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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홍.유릉 17-08-12 본문
위키백과에 의하면
홍릉(洪陵)과 유릉(裕陵)은 대한민국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능으로 홍릉(洪陵)은 대한제국의 초대황제 고종 광무제와 명성황후 민씨의 능이며, 유릉(裕陵)은 대한제국 2대 황제 순종 융희제과 순명효황후 민씨와 순정효황후 윤씨의 능이다.
1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왕릉의 정자각(丁字閣)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을 세웠으며, 양쪽으로 문무석을 세워 홍살문까지 기린·코끼리·해태·사자 등의 석수를 세웠는데 중국 명나라 황제능의 제도를 따라 조성된 황제릉이다.
일제 강점기에 홍릉은 고종의 인산일[1](1919년)에, 유릉은 순종의 인산일(1926년)에 각각 조성되었다.
조선 왕릉 중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이며 순종의 유해가 안장된 유릉은 사실상 조선 왕릉 중 마지막으로 조선왕조 임금의 유해를 모신 왕릉이 되었다.
조선 왕릉은 이렇게해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조선왕조 건국자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시작으로 고종과 순종의 홍유릉까지 연산군묘와 광해군묘를 제외한 모든 조선 임금의 유해들이 능 지위를 받으며 유해가 안장되었다.
한일 병합 조약(1910년) 이후 일본 제국의 지배에 의해 고종과 순종의 무덤은 황제릉이 될 수 없었는데(왕공가궤범, 제200조), 이때 황실에서 생각해낸 것이 명성황후의 홍릉과 순명효황후의 유릉이었다. 고종의 장례 때는 명성황후의 재궁(梓宮)을 청량리에 있던 구 홍릉(현 홍릉수목원)에서 현 홍릉(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옮겨 합장하였고, 순종의 장례 때에도 순명비(純明妃)의 재궁(梓宮)을 구 유릉(어린이대공원, 능동)에서 현 유릉(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옮겨 합봉하였다.
- 홍릉(洪陵)은 고종 32년(1895년)에 조성된 명성황후의 능으로, 1919년 고종의 인산일(3월 1일)에 황후의 재궁을 초장지 홍릉[2]에서 지금의 홍릉에 합봉하였다. 이날 3.1 운동이 일어났다.
- 유릉(裕陵)은 대한제국 광무 8년(1904년)에 조성된 순명효황후의 능으로, 1926년 순종 인산일(6월 10일)에 황후의 재궁을 초장지 유릉[3]에서 지금의 유릉에 합봉하였다. 이날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새로운 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능의 칭호를 가져다 쓰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제로서도 이것을 막을 구실은 없었으며, 능의 이장 문제 또한 이왕직이나 총독부가 관여하지 않는 황실 내의 문제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 문제는 별 탈 없이 처리되었다.
홍릉·유릉 권역내의 묘소들
19세기 후반의 격동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고종은 1895년에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등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치욕을 당했다. 그런데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치욕적인 나날을 보내는 동안에 특명을 내려 중국에 화가를 보낸다. 중국 명나라 황제의 능을 모사(模寫)해오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특사의 이름이나 정확한 날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를 통해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던 해, 즉 1900년에 황제릉 조성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러시아 공사관에서부터 대한제국 황제와 황제릉의 꿈을 계획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종은 황제릉 조성 사업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1919년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였다. 황제의 장례는 승하한 직후에 [상례보편]에 따라 조선식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나 갑작스럽게 일제가 개입하면서 일본식으로 변경되었다. 황제라면 7개월장이고 왕이라도 5개월장으로 치러져야 했지만, 3개월 장으로 축소되어 진행되었고, 하관식도 밤 10시에 거행되는 아픔을 겪었다. 일제는 궁내에서 진행된 ‘국장 의식’은 완전한 일본식으로 진행했고, 민중들이 볼 수 있는 ‘장지 행렬’만 조선식으로 진행하였다. 3·1운동으로 민심이 무서운 시기였다.
