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노래하는 사람

조선 노비들 김종성 역사의 아침 2013년 287쪽 ~5/22 본문

독서

조선 노비들 김종성 역사의 아침 2013년 287쪽 ~5/22

singingman 2023. 4. 27. 12:41
728x90
조선은 노비들이 생산의 주체였다.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국민의 약 30%가 노비였다.
호구지책을 위해서 스스로 된 노비도 있지만 신분을 물려받은 노비가 대부분이다.
부모 가운데 어느 한 쪽이 노비면 자녀는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노비는 인권이 없는 물건처럼 매매되었다.
종부법이나 종모법을 따라도 몇 예외를 제외하면 그 자녀는 노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왕이나 귀족들이 적정한 선에서 노비를 소유하는 것이 통치에 편리했다.
간혹 재산이 많은 노비는 양인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예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양인 남자가 노비 여자와 결혼하는 경우는 많이 있었지만 양인 여자가 노비 남자와 결혼하는 일은 법으로 금지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노는 남자, 비는 여자 노예를 말한다.

유학을 공부했지만 관직을 받지 못한 사람을 유학이라 부르고 그렇게 살다가 죽은 사람을 학생이라 불렀다.

정노 때 이서구는 술취해서 자기를 욕하는 노비를 다른 노비를 시켜서 때려죽였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노비주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고 당시의 정서상으로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비가 폭력을 당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법률상 양인과 싸우는 노비는 거의 무조건 지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노비 입장에서는 무조건 참아야 했다.

노비중 외거노비 가운데는 박인수처럼 글을 읽어서 선비들로부터 존경받는 노비도 있었다.
돈이나 전쟁에서 공을 세워 면천하는 경우도 있었다.
국가는 필요에 따라 노비의 숫자를 조정했다.
공주가 노비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가 그 예다.
자가 집에 살면서 노동력이나 물품을 제공하는 외거노비와 주인집에 사는 솔거노비도 있었다.
공노비는 국가 관청에 있는 노비고 사노비는 개인 집에서 부리는 노비다.
괸기도 노비였다.
서자와 얼자 가운데 얼자가 가장 비참했다.
서자는 양첩에게서 태어난 자이고 얼자는 천첩에게서 태어난 자다.
부하를 천명이나 거느린 노비도 있었다.
태조 때 목인해는 천첩의 자식이었지만 신분이 상승했다가 줄을 잘 못 서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