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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솔로몬 성전의 음악 2010-11-22 본문
솔로몬 성전의 찬양대에 관한 소고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찬양대는 음악적인 면에서 선교 초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신학적인 면에서 특히 예배학적인 측면에서 정리가 잘 되어 있지 못하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구약 성전에서의 찬양과 제사의 관계를 통해서 오늘의 찬양대가 배워야 할 것들을 알아보고자 한다.
먼 구약 시대 솔로몬 성전의 찬양대는 어떤 조직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연습은 어떻게 했는지 실제 연주의 장면은 어떠했는지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히브리의 전통과 관습이 성전 음악에 미친 영향
솔로몬 성전 찬양대의 조직에 앞서 성전 찬양대 이전에도 유대인들은 찬양을 위한 조직을 가진 적이 이미 있었다.
역대상 6장31절에서 32절 사이를 보면 다윗이 솔로몬 성전이 완공될 때까지 회막에서 섬길 사람들을 임명했다.
회막이란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해서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 만든 일종의 이동식 제사 장소였다.
이 회막이 다윗 시대에 언약궤와 함께 시온산에 세워졌고 이곳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보면 레위지파 헤만과(33절) 그 형제 아삽(39절) 그리고 에단(44절)이 나온다 이들은 족장들로서 솔로몬 성전의 중요한 음악가들이기도 하다.
이들이 성전이 완공될 때까지 회막에서 순서를 정해서 반열대로 찬송하는 일을 행했다.
그리고 다윗이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이송할 때에 찬양대를 조직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에도 역시 위의 세사람이 중요한 역할들을 했다.
이 언약궤 이송은 대단히 큰 행사였는데 이 때 동원된 아론 자손과 레위지파의 숫자만 해도 그핫 자손 중 족장 우리엘과 그 형제가 120명,므라리 자손 중 족장 아사야와 그 형제 220명,게르솜 자손 중 족장 요엘과 그 형제가 130명,엘리사반 자손 중 족장 스마야와 그 형제 200명,헤브론 자손 중 족장 엘리엘과 그 형제가 80명,웃시에 자손 중 족장 암미나답과 그 형제가 112명으로 도합 868명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이 행사를 도왔다. 이 사람들은 언약궤를 직접 메거나 그 일에 종사한 사람들이고 찬양하는 사람들의 명단과 조직도 상당히 세분화되어 있었다.
우선 위의 세 족장은 놋제금을 크게 치는 일을 했다 이 놋제금은 우리 전통 음악에서 악장이 박을 쳐서 음악의 시작을 알리듯이 일종의 신호용 악기 역할을 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리고 스가랴와 아시엘, 스미라못, 여히엘,운니,엘리압,마아세야,브나야는 비파를 타서 여청에 맞추는 일을 했다. 여기에 나오는 여청에 맞춘다는 말은 아직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또 맛디디야,엘리블레후,믹네야,오벧에돔,여이엘, 아사시야는 수금을 타서 여덟째 음에 맞추어 인도하는 자였다.
여기에서도 여덟째 음이란 것이 어떤 음계의 이름인지 아니면 이미 알고 있는 어떤 선율의 이름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또 레위사람 족장 그나냐는 노래에 익숙해서 노래를 주장하여 사람에게 가르치는 자였다.
종교 행사에서 사용하기 위한 음악을 교육하는 일은 이미 고대 에집트왕국에서도 있어 온 일이었다.
에집트의 신전들에서는 사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Cheironomy라고 하는 교육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이것은 손가락이나 손목의 모양을 통해서 음악을 지도하는 한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언약궤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대단한 규모의 이송방법을 택했을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실제로 언약궤는 유대인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일을 수행하기도 했다.
민수기 31장 6절의 성소의 기구를 가지고 나가서 전쟁했을 때 이긴 사실이나 여호수아 3장 15-16절의 요단강 건널 때 언약궤를 멘 자들의 발이 물에 잠기자 흘러내리던 물이 그친 사실,또 여호수아 6장 6절 이후의 여리고성 함락시 언약궤를 가지고 성을 돌았을 때 성이 무너진 사실 등에서 언약궤는 굉장한 위력을 발휘했다.
이 외에도 그전에 언약궤를 옮기다가 잘못해서 웃사가 죽은 일이 있었다(삼하6:7).이 사실이 다윗에게는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이번에는 정해진 규례대로 옮기려고 하는 것이다.
