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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매화음(梅花飮) 2022-01-27 본문

살아가는 이야기

매화음(梅花飮) 2022-01-27

singingman 2023. 5. 1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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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다가 나보다 1년 뒤에 정년 퇴직하신 선생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화초를 키우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학교에 함께 근무할 때는 다른 선생님들이 집에서 키우던 화초가 병이 들거나 잘 자라지 않으면 이 선생님께 가져오면 집에 가지고 가서 잘 자라도록 만들어서 가져다 주곤 했습니다.
이 선생님의 아파트 베란다에는 그래서 일년 내내 푸르른 잎과 꽃들이 잔치를 벌입니다.
며칠전 매화가 피었다고 보러 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홍매가 예쁘게 피었습니다.

조선의 선비들은 매화가 피면 함께 모여서 완상(玩賞)하며 즐겼습니다.
이런 모임을 매화음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추운 겨울에 매화를 찾아 떠나는 탐매(探梅)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조선뿐만 아니라 극동 3국의 선비들은 다 매화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투병중이신 이어령 선생님의 글에 보면 만약 한중일 3국이 하나의 나라가 되어 매화를 국화(國花)로 지정한다면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하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는 사쿠라가 있고 우리 나라에는 무궁화가 국화로 있고 중국은 국화는 없어도 모란을 아주 좋아하지요.
하지만 3국이 다 같이 좋아하는 꽃으로 매화를 꼽는데는 별 이견이 없어보입니다.
매화는 세한삼우(歲寒三友) 나 사군자(四君子)에 포함되어 그 위치를 한층 확고히 하기도 합니다.

송의 전설적인 인물 화정 임포(和靖 林逋)는 황주 서호(黃州 西湖)의 고산(孤山)에 살면서 매화를 즐겼다고 합니다.
그는 자작시 〈산원소매(山園小梅)〉에서

"맑은 물에 그림자 비스듬히 드리우고 은은한 향기 따라 달빛마저 흔들리네"
(疎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橫昏)라고 매화를 노래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매화를 이야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단원과 퇴계 선생님을 들 수 있습니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는 매화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매화를 좋아했는지 호산(壺山) 조희룡(趙熙龍)이 쓴 《호산외사(壺山外史)》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단원이 연풍 현감으로 있을 때였다.
어떤 사람이 단원에게 매화나무를 팔러 왔다.
그 매화가 퍽 기이하여 무척 갖고 싶었으나 돈이 없었다.
그 때 마침 단원에게 예전(禮錢) 삼천 량을 갖고 작품을 받으러 온 이가 있었다.
그 돈에서 이천 량을 주고 매화를 사고, 팔백으로 술을 사 동지들을 불러 매화음(梅花飮)을 베풀고, 나머지 이백으로 쌀과 땔감을 사니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퇴계 선생님의 매화 사랑은 각별한 데가 있습니다.
꽃잎이 아래로 드리운 수양매를 보고 지은 시는 이렇다.

한 송이가 등돌려도 의심스런 일이거늘
어쩌자 드레드레 거꾸로만 피었는고
이러니 내 어쩌랴, 꽃 아래 와 섰나니
고개 들어야 송이송이 맘을 보여 주는구나'
(손종섭 번역).

선생은 앵돌아진 여인의 마음을 타박하지 않는다.
먼저 다가가 살며시 다독인다.
모든 목숨붙이를 연민의 눈으로 본 선생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이 이 시에도 살아있다.
선생에게는 가까이 두고 어루만진 매화분이 있었다.
어쩌다 거처가 탁해지기라도 하면 매화분을 먼저 옮겨 씻기는가 하면 신병이 깊어지자 각방을 썼다는 일화도 있다.
모두 선생의 개결한 성정을 일러주는 사례이겠지만, 그 너머 또 다른 선생의 진정이 숨어 있을 것으로 믿는 사람도 있다.
바로 단양군수 시절에 만난 두향 얘기다.

관기였던 두향은 선생을 사모하여 가까이 모시길 자청했다.
처신이 풀 먹인 안동포처럼 빳빳한 어른인지라 두향의 애간장은 녹았을 것이다.
마침내 선생의 마음을 얻은 것은 조선 천지를 뒤져 기품 넘치는 매화 한 그루를 찾아낸 뒤였다.
두향은 그 매화를 선생에게 바쳤고, 선생은 단양 시절 동안 동헌에 심어놓고 애완했다.
물론 두향에게도 곁을 주었다고 한다.
두향의 매화는 선생이 새 임지로 떠나면서 도산으로 옮겨져 명맥을 이었다.
단양에 홀로 남았던 두향은 수년 뒤 선생의 부음을 듣고 자진했다.
죽음에 얽힌 설이 분분하지만 나는 앉은 채로 숨을 딱 멈춰버렸다는 두향이 가장 그답다고 여긴다.
두향의 묘는 지금 단양의 구담봉 맞은편 산자락에 있다.
그 묘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될 뻔한 적이 있었다.
퇴계 후손이자 국학자인 고 이가원 선생이 생전에 두향 묘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그분이 해준 말씀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수몰을 앞두고 고심하던 어느 날, 그분 꿈속에 두향이 나타났다.
두향은 "나를 그대로 두시오.
물에 잠겨서라도 이곳에 있겠소"라고 했다는 것이다.
곡절 끝에 지금 자리로 이장되긴 했으나 두향의 일편단심은 꿈속에서도 단호했다.
퇴계 선생이 임종을 앞두고 남긴 말은 알다시피 "매화분에 물 주어라"이다.
나는 그 말에서 선생의 심중에 남은 두향의 야윈 모습을 본다."
(123번째 새소식 (haksodo.com)에서 복사해 옴


위의 글처럼 두향이 자진했다면 조선 시대의 잘못된 유교 가치관이 아까운 생명을 앗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인들에게는 일부종사를 강요하고 정절을 잘 지켰다고 정려문을 세워주면서 막상 사대부 자신들은 축첩이나 기생들과의 염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쩌면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심지어는 유배지에서도 축첩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존경해마지 않는 다산도 강진 다산초당에서 유배생활 하고있을 때 자신을 시중들던 여인에게서 홍임이란 딸을 낳습니다.
이 딸이 나중에 지금의 남양주 마재 본가에 그 어머니와 함께 해배되어 오는 다산과 함께 옵니다.
하지만 본처의 반대로 이 딸 모녀는 쫓겨나다시피 하게 됩니다.
자기 딸조차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사대부들이 여인들에게는 이런 정절을 강요한 것은 천하를 경영하겠다는 자신들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퇴계 선생님과 두향의 러브 스토리와 매화 사랑은 최인호의 소설 '유림'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위 글에서는 정원에 심을 정도의 나무로 묘사되고 있지만 내 기억으로는 '유림'에서는 매화분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단양 구담봉, 옥순봉에 가면 이 러브 스토리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매화분을 보면서 퇴계 선생님을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