나는 흐름이나 연결을 거의 생각지 않는 예배들을 지켜보았다. 성가대는 어느 한 방향으로 회중을 인도하고 독창자는 또 다른 방향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인도한다. 때로는 회중 찬송과 성가대가 특정한 주제도 없이 따라간다. 그들은 단순히 상관도 없는 노래 그룹들이고 그들 중 아무도 메시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예배는 구색을 갖추는 단편적인 것들로 구성되어진다.

결과적으로 예배가 끝난 후 사람들에게 어떠했느냐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주제를 따라잡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어떤 방향도 계획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특정의 방향으로 인도되지 않았다. 각 예배 인도자들은 각자의 영역만 준비했지 다른 사람의 방향에 관해서는 전혀 몰랐다. 회중 찬송이 선택되어 불려지고 성가대 찬양도 연주되어지고 그리고 설교도 그 각 요소들을 연결시키려는 아무런 시도도 없이 행해졌다.

(p.166) 만약 두 명의 작가가 희곡을 쓰거나 뮤지칼을 작곡하면서 서로 아무런 의논도 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사실 이런 현상이 예배인도자들이 서로 예배에서 협력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홈통이 적절히 잘라지지 않기 때문에 예배의 결과는 잘 흐르지않게 된다.

한 음악감독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항상 이렇게 했습니다. 간혹 새로운 찬송을 가르치려고도 하지만 주로 사람들이 부르고 싶어하는 찬송을 고른다. 회중은 노래하는 예배를 즐기는 것 같지만 나는 내가 음악에서 하는 것이 예배의 다른 요소들과 적합한지는 거의 생각지 않는다. 예배에서 나는 내 분야에 책임이 있고 담임목사는 담임목사의 책임이 있다.“

시나리오가 이렇게 될 때 회중은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움직일지 확실히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단순히 부를 노래를 선택하는 데에는 큰 노력이 필요 없지만 연속성을 가지고 일관성있는 흐름을 가진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기도가 필요하다. 담임목사가 음악을 직접 인도하지 않으려면 음악 감독과 의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일반적인 주제와 시작점, 성가대의 찬양, 사용할 성경구절, 그리고 회중 대표기도의 주제등을 논의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가장 적절한 "위임찬송을 선택하고 메시지의 내용에 가장 잘 화답하는 마지막 찬송을 고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예배에서 회중들이 편안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 그들의 마음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것을 어떻게 연결할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뒤죽박죽된 잡동사니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회중이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기도를 듣기도 하고 , 전해지는 설교를 듣기도 하면서, 정말로 예배하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

수년간 우리는 우리가 인도할 특권을 가진 예배에서 그것은 뜻이 있었다. 나는 전에는 그런 예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이 따라오도록 해왔다. 더 나아가서 어떻게 그것이 그들의 예배를 도왔는지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에겐 처음으로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볼 수 있고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성경봉독, 기도, 설교, 그리고 음악이 하나로 묶여서 예배의 한 부분이 바로 다음으로 인도되었다. 계획을 세우고 기도함으로써 당신은 사람들이 예배에서 훨씬 더 쉽게 하나님께 가까이나아가도록 할 수 있다. (부록에 있는 예배 인도자들을 위한 점검표를 보라)

때로는 교인들이 예배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옮겨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고 예배의 흐름이 매우 자연스럽게 흘러가서 전환이 필요 없을 때도 있다. (P.167)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에서부터 일어날 일까지를 연결해주는 몇 마디의 말이 교인들의 이해를 도와줄 수도 있다.

나는 예배 인도자들이 불필요하게 예배에서 그들의 자리에 뛰어들어가는 것을 간혹 보았다. 이런 일은 메시지가 적절하지 못한 목사들이나 다른 설교자들에게서 매우 자주 나타난다. 이것은 목사나 초청된 강사가 사람들의 마음에 음악이 잘 스며들어가고 있는데 일어선다거나 농담을 해서 분위기를 망칠 때 가장 잘 나타난다. 사람들의 시선이 예배에서 말하는 사람에게로 옮겨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방금 있었던 일을 잊게된다”. 이것은 이미 실제로 일어난 일을 중요하지 않은 일로 만들어버린다.

나는 중요한 어떤 일을 제쳐놓음으로서 일어나지도 않은 일처럼 행동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지금 쓰고 있다. 그런 무감각은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성령을 슬프게 한다. 예배 인도자의 사명은 단순히 페이지나 알려주고 팔이나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다. 예배 인도자의 사명은 회중과 함께 그들을 도와주고 인도하며 이해하면서 참여하고 융화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그들이 마음을 열고 화답하며 그 화답이 적절할 때는 신체적으로나 청각적으로도 화답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예배 인도자의 역할은 예배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거나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어디에 와 있고 어디로 가는 지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어렵지는 않지만 정신적인 각성과 영적인 민감함을 필요로 한다. 방금 부른 노래의 한 구절을 선택해서 다음순서와 연결하는 것은 평범한 것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방금 일어난 일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시점으로부터 그들을 인도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계획에 없던 즉흥적인 기도나 성경귀절이 때로는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다. 계획에 없던 성가대의 찬양이나 회중찬송의 삽입도 예배의 순간을 평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예배 인도자로서 당신의 역할은 회중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예배에서 사람들과 매 순간 만나도록 하는 것에 민감할 것을 요구한다.

(p.168)

편지 33

성가대에게

 

성가대원은 예배하는 사람이면서 예배요원이다. 모든 예배 인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성가대의 역할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회중이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친애하는 성가대원에게

얼마나 놀라운 유산을 당신들은 가지고 있는가! 수많은 음악과 노래에 대한 언급과 함께 노래하는 사람들에 관한 언급이 성경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다. 역대상 15장에는 다윗의 지시에 의한 성가대 구성이 나타나 있다.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하매...”(16). “레위 사람의 족장 그냐나는 노래에 익숙하므로 노래를 주장하여 사람에게 가르치는 자요“ (22). 성벽 건축과 관련하여 느헤미야는 그가 조직한 성가대를 위해 특별한 역할을 했다. 목자들에게 우리 주의 탄생을 알리는 통고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허다한 천군 천사의 반주와 함께 했다. 계시록에서 만만이요 천천이라...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계시록 5:11-12)라고 읽듯이 허다한 하늘의 천군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영광 돌리는 것을 안다. 그리고 어느날 하나님의 구속받은 모든 자들이 노래하는 자들과 그 노래를 결코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과 함께 완전한 노래와 화음으로 천군들과 함께 그 노래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성가대가 될까!

그 때가 올 때까지 교회 성가대의 사명은 본질적으로 성경전체에 걸쳐 나타나 있고 우리도 알 듯이 하나님의 위대한 업적을 선포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성악에 숙련된 사람들을 따로 구분한 이유다. (P.169) 다른 이유는 없다. 이스라엘 주변 국가의 성악가들은 그들의 노래를 불렀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성가대는 오직 그들의 하나님의 노래만 불렀다.

성경시대부터 가장 영광스러운 많은 음악들은 교회작곡가나 세속작곡가의 작품도 마찬가지로 성경으로부터쓰여졌다. 바흐의 칸타타와 오라토리오들, 헨델의 메시아, 그리고 수많은 음악들은 사람들이 합창음악을 통하여 성경의 메시지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합창과 솔로이스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의 그 영광스러운 환희의 송가를 보라. 우리 찬송가 13기뻐하며 경배하세를 보면 알 수 있다.

교회 성가대는 그 다음에 나타난 다른 형태의 합창을 위한 기준을 세우고 모범을 보였다. 이들 다른 합창단들은 모든 종류의 음악을 노래했지만 교회 성가대는 항상 성경의 메시지만을 노래했다. 이것이 수 세기동안 그렇게 존속해 온 이유다-“그의 노래를, 그를 통해, 그에게그것은 교회가 그 첫사랑을 버리기 시작한 최근까지 그랬다. 그 버림은 성가대가 다른노래들을 부르는 데서부터 반영되기 시작했다.

교회역사를 돌이켜보면서 음악이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살펴보면 재미있다. 교회가 배교(背敎)의 기간에 있을 때는 교회는 드라마나 오락쪽으로 더욱 더 돌아섰다. (부록에 있는 교회가 틀림없이 교회였을 때에서 이 점을 충분히 설명했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께로 돌아섰을 때 설교는 그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아갔고 그 되돌아감은 음악에도 반영되었다. 교회 성가대는 더 이상 교인들의 흥미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다. 거듭난 사람들은 교회에 올 때 즐기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미국교회에서 여흥(Entertainment)은 지배적인 추세에 있다. 사실은 그것은 많은 우리들 교회에도 적용된다. 해마다 수백만 달러가 영적인 열매도 거의 없는 일에 쏟아 부어진다. 극장으로 지어진 우리 건물에서 행해지는 연출들은 많은 교회 성가대들을 여흥을 위한 기구로 바꾸어 놓았다. 이것이 우리가 첫사랑을 버렸다는 표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성가대원 여러분, 당신들은 여흥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당신들은 그를 예배하는 교회를 돕기 위해 존재한다. 당신의 책임을 수행하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다. 예배 요원이 되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다. 성가대원 여러분은 음악 자체를 위한 요원들도 아니다. 당신들과 성가대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그보다 훨씬 높은 것이다. 당신들은 당신들 자신들이나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다. (P.170) 이것은 당신의 헌신에 영향을 미쳐서 연습시간을 가지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준 역할에서 당신이 그를 나타내기 때문에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성가대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깨어진 인간관계는 불협화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당신의 책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하나님이 축복하실 단체를 지키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줄 것이다. 당신을 버티기 위해 질투나 비아냥거림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궁극적으로는 당신의 유용성과 성가대가 만들어낼 수 있는 영적인 영향력들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예배의 다른 팀들에게 여러 차례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한 몸의 지체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영광을 위해 건강한 몸으로 기능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목적이다.

할 예기가 많지만 다른 편지에서 하도록 하고 비교적 작은 교회 성가대를 위해 한마디만 하겠다. 당신들은 큰 교회 성가대가 하는 음악들을 할 수는 없다. 그들과 같은 훈련된 대원들도 없고 T.V에 나가지도 않고 반주자의 능력도 어려운 곡은 잘 연주할 수 없고 다른 성가대들처럼 훌륭하지도 않다는 말을 들어왔다. 좋다 그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당신들을 격려하기 위해 한마디만 하자.

당신들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고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한 모든 필요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사람들의 귀를 위해서는 다른 합창단들처럼 좋은 소리를 낼 수 없을 지 모르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소리내느냐가 아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소리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미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그것은 마음의 문제다. 만약 당신이 주일 아침에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가 그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린다면 하나님의 귀에는 큰 성가대가 하나님께 드리기보다는 자기 자신들을 위해 하는 찬양보다 하나님의 귀에는 훨씬 더 탁월한 음악으로 들릴 것이다.

나는 간혹 하나님이 땅 위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모든 음악을 다 받으실 수 있는 하늘의 소리 변환 장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여기 땅에서는 어떤 소리가 나더라도 그것이 그의 귀에 들릴 때는 그것은 구속받은 자들만이 낼 수 있는 소리로 바뀐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귀에는 진짜 음악이다.

나는 성가대를 위해 시편에서 따온 몇 구절을 조금 바꾸어서 당신에게 남겨주고 싶다. 이것이 당신의 목회 사역에 하나의 설명서로 남기를 기도한다.

성가대여 주께 노래하라. 주께 노래하고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그의 구원을 선포하고 노래할 때마다 그의 영광을 선포하라

주의 기이한 행적을 노래하라. 그는 위대하고 찬양 받으실만한 분이시다.

성가대여 노래할 때 그의 앞에 있는 위엄과 영광, 그의 성소를 가득 채운

영광과 권세를 기억하라

 

성가대여 노래할 때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라

그의 거룩함의 아름다움으로 예배하라. 그가 위대한 하나님임을 백성들로 알게 하라

그들은 그의 목장의 양이로다.

 

성가대여 조물주인 주 앞에 백성들로 무릎꿇게 하라. 그는 거룩함으로 옷 입고 그의 보 좌는 영원함이로다.

성가대여 노래할 때 주께 노래하라. 항상 노래하고 주께만 노래하라!

 

(P.172)

편지 34

독창자에게

 

종으로서의 독창자인 다윗의 기도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3:1-5

 

친애하는 독창자에게

이 편지를 쓸 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에게 전하거나 회중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하기 위해 음악을 사용하는 개인이나 앙상블의 성악가들과 음악가들을 생각한다.

독창자들이여 우리는 무엇보다 성직자들이다. 그리고 우리의 사역은 무엇보다 먼저는 하나님께 향한 것이고 그 다음이 사람에게다. 우리는 여흥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니고 음악가의 숫자를 채우기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 설 때 우리는 (P.173) 우리를 선택해서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신자를 대리하는 것이다. 우리가 노래하고 연주하는 것은 그를 위한 것이고 그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 설 때는 우리를 대리한 것도 아니고 흥행을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리하고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 설 때는 우리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가 하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소명과 임무를 다른 데로 돌리는 어떤 일도 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옷을 어떻게 입을지 주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성악가는 그들이 나타나는 바로 그 방법 때문에 나를 보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어떤 산만한 큰 소리나 민감한 복장은 예배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의 삶에서는 어떤 때에도 자리가 없다.) 전에 어떤 음악가가 회중들 앞에 서 있을 때 입었던 옷 때문에 당황했던 적이 있다. “예수의 이름으로한 어떤 일도 그 이름의 특성을 나타내야 한다고 전에 지적한 적이 있다. 예수의 이름에 합당치 않은 옷을 입을 때 우리는 주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의해 형태가 갖춰져서는 안 된다. 친애하는 독창자들이여 사람들이 당신에게서 받는 첫 인상은 당신이 어떻게 보이느냐이다. 당신의 옷입는 방식이 당신의 연주나 노래를 취소시킬 수도 있다. 옷 입는 것을 주의하라!

