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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선생 묘 21-01-1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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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백과에 의하면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고려시대 관리·문신·학자 이규보의 무덤. 시도기념물.
인천광역시 기념물 15호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있다. 묘는 단분으로 하단에 호석이 둘려쳐 있으며 봉분의 둘레는 16m, 높이는 1.8m이고, 묘 앞에 상석과 장명등이, 상석 좌우에는 망주석과 석양(石羊) 1쌍, 묘갈이 배치되어 있다.
묘 주변의 석물 중 문무석은 매우 고졸하여 당시 유풍을 알 수 있는 귀한 조각이며, 석양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고려시기의 조각이다. 묘와 약간 떨어진 곳에 재실이 있다.
이규보는 벼슬이 집현전 대학사와 평장사에 이르렀으나 관운(官運)은 없었다. 북방민족에 시달리는 우리 민족의 기상을 고취시키고자 고구려 건국영웅 동명왕을 서사시로 읊은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지었고,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과 「백운소설(白雲小說)」 등을 비롯하여 이규보 전집 51권을 남긴 문장가이다.
이규보 선생은
본관은 황려(黃驪). 초명은 이인저(李仁氐),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만년(晩年)에는 시·거문고·술을 좋아해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불렸다. 아버지는 호부시랑(戶部侍郎)을 지낸 이윤수(李允綏)이다.
9세 때부터 중국의 고전들을 두루 읽기 시작했고 문(文)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다. 14세 때 사학(私學)의 하나인 성명재(誠明齋)의 하과(夏課: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여름철에 절을 빌려 학습하는 일)에서 시를 빨리 지어 선배 문사로부터 기재(奇才)라 불렸다. 이때 이규보는 문한직(文翰職)에서 벼슬해 명성을 얻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지엽적 형식주의에 젖은 과시의 글(科擧之文) 등을 멸시하게 되었고 국자시(國子試)에 연속 낙방하는 요인이 되었다.
16세부터 4·5년간 자유분방하게 지내며 기성문인들인 강좌칠현(江左七賢: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임춘(林椿)·조통(趙通)·황보항(皇甫抗)·함순(咸淳)·이담지(李湛之)의 모임으로 죽림칠현·죽림고회·해좌칠현이라 불림)과 기맥이 상통해 그 시회(詩會)에 출입하였다. 이들 가운데서 오세재(吳世才)를 가장 존경해 그 인간성에 깊은 공감과 동정을 느꼈다고 한다.
1189년(명종 19) 5월 유공권(柳公權)이 좌수(座首)가 되어 실시한 국자시에 네 번째 응시해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이듬해 5월 지공거(知貢擧)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지명(李知命), 동지공거(同知貢擧) 좌승선(左承宣) 임유(任濡) 등이 주관한 예부시(禮部試)에서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관직을 받지 못하자, 25세 때 개경의 천마산(天磨山)에 들어가 시문을 짓는 등 세상을 관조하며 지냈다. 장자(莊子)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어떠한 인위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낙토)의 경지를 동경하기도 하였다. 백운거사라는 호는 이 시기에 지은 것이었다. 26세 때인 1193년(명종 23)에 개경으로 돌아왔으나 빈궁에 몹시 시달리면서 무관자(無官者)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1197년(명종 27) 조영인(趙永仁)·임유·최선(崔詵) 등 최충헌(崔忠獻) 정권의 요직자들에게 관직을 구하는 편지를 썼다. 거기에서 그동안 진출이 막혔던 문사들이 적지 않게 등용된 반면, 자신은 어릴 때부터 문학에 조예를 쌓아왔음에도 30세까지 불우하게 있음을 통탄하고 일개 지방관리라도 취관 시켜줄 것을 진정하였다. 이 갈망은 32세 때 최충헌의 초청시회(招請詩會)에서 최충헌을 국가적인 대공로자로 칭송하는 시를 짓고 나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과거에 급제한지 10년 만에 사록겸장서기(司錄兼掌書記)로서 전주목(全州牧)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봉록 액수가 적었고 행정잡무가 번거로웠다. 상관과 부하는 태만하였으며 동료들이 중상(中傷)을 하는 등 관직생활은 고통스러웠다. 결국 동료의 비방을 받아 1년 4개월 만에 면직되었다. 처음에는 자조(自嘲) 하다가 다음은 체념하고 결국 타율적으로 규제받는 것을 숙명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1202년(신종 5) 동경(東京: 현재 경상북도 경주)과 청도 운문산(雲門山) 일대의 농민폭동진압군의 수제원(修製員)으로 자원하여 종군하였다. 현지에서 각종 재초제문(齋醮祭文)과 격문(檄文), 그리고 상관에의 건의문 등을 썼다. 1년 3개월 만에 귀경했을 때, 상(賞)이 내려질 것을 기대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규보는 문필의 기능과 중요성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꼈다.
1207년(희종 3) 이인로·이공로(李公老)·이윤보(李允甫)·김양경(金良鏡)·김군수(金君綬) 등과 겨루었던 「모정기(茅亭記)」가 최충헌을 만족시켜 직한림(直翰林)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문필을 통한 양명과 관위 상의 현달이 함께 할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 다시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였다.
