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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19-05-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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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19-05-18

singingman 2023. 2. 28.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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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 중앙 교회 19년 몽골 단기 선교팀 17명이 함께 가다.

9시쯤 홍보관에 모여서 묘원에 관한 비디오물을 관람하다.

약 30분간 보고 묘원을 둘러보게 된다.

비디오에서 이미 이 묘원의 성립 배경과 중요한 선교사들에 관해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자세히 보면 다 알

수 있다.

하지만 가이드가 너무 대충 지나가는 바람에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 혼자 다니면서 열심히 사진만 찍었다.

묘역 탐방이 끝나고 양화진 홀에 들어가면 또 다른 전시물들과 성경의 번역과 배포과정을 자세히 알 수 있다.

한글 성경 덕분에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한글이 우리 서민들에게 깊이 보급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국사 편찬위원장을 지냈고 총신 신대원에서 우리에게 한국 교회사를 가르쳤던 이만열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00주년 기념교회 이재철 목사님도 우리 사회에 좋은 영향을 많이 끼친 아주 존경받는 목사님으로 얼마전 은퇴

하시고 지금은 지방으로 내려가셨다.

 

이곳에는 선교사와 그 가족을 포함한 145명의 무덤이 있으며 그외에 다른 무덤까지 합쳐서 417기의 무덤이

있다고 홍보관에서 말해 주었다 

417명은 15개국(남아공, 뉴질랜드, 덴마크, 독일, 러시아, 미국, 스웨덴, 영국, 이탈리아, 일본, 캐나다,
프랑스, 필리핀, 호주,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다.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옛날에는 이 교회 이름이 Union Church였던 걸로 기억된다.

 

사람들 서 있는 건물이 홍보관이다.

 

교회옆 화단에 꽃들이 피었다. 금낭화도 보이고

 

아이리스도 보이고

 

 

꽃잔디도 있고

 

흰 꽃잔디

 

찔레나무 꽃

 

양화진 홀 - 이 건물에서 성경 번역과 배포에 관한 동영상을 볼 수 있다.

 

지금은 100주년 기념교회 건물이지?

 

이 느티나무가 보호수

 

 

 

서울시가 보호수로 지정은 했는데 수령이 얼마나 됐는지는 안 적었다.

 

 

이쪽으로 가면 절두산 성당으로 갈 수 있다.

 

서교동 교회 장로 부부의 묘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영적 대각성운동은 한국 기독교사에서 정말 대단한 사건이었다.

 

 

 

 

 

 

 

 

              절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부처의 머리를 닮은 佛頭花가 개신교 선교사 묘원에 있다.

                          있어서 안 될 일은 아니지만...  

 

 

 

 

 

 

 

 

 

 

아이리스가 이런 색깔도 있다.

 

花無十日紅이요 달도 차면은 기우느니라.

 

위 글과 일치하는 성경말씀은 시편78:39절에 나오는

"He remembered that they were but flesh,A passing breeze That does not return"과

 

야고보 4장 14절에 나오는

" You are a mist that appears for a little while and then vanishes."

 말씀이겠다.

 

 

 

 

 

 

 

 

 

 

 

 

 

 

 

 

 

 

 

 

강화 온수리 성공회 성당은 참 아름다운 건물이다.

이런 선교사들 덕분에 강화도는 감리교와 함께 성공회가 깊은 뿌리를 내렸다.

강화에는 강화 성당과 함께 온수리 성당이 건재하고 있다.

 

 

 

 

 

 

 

 

 

 

 

 

 

 

 

 

 

 

 

 선교사 자신들은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왔지만 어린 자녀들을 먼저 보내야 하는 마음들이 어떠했을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오늘날도 MK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리 나라 초기 교육과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한 언더우드 가문의 헌신은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연세대학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유명 사립 고등학교들은 거의가 기독교 Mission School인 이유는 바로 초기 선교사들의 헌신과 노력 덕분이다.

 

 

 

 

          오늘날도 많은 미개발국가에는 이런 평신도 전문 선교사가 필요하다. 

 

 

 

 

 

 

 

 

 

 

 

 

지금도 의료사정이 열악한 지역에는 이런 선교사를 많이 필요로 하고 있다.

 

 

 6.25 전쟁에서 그런 어려움을 겪고도 다시 임지로 돌아오는 선교사들은 어떤 사람일까?

 

 

 

 

 

 

오늘날의 이화여대가 있게 한 스크랜턴 선교사

 

김규영 봉사대 카페 | 이화학당과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 - Daum 카페

 

이화학당과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

이화학당과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 ▲ 메리 스크랜턴(1832~1909)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학당(梨花學堂)은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다.

cafe.daum.net

 

 

이름을 하사했다는 말은 사액서원과 같은 의미인가?

 

 

 

 

 

 

 

       크리스마스 seal이 이 가족에 의해서 만들어졌구나.

 

 

  헤론 덕분에 이 선교사 묘지가 시작되었다.

 

 

 

 

 

 

 

 

 

 

정신여학교를 설립한 에니 앨러즈

 

 

 

 

 

백정 박성춘을 치료하고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하였으며 그 아들 박서양은 세브란스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승동교회와 안동교회의 이야기는 백정과 양반의 갈등을 말해 주는 교회사의 한 부분이다.

 

 

 

이 묘역에는 아직 작약이 피어있다.