대한제국 제2대 황제로 즉위한 순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퇴위당하고 ‘이왕’으로 강등되었으며 사후 금곡에 묻혔다. 1926년 이미 일제의 식미지였기에 유릉의 조성 주체는 일제가 되었다. 석물의 제작은 일본인 아이바 히코지로가 담당하였는데, 일제는 홍릉 바로 옆에 유릉 석물을 조성하면서 ‘조선의 예술품은 영 쇠멸하였고, 신생기가 도래하여 장래 역사에 좋은 사실을 남기기 위하여 그 시대의 예술 작품을 남겨두어 후세에 전하게 하자는 대조로 불과 지척인 유릉과 홍릉에 전연 딴 취미의 석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는 조선의 문화와 미술은 쇠퇴하여 본받을 가치가 없다는 논리로 일본의 문화가 앞서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조선 식민지화의 정당성을 드러내려했던 일제 식민지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유릉 석물은 바로 곁의 홍릉 석물과 비교하여 그 입체감과 아름다움을 인정받아왔다.
조선의 전통 왕릉과 대한제국 황제릉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석물의 배설 위치에 있다. 전통 왕릉에서는 봉분이 있는 능상 공간에만 석물이 봉분을 호위하는 형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신도에는 박석만이 깔려있다. 그러나 홍릉과 유릉에서는 능상 공간에는 물론 신도의 좌우에 문무석인과 석수를 도열시키는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이는 명 태조 효릉과 이후 13대 황제들의 능 체제를 모델로 삼은 것이다.
(위의 글은 '대한제국 황제릉'김이순 저 소와당 출판사 에서 복사해 왔다.)
조선이 황제국이 되는 과정에서 소중화 사상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오랑캐인 만주족이 명나라를 멸하고 청나라를 건국한 사건은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진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북벌론도 나오고 비교적 명나라의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제 중화의 중심이 우리 나라로 넘어오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조선이 황제국이 되는 것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게 된다.
이 능을 보면서 유교 국가인 조선은 능 하나 만드는데도 유교의 질서를 철저히 지킨 것을 알 수 있다.
황제와 왕 그리고 그 부인의 무덤은 능이고
왕의 사친(왕의 후궁,종친)과 왕세자,왕세자빈,황태자, 황태자비의 무덤은 원
폐위된 왕과 그 외 왕족과 일반인의 무덤은 묘라고 부른다.
홍릉洪陵(고종과 명성황후)
위치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능의 형식 :합장릉
능의 조성 :1900년(광무 4), 1919년
능의 구성
홍릉은 대한제국 1대 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 민씨의 능이다.
홍릉은 기존 조선왕릉의 형식과 다른 대한제국 황제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이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 한 후 명나라의 황제릉을 인용하고 기존의 조선왕릉을 계승하여 개혁한 형식이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을 설치하였다.
기존의 능침공간에 있던 석물(석양, 석호, 문무석인)들은 제향공간 앞으로 배치하고, 종류와 개수를 늘렸다.
제향공간에는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침전을 세우고, 안에는 당가를 설치하였다.
침전 앞에는 문무석인, 기린석, 코끼리석, 사자석, 해태석, 낙타석, 석마의 순으로 석물을 배치하였다.
기존의 조선왕릉과 달리 향로(香路)가 가운데에 깔려 있고, 판위는 홍살문을 기준으로 왼쪽에 놓여져 있다.
그 밖에 수복방, 수라간, 비각, 예감, 어정 등이 능역 안팎으로 배치되었고 능역 옆에는 재실이 있다.
능의 역사
1895년(고종 32)에 명성태황후 민씨는 일본에 의해 시해된 후(을미사변) 시신이 궁궐 밖에서 소각되었다.
이후 일본의 압박으로 폐서인되었다가 다시 복위되고, 동구릉 내 숭릉 근처에 숙릉(肅陵)이라는 능호로 산릉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고종이 아관파천하자 산릉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명성황후로 추존하여 홍릉(洪陵)이라는 능호로 현재의 동대문구 청량리에 새로 능을 조성하기 시작 하였다.
이 때 청량리 홍릉에는 기존의 정자각 대신 침전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1900년에 홍릉의 불길론이 주장되어 현재의 남양주 금곡 홍릉에 새로운 산릉공사를 시작 하였으나 당시 정치적인 상황에 의해 공사가 또다시 중단되었다.