둘째로 몸을 어떻게 움직이느냐의 문제다. 신체의 움직임으로 나타낸 것은 음악처럼 크게 말할 수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들 앞에 서 있는 당신의 목적에서 산만하게 하는 어떤 행동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당신의 신체로 하는 것이 메시지를 도와줄 수도 있고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도 있다. 불필요한 손의 움직임은 주의를 산만하게 할 수도 있다. 오늘날에는 흔하지는 않지만 신체의 다른 부분으로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이트클럽에서처럼 마이크를 애무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의 특징이 아니다. 당신은 거기에 당신을 보여주러 나온 것이 아니다. 당신은 하나님에 관한 어떤 것을 보여주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이다. 당신은 필연적으로 당신이 서있는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얼굴이다. 그러므로 움직임에 주의하라. 노래로 선포하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도 도와줄 수 있는 성악가를 보는 것은 얼마나 영적으로 만족스러운가! 당신의 몸과 눈은 음악이나 가사와 마찬가지로 노래의 조화를 이루는 일부분이 된다.

이것은 수년간 내게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서유럽과 미국 그리고 캐나다의 교회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현상이다. (p.174) 이 현상은 세상의 오락정신이 얼마나 교회의 틀에 강한 인상을 미쳤느냐하는 증거가 된다. 세상에서는 음악에 붙여진 가사가 예술 형식이 된다. 이 예술 형식은 온갖 종류의 형태와 소리를 가진 노래라고 불린다. 그것이 어떤 소리가 나던 그 목적은 즐기는 것이다. 가수는 청중을 위해 그리고 청중에게 노래를 부른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오늘날 얼마나 많은 크리스챤 가수들과 음악가들이 같은 생각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크리스챤이긴 하지만 노래는 청중을 위해 연주되는 예술형식으로 보인다. 이것은 때로는 가사가 예술형식에 보조적인 것이 되기 때문에 가사가 말하는 것을 무시하게 만들어버린다. 더 이상 음악은 가사의 메시지를 전하는 도구가 근본적으로 될 수 없고 둘은 이제 노래 부르기 위한 노래가 되었다. 그리고 종종 그 노래는 가사의 진짜 의미를 묘사하지 않는다.

몇 년 전에 본 크리스챤 T.V의 예를 들어보자. 그 프로그램은 흘러간 성가 가수들이 부르는 추억의 히트송이었다. 이 가수들은 모두 잘 알려진 사람들이고 수년간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스러웠다. 그러나 내가 보았을 때 그것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찬송가 40)를 부를 때 문제가 생겼다. 그 첫줄과 후렴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말로 되어있다는 것을 당신도 알 것이다. 그러나 그 가수들이 기도를 노래하는 것을 보고 들었을 때 나는 그들이 그 기도를 기도로 다루지 않고 예술형식으로 다루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가사를 노래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말을 과장해서 말할 때 그들은 웃으면서 서로 쳐다보고 상대방의 등을 몇 차례 두드려 주기도 했다. 그들은 영국 사람들이 말하는 얼큰한 좋은 시간(Jolly good time)"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끝냈을 때 그들은 서로 축하하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연주에 보내는 박수를 듣고 있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는 예술 형식으로 격이 떨어졌다. 그들은 기도말을 노래하고 있었지만 그 메시지는 그들의 마음과 멀리 떨어져있는 것 같았다.

슬프게도 이것은 우리 모든 교회에서도 역시 일어난다. 독창자들은 기도말을 노래하기 위해 일어서지만 기도를 예술형식으로 취급한다. 그들이 어떤 기도를 노래할 때 그들은 청중을 쳐다보면서 웃기도 한다. 그들의 입술은 하나님께 말하면서 그들의 눈과 몸은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회중은 그들의 노래에 초점을 맞추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는 그들의 기도를 듣는 청중이 되었다. 우리의 기도에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것이 왜 놀라운 일이 되겠는가?

(P.175)왜 내가 이 점에 관심을 가지는가? 나는 이것이 제 3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고 있다. 우리는 그에게 기도할 수 있는 그의 자녀로서 가진 놀라운 특권을 예술형식으로 격을 떨어뜨렸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예배형식을 진행하면서도 마음은 그로부터 멀어져 있었던 삶을 거듭 거듭했던 것과 거의 비슷해 보인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은 그들이 그에게 손을 들고 기도하더라도 듣지 않으시겠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때뿐만 아니라 지금도 똑같이 거룩하다. 그에게 하는 우리의 기도는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거룩하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하신 것을 우리는 얼마나 빨리 속된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 점에 관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노래할 때 정말로 하고 있는 일로 돌아 가보자. 만약 기도를 노래한다면 당신이 기도할 때 회중에게 머리를 숙이라고 요청하라. 기도할 때 눈을 감는 것이 당신의 관습이라면 눈을 감고 하라. 발성 선생이 노래할 때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라. 만약 당신이 연주를 하고 있다면 그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동료 성악가여, 우리는 연주자가 아니다. 만약 당신이 눈을 감지 않거나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면 당신의 눈은 위로 향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의 눈은 당신이 하고 있는 말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 거기에 가 있다. 아무도 당신에게 언제나 청중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고 설득하지 못하게 하라. 만약 당신이 당신의 입술로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있다면 눈으로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 사람들에게 연설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들을 쳐다보라.

수년이 지나서야 우리는 이것이 우리가 목회할 특권을 가진 회중들을 위한 강력한 교수자료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당신에게 그들이 그들 자신의 정신으로 참여하도록 도와줄 것을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성악가들이여 당신이 어떻게 노래하는지에 주의를 기울이라. 나는 지금 기술적으로 노래를 잘 하는 것을 항상 요구하지는 않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목소리 훈련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재능을 최대한 개발해야 한다고 믿는다. “달란트비유는 음악가에게도 적용된다. 그러나 모든 매력적인 가능성을 가진 정교한 사운드 시스템의 출현과 함께 우리는 이제 지금보다는 실제로 더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다. 이것이 아무리 유용하더라도 그것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할 가능성도 항상 있다. 나는 하나님을 알리기보다 그들의 목소리 효과를 더 인상깊게 남긴 성악가들을 보아왔다.(P.176) 이렇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자로서의 책임에 실패한 것이다.

하나님께 집중하기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가 훨씬 더 쉽다. 이런 일은 메시지를 강화하기보다 메시지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반주 테이프를 사용하거나 혹은 그것을 지나치게 크게 틀거나 편곡을 너무 지나치게 할 경우에 일어날 수 있다. 당신의 사운드 트랙이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메시지가 음악 때문에 죽어버리는 음악과 가사의 잘못된 결혼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대리하는 것은 장엄한 의무이다. 그를 존경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재능을 사용하는 것은 많은 기도와 말씀 읽을 시간, 그리고 매일 우리를 그 앞에 겸손하게 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때로는 그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편리하지는 않지만 적법한어떤 것을 음악적으로 하는 것을 삼갈 것을 요구한다. 당신이 높은 소리를 낼 수 있다고 해서 모든 노래의 마지막을 노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메시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꼭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높은 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보다 당신의 성악 솜씨를 더 많이 나타내는 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음악 전도자가 당신이 그것을 낼 수 있다면 그것을 과시하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이 농담이기를 나는 바란다.

나는 성악가들과 기악 연주자들이 청중을 그들의 훌륭한 기교로 잘 인도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에 관한 생각으로부터 그들의 탁월한 연주능력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경우를 보았다. 얼마나 빨리 목회가 연주로 바뀔 수 있는가! 얼마나 빨리 하나님께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그 길에 장애물이 될 수 있는가! 얼마나 빨리 우리의 재능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데서 우리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는 데로 돌릴 수 있는가!

얼마나 빨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어떻게 소리내는가 하는 것을 자랑할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 성악가들과 음악가들이 우리 매일의 삶에서 십자가를 민감하게 생각해야하는 이유다. 갈라디아 6:14에서 사도 바울은 무엇을 자랑하고 싶으면 당신이 이룩한 것을 자랑치 말고 예수의 십자가와 그것이 당신을 위해 한 것을 자랑하라고 했다. 이것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매우 크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누구나 되돌아올 수 없는 길로 머리를 돌려야 한다. 이미 결정은 났다. 협상의 여지는 없다. 십자가는 어떤 타협이나 협상도 없다. 인간의 박수갈채를 자극하는 어떤 것도 십자가의 그늘에 녹았다.

세상은 십자가가 당신 삶의 특정 영역에만 해당하고 음악경력에는 분명히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도록 유혹할 것이다. (P.177) 그러나 성경은 자신을 낮추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신그리스도의 자세를 항상 가질 것을 말한다. (빌립보 2;8)

십자가가 정말로 당신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세상으로부터 나오고 인간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당신 허벅지에 상처를 입었다면 당신이 절룩거릴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자랑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이 한 일이나 할 수 있는 것을 자랑치 말라. 사람들이 당신에 관해 말하는 것을 자랑치 말라. 하나님이 당신의 사역에 어떻게 축복하셨고 어떻게 당신을 사용했는지 자랑치 말고 감사하고 십자가만을 자랑하라

왓츠(Isaac Wastts)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했다. “주여 내가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하소서 나를 유혹하는 모든 헛된 것들을 그의 피에 바치겠습니다

친애하는 성악가/음악가들이여, 자랑하고 영광을 돌립시다 그러나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합시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게합시다. (갈라디아서 6:14)

 

P.178

편지 35

반주자들에게

 

다윗이 레위 사람의 어른들에게 명하여

그 형제들을 악기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자로 세우고

(역대상 15:16)

 

친애하는 반주자들에게

나는 이 편지를 건반악기 연주자들에게 쓰고 있다. 대부분의 우리 교회에서는 그들은 회중찬송 반주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가대 반주와 전주, 봉헌송, 후주 그리고 갑작스러운 여러 종류의 반주들을 담당하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예배할 여러 분위기를 제공할 음악적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쓰고 있다. 그러나 이 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가 전에 쓴 편지에 있는 예배상황(Worship context)-성경에 규정되고 모델이 나와있는-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당신은 한 예배 팀을 담당하고 있다. 그 팀은 몇 명으로 구성될 수도 있고 수백명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 규모가 어느 정도이던지 예배의 전주에서 후주까지 사이에 일어날 많은 것을 지원하고 있다. 아무리 당신이 훈련을 적게 받았던지 아무리 당신이 숙련되었다고 느끼더라도 당신의 책임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예배팀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먼저 하나님께 봉사하고 다음으로 사람에게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구약의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당신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이 예배에서 그를 만나도록 도와줄 책임을 가지게 구별되었다. 당신은 당신의 재능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P.179) 당신의 책임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준 재능으로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나 자신이나 자존심이 설 자리는 없다. 또 반대로 남들만큼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했거나 당신이 원하는 만큼의 뛰어난 음악가가 못된다고 느껴서 죄송하게 생각할 자리도 없다. 당신이 하나님께 당신이 가진 최선의 것을 드린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전부다. 결국 하나님의 눈은 당신의 손가락에 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마음에 가 있다. 길 건너 교회의 사람들은 그들의 반주자의 재능에 맞추어 아아아아아, 오오오오오할 수도 있다. 그들은 반주자의 환상적인 봉헌 연주에 축하를 보내고 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으셨는데. 반면에 아무도 그 날 아침에 당신이 연주한 봉헌 연주에 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도, 아무도 감동을 받지 않더라도-하나님만 제외하고-당신이 연주할 때 그는 당신이 그만큼 연주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는지 아신다. 그리고 당신이 연주할 때 너무 많은 실수를 하지 않고 그것을 하기 위해서 당신이 얼마나 그를 의지했는지 그는 아신다. 그리고 당신이 연주할 때 당신은 무엇보다 그를 기쁘시게 하기 원했다는 것을 아신다. 그리고 당신은 해냈다.

건반에 관한 책임 외에도 함께 일하는 예배팀의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책임이 또 있다. 그것은 때로는 당신이 하는 일을 끝까지 참고 견디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기독교인들도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는 최악의 사태가 교회 안에서 그것도 음악 사역에서 나온다. 우리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매우 창의적으로 되고 우리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 온갖 이유를 내세우더라도 만약 그것이 조화보다는 불화를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적의 손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교회 음악 사역에서는 날마다 우리 자신을 죽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기회를 많이 주시는 것 같다.