 

 

 

 

 

 

 

 

 

 

 

 

구세군도 초기에 우리 나라 선교에 큰 공헌을 했고 지금도 자선남비로 그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독일인으로 우리 나라에 최초의 서양식 궁정 군악대를 창설했으며 "대한제국 애국가"도 작곡했다.

 

 

 

 

 

 

 

 고종의 내탕금과 관련된 일화가 있는 헐버트 -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헤나메오 :: [양화진선교사 이야기] 한국의 친구 헐버트 선교사 (tistory.com)

 

[양화진선교사 이야기] 한국의 친구 헐버트 선교사

[양화진선교사 이야기] 한국의 친구 헐버트 선교사 호머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호머 헐버트 박사의 무덤에 적힌 그의 유언이다.

henameo.tistory.com

 

 

 

 

한국 YMCA의 개척자

 

 

 

 

 

이 묘지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 - 일본의 통치하에 있던 우리 나라지만 그는 우리 나라를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일본인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1867~1962)와 그의 부인 우에노(上野·1878~1950)의 묘비가 눈길을 끈다. 이 일본인 부부는 왜 서양인 선교사들이 묻히는 양화진 묘원에 잠들게 됐을까.

 
▲ 일생을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헌신했던 소다 가이치는 1961년 다시 한국 땅을 밟았고(왼쪽), 영락보린원에서 여생을 보내다 이듬해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양화진 묘원의 소다 가이치 묘비(오른쪽).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제공개항장 나가사키에서 일찍이 근대식 교육을 받은 소다 가이치는 대만 소재의 독일계 회사에 근무하던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런 소다에게 한국과의 인연은 우연히 찾아왔다. 술에 취해 길가에 쓰러져 죽을 뻔했던 그를 한 한국인이 구해 줘 목숨을 건졌던 것.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1905년 한국을 찾아 황성기독교청년회(현 서울YMCA)에서 일본어 교사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이곳 종교부 총무로 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을 만나 당시 식민지 조선이 처해 있던 참담한 상황에 눈뜨게 됐다. 소다는 일본인 소학교 교사로 한국에 와 있던 우에노를 만나 결혼을 했다. 아동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 부부는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한국 고아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1921년 고아사업기관인 일본 가마쿠라(鎌倉)본부 경성지부 책임자로 임명된 부부는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자리 잡은 가마쿠라보육원(현 영락보린원)에서 한국인 고아들을 돌봤다. 김수진 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은 "당시 세계적인 경제공황과 식민치하의 상황에서 고아를 돌본다는 것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희생이 뒤따랐다"고 말했다. 소다 부부는 해방 전까지 무려 1000여명 한국 고아들을 길러냈다.

일본인이었던 소다 부부는 독립운동에도 관여했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신민회 회원 105명을 투옥시킨 '105인 사건'이 발생하자 소다 가이치는 조선 총독이던 데라우치를 찾아가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또 3·1운동으로 월남 이상재 선생이 투옥되자 경성재판소 판사에게 이상재의 무고함을 고하다 일본인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그가 돌봤던 고아가 훗날 독립운동가가 됐다는 이유로 헌병대에 체포되는 곡절을 겪기도 했다.

1945년 해방이 왔지만 이들은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영락보린원을 운영했다. 부인 우에노는 고아들을 돌보다 1950년 1월 세상을 떴다. 일본으로 돌아간 소다 가이치는 전후 일본사회의 회개운동을 전개했다.

1960년 1월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한국 대통령 이승만씨의 옛 친구 소다 옹(翁)이 한국 귀환을 열망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제2의 고향 한국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하는 소다 가이치의 이야기가 알려지자 정부는 그의 입국을 허용했다. 1961년 3월 서울에 돌아온 그는 영락보린원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2년 3월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일본인에게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김수진 원장은 "당시 고아들이 소다를 '하늘의 할아버지'로 부를 만큼 존경을 받았지만, 일본인 선교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며 "충분히 조명받지 못해 안타깝다"고 했다.

<조선일보 2011.10.09>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함께 우리 나라에 공식적으로 처음 들어온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설립했고 우리 나라에 감리교가 장로교와 함께 가장 큰 교파로 성장하도록 한 장본인이다.

예수안에 거 하는곳. 사랑하라! | * 9] 아펜젤러 선교사 * - Daum 카페

 

* 9] 아펜젤러 선교사 *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말씀 실천한 선교사 ▲아펜젤러 선교사.아펜젤러(H. G. Appenzeller, 1858-1902) 선교사는 미국 펜실비니아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독일 루터교회에 출석하는 부모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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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양화진 홀에 전시된 유물과 글들입니다.

 

 

 

 

 

 

 

 

 

 

 

 

 

 

 

 

 

 

 

 

 

 

 

 

 

 

 

 

 

 

 

 

 

 

 

 

 

 

 

 

 

 

 

 

 

 

 

 

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에 우리 나라에 들어왔을 때 이미 우리 나라에는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이 있었다.

세계 선교사에서 선교사가 들어가기도 전에 성경이 먼저 번역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최초의 한글성경 번역 --- 이수정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최초의 한글성경 번역 --- 이수정

1882년 9월19일.제물포항을 떠나는 absolute; TOP: -3px" id="jinieahn/WEASFiles/644/8.gif" o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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