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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여자 김종성 역사의 아침 2011년 326쪽 ~5/19 본문

독서

왕의 여자 김종성 역사의 아침 2011년 326쪽 ~5/19

singingman 2023. 4. 27.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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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궁의 여자들에 관한 책.
궁궐에 있는 모든 여자는 왕의 여자였다.
궁녀는 공노비 가운데서 뽑은 궁궐의 노비였다.
궁녀는 보통 4~10살 사이의 소녀들을 뽑았다.
조선 시대 궁녀의 최대 숫자는 300명 미만이었다.
궁녀의 보조자인 무수리나 정식 궁녀가 되지 못한 생각시들도 있었다.
궁녀들은 내명부 소속이었지만 의녀들만 유일하게 내의원 소속이었다.
의녀들이 조선 후기에는 기생 노릇을 하기도 했다.
궁녀들의 우두머리인 상궁은 보통 근무한지 15년 정도가 지나야 하고 지밀 상궁이나 대전 상궁은 고급 관료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정 5픔까지는 궁녀이고 그 위는 후궁으로 보인다.
후궁은 선발하는 경우도 있고 왕과 동침해서 되는 경우도 있다.
왕과 동침하고도 후궁이 되지 않고 상궁으로 남은 사람을 승은 상궁이라 해서 특별한 힘을 갖게 된다.
후궁도 왕비가 되기도 하고 왕비는 못 되어도 품계가 승진한다.
왕이 먼저 죽고나면 후궁들은 일반적으로 비구니가 되어 정업사같은 절에서 여생을 보냈다.
왕후는 세자빈에서 출발해서 남편이 왕이 되면 자연히 왕비가 되는 경우도 있고 세자빈을 거치지 않고 바로 왕비로 간택되는 경우도 있다.
왕후는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때로는 왕권을 대신하는 권력을 가지기도 했다.
대비가 되면 어린 왕을 대신해서 대리 청정을 하기도 했고 왕이 궁궐을 비울 때 잠깐 왕의 역할을 일부 담당하기도 했다.
왕후나 세자빈은 3간택을 원칙으로 하고 그 기간동안 전국에 금혼령을 선포했다.
백성들은 왕비나 세자빈이 되는 것을 꺼려서 간택 단자를 제출하라고 해도 기피했다.
위험성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왕비나 세자빈은 외모보다는 덕을 우선했다.
장희빈처럼 뛰어난 미모의 왕비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왕실의 어른들이 왕이 여색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미모보다는 명문가에서 잘 교육받은 덕있는 처녀를 원했다.

여사라는 말은 고대 주나라의 궁녀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왕비나 세자빈을 뽑을 때 처녀성을 확인하기 위해 앵무새의 갓 뽑아낸 피를 팔목에 묻혀서 피가 묻으면 처녀로 묻지 않으면 처녀가 아닌 것으로 판정했다.

방자는 고유 명사가 아니고 관청의 사환을 지칭하는 용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