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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화성 융릉과 건릉 21-06-09 본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선 시대의 왕은 정조 대왕이다.
그래서 전부터 융건릉을 다시 가고 싶었다.
오래 전에 한번 다녀 온 적이 있긴 했지만 당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서 오늘 다시 가게 되었다.
지공선사가 되었으니 전철도 무료로 탈 수 있고 시간도 철철 남아도니까 여유롭게 다녀올 수 있었다.
백마역에서 병점역 까지 가서 병점역 후문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용주사와 융건릉을 갈 수 있었다.
2시간 40분 정도 걸려서 용주사를 먼저 들르고 다음에 융건릉으로 가다.
어릴 적 부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을 정조는 사도세자의 복권과 제사에 정성을 많이 쏟는다.
그래서 지지대 고개에서 송충이를 씹었다는 전설도 있고 신하들과 싸우면서 까지 아버지의 복권에 힘을 쏟았다.
궁중에서 이 곳으로 행차할 때 다산이 한강에 배다리를 설계해서 만든 이야기도 그의 효심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
태종 때 이미 박자청에 의해 한강에 배다리가 놓여졌던 적은 있지만 다산 때는 실학이 발전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이 조선에 소개되고 거중기나 다른 과학의 발전도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융건릉은 다른 조선왕릉처럼 능내에 소나무와 참나무등이 잘 자라고 있어서 시민들의 휴식처와 산책로로도 잘 사용되고 있다.
능에 들어가면 오른편에는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능이 있고 왼편에는 정조와 그 부인 효의 왕후의 능이 있다.
특이한 점은 융릉 왼편에는 곤신지라는 연못이 있다.
정조 시대에는 서학의 영향으로 이미 지구가 方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천원지방설이 힘을 잃었고 그래서 연못도 꼭 방형으로 만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융릉 들어가는 금천교 - 원대황교라고 쓰여 있다.
조선 왕릉의 금천교 가운데 이름을 가진 유일한 다리다.
처음에는 대왕교였는데 고종 때 융릉으로 추숭되면서 원대황교가 되었다고 한다.(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이정근 저 책보세 237쪽 )
금천을 넘어가면 이 곤신지가 있다.
풍수지리에도 능했던 정조가 풍수에 따라 이 연못을 조성했다고 한다.
왕릉 안에서 연못을 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김포 장릉에도 큰 못이 있긴 하지만 그건 능 한참 아래 있다.
융릉隆陵(추존 장조와 헌경황후)
위치 :경기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
능의 형식 :합장릉
능의 조성 :1789년(정조 13), 1816년(순조 16), 1899년(광무 3)
능의 구성
융릉은 추존 장조의황제와 헌경의황후 홍씨의 능으로 합장릉의 형태이다.
융릉은 1789년(정조 13)에 배봉산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으로 이름을 바꾸고 원을 다시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라간,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비각 안에는 두 기의 표석이 있는데 1기는 조선시대에 세운 조선국 표석(조선국 사도장헌세자현륭원)이고, 1기는 대한제국시대에 세운 황제국 표석(대한 장조의황제 융릉 헌경의황후 부좌)이다.
능침은 난간석을 생략하고 병풍석만 둘렀으며, 병풍석의 면석은 인조의 장릉(長陵)의 형태를 따랐고, 인석은 연꽃형태로 조각한 것이 독특하다.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특히 문석인은 복두를 쓴 일반적인 왕릉형식이 아닌 금관조복을 입고 있다.
공간 구성 상의 특이점 중 또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정자각과 능침이 이루는 축이다.
대개의 왕릉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는 반면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다.