언약궤는 레위인 제사장이 어깨에 메고 옮겨야 하는데 소가 모는 수레에다 싣고 간 자체가 잘못이었으며 또 제사장도 아닌 웃사가 손을 댄 자체도 잘못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에 유대인들이 너무 소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최대한 정성을 다해서 규례대로 옮기려는 것이다. 궤를 멘 사람들이 최대한 정성을 다해서 6걸음을 옮겼는데도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자 안도한 다윗은 그 자리에서 소와 짐승들을 잡아서 제사한 사실에서도 이 행사가 얼마나 신중하고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이 언약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있었을 때 궤로 인하여 그 집이 복을 받은 사실도 사무엘하 6장 12절에 기록되어 있고 이 사실을 다윗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귀중한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행사였기 때문에 다윗은 너무 기뻐서 힘을 다해 춤을 추며 기뻐했다.(삼하6:14-16)
이 언약궤 이송시에 사용된 악기 또한 후에 성전에서 사용된 현악기인 비파와 수금 그리고 타악기인 제금이 사용되었다.또 이 행사에서 사용된 음악 조직도 후에 성전의 음악제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개인적으로 다윗은 음악에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다.젊은 시절에 다윗은 수금의 명연주가였다.
사무엘상 16장 14절 이하에 의하면 사울이 악신 들려 괴로워 할 때 사울의 신하들이 수금 잘 타는 사람을 구해서 연주하면 그 악신이 물러갈 것이라고 말하자 찾아온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고 그의 연주를 듣고 사울은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을 일컬어서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삼하23:1)라고 했으며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노래인 150편의 시편 성경 중 73편이 다윗의 저작이며 아모스 6장 5절에 의하면 악기도 제조했다. 이런 다윗의 음악적 재능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서 성전의 음악을 제정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또 사무엘의 선지 학교에서도 음악이 가르쳐졌거나 연주된 것을 알 수 있다.사무엘상 10장 5절에 의하면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사무엘의 선지학교 생도들이 악기 연주에 상당히 능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제도적인 음악교육과 다윗의 음악적 재능 그리고 회막과 언약궤 이송에서 이미 연주된 경험들 또 같은 가문에서 계속해서 세습되는 음악적 기량들은 성전 음악의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2.찬양대의 구성
30세 이상된 레위 지파의 남자들을 조사해 보니까 38,000명이었다. 이것은 관례에 의하면 30세에서 50세 사이의 남자를 말한다(민수기4:3,23,30,35,39,43절) 이 가운데 찬송하는 자가 4,000명이라고 한다. 물론 이 4,000명의 사람들이 항상 동시에 연주했으리라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 성전 건물의 크기나 평일의 제사 의식이 이런 대규모의 인원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일의 제사를 위해서는 24반차의 레위인 찬양대가 따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 24반차의 찬양대원들을 살펴보는 것이 솔로몬 성전 찬양대의 연구에는 매우 핵심적인 일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 (간혹 에단이라고도 불린다)의 자손들로서 악기를 연주하면서 동시에 찬양했다.
이들의 명단을 살펴보면 아삽의 아들은 삭굴과 요셉,느다냐,그리고 아사렐라로써 이들은 각각 1,3,5,7번째의 순서를 맡았으며 여두둔의 아들들은 그달리야와 스리,여사야,시므이,하사뱌 그리고 맛디디야로써 각각 2,4,8,10,12,14번째의 순서를 맡았다.마지막으로 헤만의 아들들은 북기야와 맛다냐,웃시엘,스브엘,여리못,하나냐,하나니,엘리아다,깃달디,로암디에셀,요스브가사,말로디,호딜 그리고 마하시옷으로써 각각 6,9,11,13,15-24번째의 순서를 맡았다.
이 24명의 레위인들은 또 각각 자기 형제와 아들들을 동원해서 12명이 한 반차(Ward)씩을 조직해서 섬겼다.
그러면 이 24반차의 288명과 4천명의 노래하는 자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288명의 찬양대원이 4천명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들이 성전에서 찬양하는 시간은 역대상 23장 30절의 기록에 의하면 ‘새벽과 저녁마다 서서 여호와께 축사하며 찬송하며’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최소한 매일 두번씩은 찬양했다. 그리고 이 외에도 매 절기에도 제사가 있었으니까 이 때에도 찬양했다(민수기 10장 10절).
3.찬양대원의 직무
찬양대의 직무를 어떤 순서와 방법으로 수행했는지 알아보자. 우선 288명의 찬양대원들은 향리에 나가서 거주하며 순서에 따라 직무를 수행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예 골방에 거하면서 다른 일은 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역대상 9장 33절에 의하면 ‘ 또 찬송하는 자가 있으니 곧 레위 족장이라 저희가 골방에 거하여 주야로 자기 직분에 골몰하므로 다른 일은 하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족장들 외의 다른 찬양대원들은 향리에서 문지기들처럼(역대상 9장25절) 일주일마다 와서 섬겼다.
그렇다면 288명의 찬양대원들이 한꺼번에 와서 다 같이 섬겼을까? 아니면 반차별로 했을까?
이 점에 관해서 A.Sendry는 세가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첫번째의 것으로는 24반차가 평일에는 하루 3그룹씩 섬기고 안식일에는 두 그룹씩 해서 6그룹이 섬긴다. 그래서 3×6+6=24그룹이 일주일에 한번씩 돌아가면서 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월절이나 장막절 또 다른 중요한 명절에는 한번에 8그룹씩 나와서 3번 했으므로 24그룹이 하루에 다 연주했다는 것이다.