이 분야에서 매우 민감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다. 나는 실제로 피아노 반주자나 오르간 반주자가 물러날 때가 되고 다른 적임자를 물색해야 할 때가 된 것을 많이 보아왔다. 수년동안 그 일을 열심히 해왔기 때문에 기꺼이 그 자리를 내어놓지 않으려 하고 그것이 사역을 긴장시키는 경우를 보았다. 언제 물러날 지를 깨닫는 데는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쓸모없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지체 안에서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P.180) 우리는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된”(빌립보서 2:7) 우리 주를 나타내는 데 있어서 마음으로부터 종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당신의 책임과 관련된 일에 도움을 주기 위해 내가 보고 들은 경험을 이야기 해주고 싶다. 먼저 전주에 관해서 말하면 전통적으로 이것은 마음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말하자면 조율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수년간 많은 교회들에서 그것은 잡담하는 사람들을 위한 반주시간이 되었었다. 그것은 명상을 위한 전주라기보다는 대화를 위한 전주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더 좋을 정도다. 다른 편지에서 이 점을 충분히 설명했다. 그러나 이번 편지에서도 다루는 이유는 당신이 이 점을 많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기도하면서 선택한 곡들은 그들이 예배하러 온 분에게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때때로 당신이 연주할 곡을 말로 소개해보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연주할 곡이 찬송가나 찬송가 편곡이라면 말로 소개해도 되고 교회에 O.H.P가 있다면 스크린에 비추는 것도 한 방법이다. 변화를 위해서는 당신이 연주하는 곡과 관련된 성경귀절을 비추어주는 것도 좋다. 이것은 단순히 말로만 하는 것보다 낫다. 양들은 몰려가는 것이 아니고 인도된다. 한가지 더 전주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면 그것은 예배의 음색을 유지해야지 회중이 운동경기에 참석한 것처럼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찬송가 반주에 관한 것이다. 항상 반주에 강조점이 주어져야한다. 악기는 노래하는 것을 인도하기도 하고 강화하기도 한다. 반주는 그 특성상 주된 것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주된 것은 회중이 노래하는 것이다. 반주는 절대로 노래를 안 들리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경우를 많이 보았다. 특히 오르간과 오케스트라의 경우가 많았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회중반주를 하는 악기(Instruments with Congregational Accompaniment)"에서 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노래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래를 거의 들을 수 없게 되고 그래서 더 크게 노래하기보다는 노래를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듣기 위해서 금방 노래를 멈춘다. 나는 오르간이 어떤 경우에도 모든 음전(Stop)들을 다 뽑아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악기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주 예수 이름 높이어의 몇 마디를 반주한 후에 마지막 절에서 모든 음전들을 다 사용해서 그 자리가 음악과 메시지의 날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같았던 때를 상기한다. (P.181)

회중 반주와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이 하나 더 있다. 이것은 당신이 사용하는 화음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이 노래할 때 반주 코드는 성부에 의해서 자연스런 화음을 이루도록 해야한다. 나는 얼마나 자주 찬송가에 있는 테너 성부를 노래하고 싶었던지, 하지만 반주자가 스스로 만든(Creative) 화음을 사용하고 있어서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이것은 혼자 독창을 할 때는 적당하겠지만 선율 외의 다른 것을 노래할 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음악적인 무식함과 교회 찬송가에 대한 친숙하지 못함과 함께 미국 교회에서 화음 찬송이 거의 불려지지 않는 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의 신자들이 예배하는 것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선율만 따라 노래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고 싶을 것이다.

예배 인도자로서 우리가 떠 해야 할 일은 예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관해 매우 민감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예배에서 봉헌송이나 후주로 연주하려고 계획한 것이 성령이 예배에서 하신 것과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봉헌송 바로 앞에 회중에게 깊은 엄숙한 분위기가 있다면 봉헌송으로 강렬한 리듬의 음악을 준비했더라도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그 분위기를 도와줄 수 있는 찬송가나 합창을 연주하는 것이 영적으로 민감한 것이다. 이것은 후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악 연주자나 성가대가 단상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도 전에 과장된 마지막 연주를 해서 확신감을 줄여버리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가장 의미 있는 봉헌송이나 후주는 많은 경우에 매우 단순하면서도적합한합창이나 찬송가들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 드리는 예배에서 위축되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민감하고 기꺼이 조정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어떤 사람들은 남들처럼 유연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더 그를 의지하는 것을 배우고 그리고 그의 방식을 이해하게 될수록 우리를 놀라게 만드신다. 기쁨으로 그를 섬기라! 당신의 삶에서 그의 부르심을 기뻐하라! 당신의 손가락으로만 하지말고 당신의 마음으로도 당신의 악기를 연주하라!

 

(P.182)

편지 36

방송실 사역자에게

 

우리가 한 봄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로마서 12:4-5

 

방송실 사역자에게

당신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당신들 자신을 예배팀의 필수적인 파트로 보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삶의 많은 영역에서도 그렇듯이 목회에서도 교회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게 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도 꼭 같이 중요하다. 이것은 사실은 하나님이 교회를 일하도록 세우시는 것과 꼭 같은 방법이다. 성경은 교회를 전체의 선을 위해 한 부분으로서 일하는 여러 지체로 구성된 몸과 비유한다.

시청각의 세계가 기본적으로 당신이 보고 듣는 것에만 제한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사운드 시스템이나 특별한 조명이 없었다. 지금도 어떤 세계에서는 여전히 그렇지만 당신이 살고 사역하는 곳에서는 그렇지 않다. 근래에 신체의 당신 부분은 매우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당신의 임무는 많은 교회에서 필수불가결의 요소가 되었다.

이 편지는 근본적으로 당신 사역의 기계학에 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분야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간접적으로는 관련이 있다. 수년간 방송실 사역자와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종종 그들은 자신들의 기능을 기본적으로 기술자의 한 명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 분야의 노련한 몇몇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나는 당신들 가운데도 이 점에 관해 그런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또 사람들이 당신들을 이런 시각으로 보고 마이크나 켜고또는 조명과 비디오나 작동하는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본다는 것을 알았다. (P.183) 당신은 단순히 레버에 손가락이나 얹어두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눈은 모니터만 쳐다보고 앉아있는 그런 시시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말하거나 노래할 때 혹은 패트리샤가 건반을 연주하거나 노래할 때 당신은 거기에 우리와 함께 있다. 우리는 먼저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권능주심을 바라서 그를 의지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팀의 일원으로서 한 지체가 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혼란스럽지 않고 명확하게 전하도록 우리와 함께 최선을 다하는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종종 방송실 사역자가 예배 전의 기도회에 포함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이 기도회에 초대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도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감사한다. 그리고 페트리샤와 내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다 겪었기 때문에 당신을 위해 충실히 기도한다는 것을 확실히 말할 수 있다. 한 부주의한 방송사역자가 패트리샤의 피아노에 있는 마이크를 끄고 듀엣이 절반이나 지나가도록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놀라서 매우 높은 찢어지는 볼륨으로 마이크를 켜는 바람에 모든 것을 망쳐버렸던 황당한 일이 있었다.

방송실 사역자 당신은 우리와 함께 호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당신이 손을 움직여서 사람들의 시선이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시스템을 너무 늦게 켜거나 너무 크게 트는 것과 같은 사소한 실수도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한번은 예배의 끝부분에서 정말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있었는데 갑자기 성전의 조명이 다 바뀌어버렸다. “회중석의 조명은 다 침침해지고 스포트라이트가 내게로 향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고 방향도 놓치고 회중의 시선도 놓쳐버렸다. 예배에서는 평상시 예배를 위한 조명을 특별히 주문해 두고 있었지만 우리의 주문은 지켜지지 않았다. 나중에야 그때 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연주회분위기로 상황을 바꾸는 것이 가장 좋을 거라고 기술자중의 한 사람이 그렇게 결정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분위기는 성공했지만 예배는 망쳤다.

당신이 맡고 있는 일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보는 것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일한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기도와 준비, 그리고 자각과 깨어있음을 요구한다. 우리는 서로서로 섬길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섬기고 있기 때문에 항상 종의 마음을 가wu야 한다. 우리와 함께 섬기는 것에 대해 감사한다.

 

(P.189)

부록1

성가대 서약서

 

우리 교회 성가대의 일원으로 참여함에 있어서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의 예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영적이고 실질적인 의미를 충분히 깨닫기를 바랍니다. 성가대의 영향력은 매우 크며 교회의 모든 영적인 생활이 성가대의 상황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경험이 증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이 성가대 서약서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심사숙고하고 당신의 서명을 해서 성가대원의 자격을 받기 전에 담임목사에게 보내주기를 바랍니다.

1. 이로써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며 그의 권위가 성령의 힘으 로 내 삶을 지배하는 것을 인정합니다.

2. 나는 교회 성가대의 일원으로서의 중요함과 의미를 깨닫고 교회 생활 끝까지 성가대의 직무와 유익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3. 이 서약서의 조건을 따르는데 실패하면 교회의 판결에 의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징벌을 받을 것을 서약합니다.

4. 나는 음악 감독이 요구하는 평가에 나의 목소리를 복종할 것과 성가대를 위해 적합한 그 의 결정을 받아들일 것을 동의합니다.

5. 나는 성가대 연습에 규칙적으로 참석하고 음악감독과 성가대의 모든 활동에 충실한 지원 을 다 할 것을 약속합니다.

6. 나는 내 입술의 증언이 나의 기독교인으로서의 경험의 표현이 되며 그래서 내 삶에서 행 동과 성품이 항상 거룩할 것을 서약합니다.

7. 나는 교회 예배에서 노래를 인도하고 있지만 내가 그렇게 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주의 를 끌지 않아야 하며 나의 모든 목적은 내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 스도인으로서의 행동과 겸손함으로 사람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야 함을 당연 한 것으로 여깁니다. 나의 야망은 나의 주를 영화롭게 하는 제한된 목적 안에서 모든 찬 양과 독창과 찬송을 부르며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이어야 합니다.

8. 나는 교회 안에서의 모든 섬김이 천국과 지옥의 힘 사이의 영적인 전투이며 영혼의 적이 항상 찾는 것은 회개와 은혜의 사역에 대한 방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을 알고 나는 담임 목사와 함께 짐을 나누어지며 끊임없는 기도와 확신 가운데서 헌신하겠습니다.

성가대원으로서의 자격의 의미와 상황을 주의 깊게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나는 기쁘게 동의하며 위 조항들을 지킬 힘을 주실 성령을 믿습니다.

 

서명

 

날짜

 

역자의 약력이 필요하시면

 

 

성철훈

총신대학 교회음악과 졸업

총신대학 대학원 교회음악과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현 명지중학교 교사

계산교회 음악 전도사

친애하는 음악 목회자님.

당신은 앞의 편지에서 내가 예배에서 반드시 음악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음악을예배시간에 예배의 한 부분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을 상기할 것이다. 이 말도 사실이긴 하지만 음악이 회개나 위탁 그리고 순종과 같은 것들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그 자녀들의 사랑과 존경심,감사 그리고 찬양을 표현하는 데 사용할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라는 것을 놓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들었을 때가 예배 시간이라면 그것은 음악을 위한 시간이다. 하나님께 노래하고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로새서 3:16)라고 훈계한 것처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노래할 시간이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 노래하는 사람들 가운데 풍성하게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지게 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P.134) “풍성하게 거한다라는 말은 실제로는 집을 풍성하게 채우다라는 말이다. 이 성경 말씀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함이 꽉 찬다는 말이며 이로부터 진정한 예배가 나온다는 것을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바울은 거의 같은 교훈을 에베소 교회에도 주고 있다. 이번에는 노래하는 것과 노래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에베소서 5:18-20)

성령 충만은 바울의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다.“충만이라는 말은 실제적으로 계속해서 꽉 차 있다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교회 생활에서 음악의 역할을 높은 수준으로 설정하신 것은 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단순히 음악을 위한 음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요구와 만나는 것이라면 우리가 연주하고 노래하는 음악은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의 충만함과 하나님 말씀의 풍성함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는 음악목회의 모든 것에 기본이다. 만약 누가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풍성함에 대한 아무런 바람이 없다면 그가 아무리 뛰어난 가수이거나 음악가라 할지라도 혹은 주일 예배시 회중석에 앉아 있는 교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다.

음악 지도자의 높은 수준은 구약에서 확립된 것이다. 역대상 15:2절에서 레위인들(음악가들)은 언약궤를 옮기도록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이다.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를 택하사 하나님의 궤를 메고 영원히 저를 섬기게 하셨음이니라

레위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역대상 15-16장에서 아삽과 그의 형제들은 언약궤 앞에서 계속 임무를 수행하도록 지명 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도록 지명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역대하 5:12-14과 느헤미야 12:27-29에는 노래하는 사람들의 임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음악가들은 선택되고 지명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들의 임무를 위하여 따로 구분되었다. 민수기 8:5-14은 제사를 위한 지도자들과 담당자들을 준비한 전 의식을 묘사하고 있다. 6절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정결케 하라는 모세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는 듣게 된다.

역대하 5:11-14에서는 언약궤가 놓여 있는 성소에서 제사장들이 물러 나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P.135)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이후로는 대제사장만 일년에 단 한 번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그들이 물러날 때 모든 음악가들이 흰 세마포를 입고단 동편에 섰다.그들 중 일부는 제금을 들었고 어떤 사람들은 현악기를 들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하프를 가지고 있었다. 나팔 부는 자들과 노래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다 같이 하나로 모여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할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했다.” (14) 얼마나 대단한 광경과 음악이었을까! 그 정 중앙에는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음악가들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흥분된 일인가! 따로 구분되어서 존경스러운 임무를 부여받았고 하나님께 노래하고 연주했다. 그리고 그들은 순결함의 상징인 세마포를 입었다.

그의 음악가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신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넘어왔다. 그것은 음악적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단순한 직업이 아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음악가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요구 사항은 그들이 성령 충만한 것이다. 그들은 갈라디아서 5장에 나타난 것처럼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 보일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성질이나 자아나 조급함은 회개해야 할 죄악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기분파적인 음악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동료 음악가들이나 당신의 삶에 주어진 하나님의 소명의 중요성을 낮춰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각 개개인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 생활에서도 중요한 영향 가운데 하나다. 나는 항상 얼마나 많은 시편들이 음악 감독을 위해 특별히 쓰여졌느냐에 매력을 느껴왔다. 이 시편들은 목소리와 악기들을 위해 편곡되고 준비하고 연습시키고 회중들을 가르치도록 음악감독에게 주어졌다. 우리가 사용하도록 받은 수단은 그 자체로서 사람의 손에 주어진 가장 강력한 도구다.

