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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그림 공부, 사람 공부 조정육 저 앨리스 2010년 4쇄 286쪽 6/3~6/4 2015-06-04 15:00:23 본문

독서

그림 공부, 사람 공부 조정육 저 앨리스 2010년 4쇄 286쪽 6/3~6/4 2015-06-04 15:00:23

singingman 2022. 12. 10.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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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를 보면서 인생을 이야기 한다.

이 저자의 책 중에 불교와 관련해서 그림을 설명한 책이 있었다.

공자 논어 옹야편에 이런 말이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동적이나 어진 사람은 정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사느니라.

 

퇴계의 제자가 기록한 퇴계의 생활을 보면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갓을 쓰고는 온종일 책을 보며, 혹은 향을 피우고 고요히 앉아서 그 마음 살피기를

해가 처음 솟아오르는 때와 같이 하였다'고 한다.

 

'번거로움을 막는 데는 고요함보다 나은 것이 없고 못난 것을 막는 데는 부지런한보다 나은 것이 없다'

 

제백석 '새우' 종이에 수묵 68 * 33cm 1930년경 개인 소장

 

우타가와 히로시게 '에도 명소 100경' 중 '가메이도의 매화' 34 * 22.5cm 1857년 브루클린 미술관

 

김시, 동자견려도, 비단에 채색, 111 * 46cm 서울 리움미술관

 

팔대산인, 팔팔 조도, 종이에 수묵, 31.7 * 27.5Cm 1694년 개인 소장

 

조맹부, 작화추색도, 종이에 채색,28.4 * 93.2 Cm 1295년 타이베이 고궁박물관

 

가츠시카 호쿠사이  '후가쿠 36경' 중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 다색 판화 15.6 * 22.7cm 1825년경

 

강세황, 방심석전 벽오청서도, 종이에 담채, 30.5 * 35.8cm 개인소장

“정말이지 로마에 와보지 않고서는 여기서 무엇을 배우게 되는가를 전혀 알 수 없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개념들을 돌이켜 보면 마치 어릴 적에 신던 신발 같다는 생각이 든다."

-괴테,『이탈리아 기행』중에서-

 

거장(巨匠)이 내 앞에 있을 때 그는 거대한 산과 같다. 운동 삼아 산책하던 동네 뒷산하고는 차원이 다른 높고 빼어난 산이다. 동네 뒷산 오르던 실력으로는 감히 입산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영산(靈山)은 신령스런 기운마저 감돈다. 입산도 어려운 데 산꼭대기를 넘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은 마치 뒷산에 오르던 실력으로 히말라야를 넘겠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무모해 보인다. 거장을 만나면 그런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위대한 천재를 아버지로 둔 아들은 그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여간해선 빛을 발하지 못한다. 아버지라는 후광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아들의 존재가 묻혀 버리는 것이다. 죽을 둥 살 둥 노력해서 뭔가를 이룰라치면 이번에는 아버지 덕분에 출세했다고 도매금으로 넘어가 버리기 십상이다. 이래저래 스타 옆에 있는 조연은 슬프다. 이런 경우는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 그리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도 빈번히 발생한다.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1797-1858)가 태어났을 때 에도의 화단에서는 카츠시카 호쿠사이(1760-1849)라는 거장이 활동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우타가와 히로시게보다 37년이나 먼저 태어난 사람이지만 워낙 정력적으로 활동한데다 90세까지 장수한 사람이라 활동 년대가 비슷했다(히로시게는 호쿠사이보다 28년이나 적게 살고 62세에 죽었다) 히로시게가 태어난 다음 해에 카츠시카 호쿠사이는 스승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호쿠사이라는 호를 쓰며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던 때였다.

