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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21-07-13 본문
몇 년 전 창덕궁을 올 때 온 적이 있지만 그때는 대충 둘러본 것 같아서 다시 왔다.
창경궁은 홈페이지에 의하면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추존왕)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세종 즉위년 1418년,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종대 창건된 창경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인조2년(1624) 이괄의 난과 순조30년(1830)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에 의하면
국보 제226호.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 이용하였다. 조선 1484년(성종 1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16년(광해군 8)에 다시 지은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합각지붕건물.
창경궁 창건 때인 1484년(성종 15)에 처음 세웠는데,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린 것을 1616년(광해군 8)에 다시 세웠다. 이후 인조 때와 순조 때 큰 화재를 겪으면서도 무사히 보존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행각 등이 변형되었다. 1983∼1985년에 걸친 중창 공사 때 주변 행각(行閣)과 문정전(文政殿)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5칸(18.03m), 측면 3칸(9.64m)에 뒤로 툇간(退間) 1칸을 내달아 평면을 구성하였다.
창경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평상시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나랏일을 보고 경연을 하던 곳이다.
공식적인 편전은 문정전이나 일상적으로는 숭문당을 더 많이 활용하였다.
창경궁의 편전이다.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1483년(성종 14년) 창경궁 창건 때 지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복구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창경궁을 놀이공원 창경원으로 만든 후, 1930년대에 헐었다. 1983년에 창경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긴 후 1984년에 발굴 조사를 했고 198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사도세자가 문정전 앞마당에서 뒤주에 갇혀 죽었다.
창경궁의 정자이다.
‘함인(涵仁)’ 뜻은 ‘인(仁)에 흠뻑 젖는다(涵)’이다.
인조 이전 창경궁에는 없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왕실 연회를 열던 인양전(仁陽殿)이 있었다.
인양전은 임진왜란 때 불탔고 1616년(광해군 8년)에 복구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일어난 1624년(인조 2년)에 다시 화재를 입어 사라졌다.
저 때 통명전을 비롯한 창경궁 주요 건물 대부분이 같이 불탔다.
1633년(인조 11년)에 인조는 광해군이 지은 인경궁의 전각들을 철거 및 이전하여 창경궁을 재건하였다.
이 때 옛 인양전 터에 헐어온 인경궁 전각으로 지은 건물이 바로 함인정이다.
이후 왕들은 함인정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였다.
주로 왕실 의례나 잔치, 또는 과거 합격자들을 불러 모으고 신하들과 만나 경서를 읽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국상이 생겼을 때는 망곡하고 향을 올리는 곳으로도 이용하였다.
참고로 함인정을 가장 많이 사용한 왕은 영조였다. 《조선왕조실록》 중에서도 《영조실록》에 함인정 기사가 가장 많이 나온다.
1830년(순조 30년) 8월 화재로 불탔고# 1833년(순조 33년)에 복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조하면서 많은 창경궁의 전각들을 헐었지만, 함인정은 살아남았다. 다만 주변의 행각과 문은 없어지고 건물 한 채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후 몇 번의 보수 공사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1층 목조 건물이다.
3단 짜리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정면 3칸, 측면 3칸, 총 9칸이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이익공식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하였다.
용마루 위에 용두만 두고 잡상은 올리지 않았다.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하였다.
실내의 바닥은 전부 우물마루로 깔았다. 가운데 한 칸을 크게 하고 나머지 칸들을 툇마루처럼 만들었다.
높이 또한 가운데 칸이 다른 칸보다 높다.
가운데 칸의 천장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했으나, 나머지 주변 칸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만들었다.
가운데 칸의 도리 사방에는 사계절을 노래하는 시, 《사시(四時)》가 현판으로 걸려있다.
중국 동진 ~ 송(육조) 시기의 시인 도연명이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여러 연구자들이 동진 시대 유명한 화가 고개지(顧愷之)의 작품임을 밝혔다.
