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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나들길 14코스(강화도령 첫사랑길) 21-03-22 본문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가 너무 너무 좋아서 그냥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 차로 혼자 가다.
용흥궁 주차장에 갔더니 주위에 주차할 곳이 없어서 다시 강화 버스 터미널 앞에 있는 무료 주차장에 주차하고 다시 용흥궁으로 와서 출발하다.
돌아올 때 버스를 타면 터미널로 오기 때문에 여기 주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11km밖에 되지 않는 짧은 코스여서 3시간이면 점심먹는 시간 포함해도 가능하다.
11시 55분에 용흥궁을 출발해서 철종 외가에 도착한 시간은 2시 40분이었다.
식당에서 점심 먹는 시간 30분 포함해서 2시간 45분이 걸렸다.
쉬운 코스이긴 하지만 도중에 남산을 넘는 구간이 있다.
마을을 많이 통과하고 15코스와 겹치는 구간도 있다.
앞에 갔다 온 사람들의 글을 보니 자칫하면 15코스로 빠지는 수가 있으니 리본만 보지 말고 안내 팻말을 잘 보라고 해서 알바하지 않고 잘 갔다 왔다.
철종은 위키 백과에 의하면
사도세자의 3남인 은언군의 서손자이자 전계대원군 이광의 셋째 아들이다.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나 은언군과 상계군 사건과 이복 형 원경의 옥사로 교동도와 강화도로 유배지가 옮겨진 뒤 왕족으로서의 예우를 박탈당하고 평민처럼 생활하였다.
이후 농업과 나무꾼, 행상으로 살던 중 순원왕후의 명으로 덕완군에 봉해진 뒤, 종숙부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이었다.
1858년 그에게는 유일한 적장자 이융준이 태어났지만 6개월만에 사망하였고 후궁들에게서 얻은 아들들 또한 영아기에 사망하였다.
자녀 중 유일하게 혼례를 치른 영혜옹주 또한 14세에 사망하여 그의 후손은 단절되었다.
사도세자의 서자였던 은언군은 홍국영이 상계군을 정조의 후사로 추대하려던 사건과, 정조 사후 부인 송씨와 며느리인 신씨가 천주교를 비밀리에 신봉하던 것이 적발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당한다.
이후 순조는 이복동생 은언군을 살리려고 노력한 아버지 정조의 유지를 받아들여 은언군의 자녀들을 석방시키려 노력한다.
1817년 순조는 강화도 안에서 은언군 아들들의 집을 지어주는데 노론 대신들의 반발을 묵살하고 순조는 석방이 아니니 번거롭게 굴지 말라면서 넘어간다.
1822년(순조 22)에는 위리안치형에서 형을 감형하여 은언군의 자식들의 집 주위의 가시울타리를 거두고, 혼인도 하게 해주어 일반 백성들처럼 살 수 있게하는 조치를 내린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반대 상소가 올라왔지만, 순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30년 은언군의 자손들을 강화도에서 방면, 철종은 1831년 한성 경행방 사제에서 출생할 수 있었다.
행장에 의하면 1834년 4살되던 해에 주흥사(周興嗣)가 지은 주흥사 천자문(千字文)을 읽었으며, 기억력이 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후 더이상의 학문을 수학할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1836년(헌종 2) 남응중 역모사건로 인해 그의 일족은 다시 강화도로 또 유배당하게 된다.
1849년 (헌종 15년) 6월 6일을 기하여 네 살 많은 7촌 조카 헌종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죽자 강화도를 방문한 신하들을 따라 입궐,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가 음력 6월 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그 이튿날인 음력 6월 9일, 창덕궁의 인정문에서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이는 조선 왕조 왕위 계승의 기본적인 관례조차 무시한 행위였다.[5] 철종은 헌종의 아버지인 익종과 같은 항렬이었다.
철종은 선천적으로 연약하고 아둔하였다.[6]
더구나 안동 김씨들의 권력에 휘둘려 관리 한사람을 뽑는 데에도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었다.[6]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서자였고, 아버지 전계대원군은 은언군의 서자였다.
서자의 손자인 서출인데다가 본인도 서자였고, 강화도에서 나뭇꾼으로 있다가 왕이 되었다 하여 그의 재위기간 중 사대부가에서는 그를 강화도령이라 조롱하였고 이는 곧 그의 별명이 되기도 한다.
조정에서는 장형을 가하고 벌칙금을 부과하였으나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까지도 서자, 서출, 강화도령이라며 그를 조롱, 비하하는 발언을 암암리에 계속하였다.
자동차로 이 곳을 지날 때 찬우물을 종종 봤다.
조영철 목사가 강화도에서 목회할 때 이곳을 와 본 적이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一자로 되어 있다. 가운데 낮은 담장으로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했다.
사랑채 가장 바깥쪽 방 앞에는 누마루가 있어서 사랑채의 품격을 높여준다.
매헌서당 - 옛날에는 이 집에 매화 나무가 있었나?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루가 나오고 좌우에 방이 있다.
사랑채는 4칸에 광이 한 칸 더 있다.
철종 외가 뒷편에 천주교 냉정 공소가 있다.
공소는 신부가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정기적인 미사를 드리기가 쉽지 않다.
공소 교인들의 강당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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