그 후 고종이 1919년에 세상을 떠나자 중단되었던 금곡의 홍릉자리를 다시 공사하여, 명성태황후를 먼저 천장한 후 고종을 합장하여 능을 조성하였다.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 이야기
고종태황제(재세 : 1852년 음력 7월 25일 ~ 1919년 양력 1월 21일, 왕재위 : 1863년 음력 12월 13일 ~ 1897년 양력 10월 11일, 황제위 : 1897년 양력 10월 12일 ~ 1907년 양력 7월 19일)는 흥선대원군(헌의대원왕)과 여흥부대부인(순목대원비) 민씨의 둘째 아들로 1852년(철종 3)에 청니방 사저(운현궁)에서 태어났다.
1863년에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결정권을 쥐고 있던 신정익황후 조씨가 양자로 삼아 익종(문조)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하여, 익성군에 봉해지고 관례를 거행한 뒤 왕위에 올랐다.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신정익황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그 후 최익현의 상소로 인해 대원군이 하야하고 1873년(고종 10)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였다.
재위기간 동안에 강화도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하는 등 대외 개방정책을 취하고, 군제를 개혁하고 조사시찰단을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들여왔다.
하지만 친정선포 후 민씨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으로 인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1894년(고종 31)에는 농민혁명이 발발하였으며 갑오개혁을 실시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을미사변을 겪은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관파천을 단행하기도 하였으며, 1897년에는 자주 독립 국가로서의 면목을 내세워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정한 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일본의 압력이 심해지는 가운데 1905년에 을사늑약을 맺고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으며, 1907년에 일제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보호하고자 세계만국평화회담이 열리는 헤이그로 밀사를 파견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이를 빌미로 일본과 친일 대신의 강요로 1907년에 강제 퇴위되었다.
그 후 1919년에 덕수궁(경운궁) 함녕전에서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이 유포되어 3.1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896년(건양 1) 양력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왕태자(순종)가 두 대의 가마에 앉아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황토재(지금의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하였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태자가 러시아와 협의하여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친일파 대신들을 처형하도록 명하고, 이로 인해 을미사변과 맞물려 급진적 개혁으로 국민의 감정을 자극한 친일내각은 무너지고, 친러, 친미파 인사로 내각이 구성되었다.
일시에 지지기반을 상실한 일본 측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내세워 국왕의 조속한 환궁을 요청하였으나 고종은 불안과 공포가 도사린 궁전보다는 노국공관의 일실이 안정하니 당분간 환궁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의 긴 시간을 보냈으며, 이에 따라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따라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하여 독립제국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이야기
명성태황후 민씨(재세 : 1851년 음력 9월 25일 ~ 1895년 음력 8월 20일)는 본관이 여흥인 여성부원군 민치록과 한창부부인 이씨의 딸로 1851년(철종 2)에 여주 사저에서 태어났다.
1866년(고종 3)에 고종의 사친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로 책봉되었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자 친정일가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쇄국정책에 맞서 일본과 수교하고, 1882년에는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로워지자 궁궐을 탈출하여 피신생활을 하였는데,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여 군란을 진압하고 다시금 정권을 잡았다.
1884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 때에도 청나라를 개입시켜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1894년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본공사에 의해 1895년(고종 32)에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에서 시해당하였다(을미사변).
쇄국정책을 펼쳤던 흥선대원군에 맞서 명성황후는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다.
1894년 흥선대원군이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갑오개혁을 주도하자,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사주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미우라는 1895년 10월 2일 한성신보사에 있는 낭인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를 공사관으로 불러 거액의 거사자금을 주고 왕비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
그 외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을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정부에서는 일본 훈련대의 해산과 무장해제를 통고하고,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한 일본은 명성황후의 시해 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정하였다.
일본인 자객들은 명성황후의 처소인 옥호루로 들이닥쳐 궁녀들 사이에서 명성황후를 찾아내 처참하게 살해하였다.
낭인들은 시신을 궁궐 밖으로 끌어내 불에 태웠으며, 그 후 일본은 고종에게 명성황후를 폐서인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불운한 최후를 맞은 명성황후는 곧바로 복위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명성황후로 추존되었다.
일자각에서 홍살문 방향으로 문인석,무인석,기린,코끼리,사자, 해치,낙타,말의 순서로 서 있다.
조선의 전통 왕릉과 대한제국 황제릉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석물의 배설 위치에 있다. 전통 왕릉에서는 봉분이 있는 능상 공간에만 석물이 봉분을 호위하는 형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신도에는 박석만이 깔려있다. 그러나 홍릉과 유릉에서는 능상 공간에는 물론 신도의 좌우에 문무석인과 석수를 도열시키는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이는 명 태조 효릉과 이후 13대 황제들의 능 체제를 모델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
영원英園(의민황태자와 황태자비)
위치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원의 형식 :합장
원의 조성 :1970년, 1989년
원의 구성
영원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영친왕)와 의민황태자비 이씨(이방자)의 원소이다.
