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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정치와 정책(인조~현종 시기) 한국 역사 연구회 17세기 정치사 연구반 아카넷 2003년 377쪽~2/2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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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정치와 정책(인조~현종 시기) 한국 역사 연구회 17세기 정치사 연구반 아카넷 2003년 377쪽~2/27

singingman 2023. 4. 18.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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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정치와 정책에 관한 6명의 논문을 모은 책이다.
오수창이 쓴 국왕과 신료의 역학 관계에서 17세기 군주는 결코 전제 군주가 아니라고 말한다.
조선이 사대부의 나라였다는 사실이 생각난다.
국왕은 정국을 주도하기 위해 고심했지만 붕당에 속한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국왕에 등극할 때 도움을 준 당파의 신하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붕당이나 척족세력들이 왕권을 좌지우지하기도 했고 환관이 왕의 눈을 가리기도 한다.

관료 세력과 산림 세력이 견제를 하기도 하고 서로 돕기도 한다.

 

구덕회가 쓴 주요 정치기구의 성격과 위상에서는 비변사와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대해 이야기 한다.

비변사는 실제로 정책을 실행하는 집행기구이고 삼사는 언론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비변사는 도제조, 제조, 부제조, 낭청으로 구성된다.

초기에는 의정부가 정국을 이끌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비변사가 그 임무를 대신하게 되었다.

삼사는 왕이나 신하들에 대한 간쟁, 탄핵과 경연을 담당했다.

사헌부는 주로 신하들을 탄핵하는 역할을 했고 사간원은 왕에게 간쟁하는 역할을 했다.

옥당이라고도 불리는 홍문관은 서적이나 학술을 담당하기고 하고 왕의 자문기관이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포진된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홍문관을 거쳐야 나중에 정계의 높은 자리로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변사나 삼사도 자기들이 속한 붕당의 이익과 반하기는 어려웠다.

 

오종록이 쓴 조선 군사력의 실태에서는 조선의 군사력이 농민군이 주축을 이루었고 전문 직업군인들로는 왕실과 수도를 지키는 소수의 군인들이  있었다.

효종은 북벌을 계획했지만 갑작스런 죽음으로 불발로 그쳤고 또 당시 청나라의 국력과 비교해본다면 불가능한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명청 교체기에 조선의 줄타기 외교는 어려운 시대였고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후금의 실체를 알게 되고 인조가 후금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수치를 당하게 된다.

 

김세봉이 쓴 예론의 전개와 그 양상이라는 글에서는 당시 관료들이나 산림학자들이 예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예송론이 결국 붕당이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반대당을 몰아내기 위한 한 방편이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윤선도와 송시열로 대표되는 이들의 주장은 단순히 상복을 3년 입을 것이냐 1년 입을 것이냐의 문제를 넘어서 왕의 정통성 시비와도 관련되고 사림들의 권력 구조와도 관련이 있게 된다.

처음에 기해예송에서는 1659년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을 기년(만 1년)으로 할 것인가 3년(만 2년)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으로 시작되었다. 송시열을 선두로 한 서인들이 우세했지만 갑인 예송(1674년(현종 15) 2월 효종(孝宗)의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국상)이 일어나자, 시어머니 자의대비(慈懿大妃, 趙大妃)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예송(禮訟) 사건이다. 일명, ‘제2차 예송’이라고도 한다. 갑인 예송에서는 윤선도를 선두로 한 남인들이 우세해져서 결국 숙종대 초반에는 남인들이 정권을 잡게 된다.

 

한명기가 쓴 조청관계의 추이라는 글에서는 명청 교체기의 어려운 조선의 현실을 쓰고 있다.

광해군은 줄다리기를 잘 해서 버텼지만 인조반정 이후 청나라의 요구가 거세지고 또 재조지은을 주장하는 신하들이 명에 대한 의리를 주장하다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격게 된다.

효종이 북벌 계획을 세우지만 준비도 부족했고 실제로 이루어지지도 못했고 시도도 하지 않은 것 같다.

왕세자나 왕족들이 북경에 볼모로 잡혀가고 청나라에 공물이나 공녀를 바쳐야 하는 일도 일어난다.

 

배우성이 쓴 사회경제정책 논의의 정치적 성격이라는 글에서는 관료와 산림학자들 사이에서 부국론과 관료적 안민론 그리고 산림적 안민론을 다루고 있다.

부국론과 안민론은 상반되는 개념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기도 하다.

서인과 남인들의 당파색이 나타난다.

인조 반정의 주체세력인 서인은 부국론, 관료적 안민론, 산림적 안민론으로다양하게 분화해갔던 반면 남인은 산림적 안민론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해 나갔다.

서인 송시열 계에서는 서인 계열 산림적 안민론의 흐름을 이었고 기해예송에서 패배한 남인 허목 계열은 군주 중심의 안민론을 심화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