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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필들의 경연장 해남 대흥사 2021-02-17 본문
해남 두륜산 대흥사
2월 15일 월요일에 타직에서 ngo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재철이가 코로나로 국내에 들어와 있어서 월출산을 등반하고
대흥사를 들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절이 그 절이라고 하지만 우리 나라의 소위 말하는 천년고찰들은 다들 독특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축물이나 전해오는 설화나 미술품등에 다양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다.
두륜산 대흥사의 특징을 말하라면 조선 명필들의 경연장입니다.
추사 김정희와 원교 이광사 창암 이삼만 그리고 정조대왕의 친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대흥사는 크게 남원 북원 그리고 표충사 구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성보 박물관도 있지만 코로나 때문인지 휴관이어서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원본 현판들이 거기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북원에는 침계루와 대웅전 그리고 다른 전각들이 있습니다.
절을 지을 때는 대체로 불교의 수미산 세계관에 따라 짓게 됩니다.
수미산 세계관에 의하면 이 세계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네 개의 대륙과 아홉 개의 산, 그리고 여덟 개의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 수미산에는 제석천을 위시하여 신중들과 천왕등 많은 부중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수미산에 갈려면 향수해라는 바다를 건너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절 앞에는 보통 향수해를 상징하는 개울이 있고 이 개울을 건너면 절로 들어가게 됩니다.
절이 위치한 지형에 따라 일주문이 개울 건너기 전에 있는 곳도 있고 개울을 건너서 있는 곳도 있습니다.
대흥사는 일주문을 지나서 개울이 있습니다.
대흥사의 옛 이름이 대둔사였습니다.
이것이 옛날 일주문인지 산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산문은 보통 총림과 같은 큰 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문이 두륜산 대흥사 일주문인 것 같습니다.
일주문은 기둥이 하나가 아니고 한 줄로 되어 있는 문입니다.
구조상의 문제를 보강하기 위한 것인지 몰라도 보조 기둥을 세운 문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절에 있는 산문이나 일주문등에는 기둥과 지붕만 있고 문짝이 없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오게~~ 아무나 오게~~"의 뜻이라고 합니다.
이 문을 출입할 때는 사찰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기둥 사이 문 가운데로 출입하지 않고 옆으로 출입하는 것이 관례라고 합니다.
이 일주문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바로 앞에 승탑밭이 있습니다.
유홍준이든가 누군가의 주장에 의하면 부도라는 말은 부처라는 말의 음역이어서 정확한 용어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곳은 옛 고승들의 유해를 모신 곳이기 때문에 부도밭이라는 말보다는 승탑밭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승탑밭을 지나면 반야교가 나옵니다.
여기 다리 아래 금당천이 향수해를 상징하고 俗과 聖의 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절에서는 보통 이 다리의 이름이 해탈교나 극락교인 경우가 많습니다.
뜻은 비슷하지만 이 절에서는 반야교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이 다리는 홍예교인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자리는 다른 절에서는 보통 금강문이나 천왕문이 있는 자리입니다. 문 안쪽에 해탈문 현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 안 좌우에 문수동자와 보현동자가 있습니다.
이 현판은 해사 김성근의 글씨라고 합니다.
이 절에는 이 외에도 김성근의 글씨들이 많이 있습니다.
백설당과 응진당, 명부전이 다 해사 김성근의 글씨라고 합니다.
해사 김성근은 위키 백과에 의하면
김성근(金聲根, 1835년 양력 3월 19일 ~ 1919년 양력 11월 27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 서예가, 정치인이자 성리학자이며 대한제국의 정치인, 일제 강점기의 관료, 조선귀족,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62년(철종 13년) 문과에 급제, 예문관검열과 홍문관 벼슬과 삼사를 두루 거쳐 도승지, 홍문관제학,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이조참판,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동학 혁명 때 다시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1898년(광무 2년) 의정부참정에 승진,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홍문관 학사를 지냈으며, 1901년에 장례원경, 의정부 찬정, 규장각 학사, 홍문관 학사 등을 지냈으며, 1902년 탁지부대신이 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자작(子爵)이 되었다.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문수동자도 사자를 타고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보현 보살은 코끼리를 타고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보현동자도 코끼리를 타고 있습니다.
먼저 해탈문을 들어서면 이 문이 다른 절들과 다른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절들에는 이 자리에 천왕문이나 금강문이 있고 문 안에는 사천왕이나 금강역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절을 지키고 있지요.
그런데 이 절은 해탈문 안에 문수동자와 보현동자가 지키고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문수동자와 보현동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절에서는 보기 힘든 문수전과 보현전이라는 큰 전각들도 있습니다.