원소는 조선왕릉의 형식으로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재실, 홍살문, 판위, 정자각, 비각 등이 배치되어 있고, 수복방과 수라간은 설치하지 않았다.
비각 안에 있는 표석에는 ‘대한 의민황태자 영원 의민황태자비 부좌’라고 써있다.
원침에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는 조선왕릉의 형식과 같은 개수로 배치하였다.
석물들의 조각은 홍릉과 유릉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형식을 띠고 있다.
원의 역사
1970년에 의민황태자가 창덕궁 낙선재에서 73세로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에 홍릉 동쪽에 영원을 조성하였다.
그 후 1989년에 의민황태자비가 창덕궁 낙선재에서 89세로 세상을 떠나자 영원에 합장으로 원을 조성하였다.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이야기
의민황태자(재세 : 1897년 양력 10월 20일 ~ 1970년 양력 5월 1일)는 고종과 순헌황귀비 엄씨의 아들로 1897년(광무 1)에 덕수궁(경운궁) 숙옹재에서 태어났다.
1900년에 황제의 아들로써 영친왕에 책봉되었고, 1907년(융희 1)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일본유학이 결정되어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고, 일본 왕족인 마사코(방자)와 결혼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으로 이왕세자(李王世子)로 강등되었고, 1926년에 순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명목상으로 이왕(李王)의 지위를 받았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교수부장, 육군 중장이 되었다가 1945년에 해방을 맞이하여 귀국하려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이 후 평민으로 강등되어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1963년에 대한민국의 국적을 얻어 귀국하였다.
그러나 이미 병환이 악화되어 혼수상태로 귀국하였기 때문에 병상생활을 하다가, 1970년에 창덕궁 낙선재에서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신주는 종묘 영녕전 16실에 모셨다.
의민황태자비(懿愍皇太子妃) 이야기
의민황태자비 이씨(재세 : 1901년 양력 11월 4일 ~ 1989년 양력 4월 30일)는 일본 왕족인 수정친왕의 딸로 동경부 동경시 이본궁저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일본 황태자비로 정해졌었으나, 대한제국과의 정략결혼이 결정되면서 1920년에 황태자와 결혼하였다.
의민황태자 사이에 2남(이진, 이구)을 낳았으며, 1945년에 해방을 맞이하여 귀국하려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광복 후 일본 왕족에서도 제외되어 재산이 몰수되는 일을 겪었다가 1963년에 대한민국의 국적을 얻어 귀국하였다.
귀국 후 사회봉사사업에 힘을 써 신체장애자 재활협회 부회장을 역임하였고, 사회복지법인 명휘원을 설립하였으며 의민황태자가 세상을 떠난 후 영친왕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지나온 세월』, 『세월이여 왕조여』 등이 있으며, 1989년 양력 4월 30일에 창덕궁 낙선재에서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신주는 종묘 영녕전 16실에 모셨다.
영원은 황태자 영왕과 그의 처 이방자 비의 묘다. 회인원은 그 둘째 아들 이구의 묘.
회인원懷仁園(이구 황세손)
위치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원의 형식 :단분
원의 조성 :2005년
원의 구성
회인원은 의민황태자의 둘째 아들인 이구 황세손의 원소이다.
원소는 봉분만 조성되어 있고, 석물, 곡장, 정자각, 비각 등은 설치하지 않았다.
원의 역사
2005년에 이구 황세손이 세상을 떠나자 영원 경내에 회인원을 조성하였다.
이구황세손 이야기
이구 황세손(재세 : 1931년 양력 12월 29일 ~ 2005년 양력 7월 16일)은 의민황태자와 의민황태자비 이씨의 둘째 아들로 1931년에 태어났다.
1945년 광복 후 귀국하려 하였으나 무산되어 일본에서 계속 체류하며 생활하였다.
1953년에 미국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에 입학하여 건축가로서 활동을 하였고, 1959년에 미국인 줄리아와 결혼하였다. 1963년에 귀국 후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하며 서울대와 연세대 등에 출강하기도 하였다.