각 계절이 상징하는 방위에 맞춰서 봄 시는 동쪽, 여름시는 남쪽, 가을 시는 서쪽, 겨울 시는 북쪽에 두었다. #
春水滿四澤(춘수만사택)
봄의 물은 사방 연못 속에 넘치고
夏雲多奇峰(하운다기봉)
여름에는 구름이 기이한 봉우리에 많다
秋月揚明輝(추월양명휘)
가을 달빛 밝게 비치고
冬嶺秀孤松(동령수고송)
겨울 산마루에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다
현재는 사방이 트여있다. 하지만 1828년에서 1830년 사이에 제작한 《동궐도》를 보면, 남쪽을 제외한 나머지 3면에 창호 문을 달았음을 알 수 있다. 1833년에 재건했을 때 바뀐 건지, 아니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지금처럼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왕궁 안에 불교식 5층 석탑이 있는 것에 대해서 말들이 많다.
순종 때 왜놈들이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면서 어느 폐사지에서 가져왔다는 설도 있고 심지어는 유교 나라인 조선의 왕궁을 모욕하기 위해서 세웠다는 설도 있다.
이 탑에 대해서는 유독 아무런 설명이 없으니 온갖 억측이 다 나오는 걸까?
다음 백과에 의하면
정면 7칸(19. 116m), 측면 4칸(8. 623m), 기둥높이 10척. 창경궁을 창건한 해인 1484년(성종 15)에 처음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광해군 8)에 재건하였다.
그러나 1830년(순조 30)에 다시 큰 불이 일어나 조선 중기의 건물도 불타버리고, 지금의 건물은 183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침전이었으므로 남향으로 앉히고, 남·서·북쪽에 행각(行閣)을 두르고 동쪽에 담장을 둘러 독립된 구역을 설정하였으나, 주변의 부속건물은 모두 없어진 채 주건물만이 남아 있다.
기둥높이 10척(尺)이며 평면의 구성은 창경궁 경춘전과 똑같다. 그러나 현재는 바닥 전체에 마루를 깔아놓았고 대청과 방을 구분하던 칸막이벽이나 문 등이 남아 있지 않아 옛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기둥 위에 짜올린 2익공(二翼工)도 경춘전과 같으며 다만 평방과 공포, 처마 및 서까래 등에 칠한 단청이 다를 뿐이다. 건물 내부 천장은 대청칸에는 소란반자, 그 양 옆방에는 종이반자로 막고, 툇간만 서까래를 그대로 드러나게 하였다.
내부를 원형대로 복원, 조선시대 궁궐 침전의 실상을 보여줄 수 있도록 개선되어야 한다. 전체적으로 단아한 형태와 화려한 단청이 잘 어우러져 있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목조건축임이 분명하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가 환경전에서 죽었다.
아버지 인조에 의한 독살을 의심할 만한 죽음이었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정면 7칸(19. 67m), 측면 4칸(9. 56m), 기둥높이 10척. 창경궁을 처음 지은 1484년(성종 15)에 지어졌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불탄 것을 1616년(광해군 8)에 다시 지었다.
그 뒤 인조 때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을 겪으면서도 불타지 않고 보존되어오다가 1830년(순조 30)에 일어난 큰 불로 인하여 타버렸다.
이 후 1834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 현재까지 보존되어오고 있다.
평면의 구성을 보면, 4면에 너비 1칸인 퇴(退)를 두르고 정면 퇴의 한가운데를 개방하여 대청으로 들어가는 전실(前室)을 마련하였다.
대청은 3×2칸 규모로 건물 내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대청 양옆에 각각 1칸짜리 방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민족항일기를 거치면서 변형되었고 이후 원형대로 복원하는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 지금은 바닥 전체가 마루로 되어 있다.
침전으로 사용하던 건물인만큼 온돌방을 옛모습대로 복원해야 할 것이다.
