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트로트 형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구자억 목사의 보기에도 매우 역겨운 TV 공연 영상이다. 차라리 목사라는 호칭을 포기하고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 편집자 주)
CCM옹호론자들은 어떻게든 복음이 전파되고 은혜 받으면 좋은 것 아니냐는 단순한 주장을 하지만 이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이 문제가 왜 복잡한 문제인지 상식적인 차원에서, 성경적 신학적인 차원, 역사적 차원에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1) 우선 상식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보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그의 죽음을 전할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주님이 내가 받아야 될 심판을 대신 받아 죽으신 것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의 죽음에 대해서만큼은 최소한의 경건의 모양은 가져야한다. 예를 들어서 만일 최근에 지하철 스크린도어 사고로 숨진 형제와 강남역 살인사건의 희생자를 추모한다면서 전주만 들어도 흥이 나는 트롯트음악이나 디제잉 ,EDM을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한다면서 이런 음악을 사용하면 희생자의 유족들이 감동하고 고마워할까? 아니면 “이게 무슨 짓이냐?”, “어떻게 우리 아이의 죽음을 유흥거리로 전락시킬 수 있냐?” 항의할 뿐 아니라 전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게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상식적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할 때 우리는 최소한의 경건의 형식을 취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나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수단이 다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누군가 전하는 메시지 자체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 메시지를 전하는 화자(전도자, 메신저)를 통하여 메시지를 읽는다.
이것은 언어전달의 가장 기초가 되는 이론이다. 사람들이 왜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 기독교인들의 삶이 이기적이고 세상과 구별되기는커녕 아예 세속에 동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까이에서 지켜본 우리의 세속적인 삶 때문에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고 말하는 사람의 삶이 이기적이고 양보하지 않고 희생하지 않음으로 그가 전하는 메시지와 전혀 일치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과 삶이 정확히 일치가 되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교는 이단으로 규정돼 믿으면 출교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 있게 전파될 수 있었다. 이단이었던 초대 교회가 모든 사람의 칭찬을 들을 뿐 아니라 두려움을 주면서 믿는 자가 날마다 더 할 수 있었다. 이는 어디까지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와 메신저의 삶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대중 가수들도 자신의 노래를 통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일치하는 멜로디와 리듬으로 작곡을 한다. 슬픈 노래는 그 슬픔을 극대화 시킬 수 있도록, 신나는 노래는 흥을 돋울 수 있도록 작곡을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메시지를 보기만 해도 우스운 복장과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거나(https://youtu.be/bH7tsULZvbY), “하나님께서 애타게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으신다”는 메시지를 보기에 민망한 핫팬츠를 입은 여자 무용수들이 메신저의 몸을 손으로 훑는 음란한 동작을 하면서 전한다면 과연 그 내용이 제대로 전달 될 수 있을까?(https://youtu.be/RpXFICjG-mk) 이런 메시지가 어떻게 디제잉과 EDM을 통해서 영혼의 심령 골수를 찔러 쪼갤 수 있겠는가? 신나는 음악과 리듬의 보조수단으로 전락하게 될 뿐이다.
음악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고 싶다면 당연히 복음의 내용과 유사한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보석이나 명품 선물을 담는 상자는 왜 고급스러울까?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의 가치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복음이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고 구원을 주는 것이라면, 이 복음을 전달하는 매체 또한 복음의 가치를 잘 드러내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2) 성경적 신학적 차원에서 생각해보자.