음악이 성령의 영향하에서 사용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길을 준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의 마음 깊숙히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게 한다. 그것은 사람의 굳은 마음과 그에게 대항하는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그것은 고민하는 영혼을 위로하고 억눌린 영혼을 평온하게 만들며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준다. 그것은 다른 방법으로는 도달하지 못했을 존경과 축하의 높은 경지로 사람을 인도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장 영광스러운 선물 가운데 하나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백성들의 교화를 위해 사용하도록 음악 감독인 당신의 손에 주신 것이다.

(p.136) 음악은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시는 고속도로의 역할도 하지만 최대의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이런 힘이 적에 의해서 사용될 수도 있으며 그는 그것이 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악을 위해서도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육신의 통제하에 있는 음악은 교회 생활에 심각한 손해를 입힐 수 있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훼손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음악감독으로서 당신의 책임은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음악을 선택하고 성가대와 앙상블을 연습시키고 예배를 인도하며 그 외의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이 기본적인 책임 외에도 간혹 간과되는 가장 중요한 소명이 있다. 나는 그것이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의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점에 주의하지 않고는 아무리 당신의 프로그램이 탁월하고 성공적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실패로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진정한 목회가 무엇이지, 진정한 예배는 무엇인지, 그리고 예배를 이끌어 가는 사람으로서의 그들의 소명과 책임이 무엇인지를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당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지도해야 할 당신의 책임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성악가나 음악가들은 좋은 일보다 더 많은 해를 끼칠 수도 있다. 자신들을 단순히 종교음악의 연주자로만 생각하는 교회 음악가들은 자기를 단순한 대중 연설가로 생각하는 목사보다도 더 좋지 않다. 그는 세련된 화술을 구사할 지는 몰라도 영적인 것이 결여되어 잇다. 연주가들은 그들의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줄 수도 있고, 청중의 박수 갈채를 받을 수도 있고 그들이 하는 것을 즐길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의 근본적인 책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이룩할 수 없으며 그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는 시선이 멀어지게 된다.

이런 음악의 특성 때문에 음악 목회자의 소명에는 하나님 중심보다 사람중심으로 될 요소가 원래부터 있다. 음악의 특성과 기질 때문에 이 분야의 재능을 받은 사람들에게 따라 다니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쉽게 자아와 경쟁심과 질투심을 자라게 하는 모태가 되기도 하며 교회 안에서 중요한 갈등의 산실이 되기도 한다. 나는 교회의 음악 목회가 전투과로 언급되는 것을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루시퍼가 천국에서 추방되었을 때 성가대석에 떨어졌다고도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우리는 웃겠지만 얼마나 종종 이 말이 사실인지 가슴 아파해야 한다.

어떤 곳에서는 음악분야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교회음악 목회가 너무 중요해져서 다른 사역들은 그 주위에서 서성거려야 하는 교회도 보았다.(p.137) 부끄럽게도 많은 교회에서는 성가대 연습이 기도회 모임 시간 동안 열린다. 이것은 노래나 연주가 기도보다 더 중요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흥회 때 실제로 찾아오셔서 음악만을 제외한 교회의 모든 분야에 은혜를 줄 수 있는 교회도 있다.

매체의 특성 때문에 영적인 면보다 육적인 면에 더 영향을 끼치는 요소도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성악가들이나 음악가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의 재능을 사용하기 보다 인간의 재능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되는 간혹 있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음악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떤 헌신도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무리 듣기나 하기는 좋아도 영적으로나 지속적으로 유익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의 감정을 고조시킬 수는 있을 지는 모르고 설교자와 회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게 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우리의 소명에 실패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한 것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보다 우리에게로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면 우리의 임무에 실패한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람으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복음의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우신 기준이 우리 모두가 얻으려고 애쓰는 기준이 되기 바란다.

p.138

말과 음악의 힘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는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혹은 사람들의 사고 방식에 적합한가? 심지어는 결과를 좋아할까 싫어할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볼 때 하나님의 기준에 적합한가가 되어야 한다.

 

친애하는 음악 감독님께

당신에게 보낸 내 마지막 편지에서 음악의 고유한 힘에 관해서 언급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음악은 도덕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 음악 자체는 내적으로 선이나 악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음악은 중립이지만 사용하는 사람들이 선한지 악한지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 이 말도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면에서는 음악은 그 작은 희고 검은 음표들이 결합되어 작곡가가 의도하는 세계관이나 메시지를 담은 소리를 내게 되는 순간 더 이상 중립적이지 않다. 음악 그 자체가 말로는 나타낼 수 없는 진술이 된다.

음악가들이나 작곡가 자신들의 진술에 의하면 최근 40년간의 많은 세속 음악들은 국가나 교회, 가정의 권위에 반항해서 태어났다. 그것은 간혹 지금까지도 전통을 대표하는 어떤 것이라도 뒤집어엎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것은 서구 사회가 기초하고 있는 유대-기독교적인 원칙들을 조롱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균형을 깨트리려는 매우 성공적인 노력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 드럼 장단에 맞춰 행진을 해 왔다. 이 음악은 오락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 영적인 힘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종교가 되었다. 실제로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전통적인 종교와 마찬가지다.

(p.139) 스코틀랜드의 시인 칼라일(Carlyle)은 언젠가 내게 한 나라의 음악을 만들게 하라 그러면 누가 그 나라의 법을 만들든지 개의치 않겠다. 내가 그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라고 했다. 상당 부분 이것은 우리 나라에도 사실이다. 젊은 세대에 의해서 사회적 신분에 대한 온순한 반동으로 시작된 것이 마약으로 이끌리고 그에 의해서 자라는 삶의 방식이 되었다. 수년간 그 둘은 나란히 나아갔다. 쓰여지고 녹음된 음악은 더 이상 이런 반역과 생활방식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개발하고 마음에 정착시키는데 불확실한 용어들로 표현하지 않았다. 당신은 그 음악이 말하고 있는 것을 알기 위해서 더 이상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 메시지는 크고 분명했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신이 되어서 그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절하고 예배하게 되었다. 음악은 신이 되었고 이 신에 대한 어떤 도전도 성공하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것은 협상할 수 없는 영역이고 죽기까지방어될 것이다. 그것은 매우 개인적이다. 어떤 주제라도 토론할 수 있지만 내 음악만은 안 된다.

더 나아가기 전에 나는 이 마지막 10년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 쓰여졌다는 말을 하자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가장 아름다운 음악과 서정적인 가곡들의 일부가 이 기간동안 작곡되었다. 나는 음악이 1940년대나 그 이전의 소리가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당김음을 거부하지도 않고 기타나 드럼은 교회 생활에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판단하고 음악에 관한 일방적인 태도는 삼가야한다.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살제로 반역적인 세계가 보증하는 음악이라면 이것은 그 자체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모든 세대는 그 세대의 음악을 가지고 있었다. 패트리샤와 내가 사역을 시작하던 때를 회상해보면(그 때 우리는 젊었다) 우리가 사용하던 음악의 상당 부분은 날카로움이 있었다. 또 어떤 음악들은 동료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던 것보다 더 격렬한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실제로 전통주의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한 음악은 균형이 깨진 것은 아니었다. 그 음악은 가사가 말하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메시지와 음악 사이에 정직한 결혼이 있었다. 선율과 화음이 결코 리듬에 정복당하지는 않았다. 리듬은 음악의 전진을 결국 도왔고 결코 주도세력이 되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 주도세력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가사였다. 그러나 그것은 같은 말을 하는 음악과 결합되어서 그것은 강력한 매체가 되었다. 강한 리듬이 없이 노래가 실제로 그것을 만들었다. (p.140) 한편 오늘날은 연주되고 듣는 음악 가운데 얼마나 많은 노래들이 휘몰아치고 큰 리듬에 종속되어 있나하고 생각해 본다. 최근까지는 선율과 화음과 리듬 사이에 건전한 균형이 항상 있어왔다고 생각된다.

친애하는 음악감독님, 최근에 내가 당신에게 보낸 편지 첫머리에서 말한 것을 다시 한번 말하면 당신은 당신의 손에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가장 강력한 도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수천년간 하나님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세속에서도 인식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음악은 영혼의 열정을 직접적으로 나타낸다. 사람이 저속한 열정을 나타낸 음악을 들으면 그 사람도 저속한 열정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오래동안 저속한 열정을 일으키는 그런 음악을 습관적으로 듣게되면 그의 인격도 그런 형태로 만들어진다. 간단히 말해서 나쁜 종류의 음악을 들으면 그도 나쁜 종류의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생활 가운데서 음악의 놀라운 힘을 처음으로 생각하는 세대는 아니다. 아마도 전 역사 가운데 개인의 인격에 미치는 음악의 영향에 대해서 가장 많은 관심이 주어졋을 것이다. 음악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과 접촉하고 있다. 내 아내 패트리샤는 이 분야를 연구해 왔다. 이 편지에서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연구에서 발견한 몇가지만 말해보자. 그 가운데 하나는 음악은 인간에게 중요한 생리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애틀랜타에 있는 죠지아 침례교 의료센타의 의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미숙아나 몸무게가 적게나가는 아기가 음악을 들으면 몸무게도 빨리 늘고 산소도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생후 11일 된 아기들에게 한 시간과 한 시간 반 동안 매일 주의 깊게 보살피면서 음악을 들려주고 음악을 듣지 않은 아이들과 16일간 비교해 보았다.

발티모어에 있는 성 아뉴스 병원에서 클래식 음악을 엄선해서 환자들에게 들려 주었더니 통증이나 불안 때문에 약을 필요로 하던 사람들의 요구가 크게 줄었다. 한 의사는 30분 가의 음악이 발리움(Valium) 10mg과 같은 효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음악은 또한 뇌와 어린 아이들의 학습능력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1996219일자 뉴스 위크지에 교육에서 음악의 긍정적인 힘을 나타내는 왜 학교는 생물학을 포기하는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 라이넬 핸코크(Lynnell Hancock)플라톤이 음악은 교육을 위한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필수적인 수단이라고 말했다. 이제 과학자들은 그들이 믿기로는 왜 음악이 뇌가 더 높은 사고형태를 가지도록 훈련시키는지 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구진과 어빈(Irvine)은 두 그룹의 미취학 아동들을 통해서 음악의 힘을 연구했다.(p.141) 한 그룹은 매일 피아노 레슨을 받고 또 매일 합창을 했고 다른 그룹은 하지 않았다. 8개월 후에 음악적 나이로는 3살이 된 이들은 수수께끼를 노련하게 풀었으며 세상을 정확하게 보는 능력인 공간지능이 또래들보다 80%나 높았다. ‘조기 음악교육은 어린 아이의 논리적인 능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어빈 고든 쇼(Irvine physicist Gordon Shaw)는 말한다. ‘그러나 음악 교육은 종종 학교 예산이 줄어들 때 제일 먼저 깍이는 장식품이 되고 있다.’ 음악 감독이며 어린이 성가대의 감독이기도 한 당신은 아이들을 가르칠 때 그들이 배우는 노래를 통해서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으며 아이들의 배우는 능력과 합리적인 사고에 공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음악을 주신 한 이유가 아닐까?

우리 생활에서 음악이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영역은 정서적인 영역이다. 정서의 영역은 그것이 기호나 양식과 만나게 될 때 아마 가장 영향력이 커진다. 모든 사람은 특정 양식에 대한 기호를 가지고 있다. 만약 누가 당신에게 왜 그런 종류의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많은 경우의 대답은 느낌이 좋다고 말할 것이다. 음악은 우리 정서에 거대한 힘을 미친다. 나는 이 점을 내가 보낼 편지의 아드레날린 고조냐 성령이냐?(Adernaline Highs versus the Holy Spirit)"에서 언급하겠다.

많은 과학적인 연구들이 음악이 사람들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언급해 왔다. 그러나 이 점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성경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음악이 행동에 미치는 힘과 독특함을 알 수 있다. 특히 영적인 분야에서는 더 그렇다. 사무엘상 16:14-18, 23절에서 우리는 악령에게 고통받는 사울의 이야기를 읽는다. 그의 신하가 수금 잘 연주하는 사람을 추천하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음악이 그에게 미칠 긍정적인 효과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아버지의 양을 치고 있던 다윗이 부름을 받앗다.“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23)

1613절에 의하면 다윗은 이미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었다. 그의 노련한 연주가 상황을 호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가 선택하고 연주한 음악에는 악령을 물리치는 힘이 있었다. 단순히 재능있고 노련한 음악가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 자체로도 강력한 도구인 음악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종의 손에서 사용될 때 더 큰 힘을 가지게 된다.

(p.142)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음악이 가질 수 있는 강력한 영적인 힘을 볼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음악은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 사용되었다. 역대상 25:1절은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령한 노래는 어떤 번역에는 예언하다로 되어있다-역자 주)

음악은 그 자체가 언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다. 그것은 메시지를 전달할 가사를 꼭 가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음악이나 노래의 편곡이 원래의 텍스트와 동일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지 분별해야 할 때 특별히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한다 몇 년 전에 있었던 경험을 예를 들어 이야기하고 싶다.