두번째의 설로는 각 반차가 1주일씩 계속 섬기고 다시 자기 향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래서 24주마다 교대한다는 주장이다.
세번째의 설로는 평일에는 한 반차가 안식일에는 두 반차가 섬겨서 일주일에 8반차씩 되니까 3주마다 교대한다는 것이다.
Sendry자신은 위의 설 가운데서 세번째 설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두번째 설을 지지하고 있는 것 같다.
역대상 9장 26절에 의하면 문지기들도 1주일마다 와서 섬겼고 제사장들도 24반차였으니까 1년에 1주일씩 두 차례를 섬겼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그는 두번째 설이 연습기간이 너무 길고 연주 기간이 짧아서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하지만 이것은 유대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과소평가한 데서 나온 것 같다.
일례를 들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혹은 야훼라고 부르는데 정확한 이름은 잘 모르고 있다.이것은 원래 히브리어에 모음이 없어서 자음만으로 읽었는데 서기관들은 자음만 있는 히브리어로도 하나님의 이름을 바로 읽을 수 있었다(히브리어 문법 중 케팁과 케레 참조).
그러나 자음만 있는 히브리어를 실제로 소리내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정확히 읽을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기 위한 조심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릴 정도로 그렇게 정성을 다하는 히브리인들이었기 때문에 1주간의 연주를 의해서 23주를 연습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들이 와서 섬기는 기간 외에도 성전 낙성식등에서 보듯이 국가적으로 큰 행사나 축제등이 있을 때는 반차에 상관없이 함께 와서 섬겼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성전의 찬양대원들은 섬길 때에 노래만 한 것이 아니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도 불렀다. 물론 이 당시의 악기는 오늘날의 악기들처럼 화음을 훌륭하게 연주하거나 다양한 음색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겠지만 당시로서는 고도의 연주 기술과 최선을 다한 연주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성전 음악가들의 구성과 직무에서 오늘날의 찬양대와 특이하게 다른 점은 모든 대원들이 남자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남성 찬양대이다. 이것은 제사장이나 문지기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들로만 구성된 찬양대가 화음도 없는 단선율의 노래를 Chanting했을 때 그 효과는 오늘날의 우리 합창과는 많이 달랐겠지만 수금과 비파와 제금과 어우러진 찬양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엄숙한 느낌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24반차가 노래할 때 각 반차가 어떤 색다른 특징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그것은 연주 형태에 있어서 아삽의 아들들은 신령한 노래를 했고 여두둔의 아들들은 수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했으며 헤만의 아들들은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아 노래하는 자였다.
물론 이 귀절이 아삽의 아들들은 악기는 전혀 연주하지 않고 순전히 무반주의 노래만 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세 집안 자녀들을 언급하면서 연주하는 악기가 달랐다는 것은 각 반차의 음악이 어는 정도는 각각 특색이 달랐으리라고 볼 수 있다.
성전 음악의 특징 가운데 또 하나는 관악기가 현악기나 타악기에 비해서 선호도가 낮았다는 것이다. 성전이 건축되기 전 성막에는 나팔부는 레위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언약궤를 성막에 안치할 때와 또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나팔을 연주했다.이들은 제사장 그룹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일상의 제사 의식에서는 노래하면서 동시에 악기를 연주해야 했기 때문에 노래하는 입으로 악기를 동시에 불 수 없어서 관악기가 일상의 제사에서는 배제된 것으로 생각된다.
4. 찬양대의 교육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23주동안 연습해서 1주일간 성전에서 섬겼다면 이들의 연습과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어떤 사람들이 이들을 가르쳤을까?
역대상 25장의 명단에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이름은 빠져있다.
이들은 다윗 시대의 중요한 음악가들이었고 한 가문의 족장들이었다. 이들이 24반차에는 빠져 있으면서 어떤 방식으로 성전에서 섬겼을까? 역대상 9장 33-34절에 의하면 골방에 거하여 주야로 자기 직분에 골몰하므로 다른 일은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대대로 레위의 족장이요 으뜸이라 예루살렘에 거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위의 3사람이 바로 이들이 아니었을까?
이들이 주로 하는 일은 무었이었을까?
주야로 찬송하는 일에 골몰한다는 것은 항상 연주만 했다는 말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사람이 매일 밤낮으로 노래만 계속할 수는 없고 또 이 일을 위해서는 이미 24반차의 사람들이 준비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족장들은 성전의 음악에 관해서 더 연구하고 그 24반차의 사람들과 때로는 4천명의 찬양대가 동시에 연주하기도 하는 큰 행사를 위해서 교육도 담당했으리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들의 교육 방법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앞에서 언급한 Cheironomy 기술이 도입되었을 것이다.