많은 CCM 옹호자들은 새 노래로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말씀을 통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시킨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새로운’이라는 형용사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질적인 면에서 새로운 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고후5:17의 “새로운 피조물”에서 “새로운”이라는 단어는 “질적인 면에서 이전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시편의 “새 노래”는 어제 부른 노래, 지난 주에 부른 노래 말고 늘 새로운 노래를 부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으로 이전에 부르던 노래와는 질적으로 새로운 노래, 세상 노래, 속된 노래와 반대되는 말이지, 결코 최신 음악의 형태를 사용한 노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주를 높이고 춤추며 소리치며 찬양하라는 시편의 표현들도 시적 표현이었지 매번 모일 때마다 그렇게 하라고 예배의 전형을 교훈하는 것이 아니었다. 칼빈의 주석이나 에드먼드 클라우니교수의 교회론을 보면 시편의 이런 구절들은 주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그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나올 것을 명령한 것이지 실지로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물론 출15장에서 홍해를 건너고 자신들을 추격하던 바로와 그의 군사들이 홍해에 수장된 모습을 보고 백성들은 기뻐 춤추며 찬양했다. 당연한 것이다. 400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고 자신들을 다시 종살이 시키기 위하여 잡으러 온 애굽의 왕과 군사들을 하나님께서 수장시켜 버리셨으니 그 감격으로 기뻐 춤추며 찬양할 수 있었다. 다윗도 법궤를 무사히 예루살렘으로 옮긴 것으로 인하여 그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춤추며 찬양했다.
만일 위의 두 가지 예가 예배의 전형이었다면 우리도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마땅히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제사나 예배에 춤을 추었다는 기사를 볼 수가 없다. 사도들의 기록이나, 그들의 가르침을 이어 받은 교부들, 그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타락한 로마천주교로부터 다시 성경적 기독교로 복귀시켰던 종교개혁가들의 예배에서도 춤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위의 두 가지 예는 결코 예배의 전형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 앞에 나올 때마다 이렇게 춤추며 찬양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위의 두 가지 예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에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그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이들은 이때만 이렇게 춤추며 찬양했지 이후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 감히 얼굴조차 들지 못했다. 출32장에서 한 번 더 춤추며 뛰면서 찬양하는 모습이 나오지만, 그것은 애굽의 우상 숭배 의식을 따른 것이기에 철저히 정죄되었다.
만일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깨닫고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다윗처럼 바지가 흘러내리도록 춤을 춘다면 누가 말리겠는가? 이런 일이야말로 죄인 하나가 회개함으로 하늘에서는 잔치가 벌어지는 일로 우리 모두가 기뻐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그렇게 주의 은혜에 감격하여 춤을 추고 싶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삶이 과연 어떻게 변화돼야 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그의 삶은 예수님을 만나고 획기적으로 변화된 삭개오처럼 변화되야 한다. 누가봐도 이전과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돼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주님의 말씀을 더 사모하며, 그 말씀대로 자신의 삶이 변화되기를 힘쓰는 사람으로 변화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CCM을 부르며 춤을 추는 사람은 많아도 이렇게 변화되는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이들이 CCM을 통하여 높아진 자존감때문에 이 세상 속에 빛과 소금이나 밀알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오히려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많은 청년들이 믿음의 기도와 선포만으로 우리의 모든 환경들이 변화될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 분명히 자신은 존귀한 사람이고 열방을 변화시킬 사람인데, 세상에서 부딪히는 많은 갈등과 어려움으로 인하여 자신이 가진 이상과 심각한 괴리를 느끼며 혼란의 늪에 빠져 들어간다. 그 혼란을 핍박이요 고난으로 부르며, 이는 분명히 주께서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과정으로 착각함으로 대부분의 청년들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하여 선교를 꿈꾸게 된다.