구조는 지면과 구분되도록 1단으로 장대석을 두르고, 그 안쪽에 높이 1m인 석축을 쌓되 주춧돌과 세번째 댓돌이 맞물리도록 가지런하게 짜맞추었다.
주춧돌은 평면이 방형인 돌을 댓돌 두께보다 더 높게 만들어 기둥을 받치고 있어서 건물의 무게를 떠받치는 지지체를 두드러지게 표현하였다.
기둥 윗몸에 윗면이 수평인 수서형태의 익공(翼工)을 2개 짜올려 주심도리를 받친 간결한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궁궐 침전 건물이 공통적으로 취하고 있는 형식상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창경궁의 침소이다.
창경궁은 대비들과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은 궁이다.
그래서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때문에 창경궁 내전 건물의 경우, 어느 전각을 어느 지위 사람이 썼는지를 뚜렷하게 구분하기 모호하며 양화당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반적으로는 왕실 내 최고위급 인물들이 많이 머문 곳인 듯 하다.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양화(養和)' 뜻은 '조화로움(和)을 기른다(養)'이다.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썼다.
1484년(성종 15년) 창경궁 창건 때 처음 지었다. 1565년(명종 20년) 때는 명종이 양화당 뒷뜰로 유생들을 불러 시와 글을 짓는 일종의 논술 시험인 제술(製述)을 보게 하고, 현장에 있던 신하들에게 술을 내렸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다른 건물들이 전부 불탔으나 양화당만은 무사했다.
1609년(광해군 1년)에는 소성대비(인목왕후)가 세자궁인 저승전에 머무는 것이 죄스러워 양화당의 사정합(思政閤)으로 대비를 옮겨 모시려다가 무산되었다.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온 인조는 주로 이 곳에서 머물렀고, 신하들과 사신들을 접견했다.
1672년(현종 13년)에는 건물이 기울어지고 무너진 곳이 있어 보수했다.
1730년(영조 6년)에는 창경궁의 경극당과 집복헌 온돌 밑에서 뼛가루와 해골 등 흉물이 나오자 창경궁 내전 일곽을 전부 수리했는데 이 때 양화당도 철거하고 고쳐 지었다.
1830년(순조 30년) 3월 창경궁 내전 주요부에 발생한 화재로 불탔다. 그동안 창경궁의 여러 화재를 전부 비껴갔으나 이번엔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한 것. 3년 뒤인 1833년(순조 33년)에 복구했다. 1878년(고종 15년)에는 철종의 왕비 명순대비(철인왕후)가 여기서 승하했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면서 많은 창경궁의 전각들이 사라졌지만 양화당은 살아남았다.
다만, 이왕직박물관 전시실로 바뀌어 내부가 많이 훼손당했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내부를 복원했고 이후 오늘에 이른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창경궁 통명전(昌慶宮通明殿)은 창경궁에 있는 왕의 침전 겸 연회용 건물이다. 명정전 서북쪽 궁궐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동쪽에 있는 왕비의 침전인 환경전과 함께 남향하고 있다.
창경궁 창건 때인 성종 15년에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고, 광해군 8년에 다시 세운 건물은 다시 정조 14년에 불탔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34년 창경궁의 전각 대부분을 재건할 때 지은 것이다.
다음은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의 특징이다.
건물 전면에는 정교하게 장대석으로 쌓은 규모가 큰 월대가 마련되었다.
월대 정면에는 3조의 돌계단이 붙어 있으며, 좌·우측에도 각각 계단이 있고, 월대 상면에는 방형으로 다듬은 화강암 박석을 깔았다. 월대 위에 다시 장대석을 놓아 기단을 형성하여 그 위에 강회다짐을 하고 사각형 초석과 사각기둥을 세웠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인데, 정면 5칸, 측면 2칸을 감싸며 툇칸이 설치된 형식이다.