찻집 이름이 아마도 초의 선사가 쓴 동다송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동다송을 다 옮기기는 길어서 일부만 옮겨보면
"하늘이 예뻐하여 온 너 아름다운 나무여 그 덕스러움이 귀한 귤나무와 같도다
네 텃자리를 옮기지 아니하여 따뜻한 남쪽에서만 자라나니
풍성한 잎은 찬 기운과 모진 추위를 견뎌내 겨우내 푸르러라
하얀 꽃은 서리에 씻겨 가을풍광을 빛나게 하여이다
고야산에 노니는 신선의 살결같이 해맑아
갠지스강의 빛나는 황금같은 열매를 맺느니라.
...늙은이를 젊게 하는 신험 효험 있어
팔십 도인의 얼굴 붉은 복숭아 빛 같게 하도다.
...옥화 차 한 잔 기울여 마시면 겨드랑이 바람 일어
몸은 가벼워 하늘나라 신선인 듯 하나니"
침계루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기 전에 빨간 매화를 만났습니다.
이 추운 겨울에 매화를 만나니 참 반갑고 좋습니다.
나는 퇴계 선생님의 고매한 인품과 학식도 존경하지만 고 최인호의 소설 '유림'에 나오는 두향과의 로맨스와 매화를 梅兄이라 부르고 임종 직전에 매화분에 물 주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매화를 사랑한 Romantist여서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 침계루를 누하진입하면 정면에 대웅전이 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누하진입하는 것은 석가모니에 대한 존경과 겸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이광사(李匡師, 숙종 31년(1705) ~ 정조 1년(1777))는 조선의 문신, 서예가이며, 현대 한국학의 시조이다. 본관은 전주. 조선 제2대 임금 정종의 서얼 왕자였던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의 후손으로 호조판서 석문 이경직(石門 李景稷)의 현손(玄孫)이고, 예조판서 이진검(李眞儉)의 넷째 아들이다. 조선시대의 양명학자(강화학파)로 육진팔광(六眞八匡)중의 한 사람이며 서예가로서 원교체(圓嶠體)를 완성하였다.(이 서체는 중국서체의 범주에서 벗어나 조선화(朝鮮化) 되었다는 의미에서 동국진체(東國眞體)라고 불린다.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수북(壽北).
정면에 있는 대웅전의 대웅보전이라는 현판도 원교의 글씨입니다.
이 현판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금수저로 태어나서 20대 초반에 중국에 동지사절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갔습니다.
거기서 당시 중국 최고의 학자였던 옹방강과 완원등을 만나 교류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옹방강으로부터 경술문장이 해동 제일이라는 칭찬을 듣습니다.
그후 추사의 콧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높아졌습니다.
그의 호 완당도 완원의 완에서 따 온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오늘날 우리가 미국이나 서양의 과학문물을 높이 평가하듯이 그는 중국을 아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래서 간혹 추사를 모화주의자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추사가 조정에서 쫓겨나서 제주도로 유배를 갈 때 이 절에 있던 동갑내기 친구 초의선사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대웅전의 이 현판을 보고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떼어내라고 하면서 자기가 다시 써 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의 선사는 추사의 글씨를 달았습니다.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고난을 겪은 추사는 필체만 완성한 것이 아니라 인격도 겸손해집니다.
그래서 유배가 풀리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러서 초의에게 원교의 글씨가 아직도 절에 있느냐고 물으니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자기가 쓴 현판을 떼어내고 원교의 글씨를 다시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대웅전에는 원교의 글씨가 걸려 있습니다.
(위 글에 대한 반론을 최근 '박종인의 땅의 역사 19. 유홍준이 퍼뜨린 김정희 괴담'이란 유튜브 강연에서 읽었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위의 내용은 전설일뿐이라는 것입니다.)
대웅전 바로 옆 백설당 지붕 아래에는 추사의 무량수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원본은 아마 성보 박물관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갔을 때 코로나 여파때문인지 박물관은 휴관이어서 원본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 현판은 백설당 지붕 아래 걸려 있습니다.
무량수전 혹은 무량수각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곳으로 극락전이라고도 불립니다.
이곳은 극락전은 없고 추사의 글씨만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북원에서 나와서 남원으로 가는 길에 가허루가 있습니다.
창암과 추사 사이에 얽힌 이야기도 있습니다.
정읍에서 태어난 창암은 원교 이광사에게서 글을 배웠다고 합니다.
글쓰기에 얼마나 열중했던지 아무리 몸이 아파도 하루에 천자씩 썼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혼인도 후사도 친교도 다 늦어져서 원래 이름이 규환이었는데 三晩으로 바꾸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창암이 나이 70대의 노인이 되었을 때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는 추사를 창암의 제자들이 찾아와서 당대의 학자요 명필인 추사에게 자기들 스승의 글씨를 평가해 달라고 합니다.