벨기에의 브뤼셀에 있는 하드 락(hard rock)" 몇몇 라디오 방송국에서 매주 2시간씩 진행하는크리스챤락 음악을 진행해 달라는 부탁을 해 왔다. 이 방송국들은 기독교 세계에도 그들의 음향(Their sound)"과 잘 어울리는 음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레코드 가게에서는 구할 수 없는 새로운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잠재된 청중이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이 프로그램을 이 나토(NATO)의 점점 늘어가는 영어권 사람들을 위해서 영어로 방송하기를 원했다. 나는 그 방송국의 음향(Sound)"에 충실하기만 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누구와 인터뷰하든지 어떤 간증을 하든지 어떤 자료를 제공하든지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나를 이들 방송국에 초청하는데 출발점이 된 브뤼셀 국제침례교회에서 이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동안 전화 상담자 까지 두어가면서 기도하도록 후원을 했다.

이 프로그램이 몇 달 진행된 후 그 방송국들은 음악이 너무 하드(Hard)”하지 않다고 내게 알려왔다. 그들은 내가 기독교인 체육인들과 인터뷰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하나님에 관해서 이야기하거나 자유롭게 자료를 제공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문제는 음향에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음향의 크리스챤 락이 매우 많이 있었지만 내가 그들이 원하는 음향에까지 나아가지 않았다는 그들의 말은 사실이다. 수백장의 솔로와 그릅의 앨범들을 조사하면서 나와 아내는 더 이상 넘어서는 안 될 어떤 지점이 있다는 확신에 도달했다. 나는 이미 나의 개인적인 취향을 상당히 넘어서 있었다. 상담자와 기도자들을 만나본 후 나는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당신들 가운데 내가 이들 세속적인 방송국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비난하기 전에 나와 본질적으로 같은 일을 불어로 하던 두명의 벨기에 크리스챤에게서 배운 점을 말하게 하라. (P.143) 더 이상 이 일을 계속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후 이 두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들이 2년 이상 이 일을 계속하면서 얻은 반응이 어떤 것이었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그들의 복음 제시가 매우 명확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도 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전화 상담자를 두었고 성경과 자료들을 제공했다. 그러나 각 프로그램이 하드,메탈 크리스챤락으로 꽉 차면서 그들이 내게 말한 것은 완전히 놀라운 것이었다. 주께서는 전화로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말씀해 오셨다는 것을 알지만 2년 간 단 한 사람만 접촉을 해 오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나는 많은 생각을 해 본 후 음악의 강력한 메시지가 가사의 메시지를 제압해버렸다고 결론내렸다.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있을까? 그들의 프로그램은 청취자가 매우 많은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청취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음악을 사랑하는 동안 복음에는 접촉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적 메시지를 가진 음악이었다.

음악은 언어다. 교회에서 사용할 음악을 선택할 때 우리는 가사의 메시지를 없애버리는 음악을 선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은사 가운데 하나가 분별의 은사다.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빌립보서 1:9-10). 확대 해석한 번역(The Amplified Version)에는 너희가 무엇이 활기찬 것인지 깨닫도록 배우고...가장 높고 가장 좋은 것을 깨닫고 그리고 도덕적인 차이점을 분별하며라고 번역하고 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가 좋아하지 않는가에 따라서 음악을 선택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삶의 다른 영역에서는 성경에서 배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좋아하는 것도 하지 않는 많은 것들이 있다. 우리는 타락한 인간성과 우리에게 미치는 죄의 영향력의 실체를 고려하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선하고 오래된 인간 본성이 오래 됐을 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선한 것은 아니며 그래서 우리는 좋아한다고 해서 아무 것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성경에서 명백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까? 빌립보서 19절에서는 하나님과 서로간에 대한 사랑에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점점 더 풍성하게 된다고 추정된다. 빌립보서의 다음 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P.144)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함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결정과 선택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다. 특히 우리가 그를 가장 영화롭게 하는 음악-그가 누구인지를 가장 잘 연주하는 음악-을 선택하려고 할 때는 더욱 그렇다.

 

(P.145) 편지 28

아드레날린 고조냐 성령이냐?(Adrenalin Highs or The Holy Spirit?)

올바른 생각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를 하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노래할 때 그들의 마음을 닫아 버린다. 사도 바울은 영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 성령 안에 있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아무런 생각도 없는 예배나 축하는 공허한 드림을 낳을 뿐이다.

 

친애하는 음악 감독에게

수년 전에 나는 크리스챤 정신과 의사에게서 인간의 행동에 미치는 아드레날린의 영향을 자세히 연구한 책을 한 권 받은 적이 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 책은 아드레날린 중독이 마약 중독과 같은 증상을 낳는다고 했다. 나도 개인적으로 그 연구와 관련이 있는데 나도 한 때 아드레날린 중독이었다.

내 인생에서 그 때 나는 육상선수였다. 나의 연습은 건강상의 이유로 죠깅의 상태를 넘어섰다. 나는 최소한 일주일에 40마일을 달렸다. 나의 달리는 습관은 내게는 너무나 중요하고 필요하게 되었고 거의 모든 것이 달리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나는 달리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하려고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않고는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우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의 모든 증상을 다 가지고 있었다. 나는 목회에도 열심이었지만 내게 있어서 죠깅은 하나님과의 Q.T(Quiet Time:성경을 읽고 조용히 묵상하며 기도하는 시간-역자 주)보다 더 중요했다. 밤에 잠자리에 들었을 때 다음 날 아침 달리기 위해 일어나는 것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연달아 이틀 아침을 달리지 못하면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당신은 내가 아드레날린 고조라고 불릴 수 있는 달리기로 인한 정신적 고조를 중단하는데서 오는 허탈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146) 그 연구는 음악이 인체에 ,특히 아드레날린 상태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분야다. 많은 교회음악 지도자들은 음악이 사람들에게 특히 그들의 정서에 미칠 수 있는 강력한 영향력에 대해서 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바로 앞의 편지에서 음악은 그 자체로서 인간 영혼에 강력하게 말하는 언어라는 확신을 말한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것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심지어는 1600년대에 작곡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는 목표는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음악은 인간 영혼의 표현이기 때문에 영혼에 영향을 미친다. 똑같은 방법으로 그것은 정서에도 강력하게 말한다. 왜냐하면 영혼은 정서의 자리(Seat of Emotions)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서는 다양한 심리적 징후를 낳는 음악에 의해 움직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몇 개월 전에 선교 지도자그룹을 위한 국제회의에서 이런 상황을 보았다. 어느날 저녁 근처 도시에서 온 성가대가 예배의 한 부분을 인도했다. 어느 한 시점에서 그 지도자가 단순하고, 재미있어서 외우기 쉽고 리드미칼한 합창곡인 주여, 우리는 당신을 보기 원합니다.”라는 노래를 가르쳤다. 이 노래를 몇 차례 부른 후에 나는 횟수를 세기 시작했다. 이 똑같은 악절을 성경말씀으로 강조도 해 가면서 거듭 거듭 불렀다. 무려 18번이나 전조도 해 가면서 불렀다. 노래가 끝났을 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어서서 고조된 정서를 가라앉히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이 그룹은 보수적인 그룹으로 생각되었다. 쉴 틈없는 비트로 반주를 하면서 가사나 선율을 계속해서 반복하면 보통 진지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아드레날린 고조로 인도했다.

우리 교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이런 유형의 끊임없는 반복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그것은 중독증상의 아드레날린 고조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제 정신이 아니게 하며 최면술등에 쉽게 걸리게 만든다. 그의 저서 가짜 부흥에서 저자와 강사 하네그라프(Hank Hanegraaff)는 이런 유형의 반복에 내재해 있는 위험을 나타내 보여주는 강력한 예를 들어가면서 토론을 했다. 사람들을 조종하기 원하거나 잘못되게 인도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 위력을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것 같다.

당신은 그 노래의 가사와 음악이 노래하는 사람들을 거의 최면술에 걸리게 할 정도로 주여, 우리는 당신을 보기 원합니다와 같은 노래를 얼마나 자주 듣거나 불렀나?

만약 음악이 충분히 리듬적이라면 전 회중을 정서적인 찬양고조에 다다르게 할 수 있다. (P.147)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를 보기 원하는 것이 주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더 나타내 보이고 싶어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주께서 거듭 거듭 말씀하고 계시는가?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교훈을 주셨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7-8). 이런 유형의 반복에 우리가 참여할 때 염불하는 것 같은 챤팅(Chanting)은 이방인과 같이 하는 죄를 짓는 것이냐? 정말로 우리는 어느 정도는 같은 것을 계속 반복함으로 하나님의 주의를 끌려고 하는 것이냐, 아니면 사실은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정서의 고조를 위한 것이냐?

사랑하는 감독, 하나님이 당신의 지도하에 맡기신 사람들의 정서를 어떻게 연주할 것인지 주의하고 주의하라. 당신의 사람들이 교회에 예배하러 와서 찬양에 의한 정서의 고조에 너무 익숙해 있어서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면 그 예배가 공허한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더 높은 정서의 고조를 찾아서 이 그룹에서 저 그룹으로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찾아다닌다. 비극은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 강렬한 정서적인 반응에 지나지 않을 때에도 그것이 성령이라고 믿도록 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편지가 내 경우와 마찬가지로 영혼과 마음사이에 균형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것인가를 생각나게 해 주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사용하도록 주신 이 놀라운 선물-음악의 선물-의 고유한 힘을 항상 깨닫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주께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하신 말씀을 항상 우리 앞에 두어야 한다:“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24)

 

편지29

성과 속의 구분(Discerning between the Holy and the Common)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라.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브리서 12:28-29)

사랑하는 음악감독

지난 몇 년간 북미 교회에는 혼란스러운 경향이 있었고 그것은 자라고 있는 것 같다. 많은 교회들은 불신자들이 교회 성가대나 오케스트라에 참여하는 것을 점점 허용하거나 심지어는 초빙하기까지도 한다. 따라서 나는 이런 질문들을 많이 받게 되었다. “우리 교회 예배 인도자들에 불신자들을 포함해도 되느냐?”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이며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적절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문제가 왜 일어나며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실 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미 몇몇 다른 편지에서 지적한 것처럼 최근에 우리 교회에서 예배관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한때는 하나님과 그의 요구가 우리 예배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는데 지금은 인간과 그의 요구가 간혹 중심적인 것처럼 보인다. 많은 예배인도자들은 지금은 일종의 두려움-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두려움이 아니라 인간들이 스스로 즐기지못할까봐 두려워하는-에 의해 조종되고 동기유발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훔치고 있고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려고 하는 것과 온전한 그의 것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다.

(p.149) 복음으로 세상과 접하고 목회하려는 우리의 열심 때문에 사람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한다고 우리는 확신했다. 오늘날 서양 복음주의 교회의 좌우명이 사람이 가장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근사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역행했다. 차라리 우리의 예배의식(Service)-하나님께만 집중되어야 할 예배의식이-예배를 하나의 도구로 보는 우리의 예배(Worship)에서 나오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그 자체로서 매우 중요한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목표에 이르는 한 수단으로 보고 있다.

성경은 사람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는한 실제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다.-가룟유다. 예수님의 발에 부어지는 향유의 낭비에 대해 그가 얼마나 화를 내었는지 기억하라. 이 향유는 매우 비싼 값에 팔려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발에 부어지는 향유가 낭비라고 생각지 않으셨다. 더군다나 식사 준비할 시간에 마리아가 그의 발 옆에 앉아있는 것을 시간낭비라고 생각지 않으셨다. 사실은 마리아가 더 좋은 것을 택했다고 칭찬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 혼동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의 요구보다 더 우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유일하게 적절한 선물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말함직한 표현은 교회는 먼저 다른 사람을 위해 살고, 그 다음에 교회는 하나님을 위해 산다일 것이다.

예배의 지도자들인 우리는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인가?”가 아니라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하는 것이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소명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종종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향한 사랑을 더 많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는 사람을 의식하는 결과를 낳게되었다. 인간중심의 예배는 하나님의 속성 자체와 맞지 않는다. 우리가 예배에서 무엇을 하는가에 가치를 두게 될 때 그것은 하나님에게보다는 인간에게 가치를 두는 결과를 낳게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를 만나라고 우리에게 주신 바로 그것을 악용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성()이 속()이 되는 한 영역이다.

