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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나들길 4코스(해가 지는 마을길) 21-01-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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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나들길 4코스(해가 지는 마을길) 21-01-23

singingman 2023. 4. 17.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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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둘이서 가다.

아침 9시 20분쯤 집에서 내 차로 출발해서 가릉 주차장에 10시 20분쯤 도착하다. 이어서 바로 출발하다.

이 코스는 가릉부터 망양 돈대까지 거리가 지도에 11.5km라고 나온다.

날씨가 흐렸지만 겨울 날씨 치고는 따뜻해서 걷기 좋았다.

시간은 3시간 10분 정도 걸렸다.

아내가 워낙 천천히 걸었지만 그래도 아내는 끈기가 있어서 쉬지 않고 걸으니 중간에 간식 먹고 해도 이 정도 시간이 걸렸다.

출발해서 절반 정도는 진강산 허리를 따라 걷다가 정재두 묘를 지나면 포장 도로를 따라 걷는다.

천병상 시인의 공원도 있고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자와 작사자가 다 강화도 출신이어서 노래비도 있다.

조선 시대 문신이었던 정제두와 이건창의 묘가 이 구간에 있다.

 

 

 

 

 

가릉 아래 주차장이 잘 만들어져 있다. 강화도는 무료 주차장을 곳곳에 잘 만들어 두어서 주차에 문제가 된 적이 없다.

 

 

가릉은 지난 주에 3코스 걸을 때도 지나갔다.

 

 

 

 

 

유리문으로 된 석실 뒤에 다른 무덤이 또 있다.

 

 

뒤에 있는 무덤

 

 

가릉 왼편으로 4코스가 시작한다.

 

 

진강산 아래를 왼편으로 돈다. 3코스는 오른편으로 돌고

 

 

 

 

 

가을에 떨어진 낙엽이 봄이 되어도 썩지를 않는다. 산성비 때문인가?

 

 

이 나뭇잎은 색깔이 왜 이렇지?

 

 

 

 

 

여유로운 아내

 

 

 

 

 

 

 

 

 

 

 

 

 

 

 

 

 

 

 

 

갈멜산 기도원

지난번에 윤선생님과 진강산에서 내려올 때 이리로 내려왔다.

 

 

 

 

 

기도원 정문 왼편에 있는 길로 올라간다.

 

 

정제두 묘

 

 

다음 백과에 의하면 정제두는

 

서울 출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추곡(楸谷).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고, 아버지는 진사 정상징(鄭尙徵)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로 호조판서 이기조(李基祚)의 딸이다.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다.

조선에 전래된 양명학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최초로 사상적 체계를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경세론을 전개한 조선 후기의 양명학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몇 차례 과거시험에 실패한 뒤 1672년(현종 13)부터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1680년(숙종 6)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종부시주부·공조좌랑에 임명되었다. 1688년 평택현감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서연관(書筵官)을 비롯하여 상령군수·종부시주부·사헌부장령·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다.

1709년 강화도 하곡(霞谷) 으로 옮겨 살았으며, 호조참의·강원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 1722년(경종 2) 사헌부대사헌·이조참판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성균관좨주·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726년(영조 2) 이정박(李廷撲)이 정제두가 양명학을 한다고 배척했으나 영조의 보호를 받았다. 1728년 의정부우참찬에 임명되었고, 1736년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임명되었다.

 

학문세계와 저서

정제두는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하다가 일찍부터 양명학에 심취하였다. 당시의 도학은 정통주의적 신념에서 양명학을 이단으로 배척했으나, 정제두는 확고한 신념으로 양명학의 이해를 체계화시키고 양명학파를 확립하였다.

정제두는 당시 주자학의 권위주의적 학풍에 대해 학문적 진실성이라는 관점에서 비판하면서, “오늘날에 주자의 학문을 말하는 자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곧 주자를 핑계대는 것이요, 주자를 핑계대는 데에서 나아가 곧 주자를 억지로 끌어다 붙여서 그 뜻을 성취시키며, 주자를 끼고 위엄을 지어서 사사로운 계책을 이루려는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정제두는 송시열(宋時烈)과 서신을 통해 경전의 뜻과 처신의 의리 문제에 관해 논의하였고, 스승 박세채를 비롯하여 윤증(尹拯)·최석정(崔錫鼎)·민이승(閔以升)·박심(朴鐔) 등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양명학의 문제를 토론하였다.