의민황태자 사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명예총재를 지내다가, 2005년에 일본에서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황녀 덕혜옹주묘
위치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묘의 형식 :단분
묘의 조성 :1989년
묘의 구성
덕혜옹주묘는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의 묘소이다.
덕혜옹주묘는 단묘의 형태로 상설은 의친왕묘와 같으나 의친왕묘와 달리 표석을 설치하였다.
표석에는 ‘대한 덕혜옹주지묘’라고 써있다.
묘의 역사
1989년에 덕혜옹주가 세상을 떠나자 영원 동쪽 언덕에 묘를 조성하였다.
덕혜옹주(德惠翁主) 이야기
덕혜옹주(재세 : 1912년 양력 5월 25일 ~ 1989년 양력 4월 21일)는 고종과 귀인 양씨의 딸로 1912년에 덕수궁(경운궁)에서 태어났다.
1921년에 덕혜옹주의 칭호를 받았고 1922년에 심상소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1925년에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일본유학이 결정되자 일본에서 수학하였다.
하지만 신경쇠약의 증세가 보이기 시작되어 조현병의 진단을 받았다.
1931년에 대마도주의 후손 종무지와 정략결혼 후 딸(정혜)을 낳았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병상생활을 하였다.
결국 1955년에 종무지와 이혼하였으며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1962년에 대한민국 국적을 얻어 귀국 후 창덕궁에서 생활하였다.
실어증과 노환으로 여러 차례 치료를 받다가, 1989년에 창덕궁 수강재에서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황자 의친왕 · 의친왕비 묘
위치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묘의 형식 :합장
묘의 조성 :1996년
묘의 구성
의친왕묘는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과 의친왕비 김씨의 묘소이다.
합장의 형태로 조성하여 묘소 앞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을 배치하였다.
묘의 역사
1955년에 의친왕이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에 양주 화양리(현 성동구 화양동)에 묘소를 조성하였다.
이후 1964년에 의친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에 홍유릉 권역 밖(현 외재실 근처)에 의친왕과 따로 묘소를 조성하였다.
1965년에 의친왕묘가 어머니 귀인장씨의 묘와 함께 서삼릉 권역으로 이장되었고, 1996년에 서삼릉 권역에 있던 의친왕묘와 홍유릉 권역 밖에 있던 의친왕비묘소를 덕혜옹주묘소 동쪽으로 이장하고 합장으로 다시 조성하였다.
의친왕(義親王) 이야기
의친왕(재세 : 1877년 음력 3월 30일 ~ 1955년 양력 8월 16일)은 고종과 귀인 장씨의 아들로 1877년(고종 14)에 태어나, 1891년(고종 28)에 의화군에 봉해졌다.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명으로 미국유학을 하였고, 이듬해인 1900년에 의친왕에 책봉되었다.
1905년에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 대한적십자 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 이후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등 조국의 광복에 힘썼다.
한편 대동단 간부들과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의해 실패되었고,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끝까지 거부하였다.
1945년 광복 후 평민의 신분으로 살았으며, 한국전쟁을 겪은 후 1955년에 안국동 사동궁에서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친왕비(義親王妃) 이야기
의친왕비 김씨(재세 : 1881년 양력 12월 22일 ~ 1964년 양력 1월 14일)는 본관이 연안인 김사준의 딸로 1881년(고종 18)에 태어났다.
1893년(고종 30)에 의화군과 결혼하여 연원군부인에 봉해졌고, 1907년(융희 1)에 의친왕비에 책봉되었다.
의친왕 사이에는 소생이 없으며, 한일합병조약(1910), 광복(1945), 한국전쟁을 겪은 후 1964년에 궁정동 칠궁에서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능 바깥에 연꽃이 피어 있어서...
유릉裕陵(순종과 순명황후·순정황후)
위치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능의 형식 :합장릉
능의 조성 :1926년, 1966년
능의 구성
유릉은 대한제국 2대 순종효황제와 첫 번째 황후 순명효황후 민씨와 두 번째 황후 순정효황후 윤씨의 능이다.
유릉은 합장릉의 형태로 한 봉분 안에 세 분을 같이 모신 동봉삼실 합장릉의 형태이다.
유릉은 홍릉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조선왕릉을 계승하고 명나라의 황제릉을 인용한 대한제국의 황제릉으로 조성하였다.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좁지만, 석물의 조각이 사실적이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을 설치하였다. 제향공간에는 침전, 석물, 비각, 홍살문을 세웠다.
