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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장군묘 2021-01-08 본문
고려 문하시중을 지냈고 여진족을 정벌했으며 동북 9성을 쌓았다.
정적들에 의해서 어려움도 당했지만 회복했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동현(同玄). 고려 태조 때 삼한공신(三韓功臣) 신달(莘達)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 집형(執衡)이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습유(拾遺)·보궐(補闕)을 지내고 1087년(선종 4)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다. 1095년 숙종이 즉위하자 좌사낭중(左司郞中)이 되어 임의(任懿)와 함께 국신사(國信使)로 요(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으며, 1098년(숙종 3)에는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송(宋)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1099년 우간의대부·한림시강학사가 되었고, 2년 뒤에 추밀원지주사가 되어 남경(南京:지금의 서울)의 지세를 살폈다.
1102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굉(李宏)과 함께 진사시를 주관했고, 이어 추밀원부사가 되어 재추(宰樞)의 반열에 올랐다. 1103년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吏部尙書同知樞密院事)를 거쳐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승지에 올랐다.
그가 숙종대에 고위직으로 진급하고 출세한 데에는 며느리(尹彦榮 또는 둘째 아들 尹彦純의 배필로 추정됨)가 숙종비인 명의태후(明懿太后)의 동생이었던 사실이 작용했던 듯하다. 숙종대에는 대각국사 의천(義天)과 그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남경 건설, 금속화폐 유통책 실시 등 일련의 신법(新法)을 실시했다.
또 숙종대 후반에 제기되는 여진정벌론에는 여진족의 흥기와 고려 동북면 침입이라는 객관적 정세 변화 외에 국내의 정치상황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는 숙종대 왕권강화시책의 한 주역이었고, 뒤를 이어 예종대의 정책 수행과 여진정벌 추진에서도 중심세력으로 활약했다.
윤관
윤관 영정, 문숙공영당, 만뢰사의 무신상을 1902년 모사하여 이곳에 봉안하였다, 충청북도 옥천군 북이면 내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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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의 행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숙종대 후반에서 예종대 초반에 걸쳐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개척한 것이다.
고려의 동북면과 연결된 갈라전(曷懶甸) 일대의 여진 부족들은 고려의 기미주로 존재하면서 그들의 토산물을 부족한 생필품과 무역하고 있었다. 고려는 그들 추장들에게 무산계(武散階)나 향직(鄕職)을 주어 회유하기도 하고, 투화해오는 여진족에게는 투화전(投化田)을 주어 정착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11세기말에 이르러 쑹화 강[松花江] 지류인 아르추카하[阿勒楚喀河] 유역에서 일어난 완옌부[完顔部]가 주변의 여진 부족들을 정복하면서 이러한 관계가 변동되었다.
완옌부 여진은 갈라전 일대의 여진 부락을 경략하고 이어서 고려로 투항해오는 여진인을 추격하여 정주(定州)의 장성(長城) 부근까지 이르렀다. 이에 고려와 여진 사이에 무력충돌이 있게 되었다. 1104년(숙종 9) 고려는 문하시랑평장사 임간(林幹)을 보내 싸우게 했으나 패했다. 이에 추밀원사였던 윤관은 2월에 동북면 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완옌부 여진과 대적했으나 고려군 과반수가 죽고 패하자 일단 저자세로 강화하고 돌아왔다.
그는 숙종에게 우리는 보병 중심인 데 반해 적은 기병이므로 당할 수 없다고 패전의 원인을 말하고, 그해 12월부터 별무반(別武班)을 조직했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神騎軍)과 보병인 신보군(神步軍) 외에, 승병 조직인 항마군(降魔軍)·도탕(跳盪)·경궁(梗弓)·정노(精弩)·발화(發火) 등의 특수군으로 이루어졌다. 다음해 6월 태자소보판병부사(太子少保判兵部事)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고, 11월에 예종이 즉위하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1106년(예종 1) 9월에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수행되는 천수사(天壽寺)의 일을 감독했다.
1107년 12월 원수가 되어 17만 명의 군사를 중·좌·우의 3군으로 편성했으며 수군(水軍)까지 동원해 여진정벌에 나섰다.
고려군은 일거에 쳐들어가 여진족을 쫓아내고 9성을 쌓았다. 9성의 확실한 위치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흔히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吉州)·복주(福州)·공험진(公嶮鎭)·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며, 진양진·숭녕진 대신 의주(宜州)·평융진(平戎鎭)을 꼽기도 한다. 윤관은 남쪽지방의 민호(民戶)를 이곳으로 옮겨 살게 했다.
〈고려사〉 윤관전에 기록되어 있는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 의하면 사민(徙民)된 수는 함주·영주·웅주·길주·복주·공험진에 병민(兵民) 6,466정호(丁戶)였다. 1108년 3월에 포로와 전리품을 가지고 개선하여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에 봉해지고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가 되었다.
이어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 식읍(食邑) 2,000호, 식실봉(食實封) 300호에 봉해졌다.
고려의 정벌과 9성 설치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여진족은 완옌부를 중심으로 모여 무력항쟁을 하는 한편, 9성을 돌려주고 생업을 편안히 해주면 자손 대대로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면서 9성 환부를 애걸했다. 고려는 여진족의 공세 앞에 9성을 지키는 것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또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지키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무리한 군사동원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서 조정에서도 화평론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에 조정회의에서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하고 7월부터 9성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정세가 바뀌자 윤관은 패군의 죄를 뒤집어쓰고 관직과 공신호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그는 숙종대를 이어 예종대에도 왕권강화를 위한 정책을 충실히 수행한 정치세력이었으므로, 흔히 패군한 장수가 영구히 관직을 삭탈당하는 것과는 달리 예종의 비호로 벌을 받지 않고 1110년 복직되어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가 되었다.
1130년(인종 8) 예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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