진정한 예배는 예배자의 숭배가 표현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특성아 항상 반영되어야 한다. 챨스 웨슬리(Charles Wesley)거룩함이 거룩함으로 인도한다고 적절히 말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이 느낌과 필요에 집중될 때 우리는 거룩함으로부터 돌아서서 속()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P.150)우리 주 예수님에 따르면 가장 크고 첫째되는 계명은 네 마음을 다 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신 것이고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39)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 순서를 뒤바꾸었다. 사람의 욕구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요구를 무시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에스겔 44:10-23에서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사독의 아들들과 사람들 앞에 서서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레위의 아들들의 차이점을 읽을 수 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더 고귀한 사명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이것은 결코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거나 그들의 요구는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갈보리의 사건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 누구라도 사람을 돌보지 않으려는 핑계로 하나님의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부모들에게 이런 자세를 보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난하면서 이 점을 분명히 했다(마가복음 7:11). 사람도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에스겔서의 이 귀절에서 사람이 무시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성과 속 깨끗함과 부정함의 차이점에 관해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을 가르친 것은 레위 사람 사독의 아들들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레위사람들은 사람들이 예배하기 원하는 방법을 따랐기 때문에 그들의 책임은 문지기와 번제물 잡는 것과 사람들 앞에 서서 그들을 섬기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이 레위의 이 아들들에게 내게 가까이 나아와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며 또 내 성물 곧 지성물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이 자기의 수욕과 그 행한바 가증한 일을 담당하리라”(에스겔 44:13)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배에서 거룩한 것을 세속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한편 사독의 아들들에게는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그들이 내 성소에 들어오며 또 내 상에 가까이 나아와 내게 수종들어 나의 맡긴 직분을 지키되”(에스겔 44:15-16) 라고 했다. 이 모든 축복은 사람들이 예배하기 원하는 방법을 거절한 결과로부터 온 것이다! 사독의 아들들은 하나님만의 것인 예배를 속된 것으로 만들거나 더럽히기를 거절했다. 거룩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경외할만한 것이다. 더구나 예배의 인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더 경외심을 가지고 해야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교회 음악목회에 불신자들을 포함하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방법을 통해서 불신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바램에서 하는 것이다.(P.151) 나도 이런 일련의 생각을 이해하고 또 이런 재능 있는 사람들의 능력이 음악의 질을 현저히 높여준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이것이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들을 낮추는 하나의 신호가 된다는 것도 안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말한다. 성가대원들과 반주자들은 예배인도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배를 인도하는 일에 세상을 초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부르시는 것을 세속적인 것으로 만들게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찬양의 제사를 인도하는 일과 그를 경배하는 일에 참가시키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 사실은 그가 이미 이 점에 관해서 말씀하셨다.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에스겔서의 몇 구절로 돌아가 봐야한다: “대저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내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전을 더럽히므로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케하는 것이 되었으며 너희가 내 성물의 직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내 성소에 사람을 두어 너희 직분을 대신 지키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에스겔 44:7-9).

나는 이것은 자기를 위해 한 말이라고 믿는다. 레위인들은 불신자들을 제사드리는데 참여하게 해서 성소를 더럽혔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강등되었다.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예배인도의 책임을 맡겨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꼭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그것이 마치 속된 것인 것처럼 다루는 것은 아닐까?

예배에서 그의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예배의 분야에 관계없이 놀라운 특권이며 책임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에 그 무엇이라도 고의로 방해가 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된다. 히브리서 12장에서 저자는 우리를 얽어메기 쉬운 것들을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여진 경주를 인내를 가지고 예수를 바라보며 달려갈 것을 권한다. 그는 또 하나님의 훈련과 우리가 살도록 부름 받은 거룩한 삶에 관해서도 말한다. 그는 또 모세가 하나님에 대해 가졌던 경외심과 두려움을 말하며 새 언약의 중보이신 하나님이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는 그러므로...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브리서 12:28-29)고 말함으로 믿음의 부르심과 거룩함으로의 부르심으로 요약했다.

(P.152)하나님의 거룩한 빛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의 빛 안에서, 우리가 흔들릴 수 없는 천국을 받음의 빛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빛 안에서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히브리서 12:26)고 하신 사실의 빛 안에서 우리는 우리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경외심과 떨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는 소멸하는 불이시다. 우리는 거룩한 것을 속된 것으로 바꾸는 죄를 범치 말자.

 

 

(p.165) 편지 32

예배에서 연속성의 확립

물이 흐를 수 있도록 홈통을 자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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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인도자의 역할은 예배자들을 행복하게 하거나 그들에게 자신들의 능력을 인상깊게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어디에 와 있고 어디로 가는지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을 포함한다.

 

친애하는 담임목사와 음악감독에게

예배의 문맥에서 물이 흐를 수 있도록 홈통을 자르기에 관해 쓰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문장은 루이스(C. S. Lewis)에게서 나왔으며 예배인도자들의 책임-예배에서 연속성의 확립- 중 종종 간과된 부분을 서술한다. 수년간 나는 흐름이나 연결을 거의 생각지 않는 예배들을 지켜보았다. 성가대는 어느 한 방향으로 회중을 인도하고 독창자는 또 다른 방향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인도한다. 때로는 회중 찬송과 성가대가 특정한 주제도 없이 따라간다. 그들은 단순히 상관도 없는 노래 그룹들이고 그들 중 아무도 메시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예배는 구색을 갖추는 단편적인 것들로 구성되어진다.

결과적으로 예배가 끝난 후 사람들에게 어떠했느냐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주제를 따라잡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어떤 방향도 계획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특정의 방향으로 인도되지 않았다. 각 예배 인도자들은 각자의 영역만 준비했지 다른 사람의 방향에 관해서는 전혀 몰랐다. 회중 찬송이 선택되어 불려지고 성가대 찬양도 연주되어지고 그리고 설교도 그 각 요소들을 연결시키려는 아무런 시도도 없이 행해졌다.

(p.166) 만약 두 명의 작가가 희곡을 쓰거나 뮤지칼을 작곡하면서 서로 아무런 의논도 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사실 이런 현상이 예배인도자들이 서로 예배에서 협력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홈통이 적절히 잘라지지 않기 때문에 예배의 결과는 잘 흐르지않게 된다.

한 음악감독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항상 이렇게 했습니다. 간혹 새로운 찬송을 가르치려고도 하지만 주로 사람들이 부르고 싶어하는 찬송을 고른다. 회중은 노래하는 예배를 즐기는 것 같지만 나는 내가 음악에서 하는 것이 예배의 다른 요소들과 적합한지는 거의 생각지 않는다. 예배에서 나는 내 분야에 책임이 있고 담임목사는 담임목사의 책임이 있다.“

시나리오가 이렇게 될 때 회중은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움직일지 확실히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단순히 부를 노래를 선택하는 데에는 큰 노력이 필요 없지만 연속성을 가지고 일관성있는 흐름을 가진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기도가 필요하다. 담임목사가 음악을 직접 인도하지 않으려면 음악 감독과 의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일반적인 주제와 시작점, 성가대의 찬양, 사용할 성경구절, 그리고 회중 대표기도의 주제등을 논의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가장 적절한 "위임찬송을 선택하고 메시지의 내용에 가장 잘 화답하는 마지막 찬송을 고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예배에서 회중들이 편안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 그들의 마음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것을 어떻게 연결할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뒤죽박죽된 잡동사니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회중이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기도를 듣기도 하고 , 전해지는 설교를 듣기도 하면서, 정말로 예배하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

수년간 우리는 우리가 인도할 특권을 가진 예배에서 그것은 뜻이 있었다. 나는 전에는 그런 예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이 따라오도록 해왔다. 더 나아가서 어떻게 그것이 그들의 예배를 도왔는지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에겐 처음으로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볼 수 있고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성경봉독, 기도, 설교, 그리고 음악이 하나로 묶여서 예배의 한 부분이 바로 다음으로 인도되었다. 계획을 세우고 기도함으로써 당신은 사람들이 예배에서 훨씬 더 쉽게 하나님께 가까이나아가도록 할 수 있다. (부록에 있는 예배 인도자들을 위한 점검표를 보라)

때로는 교인들이 예배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옮겨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고 예배의 흐름이 매우 자연스럽게 흘러가서 전환이 필요 없을 때도 있다. (P.167)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에서부터 일어날 일까지를 연결해주는 몇 마디의 말이 교인들의 이해를 도와줄 수도 있다.

나는 예배 인도자들이 불필요하게 예배에서 그들의 자리에 뛰어들어가는 것을 간혹 보았다. 이런 일은 메시지가 적절하지 못한 목사들이나 다른 설교자들에게서 매우 자주 나타난다. 이것은 목사나 초청된 강사가 사람들의 마음에 음악이 잘 스며들어가고 있는데 일어선다거나 농담을 해서 분위기를 망칠 때 가장 잘 나타난다. 사람들의 시선이 예배에서 말하는 사람에게로 옮겨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방금 있었던 일을 잊게된다”. 이것은 이미 실제로 일어난 일을 중요하지 않은 일로 만들어버린다.

나는 중요한 어떤 일을 제쳐놓음으로서 일어나지도 않은 일처럼 행동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지금 쓰고 있다. 그런 무감각은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성령을 슬프게 한다. 예배 인도자의 사명은 단순히 페이지나 알려주고 팔이나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다. 예배 인도자의 사명은 회중과 함께 그들을 도와주고 인도하며 이해하면서 참여하고 융화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그들이 마음을 열고 화답하며 그 화답이 적절할 때는 신체적으로나 청각적으로도 화답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예배 인도자의 역할은 예배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거나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어디에 와 있고 어디로 가는 지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어렵지는 않지만 정신적인 각성과 영적인 민감함을 필요로 한다. 방금 부른 노래의 한 구절을 선택해서 다음순서와 연결하는 것은 평범한 것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방금 일어난 일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시점으로부터 그들을 인도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계획에 없던 즉흥적인 기도나 성경귀절이 때로는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다. 계획에 없던 성가대의 찬양이나 회중찬송의 삽입도 예배의 순간을 평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예배 인도자로서 당신의 역할은 회중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예배에서 사람들과 매 순간 만나도록 하는 것에 민감할 것을 요구한다.

(p.168)

편지 33

성가대에게

 

성가대원은 예배하는 사람이면서 예배요원이다. 모든 예배 인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성가대의 역할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회중이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친애하는 성가대원에게

얼마나 놀라운 유산을 당신들은 가지고 있는가! 수많은 음악과 노래에 대한 언급과 함께 노래하는 사람들에 관한 언급이 성경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다. 역대상 15장에는 다윗의 지시에 의한 성가대 구성이 나타나 있다.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하매...”(16). “레위 사람의 족장 그냐나는 노래에 익숙하므로 노래를 주장하여 사람에게 가르치는 자요“ (22). 성벽 건축과 관련하여 느헤미야는 그가 조직한 성가대를 위해 특별한 역할을 했다. 목자들에게 우리 주의 탄생을 알리는 통고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허다한 천군 천사의 반주와 함께 했다. 계시록에서 만만이요 천천이라...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계시록 5:11-12)라고 읽듯이 허다한 하늘의 천군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영광 돌리는 것을 안다. 그리고 어느날 하나님의 구속받은 모든 자들이 노래하는 자들과 그 노래를 결코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과 함께 완전한 노래와 화음으로 천군들과 함께 그 노래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성가대가 될까!

그 때가 올 때까지 교회 성가대의 사명은 본질적으로 성경전체에 걸쳐 나타나 있고 우리도 알 듯이 하나님의 위대한 업적을 선포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성악에 숙련된 사람들을 따로 구분한 이유다. (P.169) 다른 이유는 없다. 이스라엘 주변 국가의 성악가들은 그들의 노래를 불렀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성가대는 오직 그들의 하나님의 노래만 불렀다.

성경시대부터 가장 영광스러운 많은 음악들은 교회작곡가나 세속작곡가의 작품도 마찬가지로 성경으로부터쓰여졌다. 바흐의 칸타타와 오라토리오들, 헨델의 메시아, 그리고 수많은 음악들은 사람들이 합창음악을 통하여 성경의 메시지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합창과 솔로이스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의 그 영광스러운 환희의 송가를 보라. 우리 찬송가 13기뻐하며 경배하세를 보면 알 수 있다.

교회 성가대는 그 다음에 나타난 다른 형태의 합창을 위한 기준을 세우고 모범을 보였다. 이들 다른 합창단들은 모든 종류의 음악을 노래했지만 교회 성가대는 항상 성경의 메시지만을 노래했다. 이것이 수 세기동안 그렇게 존속해 온 이유다-“그의 노래를, 그를 통해, 그에게그것은 교회가 그 첫사랑을 버리기 시작한 최근까지 그랬다. 그 버림은 성가대가 다른노래들을 부르는 데서부터 반영되기 시작했다.

교회역사를 돌이켜보면서 음악이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살펴보면 재미있다. 교회가 배교(背敎)의 기간에 있을 때는 교회는 드라마나 오락쪽으로 더욱 더 돌아섰다. (부록에 있는 교회가 틀림없이 교회였을 때에서 이 점을 충분히 설명했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께로 돌아섰을 때 설교는 그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아갔고 그 되돌아감은 음악에도 반영되었다. 교회 성가대는 더 이상 교인들의 흥미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다. 거듭난 사람들은 교회에 올 때 즐기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미국교회에서 여흥(Entertainment)은 지배적인 추세에 있다. 사실은 그것은 많은 우리들 교회에도 적용된다. 해마다 수백만 달러가 영적인 열매도 거의 없는 일에 쏟아 부어진다. 극장으로 지어진 우리 건물에서 행해지는 연출들은 많은 교회 성가대들을 여흥을 위한 기구로 바꾸어 놓았다. 이것이 우리가 첫사랑을 버렸다는 표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성가대원 여러분, 당신들은 여흥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당신들은 그를 예배하는 교회를 돕기 위해 존재한다. 당신의 책임을 수행하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다. 예배 요원이 되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다. 성가대원 여러분은 음악 자체를 위한 요원들도 아니다. 당신들과 성가대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그보다 훨씬 높은 것이다. 당신들은 당신들 자신들이나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다. (P.170) 이것은 당신의 헌신에 영향을 미쳐서 연습시간을 가지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준 역할에서 당신이 그를 나타내기 때문에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성가대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깨어진 인간관계는 불협화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당신의 책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하나님이 축복하실 단체를 지키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줄 것이다. 당신을 버티기 위해 질투나 비아냥거림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궁극적으로는 당신의 유용성과 성가대가 만들어낼 수 있는 영적인 영향력들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예배의 다른 팀들에게 여러 차례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한 몸의 지체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영광을 위해 건강한 몸으로 기능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목적이다.