은근히 칭찬을 기대하면서 그랬겠지요.
그런데 추사의 평가는
"이 정도의 글씨면 노인장이 시골에서 밥은 굶지 않겠습니다"고 말합니다.
격노한 제자들이 추사를 해코지하려고 하자 이 말을 전해 들은 창암이 만류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이가 천하 명필이지만 조선 붓의 갈라지는 맛과 한지의 번지는 멋은 모르는가 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를 다시 찾아올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8년여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추사는 나이가 62세가 되었습니다.
인격이나 여러 면에서 원숙해지고 겸손해졌겠지요.
그래서 창암을 다시 찾았지만 이미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완산군에 묻힌 창암의 묘를 찾아가서 명필완산창암이삼만지묘(名筆完山蒼巖李三晩之墓)라는 묘비명을 써 주었습니다.
가허루를 지나면 용화당이 있습니다.
강당과 선방으로 사용된 건물이라고 합니다. 단청이 되지 않아서 민가 가옥같습니다.
이 현판도 원본은 박물관에 있다고 합니다.
김돈희는 위키백과에 의하면
1915년 사립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1916년 문관보통시험에 합격했다. 1919년부터 1920년까지 함경남도 장진군 서기로 근무했고 1921년부터 1931년까지 함경남도 안변군 속(屬, 1921년 ~ 1922년), 신흥군 속(1923년 ~ 1924년), 갑산군 속(1925년 ~ 1927년), 정평군 속(1928년 ~ 1929년), 함경남도 속(1930년 ~ 1931년)을 차례로 역임했다.
1931년부터 1940년까지 함경남도 홍원군수(1931년 12월 28일 ~ 1934년 3월 28일)와 정평군수(1934년 3월 29일 ~ 1940년 7월 29일), 안변군수(1940년 7월 30일 임명)을 차례로 역임했으며 1933년 7월 7일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 쇼와 5년 국세 조사 기념장, 1938년 5월 9일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함경남도 정평군수 재직 시절 군용물자 공출에 관한 업무, 국방사상 보급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으며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단광욱일장을 받았다. 1941년 11월 15일 정6위, 1945년 5월 22일 고등관 3등에 각각 서위되었으며 1944년 2월 27일 일본적십자사 유공장을 받았다.
1945년 7월 5일부터 같은 해 8월 광복 때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중추원 부문과 관료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천불전 앞에는 당간지주처럼 보이는 돌기둥이 서 있습니다.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영향이 강한 절입니다.
후에 13대종사도 나오고 하지만 절에 서산대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표충사입니다.
이 표충사의 편액을 정조대왕이 직접 써서 하사했다고 합니다.
표충사로 들어가는 외삼문의 이름이 호국문입니다.
이 편액은 심거 임병근의 글씨라고 합니다.
심거가 어떤 인물인지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절 안에 유교식 사당이 있습니다.
표충사에 걸려 있는 이 어서각 편액은 위당 신관호의 글씨라고 합니다.
이 현판이 옆에 있는 표충사 편액이 정조의 글씨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관호를 찾아보았더니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 : 1811~1884 혹은 1810~1888)
조선 말기(朝鮮末期)의 무신(武臣)이자 외교가(外交家).
본관(本貫)은 평산(平山), 자(字)는 국빈(國賓), 호(號)는 위당(威堂),금당(琴堂),동양(東陽),
우석(于石) 등이며, 시호는 장숙(壯肅). 후(後)에 ‘헌(櫶)’으로 개명(改名)하였음
1844년(年)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를 거쳐 금위영대장(禁衛營大將)이던 1849년(年) 헌종(憲宗)이 위독(危篤)했을 때 사사(私事)로이 의원(醫員)을 데리고 들어가 진찰(診察)했다는 죄명(罪名)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됐다가 철종(哲宗) 5년(1854) 무주(茂朱)로 이배(移配)된 다음 1857년(年)에 풀려났고, 그 후(後)에는 승승장구(乘勝長驅)해 1862년(年) 통제사(統制使), 고종(高宗) 1년(1864) 형조(刑曹),병조(兵曹),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에는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강화(江華)의 염창(鹽倉)을 수비(守備)했는데, 난(亂)이 끝나자 좌참찬 겸 훈련대장(左參贊 兼 訓練大將)을 지냈으며 수뢰포(水雷砲)를 제작(製作)한 공(功)으로 가자(加資)되었음.