사실 이런 삶의 어려움들은 우리를 연단하시는 주님의 손길이다. 야곱을 자신보다 더 간악한 라반 밑에서 20년간 연단하셨듯 죄악된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의 모난 성품을 다듬으시기 위하여 주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그래서 진실한 신자들은 이런 시련이나 핍박, 환란을 피하기 보다는 자신을 시련하고 연단하는 기회, 마지막 날 주 앞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위하여 허락하시는 것으로 인식하며 기쁜 마음으로 인내하였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자신을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는 주님의 은혜의 손길임을 깨닫고 자신의 연약함을 기뻐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CCM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성경적 신앙관을 갖도록 돕기 보다는 비성경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신앙관을 갖게 한다. 주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 희생 뿐 아니라 순교까지 각오하게 하지만 정작 그 헌신, 희생과 순교의 정신이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절실히 요청되는 자신의 삶의 현장, 불신자들과 부대끼며 사는 현장에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이 아무리 자신을 괴롭히고 억울하게 해도, 복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먼저 양보하고 손해보고 희생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상은 언제나 자신이 처한 삶의 현장보다는 아주 멀리 떨어진 선교지에 가 있다. 이렇게 뜬구름 잡는 신앙을 가진 이들이 어떻게 거룩하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기 위하여 늘 가슴을 치며 주 앞에 엎드릴 수 있겠는가? 따라서 CCM을 통한 감정의 고조와 그렇게 흥분된 감정으로 춤추게 하는 것은 결코 출15장의 백성들의 춤이나 다윗의 춤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주님을 우롱하는 짓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CCM 옹호자들이 예배의 전형으로 주어지지 않은 특별한 상황가운데 주어진 '춤'을 성급하게 일반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 있다는 것 하나 만으로 춤을 중요하게 여기는 CCM 옹호자들은 왜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 2:20)라는 말씀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까?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12:28,29).”라는 명령에는 전혀 관심조차 갖지 않을까?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심령을 감찰(추에 달아서 무게를 잰다는 의미)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의식한다면 어떻게 감히 주 앞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구약 시대 백성들은 주의 임재가 나타나면 두려움에 떨면서 감히 얼굴조차 들 수 없었다. 시내산 아래서 백성들이 벌벌 떨었고 솔로몬의 성전에 주의 영광이 임했을 때도 모두가 엎드렸다. 이사야 선지자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며 엎드렸으며,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밧모 섬에 유배되었던 요한은 그렇게 사랑하는 주님을 다시 뵈었지만 그의 품에 달려간 것이 아니라 그 발에 엎드려 죽은 자 같이 되었다. 그들이 남발하는 주의 임재, 주의 영광은 결코 주님 앞에서 경망스럽게 뛰어 날뛰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주 앞에 완전히 엎드리게 만드는 것이다.
CCM의 가사 또한 도저히 신학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신성모독적인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오늘날 유행하는 CCM들은 거의 대부분이 신사도운동이나 신오순절주의자들과 종교다원주의, 종교통합운동의 일선에 서 있는 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곡들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그들이 만든 가사들은 언뜻 보기에는 굉장히 은혜스러울지 몰라도 가사의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결국 우리를 정상적인 신앙에서 이탈시키는 뉴에이지적이며 신성모독적인 내용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곡을 교회에서 경배와 찬양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겠는가? 어떻게 이런 노래들을 복음 전도용으로 사용할 수 있겠는가?
(3) 역사적 차원에서 생각해보자.
초대 교회의 찬양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당시 창궐하던 이단을 배척하기 위한 교리 교육용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교회가 확장되고 제도적으로 안정되자, 찬양대도 생겨나고 전문가의 창작시와 창작곡들이 생겨났다. 교회는 가는 데마다 열심히 찬송을 부르는데, 문제는 여러 나라 여러 민족, 여러 전통과 가락으로 찬송가가 작사 작곡 연주되다 보니 성경적으로,신학적으로, 음악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직설적이거나 유치한 가사와 곡조와 창법으로 만든 찬송이 범람함으로 찬송가의 정통성 뿐 아니라 경건성에도 문제가 발생하였다.