할 예기가 많지만 다른 편지에서 하도록 하고 비교적 작은 교회 성가대를 위해 한마디만 하겠다. 당신들은 큰 교회 성가대가 하는 음악들을 할 수는 없다. 그들과 같은 훈련된 대원들도 없고 T.V에 나가지도 않고 반주자의 능력도 어려운 곡은 잘 연주할 수 없고 다른 성가대들처럼 훌륭하지도 않다는 말을 들어왔다. 좋다 그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당신들을 격려하기 위해 한마디만 하자.

당신들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고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한 모든 필요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사람들의 귀를 위해서는 다른 합창단들처럼 좋은 소리를 낼 수 없을 지 모르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소리내느냐가 아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소리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미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그것은 마음의 문제다. 만약 당신이 주일 아침에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가 그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린다면 하나님의 귀에는 큰 성가대가 하나님께 드리기보다는 자기 자신들을 위해 하는 찬양보다 하나님의 귀에는 훨씬 더 탁월한 음악으로 들릴 것이다.

나는 간혹 하나님이 땅 위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모든 음악을 다 받으실 수 있는 하늘의 소리 변환 장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여기 땅에서는 어떤 소리가 나더라도 그것이 그의 귀에 들릴 때는 그것은 구속받은 자들만이 낼 수 있는 소리로 바뀐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귀에는 진짜 음악이다.

나는 성가대를 위해 시편에서 따온 몇 구절을 조금 바꾸어서 당신에게 남겨주고 싶다. 이것이 당신의 목회 사역에 하나의 설명서로 남기를 기도한다.

성가대여 주께 노래하라. 주께 노래하고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그의 구원을 선포하고 노래할 때마다 그의 영광을 선포하라

주의 기이한 행적을 노래하라. 그는 위대하고 찬양 받으실만한 분이시다.

성가대여 노래할 때 그의 앞에 있는 위엄과 영광, 그의 성소를 가득 채운

영광과 권세를 기억하라

 

성가대여 노래할 때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라

그의 거룩함의 아름다움으로 예배하라. 그가 위대한 하나님임을 백성들로 알게 하라

그들은 그의 목장의 양이로다.

 

성가대여 조물주인 주 앞에 백성들로 무릎꿇게 하라. 그는 거룩함으로 옷 입고 그의 보 좌는 영원함이로다.

성가대여 노래할 때 주께 노래하라. 항상 노래하고 주께만 노래하라!

 

(P.172)

편지 34

독창자에게

 

종으로서의 독창자인 다윗의 기도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3:1-5

 

친애하는 독창자에게

이 편지를 쓸 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에게 전하거나 회중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하기 위해 음악을 사용하는 개인이나 앙상블의 성악가들과 음악가들을 생각한다.

독창자들이여 우리는 무엇보다 성직자들이다. 그리고 우리의 사역은 무엇보다 먼저는 하나님께 향한 것이고 그 다음이 사람에게다. 우리는 여흥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니고 음악가의 숫자를 채우기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 설 때 우리는 (P.173) 우리를 선택해서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신자를 대리하는 것이다. 우리가 노래하고 연주하는 것은 그를 위한 것이고 그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 설 때는 우리를 대리한 것도 아니고 흥행을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리하고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 설 때는 우리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가 하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소명과 임무를 다른 데로 돌리는 어떤 일도 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옷을 어떻게 입을지 주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성악가는 그들이 나타나는 바로 그 방법 때문에 나를 보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어떤 산만한 큰 소리나 민감한 복장은 예배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의 삶에서는 어떤 때에도 자리가 없다.) 전에 어떤 음악가가 회중들 앞에 서 있을 때 입었던 옷 때문에 당황했던 적이 있다. “예수의 이름으로한 어떤 일도 그 이름의 특성을 나타내야 한다고 전에 지적한 적이 있다. 예수의 이름에 합당치 않은 옷을 입을 때 우리는 주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의해 형태가 갖춰져서는 안 된다. 친애하는 독창자들이여 사람들이 당신에게서 받는 첫 인상은 당신이 어떻게 보이느냐이다. 당신의 옷입는 방식이 당신의 연주나 노래를 취소시킬 수도 있다. 옷 입는 것을 주의하라!

둘째로 몸을 어떻게 움직이느냐의 문제다. 신체의 움직임으로 나타낸 것은 음악처럼 크게 말할 수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들 앞에 서 있는 당신의 목적에서 산만하게 하는 어떤 행동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당신의 신체로 하는 것이 메시지를 도와줄 수도 있고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도 있다. 불필요한 손의 움직임은 주의를 산만하게 할 수도 있다. 오늘날에는 흔하지는 않지만 신체의 다른 부분으로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이트클럽에서처럼 마이크를 애무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의 특징이 아니다. 당신은 거기에 당신을 보여주러 나온 것이 아니다. 당신은 하나님에 관한 어떤 것을 보여주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이다. 당신은 필연적으로 당신이 서있는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얼굴이다. 그러므로 움직임에 주의하라. 노래로 선포하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도 도와줄 수 있는 성악가를 보는 것은 얼마나 영적으로 만족스러운가! 당신의 몸과 눈은 음악이나 가사와 마찬가지로 노래의 조화를 이루는 일부분이 된다.

이것은 수년간 내게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서유럽과 미국 그리고 캐나다의 교회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현상이다. (p.174) 이 현상은 세상의 오락정신이 얼마나 교회의 틀에 강한 인상을 미쳤느냐하는 증거가 된다. 세상에서는 음악에 붙여진 가사가 예술 형식이 된다. 이 예술 형식은 온갖 종류의 형태와 소리를 가진 노래라고 불린다. 그것이 어떤 소리가 나던 그 목적은 즐기는 것이다. 가수는 청중을 위해 그리고 청중에게 노래를 부른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오늘날 얼마나 많은 크리스챤 가수들과 음악가들이 같은 생각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크리스챤이긴 하지만 노래는 청중을 위해 연주되는 예술형식으로 보인다. 이것은 때로는 가사가 예술형식에 보조적인 것이 되기 때문에 가사가 말하는 것을 무시하게 만들어버린다. 더 이상 음악은 가사의 메시지를 전하는 도구가 근본적으로 될 수 없고 둘은 이제 노래 부르기 위한 노래가 되었다. 그리고 종종 그 노래는 가사의 진짜 의미를 묘사하지 않는다.

몇 년 전에 본 크리스챤 T.V의 예를 들어보자. 그 프로그램은 흘러간 성가 가수들이 부르는 추억의 히트송이었다. 이 가수들은 모두 잘 알려진 사람들이고 수년간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스러웠다. 그러나 내가 보았을 때 그것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찬송가 40)를 부를 때 문제가 생겼다. 그 첫줄과 후렴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말로 되어있다는 것을 당신도 알 것이다. 그러나 그 가수들이 기도를 노래하는 것을 보고 들었을 때 나는 그들이 그 기도를 기도로 다루지 않고 예술형식으로 다루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가사를 노래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말을 과장해서 말할 때 그들은 웃으면서 서로 쳐다보고 상대방의 등을 몇 차례 두드려 주기도 했다. 그들은 영국 사람들이 말하는 얼큰한 좋은 시간(Jolly good time)"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끝냈을 때 그들은 서로 축하하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연주에 보내는 박수를 듣고 있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는 예술 형식으로 격이 떨어졌다. 그들은 기도말을 노래하고 있었지만 그 메시지는 그들의 마음과 멀리 떨어져있는 것 같았다.

슬프게도 이것은 우리 모든 교회에서도 역시 일어난다. 독창자들은 기도말을 노래하기 위해 일어서지만 기도를 예술형식으로 취급한다. 그들이 어떤 기도를 노래할 때 그들은 청중을 쳐다보면서 웃기도 한다. 그들의 입술은 하나님께 말하면서 그들의 눈과 몸은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회중은 그들의 노래에 초점을 맞추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는 그들의 기도를 듣는 청중이 되었다. 우리의 기도에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것이 왜 놀라운 일이 되겠는가?

(P.175)왜 내가 이 점에 관심을 가지는가? 나는 이것이 제 3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고 있다. 우리는 그에게 기도할 수 있는 그의 자녀로서 가진 놀라운 특권을 예술형식으로 격을 떨어뜨렸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예배형식을 진행하면서도 마음은 그로부터 멀어져 있었던 삶을 거듭 거듭했던 것과 거의 비슷해 보인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은 그들이 그에게 손을 들고 기도하더라도 듣지 않으시겠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때뿐만 아니라 지금도 똑같이 거룩하다. 그에게 하는 우리의 기도는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거룩하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하신 것을 우리는 얼마나 빨리 속된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 점에 관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노래할 때 정말로 하고 있는 일로 돌아 가보자. 만약 기도를 노래한다면 당신이 기도할 때 회중에게 머리를 숙이라고 요청하라. 기도할 때 눈을 감는 것이 당신의 관습이라면 눈을 감고 하라. 발성 선생이 노래할 때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라. 만약 당신이 연주를 하고 있다면 그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동료 성악가여, 우리는 연주자가 아니다. 만약 당신이 눈을 감지 않거나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면 당신의 눈은 위로 향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의 눈은 당신이 하고 있는 말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 거기에 가 있다. 아무도 당신에게 언제나 청중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고 설득하지 못하게 하라. 만약 당신이 당신의 입술로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있다면 눈으로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 사람들에게 연설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들을 쳐다보라.

수년이 지나서야 우리는 이것이 우리가 목회할 특권을 가진 회중들을 위한 강력한 교수자료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당신에게 그들이 그들 자신의 정신으로 참여하도록 도와줄 것을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성악가들이여 당신이 어떻게 노래하는지에 주의를 기울이라. 나는 지금 기술적으로 노래를 잘 하는 것을 항상 요구하지는 않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목소리 훈련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재능을 최대한 개발해야 한다고 믿는다. “달란트비유는 음악가에게도 적용된다. 그러나 모든 매력적인 가능성을 가진 정교한 사운드 시스템의 출현과 함께 우리는 이제 지금보다는 실제로 더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다. 이것이 아무리 유용하더라도 그것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할 가능성도 항상 있다. 나는 하나님을 알리기보다 그들의 목소리 효과를 더 인상깊게 남긴 성악가들을 보아왔다.(P.176) 이렇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자로서의 책임에 실패한 것이다.

하나님께 집중하기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가 훨씬 더 쉽다. 이런 일은 메시지를 강화하기보다 메시지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반주 테이프를 사용하거나 혹은 그것을 지나치게 크게 틀거나 편곡을 너무 지나치게 할 경우에 일어날 수 있다. 당신의 사운드 트랙이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메시지가 음악 때문에 죽어버리는 음악과 가사의 잘못된 결혼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대리하는 것은 장엄한 의무이다. 그를 존경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재능을 사용하는 것은 많은 기도와 말씀 읽을 시간, 그리고 매일 우리를 그 앞에 겸손하게 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때로는 그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편리하지는 않지만 적법한어떤 것을 음악적으로 하는 것을 삼갈 것을 요구한다. 당신이 높은 소리를 낼 수 있다고 해서 모든 노래의 마지막을 노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메시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꼭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높은 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보다 당신의 성악 솜씨를 더 많이 나타내는 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음악 전도자가 당신이 그것을 낼 수 있다면 그것을 과시하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이 농담이기를 나는 바란다.

나는 성악가들과 기악 연주자들이 청중을 그들의 훌륭한 기교로 잘 인도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에 관한 생각으로부터 그들의 탁월한 연주능력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경우를 보았다. 얼마나 빨리 목회가 연주로 바뀔 수 있는가! 얼마나 빨리 하나님께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그 길에 장애물이 될 수 있는가! 얼마나 빨리 우리의 재능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데서 우리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는 데로 돌릴 수 있는가!

얼마나 빨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어떻게 소리내는가 하는 것을 자랑할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 성악가들과 음악가들이 우리 매일의 삶에서 십자가를 민감하게 생각해야하는 이유다. 갈라디아 6:14에서 사도 바울은 무엇을 자랑하고 싶으면 당신이 이룩한 것을 자랑치 말고 예수의 십자가와 그것이 당신을 위해 한 것을 자랑하라고 했다. 이것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매우 크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누구나 되돌아올 수 없는 길로 머리를 돌려야 한다. 이미 결정은 났다. 협상의 여지는 없다. 십자가는 어떤 타협이나 협상도 없다. 인간의 박수갈채를 자극하는 어떤 것도 십자가의 그늘에 녹았다.