내부는 서북쪽 일부 방을 제외하고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원래는 가운데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대청을 두고 대청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건물의 정면 중앙 3칸의 툇칸 부분은 개방하였고, 툇칸면 중앙 세칸은 사분합 들문을 달았고, 좌·우의 각 두칸에는 머름을 꾸미고 머름 위에 사분합창과 광창(光窓)인 교창을 달았다.
기둥 위는 이익공으로 결구하였고, 기둥 사이에는 장화반(長花盤)만 놓았다.
천장은 우물천정을 주조로 하되 부분적으로 고미반자를 사용했다. 큰 부재들에는 모루단청을 하였고 우물천장의 청판에는 모란문양을 그려 넣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창덕궁 대조전과 같이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이다.
지붕의 내림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두와 잡상 등을 배치했고, 사래에는 토수(吐首)를 끼웠다. 건물 전면 좌·우 협칸 기단 위에는 아궁이를 설치했던 흔적이 있다.
통명전 서쪽에 화강석으로 아름답게 조성한 지당(池塘)이 있다.
남북 길이 12.8m, 동서 길이 5.2m의 장방형 연못인데, 연못의 4벽은 장대석으로 쌓았고, 둘레에 돌난간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돌렸다.
지당 위에는 길이 5.94m, 폭 2.56m의 간결한 돌다리를 동서로 설치했다.
이 지당의 물은 북쪽 4.6m 떨어진 샘에서 넘쳐나는 물을, 직선으로 설치한 석구(石溝)를 통해 폭포로 떨어지도록 고안했다.
한국의 지당 가운데 가장 기발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평가받는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창경궁의 주거 건물이다. 양화당의 동쪽에 위치해있으며 집복헌과 붙어 있다.
‘영춘(迎春)’은 ‘봄(春)을 맞는다(迎)’는 뜻이다.
현판은 봉조하 남공철이 썼다.
원래 이 일대에 후궁 처소가 모여있었으므로, 영춘헌도 본래는 후궁 거처였던 듯 하다.
창건 연대는 모르나 기록 상 처음 나타나는 것은 정조 때이다. 정조는 창경궁 옛 홍문관에 감인소란 이름을 붙이고 즐겨읽는 책들을 그 곳에서 편찬, 인쇄했다. 그리고 감인소 근처에 있는 영춘헌에 주로 머무르며 이곳을 서재와 집무실로 활용했다.
1796년(정조 20년) 6월에는 정리당상(整理堂上) 이시수가 건물을 고쳐지을 것을 청했다.
임금이 거주하는 건물의 규모가 협소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정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영춘헌에 주로 머물던 정조는 1800년(정조 24년) 6월에 이곳에서 승하했다. 이 때 영조의 계비 예순왕대비(정순왕후)가 영춘헌을 빈전으로 쓰려 했으나 좁다는 이유로 대신 환경전을 빈전으로 정했다.
1830년(순조 30년) 8월에 화재로 불탔고 1833년(순조 33년)에 다시 지었다. 이 때 창덕궁 중희당 근처에 있던 연영합(延英閤) 일대에 있던 천지장남궁(天地長男宮)을 헐어 지었다고 한다.
재건 이후 정조를 닮고 싶었던 후대 임금들도 영춘헌을 많이 활용했다. 헌종은 이곳에서 국사를 돌보고 경서 강독을 했으며, 아플 때도 영춘헌에 머물면서 치료를 받았다. 고종도 헌종처럼 영춘헌에서 경서를 읽고 정사를 보았으며 신하들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역사 기록은 1894년(고종 31년) 4월 8일 《승정원일기》 기사이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바꾸면서 많은 전각들을 헐었다. 그러나 영춘헌은 무사하여 오늘에 이른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궁궐 중 하나인 창경궁에 있는 주거 건물이다. 양화당의 동쪽에 위치해있으며 영춘헌과 붙어있다.