이 방법은 아직 기보법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에는 흔히 사용되었던 효율적인 교수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제자가 스승의 손이나 손가락 모양을 보고 음을 높게 혹은 낮게 또는 길게 짧게,세게 여리게 등으로 연주하는 방법이었다.
이 시대에는 오늘날의 우리처럼 합창 성부가 없었으며 또 혼성합창이 아니었기 때문에 Magadizing(남자와 여자가 같이 노래할 때 자연히 일어나는 완전8도 화음을 말함)현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양자가 다 화음이나 악곡 구조에 관해서 보다는 리듬이나 선율의 흐름 등에 치중했을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동양음악은 전통적으로 화음보다는 선율과 리듬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에 서양음악이 화성과 대위법적인 음악으로 발전한 데 비해서 동양음악은 리듬과 선율을 중시해서 꾸밈음 등이 발달했다.
그리고 그 선율선도 꾸밈음 등의 화려한 표현 아래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경우가 많이 있다.
성전의 성악 음악에 관한 교육은 대체로 위와 같이 이루어졌으리라고 볼 수 있지만 기악 음악은 어떻게 교육했을까? 찬양대원들이 성전에서 섬길 때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악기 반주에 맞추어 노래도 했기 때문에 찬양대원들의 악기연주는 필수적이었다.
이런 악기 연주 교육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사무엘의 선지 학교에서부터 있었던 일이다.
악기는 성악과 달리 조율의 문제가 있고 성악에 비해서 대체로 초보자들이 연주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이 찬양대원들은 역대상 25장 7절에 의하면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하다고 했다.
배워서 익숙하게 될려면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역대상 15장에 보면 각 가문별로 다른 악기들을 언급한 것이 있는데 아마도 각 가문에서 특정한 악기들을 교육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고대의 악기는 이미 언급한대로 화음이나 선율 자체의 반주는 아니었겠지만 하지만 여러 사람이 동시에 연주하기 위해서는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각 반차 12명이 연주할 때 그 중에 한 명이 아마 음악의 시작과 끝을 지시해서 나머지 대원들과 함께 연주했을 것이다. 이것은 역대하 5장 13절의 기록에 비추어 보면 알 수 있다.“나팔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했다”고 하는데 여러 사람이 동시에 악기와 노래를 연주하기 위해서는 지휘자나 인도자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교육하는 아삽,헤만 그리고 여두둔은 역대상 25장 6절에 의하면 왕의 수하에 속하여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들이 직접 왕의 명령을 받았거나 혹은 왕실 직속 기구로 존재하는 어떤 찬양대 지도자들로 생각된다. 이것을 보아 다윗왕의 찬양대에 관한 관심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찬양대의 존재 목적은 물론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할 때 정기적으로 섬기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외에도 국가적으로 특별히 기념할 날 (성전 봉헌식등)에 연주를 담당했다(대하 5:12-14)
오늘날에는 큰 교회들에 유년부 어린이에서부터 장년이나 심지어는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찬양대가 있지만 솔로몬 성전에는 오직 30세 이상의 레위인 남자로만 구성된 찬양대가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노래할 때 문제가 되는 음역의 문제나 기술상의 문제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후대에 와서 중세 교회에서는 음악이 발전함에 따라 높은 소리를 필요로 하는 합창곡에서는 여성 대신에 어린 남자아이들의 boy soprano를 활용했다.더 후대에는 이 아이들 대신 카스트라토를 찬양대에 고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은 아직도 러시아 일부에는 남아 있다고 한다.
5.찬양대원의 복장
찬양대원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에는 평상시에 입던 의복을 그대로 입고 한 것이 아니라 역대하 5장 12절에 의하면 세마포를 입고 찬양했다.
세마포는 계시록 19장 8절에 의하면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찬양대원들은 옷만 깨끗하게 입을 것이 아니라 생활과 행동도 올바르고 구별되어야 한다. 위의 장면은 언약궤를 성전에 안치한 후에 모든 찬양대원들이 함께 찬양한 것으로써 아주 감격적인 장면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언약궤는 굉장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광야생활과 전쟁시에 자기들을 지켜 준 상징적인 것으로 그들은 그 언약궤 위에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앉아 계신다고 믿었다.
블레셋에게 빼앗겼다가 되찾은 언약궤를 솔로몬 성전에 안치했을 때 솔로몬과 그 백성들의 기쁨과 감격은 굉장한 것이었다. 이런 큰 행사에 그들이 특별히 준비한 옷을 입고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찬양대원들이 동일한 uniform을 입는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장점이 많다.
우선 평상복을 입을 때보다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대체로 사람이 입는 옷에 따라서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행동도 그 옷에 어울리게 변한다.
세마포를 입은 찬양대원들은 자신들이 일반인들과는 구별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언약궤를 안치하는 이 엄숙한 순간에 자신들은 방관자가 아니라 이 의식의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했을 때 그 결과는 더 감격적인 것이 되었을 것이다.