비각에는 1개의 능표석이 있는데 ‘대한 순종효황제 유릉 순명효황후 부좌 순정효황후 부우’라고 써있다.
능의 역사
처음 순명효황후 민씨가 1904년(광무 8)에 세상을 떠나자, 양주 용마산(현 어린이대공원)에 유강원(裕康園)을 조성하였다.
순종이 등극한 후 유강원은 유릉으로 추봉되었으며, 순종이 1926년에 세상을 떠나자 용마산에 있던 유릉을 홍릉 동쪽 언덕으로 천장하는 것이 결정되고 산릉공사를 하였다.
이후 순명효황후를 먼저 모시고, 순종을 합장으로 모셨다.
그 후 순정효황후 윤씨가 1966년에 세상을 떠나자 유릉에 합장으로 장사되었다.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 이야기
순종효황제(재세 : 1874년 음력 2월 8일 ~ 1926년 양력 4월 25일, 황재위 : 1907년 양력 7월 19일 ~ 1910년 양력 8월 29일)는 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 민씨의 둘째 아들로 1874년(고종 11)에 창덕궁 관물헌에서 태어났다.
바로 다음 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97년(광무 1)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7년(광무 11)에 일본의 압박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되자 대한제국의 두 번째 황제로 등극하고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등극 후 일본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었고, 1909년(융희 3)에는 기유각서가 강제 체결되어 사법권을 강탈당했다.
결국 1910년(융희 4)에 친일파에 의해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 후 이왕(李王)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1926년 양력 4월 25일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 구차히 산 지 17년, 2천만 생민(生民 : 국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다. 지금의 병이 위중하니 한 마디 말을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백성들이 분명히 알게 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백성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어둠 속에서 여러분을 도우리라. 】
1926년 4월 25일 새벽 6시 15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53세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위와 같은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신문에는 '5백 년 종사의 마지막 황상(皇上) 승하'라는 제목의 기사가 전면을 장식하였다.
그 해 6월 10일 발인하는 날, 순종의 발인 행렬이 유릉을 향하여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단성사 앞을 지날 때였다.
황제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러 나온 수많은 군중 속에서 수천 장의 격문이 날아오르며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 황제의 인산일을 기하여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순종의 마지막 유언을 백성들이 알 리 만무하였으나, 마지막 황제의 죽음은 백성들의 독립에 대한 욕망을 더욱 고조시키게 된 것이다.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이야기
순종의 첫 번째 황후 순명효황후 민씨(재세 : 1872년 음력 10월 20일 ~ 1904년 양력 11월 5일)는 본관이 여흥인 여은부원군 민태호와 진양부부인 송씨의 딸로 1872년(고종 9)에 양덕방 계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882년(고종 19)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897년(광무 1)에 황태자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순종 등극 전인 1904년(광무 8)에 경운궁(덕수궁) 강태실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07년(융희 1) 순종 등극 후 순명황후로 추존되었다.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이야기
순종의 두 번째 황후 순정효황후 윤씨(재세 : 1894년 음력 8월 20일 ~ 1966년 양력 2월 3일)는 본관이 해평인 해풍부원군 윤택영과 경흥부부인 유씨의 딸로 1894년(고종 31)에 양근 서종면 외가(현 양평군)에서 태어났다.
1907년(광무 10)에 황태자비로 책봉되었고, 같은 해에 순종이 등극하자 대한제국 최초의 황후로 책봉되었다.
황후는 한일합방체결을 반대하여, 병풍 뒤에서 옥새를 치마속에 감추고 어전회의를 듣고 있다가 백부 윤덕영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결국 1910년(융희 4) 한일합병조약 체결되면서 이왕비(李王妃)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게 되었다.
일제의 침략행위를 경험하였고, 광복과 한국전쟁을 겪었어도 대한제국의 황후로서 품위를 잃지 않았다.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생활하였다가 1966년 양력 2월 3일에 창덕궁 낙선재에서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1950년, 순정효황후는 한국전쟁 당시에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창덕궁에 남아있었는데, 이때 인민군들이 창덕궁에 들이 닥쳐 행패 부리는 것을 보고 크게 호통을 쳐서 내보냈다고 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로서 당당함과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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