세상은 십자가가 당신 삶의 특정 영역에만 해당하고 음악경력에는 분명히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도록 유혹할 것이다. (P.177) 그러나 성경은 자신을 낮추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신그리스도의 자세를 항상 가질 것을 말한다. (빌립보 2;8)

십자가가 정말로 당신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세상으로부터 나오고 인간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당신 허벅지에 상처를 입었다면 당신이 절룩거릴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자랑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이 한 일이나 할 수 있는 것을 자랑치 말라. 사람들이 당신에 관해 말하는 것을 자랑치 말라. 하나님이 당신의 사역에 어떻게 축복하셨고 어떻게 당신을 사용했는지 자랑치 말고 감사하고 십자가만을 자랑하라

왓츠(Isaac Wastts)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했다. “주여 내가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하소서 나를 유혹하는 모든 헛된 것들을 그의 피에 바치겠습니다

친애하는 성악가/음악가들이여, 자랑하고 영광을 돌립시다 그러나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합시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게합시다. (갈라디아서 6:14)

 

P.178

편지 35

반주자들에게

 

다윗이 레위 사람의 어른들에게 명하여

그 형제들을 악기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자로 세우고

(역대상 15:16)

 

친애하는 반주자들에게

나는 이 편지를 건반악기 연주자들에게 쓰고 있다. 대부분의 우리 교회에서는 그들은 회중찬송 반주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가대 반주와 전주, 봉헌송, 후주 그리고 갑작스러운 여러 종류의 반주들을 담당하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예배할 여러 분위기를 제공할 음악적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쓰고 있다. 그러나 이 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가 전에 쓴 편지에 있는 예배상황(Worship context)-성경에 규정되고 모델이 나와있는-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당신은 한 예배 팀을 담당하고 있다. 그 팀은 몇 명으로 구성될 수도 있고 수백명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 규모가 어느 정도이던지 예배의 전주에서 후주까지 사이에 일어날 많은 것을 지원하고 있다. 아무리 당신이 훈련을 적게 받았던지 아무리 당신이 숙련되었다고 느끼더라도 당신의 책임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예배팀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먼저 하나님께 봉사하고 다음으로 사람에게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구약의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당신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이 예배에서 그를 만나도록 도와줄 책임을 가지게 구별되었다. 당신은 당신의 재능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P.179) 당신의 책임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준 재능으로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나 자신이나 자존심이 설 자리는 없다. 또 반대로 남들만큼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했거나 당신이 원하는 만큼의 뛰어난 음악가가 못된다고 느껴서 죄송하게 생각할 자리도 없다. 당신이 하나님께 당신이 가진 최선의 것을 드린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전부다. 결국 하나님의 눈은 당신의 손가락에 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마음에 가 있다. 길 건너 교회의 사람들은 그들의 반주자의 재능에 맞추어 아아아아아, 오오오오오할 수도 있다. 그들은 반주자의 환상적인 봉헌 연주에 축하를 보내고 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으셨는데. 반면에 아무도 그 날 아침에 당신이 연주한 봉헌 연주에 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도, 아무도 감동을 받지 않더라도-하나님만 제외하고-당신이 연주할 때 그는 당신이 그만큼 연주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는지 아신다. 그리고 당신이 연주할 때 너무 많은 실수를 하지 않고 그것을 하기 위해서 당신이 얼마나 그를 의지했는지 그는 아신다. 그리고 당신이 연주할 때 당신은 무엇보다 그를 기쁘시게 하기 원했다는 것을 아신다. 그리고 당신은 해냈다.

건반에 관한 책임 외에도 함께 일하는 예배팀의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책임이 또 있다. 그것은 때로는 당신이 하는 일을 끝까지 참고 견디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기독교인들도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는 최악의 사태가 교회 안에서 그것도 음악 사역에서 나온다. 우리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매우 창의적으로 되고 우리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 온갖 이유를 내세우더라도 만약 그것이 조화보다는 불화를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적의 손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교회 음악 사역에서는 날마다 우리 자신을 죽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기회를 많이 주시는 것 같다.

이 분야에서 매우 민감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다. 나는 실제로 피아노 반주자나 오르간 반주자가 물러날 때가 되고 다른 적임자를 물색해야 할 때가 된 것을 많이 보아왔다. 수년동안 그 일을 열심히 해왔기 때문에 기꺼이 그 자리를 내어놓지 않으려 하고 그것이 사역을 긴장시키는 경우를 보았다. 언제 물러날 지를 깨닫는 데는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쓸모없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지체 안에서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P.180) 우리는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된”(빌립보서 2:7) 우리 주를 나타내는 데 있어서 마음으로부터 종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당신의 책임과 관련된 일에 도움을 주기 위해 내가 보고 들은 경험을 이야기 해주고 싶다. 먼저 전주에 관해서 말하면 전통적으로 이것은 마음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말하자면 조율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수년간 많은 교회들에서 그것은 잡담하는 사람들을 위한 반주시간이 되었었다. 그것은 명상을 위한 전주라기보다는 대화를 위한 전주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더 좋을 정도다. 다른 편지에서 이 점을 충분히 설명했다. 그러나 이번 편지에서도 다루는 이유는 당신이 이 점을 많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기도하면서 선택한 곡들은 그들이 예배하러 온 분에게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때때로 당신이 연주할 곡을 말로 소개해보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연주할 곡이 찬송가나 찬송가 편곡이라면 말로 소개해도 되고 교회에 O.H.P가 있다면 스크린에 비추는 것도 한 방법이다. 변화를 위해서는 당신이 연주하는 곡과 관련된 성경귀절을 비추어주는 것도 좋다. 이것은 단순히 말로만 하는 것보다 낫다. 양들은 몰려가는 것이 아니고 인도된다. 한가지 더 전주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면 그것은 예배의 음색을 유지해야지 회중이 운동경기에 참석한 것처럼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찬송가 반주에 관한 것이다. 항상 반주에 강조점이 주어져야한다. 악기는 노래하는 것을 인도하기도 하고 강화하기도 한다. 반주는 그 특성상 주된 것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주된 것은 회중이 노래하는 것이다. 반주는 절대로 노래를 안 들리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경우를 많이 보았다. 특히 오르간과 오케스트라의 경우가 많았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회중반주를 하는 악기(Instruments with Congregational Accompaniment)"에서 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노래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래를 거의 들을 수 없게 되고 그래서 더 크게 노래하기보다는 노래를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듣기 위해서 금방 노래를 멈춘다. 나는 오르간이 어떤 경우에도 모든 음전(Stop)들을 다 뽑아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악기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주 예수 이름 높이어의 몇 마디를 반주한 후에 마지막 절에서 모든 음전들을 다 사용해서 그 자리가 음악과 메시지의 날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같았던 때를 상기한다. (P.181)

회중 반주와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이 하나 더 있다. 이것은 당신이 사용하는 화음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이 노래할 때 반주 코드는 성부에 의해서 자연스런 화음을 이루도록 해야한다. 나는 얼마나 자주 찬송가에 있는 테너 성부를 노래하고 싶었던지, 하지만 반주자가 스스로 만든(Creative) 화음을 사용하고 있어서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이것은 혼자 독창을 할 때는 적당하겠지만 선율 외의 다른 것을 노래할 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음악적인 무식함과 교회 찬송가에 대한 친숙하지 못함과 함께 미국 교회에서 화음 찬송이 거의 불려지지 않는 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의 신자들이 예배하는 것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선율만 따라 노래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고 싶을 것이다.

예배 인도자로서 우리가 떠 해야 할 일은 예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관해 매우 민감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예배에서 봉헌송이나 후주로 연주하려고 계획한 것이 성령이 예배에서 하신 것과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봉헌송 바로 앞에 회중에게 깊은 엄숙한 분위기가 있다면 봉헌송으로 강렬한 리듬의 음악을 준비했더라도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그 분위기를 도와줄 수 있는 찬송가나 합창을 연주하는 것이 영적으로 민감한 것이다. 이것은 후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악 연주자나 성가대가 단상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도 전에 과장된 마지막 연주를 해서 확신감을 줄여버리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가장 의미 있는 봉헌송이나 후주는 많은 경우에 매우 단순하면서도적합한합창이나 찬송가들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 드리는 예배에서 위축되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민감하고 기꺼이 조정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어떤 사람들은 남들처럼 유연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더 그를 의지하는 것을 배우고 그리고 그의 방식을 이해하게 될수록 우리를 놀라게 만드신다. 기쁨으로 그를 섬기라! 당신의 삶에서 그의 부르심을 기뻐하라! 당신의 손가락으로만 하지말고 당신의 마음으로도 당신의 악기를 연주하라!

 

(P.182)

편지 36

방송실 사역자에게

 

우리가 한 봄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로마서 12:4-5

 

방송실 사역자에게

당신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당신들 자신을 예배팀의 필수적인 파트로 보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삶의 많은 영역에서도 그렇듯이 목회에서도 교회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게 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도 꼭 같이 중요하다. 이것은 사실은 하나님이 교회를 일하도록 세우시는 것과 꼭 같은 방법이다. 성경은 교회를 전체의 선을 위해 한 부분으로서 일하는 여러 지체로 구성된 몸과 비유한다.

시청각의 세계가 기본적으로 당신이 보고 듣는 것에만 제한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사운드 시스템이나 특별한 조명이 없었다. 지금도 어떤 세계에서는 여전히 그렇지만 당신이 살고 사역하는 곳에서는 그렇지 않다. 근래에 신체의 당신 부분은 매우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당신의 임무는 많은 교회에서 필수불가결의 요소가 되었다.

이 편지는 근본적으로 당신 사역의 기계학에 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분야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간접적으로는 관련이 있다. 수년간 방송실 사역자와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종종 그들은 자신들의 기능을 기본적으로 기술자의 한 명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 분야의 노련한 몇몇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나는 당신들 가운데도 이 점에 관해 그런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또 사람들이 당신들을 이런 시각으로 보고 마이크나 켜고또는 조명과 비디오나 작동하는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본다는 것을 알았다. (P.183) 당신은 단순히 레버에 손가락이나 얹어두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눈은 모니터만 쳐다보고 앉아있는 그런 시시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말하거나 노래할 때 혹은 패트리샤가 건반을 연주하거나 노래할 때 당신은 거기에 우리와 함께 있다. 우리는 먼저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권능주심을 바라서 그를 의지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팀의 일원으로서 한 지체가 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혼란스럽지 않고 명확하게 전하도록 우리와 함께 최선을 다하는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종종 방송실 사역자가 예배 전의 기도회에 포함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이 기도회에 초대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도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감사한다. 그리고 페트리샤와 내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다 겪었기 때문에 당신을 위해 충실히 기도한다는 것을 확실히 말할 수 있다. 한 부주의한 방송사역자가 패트리샤의 피아노에 있는 마이크를 끄고 듀엣이 절반이나 지나가도록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놀라서 매우 높은 찢어지는 볼륨으로 마이크를 켜는 바람에 모든 것을 망쳐버렸던 황당한 일이 있었다.

방송실 사역자 당신은 우리와 함께 호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당신이 손을 움직여서 사람들의 시선이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시스템을 너무 늦게 켜거나 너무 크게 트는 것과 같은 사소한 실수도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한번은 예배의 끝부분에서 정말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있었는데 갑자기 성전의 조명이 다 바뀌어버렸다. “회중석의 조명은 다 침침해지고 스포트라이트가 내게로 향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고 방향도 놓치고 회중의 시선도 놓쳐버렸다. 예배에서는 평상시 예배를 위한 조명을 특별히 주문해 두고 있었지만 우리의 주문은 지켜지지 않았다. 나중에야 그때 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연주회분위기로 상황을 바꾸는 것이 가장 좋을 거라고 기술자중의 한 사람이 그렇게 결정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분위기는 성공했지만 예배는 망쳤다.

당신이 맡고 있는 일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보는 것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일한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기도와 준비, 그리고 자각과 깨어있음을 요구한다. 우리는 서로서로 섬길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섬기고 있기 때문에 항상 종의 마음을 가wu야 한다. 우리와 함께 섬기는 것에 대해 감사한다.

 

(P.189)

부록1

성가대 서약서

 

우리 교회 성가대의 일원으로 참여함에 있어서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의 예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영적이고 실질적인 의미를 충분히 깨닫기를 바랍니다. 성가대의 영향력은 매우 크며 교회의 모든 영적인 생활이 성가대의 상황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경험이 증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이 성가대 서약서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심사숙고하고 당신의 서명을 해서 성가대원의 자격을 받기 전에 담임목사에게 보내주기를 바랍니다.

1. 이로써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며 그의 권위가 성령의 힘으 로 내 삶을 지배하는 것을 인정합니다.

2. 나는 교회 성가대의 일원으로서의 중요함과 의미를 깨닫고 교회 생활 끝까지 성가대의 직무와 유익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3. 이 서약서의 조건을 따르는데 실패하면 교회의 판결에 의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징벌을 받을 것을 서약합니다.

4. 나는 음악 감독이 요구하는 평가에 나의 목소리를 복종할 것과 성가대를 위해 적합한 그 의 결정을 받아들일 것을 동의합니다.

5. 나는 성가대 연습에 규칙적으로 참석하고 음악감독과 성가대의 모든 활동에 충실한 지원 을 다 할 것을 약속합니다.

6. 나는 내 입술의 증언이 나의 기독교인으로서의 경험의 표현이 되며 그래서 내 삶에서 행 동과 성품이 항상 거룩할 것을 서약합니다.

7. 나는 교회 예배에서 노래를 인도하고 있지만 내가 그렇게 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주의 를 끌지 않아야 하며 나의 모든 목적은 내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 스도인으로서의 행동과 겸손함으로 사람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야 함을 당연 한 것으로 여깁니다. 나의 야망은 나의 주를 영화롭게 하는 제한된 목적 안에서 모든 찬 양과 독창과 찬송을 부르며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이어야 합니다.

8. 나는 교회 안에서의 모든 섬김이 천국과 지옥의 힘 사이의 영적인 전투이며 영혼의 적이 항상 찾는 것은 회개와 은혜의 사역에 대한 방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을 알고 나는 담임 목사와 함께 짐을 나누어지며 끊임없는 기도와 확신 가운데서 헌신하겠습니다.

성가대원으로서의 자격의 의미와 상황을 주의 깊게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나는 기쁘게 동의하며 위 조항들을 지킬 힘을 주실 성령을 믿습니다.

 

서명

 

날짜

 

역자의 약력이 필요하시면

 

 

성철훈

총신대학 교회음악과 졸업

총신대학 대학원 교회음악과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현 명지중학교 교사

계산교회 음악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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