박세채는 「왕양명학변(王陽明學辨)」을 지어 양명학을 비판하고, 정제두에게 양명학을 버리도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제두는 “왕수인(王守仁)의 학설에 애착을 갖는 것이 만약 남보다 특이한 것을 구하려는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결연히 끊어 버리기도 어려운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학문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성인의 뜻을 찾아서 실지로 얻음이 있고자 할 뿐입니다.”라고 하며 결연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특히 민이승과는 여러 차례 만나서 토론을 벌이거나 서신을 통해 조목별로 심즉리(心卽理)·치양지·지행합일·친민(親民) 등 양명학의 문제들에 관해 논의함으로써 양명학과 주자학에 관한 본격적인 토론을 전개하였다. 또한 민이승에게 왕수인의 글을 초록하여 제시하기도 하고, 「양지체용도(良知體用圖)」와 「여명체용도(麗明體用圖)」를 그려서 양명학의 심성론과 양지론의 도상적 표현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정제두는 왕수인의 심즉리를 받아들여 주자가 마음[心]과 이(理)를 구별하는 것을 비판하고 마음과 이의 일치를 주장하였으며, 이와 기(氣)의 이원화도 거부하고 이기합일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나아가 이가 마음과 일치되어 마음 밖에 이가 따로 존재할 수 없게 되기에 이가 공허하지 않고 실실하게 있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정제두는 양지의 개념에 대해서 지각이나 지식의 뜻과 구별하여 성체(性體)의 지(知)요, 본연의 선(善)이며, 오상(五常)의 지(知)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여 성의 본체라 하였다. 「양지체용도」에서도 중심의 원 속에 마음의 성과 인의예지(仁義禮智), 마음의 본원과 양지의 본체를 동일시하고 있으며, 바깥의 가장 큰 원은 천지만물인 동시에 마음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정제두는 심(心)·성(性)·정(情)의 관계도 성은 양지의 본체이고, 정은 양지의 작용이며, 마음은 바로 양지의 전체라 이해하였다. 또한 지행합일설에 대해서도 지와 행을 둘로 나누어 놓는 것은 물욕에 가려진 것이라 하고, 양지의 본체에서 보면 지와 행이 하나라고 지적하였다.

정제두는 이황과 이이의 성리설도 비판하면서 양명학의 확립에 전념하였다. 아들 정후일(鄭厚一)을 비롯하여 윤순(尹淳), 김택수(金澤秀), 이광사(李匡師) 형제 등이 정제두의 문인으로서 학풍을 계승하였으며, 정제두가 속하는 소론의 가학으로서 학파를 형성하여 강화도를 중심으로 표면에 나타나지 못한 채 계승되어갔다.

저서로는 양명학의 치양지설(致良知說)과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받아들여 저술한 『학변(學辨)』·『존언(存言)』, 경전 주석서인 『중용설』·『대학설』·『논어설』·『맹자설』·『삼경차록(三京箚錄)』·『경학집록』·『하락역상(河洛易象)』, 송대 도학자의 저술에 대한 주석서인 『심경집의(心經集義)』·『정성서해(定性書解)』·『통서해(通書解)』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여기는 정재두 부모님의 묘(정재두 묘 바로 아래 있다.)

 

 

정재두 묘를 지나면 포장도로를 걷는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김취려 장군은

김취려(金就礪, 金就呂로도 쓴다)는 고려 고종 때 거란유종(契丹遺種)의 침략을 격퇴하는 데에 지대한 공로를 세운 무신이다. 본관은 언양(彥陽)으로 할아버지는 금오위(金吾衛) 섭낭장(攝郎將) 김언량(金彦良)이고, 아버지는 금오위 대장군 김부(金富)이다. 어머니는 검교장군(檢校將軍) 행낭장(行郎將) 주세명(朱世明)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김취려는 부음(父蔭)으로 정위(正尉)가 된 뒤 중랑장과 장군을 거쳐 대장군에 올랐다. 1216년(고종 3) 8월에 거란유종이 침략하자 왕이 중군·우군·후군의 3군을 편성해 출정시켰다. 김취려는 섭(攝) 상장군으로서 후군을 지휘해 서북면 일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그의 장남이 전사했다. 거란적이 대동강을 넘어 서해도로 진출했다. 김취려는 다음해 초에 상장군이 되어 거란적과 대치했다. 고려정부는 삼군을 5군(五軍)으로 개편해 거란적을 저지하려 했지만 패배했고, 김취려는 분투했지만 부상을 입은 채 돌아왔다.