역대상 5장 12-14절의 기록에 의하면 노래하는 자들과 제금과 나팔과 수금을 연주하는 자들이 동시에 연주하며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라고 노래할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하게 되었고 이 구름이 얼마나 가득했던지 그 때문에 제사장이 능히 서서 섬기지도 못할 만큼 되었다.
구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며 어떤 사본에는 그래서 이 귀절을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지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 사건이 꼭 세마포를 입고 노래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사건의 흐름을 보면 백성들이 정말 기쁜 마음으로 감격적인 찬송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찼다는 것이다.
즉 찬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그 찬양 중에 임재하셨다는 것이고 이 찬양하는 사람들의 자세에는 세마포 의복도 엄숙한 분위기와 통일감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도 찬양대원들이 찬양대의 유니폼을 착용하는 것은 좋게 보여진다. 다만 그 방법에 있어서 몇 가지 문제점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구교와 개신교,또 개신교 가운데도 교단에 따라서 이 까운의 착용에 대한 견해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신교 안에서도 교회력에 따르는 교회들, 성공회나 루터교등은 대체로 교회력에 따른 색상을 사용해서 찬양대원들의 후드도 흰색, 녹색, 보라색등을 그 절기에 따라서 사용하고 있다.
한편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에서는 대체로 여름용과 겨울용으로만 나누어서 교회력과는 무관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근래에 예배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이런 경향은 서서히 변하고 있는 추세이긴 하지만 교회력에 따른 후드의 사용을 구교적인 것으로 생각해서 한가지 색깔만 사용하는 교회도 아직 많이 있다.
교회에서 색깔이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경부터라고 할 수 있다.
색깔이 너무 형식에만 너무 치우치면 예배의 본질을 등한시할 수도 있겠지만 예배의 지도자와 모든 참석자들이 색깔의 상징적 의미를 이해한다면 절기와 예배를 조화시키고 교회력이 나타내는 상징적인 교훈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이 상징으로 자신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력에 사용되는 색깔들은 각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 의미있는 색깔을 찬양대원들이 사용하고 또 교인들이 그것을 이해한다면 예배도 보다 큰 의미와 효율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참고로 색깔의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흰색:생명의 색으로 승리, 순결,광명,기쁨을 나타내며 흠과 티가 없는 그리스도의 색깔로 표현된다.세례식,임직식,결혼식등에 사용된다.
*적색:열의 색,불꽃의 색,피의 색깔로 교회의 사업과 선교등을 상징한다.성령강림절에서 삼위일체 주일 전날까지 쓰이며 종교개혁 주일과 교회 창립 기념일 헌당식등에 사용된다.
*자색:사람의 마음을 무겁게하는 색으로 명상,참회,비애의 색으로 쓰이며 대강절 전날 저녁부터 성탄절 전날 까지 등에 쓰인다.
*초록색:자연,생명,평화,성장,희망과 선의 색깔과 수난절 3주 전날부터 성회 수요일 전날까지 등에 쓰인다.
*검정색:암흑과 사망의 색깔로 죽음과 비애 ,죄에 대한 탄식의 색으로 성 금요일과 특별한 회개의 날에 사용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색깔들을 사용하는 것은 이 색상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예배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6.찬양대원의 자격
역대상 23장 3절에 의하면 찬양대원의 자격은 30세 이상의 레위인 남자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 관습은 솔로몬 성전에서는 엄격하게 지켜졌지만 오늘날의 신약 교회에서는 신학적인 발전에 의해서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로마의 박해 하에 있었던 초대 교회에서는 찬양대가 구성되기도 어려웠고 예배도 엄격한 의식에 맞춰질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별로 고려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중세 교회에서는 찬양대가 전문화되고 찬양대원들도 사제 계급에 의해서 독점되기도 했다. 그러나 M. Luther에 의해 만인 제사장설이 주장되면서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을 직접 찬양하고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든 신자가 다 찬양대원이 되는 데에는 문제가 생겼다. 교회의 관습이나 예배에 관헤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찬양대원으로 봉사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칙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조직적으로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예배에서 봉사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전반적인 지식을 갖고 있어야 효율적으로 잘 섬길 수 있다. 그래서 교회 관례가 세례교인 이상으로만 찬양대원을 구성하도록 하고 있다.
세례 여부와 관계된 자격 외에도 음악적 지식의 측면에서는 어떤 자라야 자격이 있을까?
그것은 원칙적으로 음악을 “배워 익숙한 자”(역대상 25:7)라야만 솔로몬 성전에서는 24반차에 포함될 수 있었다.
