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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아버지 소천 18-12-16일 04시 43분 본문
이 세상에서는 어머니와 함께 나를 가장 사랑하셨던 아버지께서 94년의 생애를 마치시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8년을 더 혼자 계셨다.
우리들 세대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최초의 기억은 아마도 내가 5살 무렵의 일이었던 것 같다.
의성군 위중에서 목회하실 때 교회 옆 웅덩이에 내 신발인지 동생신발인지가 빠졌다.
아버지께서 긴 막대기로 그 신발을 건져올리려고 하고 있는데 옆에서 구경하던 신애가 그만 상당히 깊은 그
웅덩이에 빠졌다.
그때 아버지 옆에는 교인 어른들이 몇 분 함께 계셨다.
신애가 빠진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신애가 빠졌다고 말을 했는데 다른 교인들도 소리만 질렀지 아무도 선뜻
들어가서 건지려고 하지 않았다.
신발 건지는 일에 열중하고 계셨던 아버지는 조금 뒤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소리만 지르고 아무도 선뜻 물로 뛰어들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바로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뛰어들어 신애를 건져낸 기억이 있다.
이것이 아버지에 대한 나의 최초의 기억이다.
그리고 또 잊혀지지 않는 기억 가운데 하나는 내가 군에서 전역하고 와서 복학하기까지 밀양에서 잠깐 지낸
적이 있었다.
그때 교회 청년 몇명과 좀 먼 다른 동네로 낚시를 갔다가 해가 지고 나서야 집에 돌아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가 낚시를 갔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지만 늦게까지 안 들어오니까 걱정이 되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교회의 어떤 장로님께 부탁해서 나를 찾아달라고 부탁까지 드렸다고 한다.
당시 내 생각에는 군에서 제대까지 하고 온 신체 건강한 남자인데 무슨 걱정을 그렇게까지 하실까 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이제 이 나이가 되어보니 자식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버지에게는 걱정해야 할 자식일 뿐이다.
이런 아버지께서 지난 봄에 넘어지셔서 고관절이 부러지고 난 후 병원에 계셨다.
다행히 큰 통증을 느끼시다가 돌아가신 것은 아니지만 1년 8개월 정도의 시간을 병원에 계시다가 소천하셨다.
어머니께서 살아계실 때는 아들이 최고라고 말씀하셨지만 어머니 돌아가시고 난 후 아내가 최고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들에게도 부부간에 서로 사랑하고 살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니까 잘 해드린 것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고 잘못한 것만 생각이 난다고 말씀하시면서
우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참 마음이 섬세하고 여리신 분이셨다.
하지만 목사이기 때문만은 아니라 기독인으로서 신앙 문제에서만은 아주 강경하셨던 분이셨던 것 같다.
고신측 목사님이어서 교단의 영향으로 그런 면도 있었겠지만 철저하게 잘 믿어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러셨던
것 같다.
내 어릴적 고신 교단의 분위기는 주일 성수가 아주 엄격했다.
주일 예배에 한번이라도 빠지면 정말 큰 일 나는 줄 알았다.
너무 율법적인 면도 있었겠지만 그런 훈련 덕분에 나는 주일 성수에 정말 최선을 다했다.
군에서는 졸병 시절에 주일날 교회 간다고 탄약고 뒤로 불려가서 고참한테 많이 얻어맞기도 했고 파병나가서 산꼭대기에서 근무할 때는 캄캄한 밤에 산을 오르내리면서 주일 밤예배까지 드렸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다른 친구들은 임용고사를 거쳐서 교사가 되고 교장이 되고 교육장까지 된 친구도 있다.
그런데 그 시험을 주일에 보았기 때문에 나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교사가 되지 못했고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하지만 그 시험 보지 않고도 나는 교사로 정년퇴직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내가 종종 자부심을 가지고 하는 말인데 "내가 아는 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좋은 학교에서 평생을 보냈다.
주일 성수를 하려고 했더니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학교에서 내가 교사로 지낼 수 있게 해 주셨다고 나는 믿는다.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도우심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훈련과 영향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목회하실 때 사람이니까 아버지도 실수할 때도 있었을 것이고 힘들 때도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 기억 나는 것 중에 하나는 아버지께서 밀양에서 목회하실 때 교회 모 장로가 아마 속을 많이 상하게 하였던 것 같다.