 호쿠사이는 임종을 눈 앞에 두고도 “하늘이 내게 10년의 수명을 더 주었으면...”하고 탄식할 정도였으니 그가 한창 때는 어느 정도로 잘 나갔을 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태어날 때부터 호쿠사이의 이름을 들었고, 자라면서도 계속 그의 이름을 들었다. 그러나 히로시게는 호쿠사이라는 거장을 뛰어넘어 우키요에의 대표적인 걸작을 완성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 이런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을까.

 

히로시게는 1797년 에도성의 변두리에서 소방수라는 하급 무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무사 집안이라 해도 사무라이 중에서 최하위에 가까울 정도로 박봉에 시달려야 했다. 13살에 부모를 한꺼번에 잃는 그는 가장이 되어 세습적인 직업을 대물림해야 했다. 그가 화가로 대성해보겠다고 생각한 것은 가난에 찌든 박봉의 세습 직업을 벗어나보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림에 뜻을 굳힌 그가 15세 때 당시 잘 나가던 공방에 문을 두드렸으나 워낙 지원자가 많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대신 우타가와 토요히로(歌川豊廣) 문하에서 그림을 시작했다. 히로시게가 ‘우타가와(歌川)’라는 성을 쓰게 된 것은 그의 공방에서 그림을 배웠기 때문이다. ‘우타가와’ 화파는 19세기에 가장 앞서가던 판화 공방이었는데 이곳에서 히로시게는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 배우초상화, 미인판화 등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장르를 배우고 경험할 수 있었다.  

그는 20대에 미인도같은 인물화로 이름을 날렸는데 22살 때 처음 작품을 발표한 것도 다른 우끼요에 화가들처럼 싸구려 배우 그림이었다. 그림에 자신감을 얻자 그는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직업을 은퇴했다. 그러나 어린 아들 대신 때때로 소방서 일을 맡아서 해야 했다.

28살에 그의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그림에는 일대 혁신이 일어난다. 호쿠사이의 <후지산 풍경>을 보고 자극을 받아 기존의 인물화에서 풍경화로 전환한 것이다. 나이가 70이 넘었지만 예술적으로 절정에 도달해 있던 호쿠사이의 후지산 연작이 후배 화가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이 때 히로시게에게 호쿠사이는 거대한 산이었다. 도저히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난공불락의 산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죽지 않았다. 절망하지도 않았다. 차분하게, 확신을 가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쳐나갔다. 그로부터 6년 후 《토카이도東海道 53역참》이란 작품이 탄생되었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흔들린 사람은 오히려 호쿠사이였다.

 

심사정, 하마선인, 비단에 담채, 22.8 *15.6Cm 간송 미술관

 

서비홍 '말' 종이에 수묵 130 * 76cm 1941년 서비홍 기념관

 

우타가와 히로시게, 《토카이도 53역참》<쇼노>, 1833년, 21.9×34.6cm, 도쿄 국립박물관

그 중에서 히로시게의 시적인 천재성을 보여주는 작품이 <쇼노庄野>이다. 세차게 장대비가 쏟아지는 여름 날, 언덕을 걸어가던 나그네들 사이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사선으로 그어진 옅은 먹색의 빗줄기는 바람에 휘날리는 대나무 숲과 함께 비오는 날의 법석을 잘 표현하고 있다. 특히 메아리처럼 실루엣 처리된 대나무숲의 메아리는 그가 색채 사용의 대가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호쿠사이가 그림을 오직 ‘조합하는 재미에 전념하여’ 작품을 만들었다면, 자신의 풍경화는 ‘내가 사물을 직접 보고 그 모든 것을 묘사한 초고를 토대로 하여 진정한 진실을 옮겨 그린 풍경’이라 자부했던 히로시게의 열정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 실제로 이 작품을 제작하기 전에 그는 막부가 왕실에 말을 진상하러 보내는 행사 요원의 한 사람이 되어 에도에서 교토까지 여행을 하였다.  