오늘날 교회에서 “배워 익숙한 자”의 기준을 일정하게 두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어떤 교회들에서는 오디션을 통해서 음악적 수준을 헤아려 보고 일정한 수준이 되어야만 찬양대원으로 임명하는 교회들도 있다. 그러나 교인수가 그리 많지 않은 교회들에서는 이렇게까지 할 수 없기 때문에 음악적 능력은 별 문제삼지 않고 추천에 의해서나 혹은 간곡히 부탁해서 찬양대원으로 임명하는 경우도 있다.
이상적인 찬양대원의 자격을 말하자면 세례 받은 신실한 교인으로서 기본적인 음악적 소양을 갖춘 사람이 좋겠다. 그런데 오늘날의 찬양대와 구약 성전의 찬양대와의 차이점 가운데 하나는 성전의 찬양대원들은 자신들이 직접 악기를 연주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지만 오늘날의 찬양대원들은 기악 대원과 성악 대원이 구별되어 있다.
찬양대원이 많은 교회들에서는 그래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반주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찬양대가 구성된 교회는 피아노나 오르간 반주자와 성악대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도 구약시대의 음악과 오늘날의 음악이 워낙 다르게 발전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예배 방식이 구약의 제사와는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솔로몬 성전에서는 기악 음악이 성악 음악의 음역보다 훨씬 넓은 그런 음악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노래할 때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거의 리듬 반주에 그쳤기 때문에 성악과 기악을 동시에 연주할 수 있었으며 특히 무엇보다도 이들은 이런 찬양을 위해서 특별히 배워 익숙한 자들이었다.
거기에 비해 오늘날의 음악은 성악과 기악음악이 그 특징이 아주 다르게 발전했으며 사람의 소리로는 악기의 음역을 다 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기악 음악 - 그것이 합창 반주를 위한 것이라 할찌라도 - 은 상당한 기간, 심지어는 몇 년간 배우지 않으면 도저히 연주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경향을 보면 찬양대원은 전부가 다 음악대학 출신이 아니더라도 반주자는 대체로 기악을 전공했거나 수년간 그 악기를 공부한 사람에게 맡기고 있다.
7.성전의 회중찬송
성전의 회중 찬송에 관해서는 성경에 자세한 언급이 없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특별한 날 모일 때는 함께 찬송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출애굽기 15장에 기록된 모세의 노래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노래했고 이어서 미리암과 여인들도 화답했다는 기록이 성경에 언급된 최초의 회중찬송으로 보여진다.
이 찬송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의 공포에서 구해 주셨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해주셨기 때문에 감사와 감격의 노래가 자연스럽게 터져나온 것 같다.
이런 회중찬송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이지만 성전의 정기적인 제사는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백성을 대표해서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회중찬송을 부를 기회가 별로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특별한 행사로 백성들이 모일 때는 회중찬송이 있었는데 역대상 13장 8절에 의하면 아비나답의 집에서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싣고 나올 때에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가 하나님 앞에서 노래한 기록이 있다.
이때의 노래는 언약궤를 다시 찾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안 기쁨 때문이었다(역대상 13:6,12,14).또 역대상 29장 20절에는 솔로몬이 왕으로 임명된 후에 회중이 하나님을 송축(praise)한 기록이 있다.
물론 이 기록도 아직 성전이 완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전의 회중찬송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역대하 7장 3절에서 6절까지를 보면 회중이 제사장들과 함께 성전 뜰에서 하나님을 찬양한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성전 낙성식 제사를 위한 것이었다. 이때 이스라엘 회중이 찬양한 노래는 그들이 즐겨하는 노래 가사인 “선하시도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였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다윗의 노래의 큰 주제였으며 시편에도 자주 나타난다(시 59:16,89:1등).역대하 7장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부른 이스라엘 백성의 찬송은 감격과 경외심에 가득찬 찬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자 번제물에 누가 불을 지르지도 않았는데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번제물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한 것을 보았을 때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느끼고 그 초자연적인 현상 앞에서 경외심과 감격으로 노래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 때 레위인들은 악기를 들고 있었고 그것으로 함께 연주했다는 것을 7장 6절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이 회중찬송은 후에 회당 시대에는 성전의 수종자들이 따로 제사를 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성악만 남아서 사용되었고 이것은 초대 교회와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8.성전과 성막의 음악적 관계
성전의 거의 모든 제도는 성막의 것에서 많이 취했다.
찬양하는 일이나 제도도 성막의 것과 관계가 많다.(여기서의 성막은 모세 시대의 회막이 아니고 다윗이 언약궤를 위해서 마련한 막을 말한다.) 그러나 물론 성막의 제도가 성전의 제도로 고스란히 넘어 온 것은 아니다.
우선 큰 차이점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성막에는 24반차의 조직적인 찬양대가 없었다는 것이다.
성막의 음악에 관한 기록은 역대상 15장과 16장에 기록되어 있다.
성전의 음악가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음악가가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인데 성막의 대표적 음악가들로도 바로 이들이 언급되고 있다.