거란적은 개경을 위협하더니 장단을 건너 동주(철원)를 함락하고 남하했다. 최충헌이 오군을 다시 개편하면서 김취려를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로 삼았다. 이어진 전투에서 김취려의 전군은 때로는 패배하기도 했지만 자주 승리를 거두며 적을 추격해 제주(提州)에 이르더니 박달현(朴達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타격을 입은 거란적은 남하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대관령을 넘어 등주, 함주를 지나 여진 땅으로 들어갔고, 김취려 군대는 여진 국경까지 추격했다. 거란적은 여진 병력을 추가해 다시 고려를 침략했는데, 김취려는 병이 들어 개경으로 돌아와야 했다.

김취려는 1218년(고종 5)에 상장군으로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를 겸했다. 고려정부는 오군을 삼군으로 개편해 거란적을 저지하려 했지만 효과가 없자 조충(趙冲)으로 중군 원수 겸 서북면 원수를, 김취려로 병마사를 삼고 전군·좌군·우군·후군을 편성했다. 오군으로 편성한 것인데 조충은 원수로서 중군을 지휘했고, 김취려는 중군에서 병마사로서 부원수 역할을 한 것이었다. 조충과 김취려의 고려군이 거란적을 압박하니 거란적은 평양 동쪽 강동성으로 들어갔다. 합진(哈眞)의 몽골군 및 완안자연(完顔子淵)의 동진군이 강동성으로 향했다. 1219년(고종 6)에 고려군이 이 두 외국군과 연합해 강동성을 포위 공격하니 거란적이 항복했다. 합진이 조충과 김취려에게 요청해 몽골과 고려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었다. 몽골 원수를 전송하다가 서경(西京) 재제사(齋祭使)에 임명되어 서경에서 제사를 지냈다. 의주(義州)에서 한순(韓恂)과 다지(多智)가 여러 성과 연결해 반란을 일으키자 김취려가 우군을 이끌고 중군·후군과 함께 토벌하다가 다음해에 추밀부사(樞密副使)에 올라 중군을 이끌고 토벌을 완료했다. 부하를 보내 거란의 잔여 무리까지 토벌하니 북쪽 국경이 안정되었다.

1221년(고종 8)에 추밀사(樞密使) 병부상서 판삼사사에, 다음해에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판호부사에 임명되었다. 1228년(고종 15)에 수태위(守太尉)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에, 1230년(고종 17)에 평장사 판이부사에, 1232(고종 19년) 3월에 수대부(守大傅: 수태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최우 무인정권이 1232년(고종 19) 6~7월에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함에 따라 김취려도 강도(江都)로 이주해 문하시중에 올랐고 다음해에 특진(特進) 주국(柱國)을 받았다. 1234년(고종 21) 5월 21일 강도(江都)에서 63세로 사망하였으며, 7월 12일에 진강현(鎭江縣) 대곡동(大谷洞) 서쪽 기슭에 장례 지냈다.

 

상훈과 추모

시호 위열(威烈)을 추증받았고, 고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길가에 바람개비가 많다.

 

 

 

 

 

 

 

 

 

 

 

정재두 숭모비는 묘에서 외포리쪽으로 한참 걸어오면 있다.

 

 

하우 약수터는 말랐다.

 

 

 

 

 

강화도는 부자여서인지 화장실도 길가에 아주 잘 만들어 두었다.

 

 

진강산

 

 

길가에 좋은 집들도 많이 있다.

 

 

이건창 생가는 함허동천 근처에서 본 것 같다.

 

 

묘와 생가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 오면 바다를 끼고 걷는다.

 

 

 

 

 

 

 

 

 

 

 

 

 

 

 

 

 

처음에는 후렴의 '못 가본지 몇몇해'가 '더럽힌지' 몇몇해 였던 것 같고 2절의 우리 다 맺힌 '슬픔'도 원래는 '원한'이었던 것이 북한에 가서 이 노래를 부르면서 가사가 바뀐 것 같다. 내 기억이 잘못 되었나?

 

 

그리운 금강산의 작사자와 작곡가가 둘 다 강화도 출신이다.

 

 

 

 

 

 

 

 

마산에서 문인들이 많이 나왔다. 천병상 뿐만 아니라 가난한 시인들이 많았다.

고향이 그리워도 갈 여비가 없어서 대신 강화도로 와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오늘의 목적지 망양 돈대

 

 

 

 

 

 

 

 

 

 

 

 

 

 

 

 

 

주차장에 세워 둔 차를 누가 주차하다 박아서 번호판 테두리가 깨어졌다.

전화가 왔길래 내가 없는 동안 깨어져서 상황이 어떤지 모르고 50,000원을 받았다가 마음이 편치 않아서 돌려주었다.

 

 

 

가릉 앞에 있는 유진 냉면에서 아내와 함께 늦은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다.

 

 

 

이건 이슬라 무헤레스 앞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