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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유배, 권력의 뒤안길 전웅 저 청아출판사 2012년 3쇄 339쪽 ~2/22 본문
배 간 사람들과 유배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들이다.
조선의 왕들이 신하들을 벌 줄 때 사용하기도 했지만 아끼는 신하를 정적들이 죽이라고 할 때 살리는 묘수로 사형을 바로 시키지 않고 유배를 보냈다가 다시 해배시키는 방법으로 쓰이기도 했다.
유배를 떠나기 전에 보통은 장을 100대 정도 맞고 떠나게 된다.
약한 사람들은 이 장독 때문에 심한 경우는 죽기도 한다.
또 유배 전에 심한 고문을 받아서 유배 중에 죽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주일에서부터 유배지에서 태어나서 62년간 여러 곳을 이배하다가 유배지에서 죽은 사람도 있다.
천주교 순교복자 유항검의 딸 유섬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유배 간 사람들은 위리안치처럼 가시 울타리로 둘러 쌓인 좁은 집 안에 갇혀 있는 경우도 있었고 주군 안치나 별서 안치처럼 행동이 자유스러운 유배도 있었다.
유배지에 온 이들이 학자들이거나 명망이 높은 사람들일 경우에는 그 지역의 양반들이 자제들의 교육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다산이나 추사와 같은 사람들은 강진과 제주의 양반 자제들을 가르치고 독서나 집필로 소일했다.
또 지방 관리가 바른 사람이면 그리 핍박하지 않고 너그럽게 대하는 경우도 있었고 필요한 물픔들을 관에서 지급하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유배에 필요한 경비를 자기 스스로 충당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전답을 팔아서 유배를 가기도 하였다.
오랜 유배 기간 동안 외롭다 보니 그 지역에서 소실을 얻어서 아이를 두는 경우도 있었다.
다산도 소실에게서 홍임이라는 딸아이를 낳기도 하였다.
다산의 매조도는 이 홍임에게 준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는 이 책의 내용은 아니다)
정민 교수의 저서 “삶을 바꾼 만남”에서
정약용은 사의재에서 4-5년 정도 머물러 그 집 딸이라면 어렸다 하여도 그 당시 시집갈 나이의 처녀로 성숙하였을 것이다. 이후 정약용이 거처를 옮기며 이학래의 집을 거쳐 최종적으로 다산초당으로 가서 시중을 들 하인을 두었으나, 이 하인이 너무나 게을러서 1810년에 내치고, 그 자리를 다산의 제자들이 오가며 시중을 하였으나, 여자의 손이 미치지 않는 주변은 늘 정결치 못하고, 부족하기만 하였다고 한다. 이 때, 또한 다산은 풍이 들어 힘들었다고 한다. 이 때 윤구노란 사람이 안살림을 맡을 여자를 들이라고 권하였는데, 이때 한양서 들려오는 석방 소식이 그 당시 실권자들의 방해로 인하여 해배의 꿈이 절망으로 치닫는 시기였기에, 다산의 마음도 약해져 2년 정도가 지난 시점인 1812년 경 소실을 들인 것으로 추정을 한다. 이 소실에게서 딸을 두는데 정약용이 해배되어 마재로 올라갈 때 쯤이면, 연령이 5-6세 정도되어 칭얼거릴 나이로 보이며 남당사16 수 안에는 딸의 칭얼대는 모습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정민 교수의 책에 의하면, 임형택 교수가 남당사16수는 인사동의 문우서림의 김영복 씨에게서 구하였는데, 어떤 잡동사니 책자의 필사본 내에 포함이 되어 있었으며 그 책자 안에는, 다산 정약용의 '아언각빈'도 있다고 한다. 그 책자 표제에 정약용이라고 표시 되어 있으나, 임형택 교수는 정약용은 아닐 것이고 다른 누군가일 것이다라는 의견을 내고있다. 임형택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이 남당사 16수를 소개하였다.
다산의 소실 홍임모녀는 다산이 해배가 되자 광주 마재의 집까지 따라 갔다. 하지만 다산의 집안에서는 홍임 모녀를 받아들이지 않고, 내치게 되어 정약용의 아내가 박생이란 자를 붙여 다시 강진으로 보내게 되었다. 강진을 가는 도중, 장성의 부호 김씨가 자신의 소실로 들이려 하였으나 반항하고 빠져 나왔다고 하며, 강진의 자신의 친정 남당포가 아니라, 다산이 머물던 다산초당으로 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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