마침 내가 집에 갔을 때도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그때 친구 목사님들이 부르셔서 나갔다 오시더니 다시 기운을 차려서 들어오신 모습을 본 적도 있다.
아들이 위로가 되지 않고 친구가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되어서 나이 들수록 좋은 친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나도 좋은 친구가 될려고 노력한다.
어릴 때 우리 집은 매일 가정 예배때 기도할 때마다 신 00 전도사님을 위해서 빠지지 않고 기도했다.
나는 당시 아주 어릴때 였으니까 누군지 잘 모르지만 아버지 어머니께서 빠지지 않고 기도를 하시니까 내 기도 차례가 되면 나도 그렇게 했다.
이번 장례식에 이 분께 전화를 드렸더니 전화를 받으시면서 우셨다.
이 분의 아들 두 분이 조문을 오셨다.
어머니는 연세도 드셨고 몸이 아파서 오시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께서 위중에서 목회하실 당시 이 분은 10대의 처녀였고 복음을 받아들이셔서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셨다.
후에 성경학교에 들어가셔서 전도사님이 되셨고 그 후에 목사님 사모님이 되셨다.
그런데 당시 아버지의 박해가 엄청 심하였다.
어떤 때는 예배 중인데 그 아버지께서 술이 취해서 예배 중인 딸을 죽이겠다고 도끼를 들고 교회 밖에서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여자 아이 머리를 빡빡 깍아 버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새벽 기도회까지 나가니까 교회에 못 가게 하려고 할머니와 같은 방에 자는 딸의 다리와 할머니 다리를
끈으로 묶어서 못가게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다고 해야 할지 어떤 때는 이 할머니가 연세가 많으셔서 눈이 어두우니까 이 사모님 동생의
다리와 자기 다리를 묶어서 다행히 교회에 가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모진 박해 가운데도 열심히 신앙생활 하시더니 결국은 목사님 부인이 되셨고 그 아들 둘이 조문을
왔는데 한 분은 세브란스 병원의 교수고 한분은 경희대 교수가 되었다.
신앙 생활을 똑바로 제대로 한 사람들의 자손들이 잘 된 예는 이루 셀 수없이 많다.
아버지께서는 힘든 목회도 하셨지만 이런 보람있는 일들도 다 기록하려면 오늘 밤을 세워야 한다.
이제는 천국에서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시던 어머니 만나셔서 행복하게 계실 것을 생각하니 이 글을 쓰면서
눈물이 난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니 정말 잠깐 후면 그동안 그렇게 보고 싶었던 어머니도 함께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아야 하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처럼 내 자식들에게도 이런 좋은 신앙과 기억을
물려주어야 한다.
내 동생들과 후손들에게도 role model이 되어야 하고 주위 사람들뿐만 특히 아내와 자녀들에게도 인정받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하나님께서 은혜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이제 이 세상에서는 인자하셨던 아버지를 다시 뵐 수 없으니 매우 섭섭한 일이지만 근심 걱정 없는 천국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감사한 일이다. 우리 후손들이 모였다.
여기에 빠진 인물들은 아기가 어리거나 뱃속에 아기가 있어서 사진에는 빠졌다.
장영돈 목사님은 아버지께서 무안 동부교회 계실 때 전도사로 시작해서 목회를 배우셨고 지금은 광주 은광교회에서 목회를 잘 하고 계시는 목사님이시다.
특별히 아버지 장례에 멀리서 올라오셔서 발인예배와 하관예배를 인도해 주셨다.
아주 인상적인 설교도 해 주셨고...
아버지의 장손의 아들인 호준이도 증조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유봄도 왔다 갔다.
멀리 있는 나은이는 엄마가 임신 중이어서 오지 못했지만 영상통화로 우리가 다 만날 수 있었다.
장례 절차를 모두 마치고 조카들에게 앞으로 사촌들끼리도 정답고 우애있게 잘 지내도록 특별히 부탁하였다.
장례식에서 큰 역할을 하였고 우리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것을 감사해서 거금(?)이 든 금일봉을 각자에게 전했다.
호텔에서 나와서 아버지께서 계셨던 요양 병원에 들러 그동안 수고해 준 간호사들과 간병인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이 집에서 점심을 먹고 근처에 있는 Coffee shop에서 다시 이야기들을 나눈 후 헤어졌다.
Thank you My Lord & my 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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