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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강화 광성보 22.11.02 본문
10층 조집사님 부부와 우리 부부가 함께 가다.
10시 반에 출발해서 11시 반 도착.
한바퀴 돌아보는 데 50분 가량 소요.
나와서 강화 읍내에 있는 이유가라는 청국장집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성공회 강화 성당과 용흥궁을 둘러보고 돌아오다.
화창한 가을날이 참 좋았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광성보는
사적 제 227호이다. 고려시대 몽고 침입에 대항하여 흙과 돌을 쌓아 강화외성을 쌓았다. 조선 광해군 10년(1618년)에 고려시대의 외성을 보수하고, 1656년 광성보를 설치했는데, 이 보의 돈대는 1679년에 축조된 것이며 오두, 화도, 광성의 돈대와 오두정 포대가 이 보에 소속되었다. 1745년 완전한 석성으로 개축되어 당시 성문도 설치되었다. 광성보는 신미양요 당시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로서, 1871년 4월 24일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였을 때, 상륙부대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용사가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싸워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고 장렬히 순국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 후 성책과 문루가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7년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그리고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이 모두 보수 정화되었으며, 이 때 세운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가 용두돈대 위에 서 있다. 1998년에는 해변쪽으로 넓은 휴식공간을 조성하여 관광객들에게 이용 편의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광성보는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음력 4월 24일에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하여 장렬하게 전사한 무명용사들에 대한 광성제가 11:00부터 봉행된다.
신미양요를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1871년 6월 10일 존 로저스 제독이 미국 해군 1,200여명을 이끌고 와서 초지진, 덕진진, 그리고 이곳 광성보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당시 미군은 남북 전쟁을 막 치른 후라서 최신식 무기와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조선군은 1,000여명이 있었지만 훈련도 안 되어 있었고 무기도 미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도 어재연 장군과 그 동생 어재순 그리고 조선군은 끝까지 싸우다가 장군을 포함해 340명이 전사했고 미군은 3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이 전투로 얻은 것이 없었던 미군은 결국 철수하고 이로 인해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더 강화하게 된다.
신미양요의 원인은 6년전인 1866년에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했지만 조선은 불응했고 그들이 대포를 쏘면서 민간인을 학살하자 조선군이 그 배를 불태워 버린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링컨 암살로 국내가 어수선했고 이 배가 민간인의 배여서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알고 외교적 항의와 함께 통상을 요구하게 된 사건이 바로 신미양요였다.
1866년에는 병인 양요로 불리는 프랑스 해군이 광성보를 침략한 사건도 있었다.
이 때는 초반에는 조선군이 패했으나 후반에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조선 군대가 정족산성에 매복하고 있다가 프랑수군을 물리쳤고 결국 더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로즈 제독은 퇴각했다.
이때 이들은 외규장각에 있는 보물들, 서적들을 많이 약탈해 갔다.
병인양요 - 나무위키 (namu.wiki) 참조
또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피난왔던 인조가 후금과 연미정에서 형제의 연을 맺고 교섭을 벌여서 전쟁을 끝내기도 했고
1636년의 병자호란 때는 청군의 몽골병사들이 강화도 일대를 약탈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인조는 영의정 김류의 아들 김경징에게 대군들과 그 식솔들을 보호하라고 강화도로 보내면서 강화도 검찰사로 임명하였으나 수비는 하지 않고 술만 마시다가 강화가 청나라 9왕에게 함락 당하고 그는 도망 갔다가 결국 사사당했다.
아래는 성당 내부에 있는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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