1868년 어영대장(御營大將),행지삼군부사(行知三軍府事),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歷任)하고, 1874년(年) 진무사(鎭撫使)가 되어 강화 연안(江華沿岸)에 포대(砲臺)를 구축(構築)했으며, 1875년(年) 운요호[운양호(雲揚號)] 사건(事件)이 일어나자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로서 전권대관(全權大官)이 되어 1876년(年) 일본(日本)의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구로다 기요타카[흑전청륭(黑田淸隆)]와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 일명(一名)‘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라고도 함)을 체결(締結)하였고, 1882년(年)에는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로 역시 전권대관(全權大官)이 되어 미국(美國)의 슈펠트(Robert W. Shufeldt)와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체결(締結)하고는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가 되었음
전형적(典型的)인 무관 가문(武官 家門)에서 태어났음에도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문하(門下)에서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인 다양(多樣)한 학문(學問)을 수학(修學)함으로써 유장(儒將)으로 불리기도 한 위당(威堂)은 금석학(金石學) 관계 저술(關係 著述)인『금석원류휘집(金石原流彙集)』을 지었고, 역사지리서(歷史地理書)『유산필기(酉山筆記)』를 편찬(編纂)했으며, 예서(隸書)를 잘 쓰고 묵란(墨蘭)을 잘하며 문장(文章)에도 뛰어났다고 하는데, 그리하여
시(詩),서(書),금석(金石)에서 추사(秋史)의 뒤를 이은 인물(人物)로 알려져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수제자로 무과에 급제한 무인이면서 서예와 바둑에 조예가 깊었다.
추사 선생이 "한대(漢代)의 명필에 비해도 손색이 없다. 나보다 났다." 고 극찬했던 명필로
수제자가 신관호공, 다음 제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인데 1864년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자
신관호 공을 중앙으로 불러 올려 형조판서, 병조판서, 공조판서, 어영대장을 역임토록했다.
주요 사찰의 편액 등은 다음과 같다.
해남 대흥사 御書閣. 表忠碑閣.
고성 옥천사 大雄殿. 蓮華玉泉.
밀양 표충사 無量壽閣. 寶華樓. 西來閣. 大弘願殿. 寶華樓.
합천 해인사 修多羅藏’ 및 동 주련. 법보전. <팔만대장경> 등
화계사 보화루 寶華樓
(단원 수석회 | 詩窓淸香/위당 신관호 작품 감상 - Daum 카페에서 복사해 옴)
초의 선사는 우리 나라 다도의 시조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茶聖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다산 정약용으로부터 시작해서 혜장스님 그리고 초의에게 이어지는 차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다산보다 10살 아래인 혜장 스님은 해남 일대에서 승려이지만 유학에도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강진으로 유배를 온 다산을 만나게 됩니다.
시골에서는 상당히 이름이 알려져 있었지만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자 다산을 만나서 주역등을 이야기해보니 자신의 실력은 다산에 비해 그야말로 조족지혈임을 알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그는 강진에 있는 대흥사의 말사인 백련사로 가게 되고 강진 시내 지금의 사의재 자리인 주막에서 궁핍한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을 고성사에 있는 보은산방으로 옮겨 가게 하고 돌보아 주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산은 자기 외가의 먼 친척이 되는 윤단의 산장으로 옮겨오게 됩니다.
이 산장이 지금의 다산 초당이고 백련사 바로 아래 있습니다.
이후 승려인 혜장 스님과 유학자인 다산은 만나서 차도 마시고 술도 함께 마시면서 학문도 논하게 됩니다.
혜장스님은 정성껏 다산을 돌보게 됩니다.
혜장 스님이 초의 선사도 다산에게 소개하게 됩니다.
초의는 다산보다 24살 연하였지만 그의 인물됨을 한 눈에 알아 본 다산이 그를 가르치다가 초의가 30세 되던 해에 서울로 보내어 당시 경화사족들과 교류하게 만들어 줍니다.
다산의 아들 학유, 학연 그리고 추사등과 만나서 학식을 더하게 됩니다.
그 후 39세에 다시 해남으로 돌아와서 일지암을 짓고 기거하면서 茶神傳과 그 유명한 東茶頌도 짓습니다.
추사와 초의의 우정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편지들을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유배중인 추사가 초의에게 차를 보내달라는 편지도 씁니다.
그래서 유배 가 있는 동안에 친구를 찾아 직접 제주도로 차나무와 차를 가지고 찾아가서 6개월이나 있다 오기도 하고 제자 소치 허유도 보냈다고 합니다.(유배, 권력의 뒤안길 293쪽, 전웅 저, 청아 출판사,)
대흥사에는 이 외에도 많은 전각들과 성보 박물관에는 유물들이 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쓸 수 밖에 없습니다.
또 기회가 되면 일지암과 북미륵암 그리고 선원에 있는 광명전등도둘러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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