제목으로 쓴 토카이도東海道는 에도와 교토를 연결하는 도로인데 도보로 13일 가량이 소요되는 구간이다. 왕복으로 한 달쯤 걸리는 그 여행길에서 보고 느낀 감동이 작품의 바탕이 되었다. 히로시게는 구름, 안개, 눈 등 자신이 경험한 시각적인 인상을 기후와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시적 세계로 끌어 올릴 줄 아는 시인이었다.

히로시게의 작품은 여행에서 시작해서 여행으로 끝난다. 만약 그가 호쿠사이를 뛰어넘기 위해 선배의 작품 형식만을 차용했더라면 그는 영원히 호쿠사이의 추종자나 아류로 남았을 것이다. 그는 호쿠사이의 작품을 따르는 대신 호쿠사이를 사로 잡았던 영감의 원천을 찾아낼 줄 알았다. 그것이 바로 여행지에서 만나는 자연이었다. 자연에서 받은 느낌을 자신만의 시적인 언어로 표현하면서 히로시게는 ‘형만한 아우’가 되었다.  

 

호쿠사이나 히로시게의 풍경 판화가 인기를 끌게 된 데는 여행을 동경하고 즐기는 당시 사람들의 욕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여행과 관련된 게사쿠(戱作)등의 통속소설은 속편이 간행될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에도 시민들은 이런 통속소설을 보면서 자신들이 마치 소설속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착각했고 소설의 주인공처럼 여행을 떠나기 위해 돈을 모았다. 여행지와 관련된 그림도 덩달아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림은 여행을 다녀온 사람에게는 추억을 환기시켜 주었고, 떠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림을 보며 상상 속에서 여행한 것 같은 대리만족을 주었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자연을 관찰하고 이를 시적인 세계로까지 승화시킨 히로시게의 판화는 호쿠사이보다 지속적으로 인기를 누렸다. 그는 《교토 명소 경치》《오사카 명소 그림》《에도 명도 100경》등 각지의 명소와 풍경 속에 나그네의 마음까지 담을 수 있는 서정적인 풍경화를 제작했다. 역시 《토카이도 53역참》에 포함되어 있는 <감바라의 밤 눈>도 그러하다.

이 작품을 보면, ‘여기가 바로 내 마지막 거처런가. 눈이 다섯 척’ 이라고 탄식했던 하이쿠 작가 고바야시 잇사(1763-1827)가 떠오른다. 그냥 바라보면 평범하기 그지없을 일본의 자연과 여행지가 히로시게의 마음이 얹혀지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탈바꿈한다. 손끝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정을 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눈과 달과 꽃의 화가’라고 불려질 정도로 계절 속에 투영된 감성을 표현할 줄 알았다.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가 선 굵은 호쿠사이의 <붉은 후지산>을 닮았다면, 고바야시 잇사의 아련한 향수는 히로시게의 <감바라의 밤 눈>을 닮았다.

장승업, 귀거래도, 비단에 채색, 136.7 * 32.5Cm 간송 미술관

 

정선 어한도 비단에 먹,28.2  *21.7cm 서울 대학교 박물관

 

우타가와 히로시게, 《토카이도 53역참》<감바라의 밤눈>, 1833년, 21.9×34.6cm, 도쿄 국립박물관

히로시게는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거의 종말에 가까워지는 시기에 살았다. 봉건정권의 붕괴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은 불안해했고 황권 복원 운동이 일어났다. 대외적인 개방 압력은 날로 지속되는 가운데 사람들은 현실의 불안을 잊기 위해 순간의 쾌락을 추구했다.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하듯 우키요에는 시적이고 세련된 깊이 대신 관능적이고 퇴폐적인 표현에 집착했다. 이후 우끼요에는 결코 히로시게같은 작가를 배출하지 못했다.