홍살문의 오른쪽에는 원형의 연못인 곤신지(坤申池)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풍수적 논리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능의 역사
1762년(영조 38)에 장조(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 아래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묘의 이름은 수은묘(垂恩墓)라 하였으며,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격상하여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원을 현재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1815년(순조 15)에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16년에 현륭원에 합장으로 원을 조성하였다. 그 후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년에 사도세자가 추존되자 능으로 격상되어 융릉이라 하였다.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이야기
장조의황제(재세 : 1735년 음력 1월 21일 ~ 1762년 음력 윤5월 21일)는 영조와 영빈 이씨의 아들로 1735년(영조 11)에 태어나 1736년(영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3세가 되었을 때 이미 『효경』을 외울 정도였으며, 수시로 글을 쓰고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다양한 방면에서 왕세자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갖춰 부왕인 영조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1749년(영조 25)에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그를 경계하는 노론 벽파 대신들이 왕세자를 모함하여 영조와 왕세자 간의 갈등이 비롯되었다.
특히 1762년(영조 38)에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였던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고하는 상서를 올리자 크게 노한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왕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왕세자가 명을 따르지 않자 영조는 왕세자를 폐서인 한 후 뒤주에 가두었다.
『영조실록』 1762년(영조 38) 5월 13일의 기사에는 아버지인 영조가 왕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게 되는 비극의 시작이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나경언이 고변한 후로부터 임금은 왕세자를 폐하기로 결심하였다. 임금은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에게 휘령전(정성왕후의 혼전)에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행례를 마치고, 세자가 뜰 가운데서 사배례를 마치자, 궁성문을 굳게 막고 사람의 출입을 금한 후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왕세자의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세손(정조)이 들어와 관과 포를 벗고 왕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전교를 내려 왕세자의 자결을 재촉하니, 왕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은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군병을 시켜 신하들을 내쫓게 하였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한림 임덕제 마저 강제로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왕세자는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곡하면서 따라 나오며 말하기를, “너 역시 나가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 하고, 전문에서 나와 춘방의 여러 관원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물었다.
왕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드디어 왕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왕세자빈, 세손 및 여러 왕손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결국 뒤주에 가둔지 8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자신의 행동을 곧 후회하고, 애도하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렸으며, 1899년(광무 3)에는 왕으로 추존되어 묘호를 장종이라 하였다가 곧 바로 황제로 추존되어 장조의황제라 하였다.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이야기
헌경의황후 홍씨(재세 : 1735년 음력 6월 18일 ~ 1815년 음력 12월 15일)는 본관이 풍산인 영풍부원군 홍봉한과 한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735년(영조 11)에 반송방 외가 사저에서 태어났다.
1744년(영조 20)에 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762년(영조 38)에 장조가 세상을 떠나자 혜빈에 봉해졌다.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호칭을 높여 혜경궁(惠慶宮)이라 하였다.
헌경의황후의 아버지와 숙부 홍인한은 외척이면서도 폐세자를 주장하는 노론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다.
숙부 홍인한은 심지어 영조가 세상을 떠나기 넉 달 전인 1775년(영조 51) 11월에 이른바 ‘삼불필지설’을 내세워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의 대리청정도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었다.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혜경궁 홍씨는 왕세자의 참변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후 1795년(정조 19) 친정 조카 홍수영의 소청에 의해 장조의 참변을 중심으로 한 자전적 회고록 『한중록』을 남겼다. 사료적 가치가 풍부한 『한중록』은 『인현왕후전』과 함께 궁중문학의 쌍벽을 이룬다.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왕실의 어른으로 생활을 하다가 1815년(순조 15)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올라갈 수 없어서 아래에서 찍을 수 밖에 없다.
석물들과 문신 무신 석인들이 보인다.
건릉健陵(정조와 효의황후)
위치 :경기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
능의 형식 :합장릉
능의 조성 :1800년(순조 즉위), 1821년(순조 21)
능의 구성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선황제와 효의선황후 김씨의 능이다.
건릉은 같은 봉분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의 형식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라간,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융릉과 비슷하지만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능의 역사
1800년(정조 24)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장조의 현륭원(융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 건릉 불길론이 있었고, 1821년(순조 21)에 효의선황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건릉 천장이 결정되었다.