다만 성막에서는 여두둔의 이름이 에단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두 이름은 동일한 인물에게 주어진 두 이름인 것 같다.
성전의 음악가들에 관해서는 앞에서 그 반차대로 이미 언급했고 다윗이 언약궤를 옮길 때와 장막에 안치한 후에 기록한 음악가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언약궤를 메고 올 때 음악을 담당한 레위인들의 명단을 보면 비파를 타서 여청에 맞추는 자들로는 스가랴,아시엘,스미라못,여히엘,운니,엘리압,마아세야,브나야의 8명이 있고 수금을 타서 8째 음에 맞추어 인도하는 자로는 맛디디야,엘리블레후,믹네야,오벧에돔,여이엘,아사시야의 6명이 있다.
그리고 노래를 주장하여 사람에게 가르치는 자로는 그나냐가 있다.
헤만과 아삽과 여두둔은 놋제금을 크게 치는 자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제사장 스바냐와 요사밧,느다넬,아비새,스가랴,브나야,엘리에셀의 7명은 언약궤 앞에서 나팔부는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이스라엘 무리들이 노래하며 사용한 악기는 각과 나팔과 제금,비파,그리고 수금이었다.
우선 위의 글에서 역대상 15장 20절의 ‘여청’은 alamoth이란 히브리어를 번역한 것인데 정확한 의미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그래서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성경은 그냥 Alamoth으로 음역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에 관한 J. Stainer의 견해에 의하면 그것은 ‘감추어진 것’혹은 ‘젊은이들에게 속한 것’이나 ‘처녀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많은 학자들은 이 용어가 소년들이나 처녀들을 위한 노래, 즉 소프라노 성부를 위한 노래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 단어는 시 68편 25절에도 나오는데 한글 개역 성경은 동녀(童女)로 번역했고 N.I.V.성경은 Maidens로 번역했다.
위의 두 예에서 보면 처녀와 관련이 있는 어떤 용어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정확한 의미는 역시 알 수 없다.
다음으로는 역대상 15장 21절의 ‘여덟째 음’이란 용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의 히브리어인 Shiminith은 ‘8’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단어에 관해서도 J. Stainer는 세 가지로 그 단어의 의미를 요약했다. 하지만 이것은 추측에 의한 결론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 세가지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어떤 옥타브의 음이거나 둘째는 어떤 음계나 곡의 이름 셋째는 어떤 악기에 있는 현의 수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도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길 때에 언급된 음악가들과 언약궤를 다윗이 만든 장막에 안치한 후에 언급되는 음악가들을 비교해 보면 같은 인물이 많이 있지만 후자가 좀 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장막에서 솔로몬이 성전으로 옮길 때의 기록을 조사해 보면 이 때는 음악가들의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열왕기상 8;1-11,역대하7:1-6).
하지만 다윗이 성전에서 섬기도록 하기 위해 임명하는 역대상 25장의 기록에 의하면 이 때에도 역시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은 다윗 시대에서부터 솔로몬 시대까지 성전과 장막에서 음악을 담당한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4반차의 명단과 다윗이 언약궤 운반시 지정한 사람들의 명단을 대조해 보면 거기에는 같은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대상 25장 3절의 시므이가 빠지고 6명으로 기록된 것도 언급)
성전이 완성되기 전이나 되고 난 후에도 이 레위인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던 것 같다.
역대상 15장 22절에는 “그나냐는 노래에 익숙하므로 노래를 주장하여 가르치는 자”라는 기록을 보면 성전에서 반차대로 섬기기 위한 레위인들뿐만 아니라 이미 성전이 완공되기 전부터 노래를 가르치는 일은 있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기록들에서 보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은 다윗 시대에서부터 솔로몬 시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뛰어난 음악가들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왕의 수하에 속하였는데 다윗도 이들에 못지 않은 훌륭한 음악가였다.
젊은 시절에 사울의 궁정에 수금 연주자로 발탁된 것이나 또는 아모스 6장 5절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악기를 제조하기도 한 것 또 사무엘하 23장 1절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라는 것을 보면 다윗도 뛰어난 음악가였다는 것이 확실하다.
특히 사울이 악신에 사로잡혀서 괴로워 할 때 그가 수금을 연주해서 악신이 추방될 정도라면 다윗의 수금 연주 실력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여진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셨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음악의 힘이 귀신을 추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다윗의 소년 시절에도 유대인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다.
사무엘상 16장 16-19절 사이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우리 주는 주의 앞에 모시는 신하에게 명하여 수금 잘 탈줄 아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이 기록에 의하면 분명히 다윗이 수금을 연주해서 사울에게 임한 악신을 추방했다.
