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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21-07-13 본문
조선 5대 궁궐 가운데 복원이 가장 되지 않은 궁궐이다.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에는 지금의 건물들도 없었던 것 같다.
정전과 편전 그리고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는 태령전만 있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경희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궁궐로, 사적 제271호로 지정되어 있다.
1617년(광해군 9년)에 착공하여 1623년에 완공된 이궁으로, 조선 후기 동안 정궁인 창덕궁에 이은 제2의 궁궐로 양대 궁궐 체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많은 왕들이 경희궁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거처하면서 창덕궁이 지닌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일정 부분 나눠서 수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복궁의 동쪽 궁궐인 창덕궁+창경궁을 지칭하는 '동궐'에 대비되는 경복궁의 서쪽 궁궐을 뜻하는 '서궐西闕'로 불렸다.
규모로 보자면 경복궁 크기의 2/3를 넘는 영역이 경희궁에 속하였고, 한양도성 서쪽 성벽 일부와 한양 서북부를 대부분 차지하던 거대한 궁궐이었다.
1865년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이 철거되었다.[3] 원래 경희궁에는 100여동의 전각이 있었지만, 주요 전각 5개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어 경복궁의 궐내각사와 나인전 건설에 사용되었다.
경희궁 숭정전의 정문으로 높은 기단을 쌓아 월대를 만들었고 왕궁으로서 위엄을 갖추고 있다.
숭정문(崇政門)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봉황을 새긴 답도를 만들어 왕궁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경희궁의 정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다.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에 세워졌으나 1926년 일제가 경희궁의 남은 전각 5개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복원한 것이다. 숭정전 내부 당가에 용상을 설치하였는데, 그 뒤로 곡병과 일월오봉병을 두었다. 우물천정에는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두었다.
위쪽 사진의 용은 동국대 정각원건물로 쓰이게 된 본래의 숭정전 천장에 달려있는 것이고, 아래쪽 사진의 용은 옛 숭정전 자리에 새로 복원한 건물의 천장에 달아놓은 것이다.
경희궁의 편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1617년(광해군 9)에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1620년(광해군 12)에 건립되었으며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8~1910년 사이에 경희궁의 몇 안남은 전각들조차 훼손될 때 덩달아 헐렸다가 해방 후 경희궁지 발굴을 통해 복원했다.
경희궁은 원래 정원군의 집이었다.
광해가 이곳에 왕의 서기가 있다고 해서 궁을 짓고 경덕궁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 서기가 바로 이 바위 때문인데 처음에는 왕암이라 불렸다.
숙종이 서암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이 나중에 인조가 된다.
영조가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경희궁의 전각 중 하나로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영조 당시 중수되어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였고 영조가 붕어한 후 혼전으로 이용되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경희궁 전각 중 하나였으나 일제가 경희궁의 남은 전각 5개 매각할때 같이 매각되었다가 해방 후 발굴, 복원되었다. 복원 이후에는 영조의 진전이었던 점을 반영해 영조 어진 모사본을 봉안했다.
이 전각의 뒤편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큰 바위가 있는데 서암(瑞巖)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바위다.
원래는 왕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 해서 왕암(王巖)이라고 불렀고 이 때문에 광해군이 이 자리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현재 이름인 서암은 숙종이 상서로운 기운이 서린 곳이라는 의미를 담아 왕암을 서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아래는 서울 역사 박물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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