이후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능자리가 결정되면서 합장릉의 형태로 능을 조성하였다.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 이야기
정조선황제(재세 : 1752년 음력 9월 22일 ~ 1800년 음력 6월 27일, 재위 : 1776년 음력 3월 10일 ~ 1800년 음력 6월 27일)는 추존 장조와 헌경의황후 홍씨의 둘째 아들로 1752년(영조 28)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1759년(영조 35)에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1762년(영조 38)에 아버지 장조의 죽음을 목격하는 일을 겪었다.
1762년에 영조는 정조에게 왕위 계승의 명분을 주기 위해 일찍 세상을 뜬 첫째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게 하였다.
1775년(영조 51) 부터는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이듬해인 1776년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먼저 아버지 장조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노력하였으며,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를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규장각 설치, 신해통공(금난전권 폐지 등) 실시,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임진자 등을 새로 만들어 인쇄술의 발달을 기하고, 『증보동국문헌비고』등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이론이 중시되는 학문에 치우치지 않고, 실학을 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의 문예 부흥기를 가져왔다.
가난한 백성의 구제를 위해 자휼전칙을 공포하고, 제도 개편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후 1800년(정조 24)에 창경궁 영춘헌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순조는 묘호를 정종(正宗)이라 올렸으며,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정조선황제로 추존되었다.
정조는 아버지 장조의 원(영우원)을 지금의 자리인 현륭원(융릉)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정조 14)에서 1795년(정조 19)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1796년(정조 20)에 화성을 축성한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576칸 규모로 건립하였으며, 그 전까지는 1789년(정조 13) 수원읍치를 화산에서 팔달산으로 옮기면서 관아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행궁으로 고쳐 지은 후에도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화성행궁은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 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 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 이야기
효의선황후 김씨(재세 : 1753년 음력 12월 13일 ~ 1821년 음력 3월 9일) 본관이 청풍인 청원부원군 김시묵과 당성부부인 홍씨의 딸로 1753년(영조 29)에 가회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62년(영조 38)에 왕세손빈으로 책봉되었고,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하여 60세가 넘어서도 정순왕후 김씨와 헌경의황후 홍씨를 공양하여 칭송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순조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일생을 검소하게 지내어 수차례에 걸쳐 존호(尊號)를 올렸으나 “선왕께서 존호를 받지 못하신 것이 마음속에 지통으로 남아 있는데, 미망인으로서 이를 받는 것이 어찌 가당하단 말인가.”하며 모두 거절하였고, 1820년(순조 20)에 여러 대신들이 하수연(賀壽宴)을 베풀고자 했으나 사양하였다고 한다.
그 후 1821년(순조 21)에 창경궁 자경전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효의선황후는 선천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자식을 낳을 수 없어 불안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효성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타고난 덕망으로 뭇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순조실록』에 실린 효의선황후의 행장에는 성품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아랫사람을 반드시 성의와 신의로써 대하여 일찍이 천히 여기고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마음을 열고 얼굴을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사적인 은정으로 봐주지 않았으므로, 좌우에 있는 궁중의 심부름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할 줄 알았다.
친척 중에 과실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꾸짖지는 않았으나 묵묵히 말을 하지 않아 그로 하여금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하였으므로, 그 사람이 “마음에 부끄럽고 송구하여 벌을 받는 것보다 더 심하다.”라고 하였다.
또, 자신의 봉양에 매우 검소하여 복식과 기물이 하나도 좋은 것이 없었고 겨우 사용할 수 있는 것만 취할 뿐이었다.
평소의 반찬이 더러 마음에 맞지 않을 때 좌우에서 담당자를 치죄할 것을 청할 경우 “어찌 구복(口腹) 때문에 사람을 치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대한정조선황제건릉효의선황후부좌
(맞게 읽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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