19세기 중엽, 일본에서는 우끼요에가 내리막길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을 무렵 지구의 반대편 유럽에서는 ‘자포니즘’이란 거대한 파도가 인상파 화가들을 덮쳤다. 이미 일본에서는 ‘한물 간’ 유행이 유럽에서 새롭게 붐을 일으킨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오가타 코린 연자화도 병풍 6폭(위),종이에 금지와 담채, 150.9 * 338.8cm 에도시대 도쿄 네즈 미술관 오가타 코린 '홍백매도 병풍' 2폭 (아래), 종이에 금지와 채색, 각각 156 * 172.2cm 에도시대 시즈오카현 아타미 미술관

 

김홍도, 군선도,종이에 담채,132.8 * 575.8cm 1776년 호암 미술관

 

김명국, 설경 산수도, 모시에 담채, 101.7 * 55Cm, 국립 중앙박물관

 

마원 산경 춘행도  비단에 채색, 27.4 * 43.1cm 남송, 타이베이 고궁박물원

 

군선도 중 부분으로 복숭아 든 남자는 동방삭이고,붓을 쥔 이는 문창, 소를 탄 사람은 태상 노군등 모두 신선들이다.

혜가스님이 달마대사에게 물었다.

“스승님. 제 마음이 괴롭습니다.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달마대사가 대답하셨다.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럼 내가 편안하게 해주리라.”

그 말을 들은 혜가스님이 고요히 앉아 괴로운 자신의 마음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제 마음을 아무리 찾아봐도 마음 간 곳이 없습니다.”

혜가스님은 중국에 선종(禪宗)을 전한 달마대사의 뒤를 이어 제2대 선사가 되신 분이다. 혜가스님은 폭설 중에 도를 구하러 달마 대사를 찾아가 법문을 청했지만 돌아보지도 않자 자신의 팔을 베어서 신표로 내보일 만큼 구도심이 치열했던 분이다.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셋슈우 토오요오(雪舟等楊ㅣ1420-1506)의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이다. 셋슈는 일본 회화사상 가장 뛰어난 화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작가로 일본 무로마찌 시대 수묵화를 완성시킨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런 셋슈가 나이 76세 때 그린 이 작품은 그의 인물화가로서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대작이다.

 

가츠시카 호쿠사이  '후가쿠 36경' 중 '붉은 후지산' 다색 판화 26 * 38.1cm

 

우타가와 히로시게 '도카이도 53역참 ' 중 '쇼노' 다색판화 21.9 * 34.6cm 1833년 도쿄 국립박물관

 

서비홍 '우공이산' 종이에 채색  144 * 421cm 1940년 서비홍 기념관

 

이경윤, 조옹도, 조선중기, 비단에 수묵, 10폭 화첩

강태공의 주제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낚싯대를 들고 강가로 나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큰 희망을 주고 위로가 되었다. 이경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작가들이 자신을 그림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생떽쥐뻬리는 『내 마음의 성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양초의 생명은 한 덩어리의 밀랍덩어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성해내는 빛 자체이다.”

 그러니 빛을 내며 불꽃같은 삶을 살아야 삶이라고 했다. 불꽃처럼 살고 싶은데 때가 되지 않았거든 그냥 기다리자. 양초에 불이 붙여질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리자.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기다리자. 그러면 언젠가는 우리도 우리들의 양초에 불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팔을 끊어서 바칠 정도로 굳세게 다짐해놓고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달라고 호소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한 번에 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였기에 달마대사의 선맥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고통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가장 가까운 사람마저 자신을 포기하고 떠날 정도로 모두가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도 여상은 자신을 믿었다. 그런 자기확신 때문에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 우리도 자신을 믿자. 그리고 기다리자. 강태공은 칠십까지 기다렸지 않은가. 그 절반만이라도 기다려보자. 그러다보면 위수가에 찾아오는 그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셋슈우 토오요오, 혜가단비도, 1496, 일본 무로마찌시대, 종이에 수묵담채, 183.8×112.8cm,