여기에 이단들까지 끼어들어 교회를 혼란케 하였다. 그래서 주후 341년 열린 라오디게아총회에서는 오랜 논란 끝에 60개조의 라오디게아 총회 교회법을 제정했는데, 15번째 법에 이런 결정을 넣었다. “교회에서는 설교단에 올라가서 책을 가지고 노래하는 지정된 가수 이외에는 찬양을 해서는 안 된다.” 이를 통하여 자작 찬송을 금지시키고 성경에 있는 찬송(Canticle, 시편과 성경에 있는 찬송)만을 부르되 찬양대만이 단상에 올라가서 부를 수 있도록 함으로 찬송가의 세속화를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쉽게 가르치기 위한 용도로 당시 로마천주교의 특권층만 부를 수 있던 찬송을 모든 회중이 부를 수 있도록 어렵지 않은 민요에 곡을 붙임으로서 찬송을 대중화시켰다. 칼빈은 제네바 시편가 서문에서 “우리는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도록 격려하는 진실하고 거룩한 노래가 있어야겠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나게 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영광 돌리게 하는 노래가 있어야겠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도록 격려하는 진실하고 거룩한 노래,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상기시킴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영광 돌리게 하는 것이 칼빈이 생각한 찬송의 의미였다.
웨슬리는 찬송을 교리 교육과 신앙선포, 부르심에 대한 응답, 성화에 이르도록 많은 사람들을 교훈하기 위하여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당시 유행하던 곡조를 이용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유행하던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의 영향으로 원곡에 장식음이나 경과음을 넣어서 곡조를 바꾸거나 고치는 것을 철저히 금지키셨다. 원래의 곡대로 정확하게 부를 때만 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통하여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고 음악에 도취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악보대로 정확히 부르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많은 CCM사역자들은 루터의 예를 통하여 그가 불렀던 것도 당시 대중음악이었음을 지적하며 오늘날 CCM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한다. 물론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찬송가도 그 곡이 지어진 당시에는 동시대의 음악을 사용했다. 그러나 당시의 대중음악은 오늘날처럼 철저한 시장논리에서 의해서 만들어지진 않았다. 물론 당시의 찬송가들이 모차르트나 비발디와 같은 유명 작곡가들의 곡들만이 아니라 당시 널리 불리던 민요를 사용한 것도 많지만 당시의 민요들은 나름대로 음악적이고 서정적인 특색과 깊이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 곡의 가락들은 감수성만을 자극하기 보다는 그 노래를 통하여 전달하고자하는 이야기에 집중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매체가 되었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 음악 시간에 배운 '메기의 추억'이나 '오 수재너'도 1800년도 당시에는 대중적으로 불린 가곡이었지만 그 음악의 독특함, 우수성을 인정받아 지금까지 애창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과연 100년 뒤에도 애창 될 아이돌 그룹의 노래나 CCM이 있을까? 결코 없다. 어떻게 단정할 수 있을까? 100년 후에 오늘날 유행하는 노래들은 시장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당장 20년 전에 유행하던 CCM 중 오늘날까지 꾸준히 인기를 끄는 곡이 얼마나 될까? 20년 전의 대중음악과 오늘날 대중음악의 차이만큼 CCM 역시 그렇다.
결 론
최근의 CCM이 현대대중음악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려는 시도는 음악적인 차원에서는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기독교의 복음의 차원에서는 결국 복음을 유흥의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트롯트나 디제잉, EDM이라는 그릇에 담으려는 시도 자체가 상식적으로, 성경 신학적으로, 기독교 역사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CCM보다는 주께서 주신 삶의 자리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성되이 감당하는 것이 더욱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섬기고 양보하고 손해보고 희생하는 삶으로 복음을 전할 때 최신 현대음악이라는 그릇에 복음을 담는 것보다 더욱 폭발적인 복음의 역사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서적>
오소은, 누구나 알기 쉽게 쓴 21세기 찬송가 연구
마이클호튼, 개혁주의 예배론
김철웅, 추적, 마틴루터도 CCM 사역자였는가?
존 맥아더, 참된 예배
폴스티븐존스, 예배 누구를 위해 손뼉치는가
에드먼드 클라우니, 교회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