1215년(고종 2) 드디어 우정언(右正言) 지제고(知制誥)로서 참관(參官)이 되었다. 이때부터 출세에 있어서 동료 문사들과 보조를 같이 하면서 쾌적한 문관생활을 만끽하였다. 금의(琴儀)를 두수(頭首)로 하여 유승단(兪升旦)·이인로·진화(陳澕)·유충기(劉冲基)·민광균(閔光鈞), 그리고 김양경 등과 문풍(文風)의 성황을 구가하였다.
1217년(고종 4) 2월 우사간(右司諫)이 되었으나 가을에 최충헌의 한 논단(論壇)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하는 부하의 무고를 받아 정직당하고, 3개월 뒤에는 좌사간(左司諫)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집무상 과오를 범한 것으로 단정, 좌사간마저 면직되었다.
이 같은 사태는 그때까지 전통적인 왕조규범으로 직무를 수행하고자 하였고, 그러한 태도를 관리의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이규보에게 큰 충격과 교훈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관념이 최충헌의 권력 앞에서 무의미한 것이 되고 파탄되어 버리자 또 다시 자신의 사고(思考)와 태도를 바꾸어 보신(保身)에 대한 특별히 마음을 두게 되었다.
1219년(고종 6) 최이(崔怡)의 각별한 후견 덕분으로 중벌은 면하게 되어 계양도호부부사병마검할(桂陽都護府副使兵馬黔轄)로 부임하였다. 다음해 최충헌이 죽자 최이에 의해 귀경하게 되면서 최이와 절대적 공순관계(絶對的恭順關係)를 맺게 되었다. 일체의 주견 없이 다만 문필기예의 소유자로서 최씨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충실히 집행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뒤 10년간은 최씨정권의 흥륭기(興隆期)이기도 하거니와 이규보가 고관으로서 확고한 기반을 다진 시간이었다.
보문각대제지제고(寶文閣待制知制誥)·태복소경(太僕少卿)·장작감(將作監)·한림학사시강학사(翰林學士侍講學士)·국자좨주(國子祭酒) 등을 거치면서, 1225년(고종 12) 2월 국좌좨주(國子祭酒)로서 국자시를 주관하였다. 1228년(고종 15) 중산대부 판위위사(中散大夫判衛尉事)에 이르렀고, 3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1234년 5월 지문하성사로서, 1236년 5월 참지정사로서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1230년(고종 17) 한 사건에 휘말려 위도(猬島)에 유배되었다. 이규보는 이때까지 권력에 심신을 다 맡겨왔던 터였는데 자기를 배제하는 엄연한 별개의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새롭게 놀랐다. 보신을 잘못하는 자신이 부덕한 사람으로 통감되었다. 8개월 만에 위도에서 풀려나와 이해 9월부터 산관(散官)으로 있으면서 몽고에 대한 국서(國書) 작성을 전담하였다. 국서는 최씨의 정권보전책으로 강화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고, 이규보는 이 정책에 적극 참여한 셈이었다.
1232년(고종 19) 4월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 경성부우첨사지제고(判秘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右詹事知制誥)로 복직되었고, 이듬해 6월 추밀원부사 우산기상시, 12월 참지정사 수문전대학사 판호부사 태자태보가 되었고, 1236년 10월 퇴임을 청하였으며, 1237년(고종 24)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門下侍郎平章事)·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대보(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大保)로서 치사(致仕)하였으며, 1241년(고종 28) 9월 세상을 떠났다.
학문세계와 저술활동
왕정(王廷)에서의 부패와 무능, 관리들의 방탕함과 관기의 문란, 민의 피폐, 그리고 남부지방에서 10여 년 동안 일어난 농민폭동 등은 이규보의 사회·국가의식을 크게 촉발시켰다. 이때 지은 것이 바로 『동명왕편(東明王篇)』·『개원천보영사시(開元天寶詠史詩)』 등이었다. 그리고 문집으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있다.
혜문(惠文)·총수좌(聰首座)·전이지(全履之)·박환고(朴還古)·윤세유(尹世儒) 등과 특별한 친분을 유지하였다. 71세 이후에는 하천단(河千旦)·이수(李需) 및 승통(僧統) 수기(守其) 등과 사귀었고, 최씨의 문객인 김창(金敞)·이인식(李仁植)·박훤(朴暄)과도 교제가 잦았다.
평가와 의의
이규보는 이권에 개입하지 않은 순수하고 양심적인 관직자였으나 소심한 사람이었다. 학식은 풍부하였으나 작품들은 깊이 생각한 끝에 나타낸 자기표현이 아니라 그때그때 마다 떠오르는 바를 그대로 표출한 것이었다. 이규보는 본질적으로 입신출세주의자이며 보신주의자였다. 그렇게 된 근본이유는 가문을 일으키고, 고유의 문명을 크게 떨치고자 하는 명예심에서였다. 최이에게 바쳐진 이규보의 시들이 최이의 은의에 대해 감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규보는 최씨정권 아래에서 볼 수 있는 일반 문한직 관리층의 한 전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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