‘집복(集福)’은 ‘복(福)을 모은다(集)’는 뜻이다.
원래 이 일대는 후궁들의 처소가 모여있던 영역이었으므로, 집복헌 역시 후궁의 거처였던 듯 하다.
창건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기록 상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영조 때이다.
1730년(영조 6년) 4월에 집복헌과 건극당의 온돌 밑에서 뼛가루와 해골을 찾아내어 내전 영역 전체를 수리했다는 내용으로 처음 등장한다.
1735년(영조 11년)에는 사도세자가, 1790년(정조 14년)에는 순조가 , 1793년(정조 17년)에는 숙선옹주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즉위하기 전 순조와 관련한 기록이 많다. 이곳에서 돌잔치도 열었으며, 원자일 때는 사부와 함께 경서를 읽기도 했다. 그리고 세자가 된 이후 관례와 책봉례를 집복헌 바깥채에서 행했고 세자빈의 첫 간택도 여기서 행했다.
순조 즉위 후엔 딱히 두드러진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1820년(순조 20년)에는 집복헌을 수리하기 위해 길한 날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아 이 때 보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30년(순조 30년)에 불탔고 1833년(순조 33년)에 재건되었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승정원일기》에 가끔 고종이 신하를 만났다는 내용의 기사만 드문드문 보인다. 가장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기록은 1894년(고종 31년) 5월 23일 자 《승정원일기》의 기사이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면서 많은 창경궁의 전각들이 헐렸지만 집복헌은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바람을 관측하는 기상 관측 기구다.
창경궁의 연못이다. 연못이 두 개로, 북쪽의 작은 연못과 남쪽의 큰 연못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못 이름은 근처에 있던 춘당대에서 따왔다. 춘당대는 창덕궁 영화당 앞의 넓은 마당이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한 권역으로 묶어 사용하였다. 특히 후원 권역은 더욱 그랬다. 지금은 춘당대 한 가운데를 담으로 막아 인식하기 어렵지만, 춘당대의 위치는 현재의 춘당지 바로 옆이다. 그래서 연못의 이름을 거기서 따온 것이다.
창경궁 후원 춘당지 북쪽에 위치한 서양식 건물로 1909년 목재와 철재, 그리고 유리로 지어진 한국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일제가 순종황제를 유폐시킨 후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세워졌으며 일본 황실 식물원 책임자였던 후쿠와가 1907년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에서 시공해 건축 당시 동양 최대의 규모였다. 열대 지방의 관상 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다. 처음에는 대온실 후면에 원형 평면의 돔식 온실 2개를 서로 마주 보게 세웠으나 후에 돔식 온실 2개는 철거하여 현재 대온실만 남아있다. 건축 양식은 19세기 말 시작된 세계 박람회 전시 건물의 양식을 따른 근대 건축물로 한국 근대 건축사의 보고 중 하나다. 원래는 창경원에 딸린 식물원이었으나 식물원 자체는 창경궁 복원 공사에 따라 1983년에 서울대공원으로 이전하고, 1986년에 궁이 복원된 후에는 자생목본류를 중심으로 야생화를 함께 전시하는 공간이 되었다. 현재 대온실은 2004년 2월 6일에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창경궁의 정자이다. 춘당지 동북쪽 야산 기슭에 있다.
주로 활쏘는 곳으로 활용하였다.
《예기》의 〈사의(射義)〉 편에 나오는 "활쏘기란 그의 높은 덕을 살펴보는 것(射者所以觀盛德也)"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지방에 있는 관아들에도 관덕정이란 이름의 정자가 많이 설치되었다. 대표적으로 제주도의 관덕정을 들 수 있다.
현재에도 여러 활터의 이름으로 많이 쓰인다.
임진왜란 때 불탄 후 1642년(인조 20년)에 그 자리에 관덕정을 세웠다. 처음에는 취미정(翠微亭)이라 부르다가 1664년(현종 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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