화면은 굵은 필선으로 그린 암굴 속에 벽을 향해 앉아 있는 달마대사와, 잘린 팔을 바치는 혜가스님의 옆모습을 그렸다. 추상적인 느낌이 나도록 그려진 강한 필선의 바위와 굵고 간결한 인물의 옷주름선이 대비되면서 분위기는 엄숙하고 삼엄해진다. 옷주름선은 마치 순간적인 깨달음을 구하는 선종을 표현하듯 최소한의 붓질로 마감했다. 어떤 순간이 와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달마대사의 옷은 흰색으로, 도를 구하겠다는 열망은 가득하지만 아직은 때 묻은 마음을 벗어버리지 못한 혜가스님의 옷은 흰색과 갈색이 뒤섞인 색으로 그린 것도 예사롭지 않다. 


팔 하나를 자른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팔을 자르는 것이 아니다. 몸뚱이 전체를 바친다는 것이고 가죽 주머니같은 이 몸뚱이를 버려야 무상 대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붉은 결심을 한 혜가 스님도 수행 중에 마음이 편안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니 우리 같은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지나 놓고 나면 기억조차나지 않는데 그때는 왜 그리 힘들었는지. 차라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낫지 싶을 정도로 괴로운 순간들. 아파트 12층에서 베란다 창문을 열고 서 있으면 저 아래서 나를 맹렬하게 빨아들이던 시커먼 블랙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내가 어떻게 그 때 떨어져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는지.

그런데 잘 견뎠다. 시간이 흐르고서야 알았다. 그때 창밖의 유혹에 지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준 내가 고맙다는 것을. 지나 놓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 때는 그렇게 힘들었을까. 지금은 편안하다.


이렇게 견딜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 이럴 때 들으면 위안이 되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강태공 얘기다. 강태공은 사마천(B.C 145-86)의『사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원래 이름이 여상인 강태공은 나이 칠십이 되도록 벼슬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남편을 믿지 못하고 마누라는 도망쳤다. 홀애비가 된 강태공은 위수가에서 미늘 없는 낚시 바늘을 드리운 채 세월을 낚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다. 언젠가는 분명히 자신을 알아보는 눈 밝은 사람이 나타나리라는. 그러기에 칠십 년 세월을 견딜 수 있었으리라. 칠십 년이라니. 설령 칠십 년 후에 귀인이 나타나지 않았다하더라도 그 모진 세월을 자기 확신 하나만으로 견디었다는 것은 존경받을 만하다.


그런데 나타났다. 그것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한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었다. 썩어가고 있는 은나라를 대신해서 주나라를 세울 문왕이었다. 문왕은 나라를 세우는데 지혜를 빌려줄 스승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던 차에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 문왕의 아버지인 태공이 나타나서 위수가에 가면 스승을 만날 수 있으리라 예언한다. 그 말을 듣고 위수가에 가보니 진짜 칠 십 노인이 앉아 있다. 문왕은 여상을 보고 대번에 아버지가 예언한 스승임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여상을 ‘아버지 태공이 바라는(望) 사람’이라는 뜻으로 ‘태공망’이라 불렀다. 태공망은 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열었고 후대의 무왕까지 보좌하여 제나라의 후(侯)로 봉해졌다.

조선 중기의 이경윤(李慶胤:1545-1611)이 그린 <조옹도(釣翁圖)>는 무명시절의 여상을 그린 작품이다. 아직 강태공으로 거듭나기 전, 누가 봐도 한심하고 마누라한테까지 버림받은 백수의 모습이다. 버드나뭇잎이 느리게 휘날리는 날, 미래에는 한 나라를 세울, 그러나 지금은 꿈 밖에 가진 것이 없는 낚시하는 늙은이 ‘조옹(釣翁)’이 일과처럼 위수가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여지껏 그래왔듯 아무런 변화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그저 평범한 날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차며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봐도 그의 마음은 바위처럼 굳다. 조옹이 앉은 위수가의 시커먼 바위가 그의 굳은 결심을 대변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