오늘날도 정신병 치료의 한 방법으로 음악요법이 사용되고 있는데 설령 위의 기록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는 한 방법이 음악을 통한 것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며 또 미숙한 수금 연주자라면 그 수금 소리가 번뇌하는 왕을 진정시키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더 산만하게 할뿐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이런 뛰어난 음악적 능력과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능력은 성전과 그 전 시대부터 성전 음악의 발달을 위한 귀중한 자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결론
이 글의 목적은 솔로몬 성전의 음악에 관해서 알아보는 것과 함께 현재 우리 교회의 음악을 성경적으로 정립하려는 것이다.
첫째, 어떤 사람들이 찬양대원으로 봉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찬양대원의 자격에서 보듯이 성전에서는 레위지파 사람들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신학의 발달에 힘입어 모든 믿는 사람이 다 ‘만인 제사장’이라는 루터의 주장을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신자들이 다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지만 교회의 관습과 덕을 위해서 세례받은 신자가 찬양대원의 직을 감당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이 문제에 관한 결론이었다.
음악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원칙적으로 성전의 음악가들은 ‘배워 익숙한 자’ 288명이 반차대로 섬겼으나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이 점은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음악 소양과 열심이 있으면 가능하다. 하지만 대형 교회에서는 지원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이런 문제도 오디션을 통해서 해결하고 있다. 즉, 교회의 형편에 따라서 어느 정도는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예배에서 악기의 사용 문제인데 이것은 성전에서는 원칙적으로 악기의 사용을 허락했다. 다만 성전에서도 모든 악기가 다 사용된 것은 아니고 당시로서는 고상하고 품위있는 악기로 여겨졌던 현악기를 중심으로 제금이 사용되었고 큰 축제 때나 특별한 행사에는 나팔과 피리 그리고 북도 사용되었다. 이것을 오늘의 우리 실정에 비추어 보면 예배 시간에 사용되어야 할 악기는 예배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아야 하며 많은 사람들이 그 악기가 예배에 사용되어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시대와 문화적 차이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교파에서는 악기 사용 문제로 교단이 분열되는 현상도 있었다. 오늘날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파이프 오르간을 예배용 악기로 적합하게 생각하지만 칼뱅(J. Calvin) 시대에는 이 악기조차도 예배에서 사용을 금지하고 심지어는 파괴하는 일까지도 있었다. 즉, 예배 시간에 어떤 악기를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예배하는 신자들의 문화적 수준도 고려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인들이 거부감을 갖는 악기는 그 악기에 관한 편견 때문이긴 하지만 교육을 통해서 그 편견을 극복하고 자연스럽게 받아 드릴 수 있을 때 교회에 도입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셋째로 교회 음악의 연주 장소 문제인데 원칙적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라도 가능하겠다. 성전 시대에는 성전 뜰에서 하나님을 했고 또 언약궤를 옮길 때에는 길거리에서도 찬양했다. 오늘날 교회 밖에서의 찬양은 주로 선교적 차원과 관련이 있다. 전철역이나 가로 공원 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특정 장소에서 찬양하는 일은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병원 선교 같은 특정의 장소는 찬반 양론이 많이 있다. 찬양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도리어 방해가 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사전에 충분히 검토해서 지혜롭게 해야한다. 또 술집이나 떠들썩한 비신자들의 모임에서 찬양을 하는 것도 그 분위기와 상황을 잘 파악해서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떤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성전에서의 찬양의 주제는 여호와의 자비하심과 능력 많으심이었다. 그 음악의 실체에 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지만 이런 관점에서도 오늘날의 음악을 살펴볼 수 있다.
실제로 어떤 음악이 사용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A.Z.Idelshon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회당과 사막 깊숙한 곳에 있는 오아시스에 격리된 채로 오랫동안 살아 온 유대인들의 음악도 연구했다( A.Z.Idelsohn 저 'Jewish Music' 참고).
리듬이나 화음, 선율이 예배 시간에 쓰기에 적합한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는 신자들이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한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로큰롤(Rock and Roll) 음악 가운데는 사탄 숭배나 마약과 동성 연애를 찬양하는 것들도 있다.
이런 음악들은 그 가사가 비 성서적인 것은 물론이고 그 음악까지도 이교도적이거나 퇴폐적인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것들도 있다. 물론 어떤 특정의 선율이나 화음 또는 리듬을 두고 비신앙적이라거나 비성서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 음악이 비성경적이고 비기독교 적인 것을 연상시킨다면 교회에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신학자들과 교회 음악가들이 함께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구교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03년 교황 피우스(Pius) 10세가 모투 프로프리오(motu proprio)를 발표했지만 그 해결책은 오늘날 실패한 것으로 판결되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고 복음의 빛에 비추어 보되 문화적 측면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전의 음악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전문인을 둘 만큼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정신과 이것을 가능케 할 제도적인 조직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제도와 준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배워 익숙하게’되도록 해서 찬양하는 것이다.
설교나 기도는 많은 연습과 준비를 하면서 찬양은 음악적인 요소는 무시하고 ‘가사에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로 얼버무리면서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오직 정성껏 준비한 것으로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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