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노래하는 사람

송강 정철과 강아(江娥) 2022-09-03 본문

역사 문화 유적지 관광지

송강 정철과 강아(江娥) 2022-09-03

singingman 2023. 6. 2. 15:48
728x90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강아(江娥)

파주 파산 서원에 갔다가 서원 입구 길가에서 아래 사진의 간판을 보았습니다.
파산 서원은 우계 성혼의 서원이고 송강과 그는 친구 사이입니다.
율곡과 송강은 동갑이고 우계는 한 살 위인 1535년 생입니다.
구봉 송익필도 파주 사람으로 이들은 다 친하게 지냈습니다.

누이가 인종의 후비였던 송강은 젊은 시절에는 청렴하고 올곧은 선비였던 것 같지만 후기로 가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세대는 학교 다닐 때 그가 쓴 관동별곡이나 사미인곡 등으로 인해 정철을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가로서의 송강은 그리 훌륭한 인물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죽하면 서인의 영수였던 그를 '동인 백정'이라는 별명으로 불렀겠습니까?
그는 뇌물사건에도 연루되었고 옥사를 너무 가혹하게 다루어 많은 사람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습니다.
또 술을 너무 좋아해서 알코올 중독이 되어 업무를 소홀히 하고 돌보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일례로 임진왜란이 한창인 와중에 평양성 전투의 패전으로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는데도 술에 취해 회의에 불참하는 경우를 보이기도 합니다.
또 선조 시대에는 여자를 너무 좋아한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습니다.
오죽하면 절친이었던 율곡이 그에게 '제발 술을 끊도록 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을 없애라'라고 충고하기도 했습니다.
강원도 관찰사(지금의 도지사) 시절에는 냉해와 홍수, 기근 등이 심각했는데 이런 기간에 자기는 금강산 유람이나 다니고 관동별곡이나 짓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심각한 직무유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어느 대통령은 진도 앞바다에서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이 탄 배가 침몰한 후 직무의 특성상 몇 시간의 행적을 밝히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었는데 송강은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 기간에 몇 달 동안이나 유람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야사에 의하면 전라도 관찰사 시절에는 어린 기생을 한 명 알게 되었습니다.
이 기녀는 진옥이라는 기녀로 송강이 전라도 관찰사였던 당시 10대의 어린 소녀였습니다.
송강은 그녀의 머리도 올려주고 잘 돌보아주고 아꼈습니다.
그리고 임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면서 이들의 관계는 끝이 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운명은 이들을 다시 만나게 만듭니다.
진옥은 송강을 사모한 나머지 그의 호 松江에서 江을 따와서 강아(江娥)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어떤 글에는 다른 사람들이 이 이름을 붙여주었다고도 합니다.
이들이 헤어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591년에 송강이 강계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진옥은 강계로 그를 찾아가게 됩니다.
위리안치의 유배형을 받은 송강을 찾아왔지만 너무 많이 변한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자 진옥은 송강이 머리를 올려준 바로 그 기녀라는 사실을 말하게 됩니다.
위리 안치는 가시나무 울타리 안에 작은 방을 만들고 그 방안에 구금되어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운 유배형입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찾아왔으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것도 자기를 사모하여 그 먼 곳 전라도 땅에서 이 외진 강계까지 찾아와 주었으니 송강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여기서 정말 사태를 완전히 반전시키는 시가 나옵니다.

여러 Version 이 있지만 아래의 것을 소개합니다.
송강은 성격이 호방하고 직선적이어서 미움을 사기도 했지만 그의 시적인 재능이 이렇게 사용되기도 합니다.

옥(玉) 을 옥(玉)이라 커든
형산백옥(荊山白玉)만 여겼더니
다시 보니 자옥임에 틀림없다.
마침 활비비 있으니
뚫어 볼까 하노라
- 松江-

이 시에 답하는 진옥의 답시 또한 대단합니다.

철(鐵)을 철(鐵)이라 커든
무쇠로만 여겼더니
다시 보니
정철(正鐵)임에 틀림없다.
마침 골풀무가 있으니
한번 녹여볼까 하노라
-江娥-

활비비와 골풀무라는 은어를 사용해서 두 사람의 마음을 주고받습니다.
이 뒤의 장면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송강은 이후 강화에서 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강아는 이후 흔적이 남아 있지 않지만 스토리 텔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강아의 스토리와 무덤을 만든 것 같습니다.
고양시 신원동 송강마을에는 송강공원도 있고 마을 뒷산에는 강아의 묘가 있습니다.
송강은 조정에서 물러나면 이곳 고양에 은거하기도 하고 부모님의 시묘살이를 1570년과 1573년에 여기 고양에서 두 번이나 했습니다.
송강 자신의 묘도 처음에는 여기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충청도 진천으로 이장을 했습니다.
그의 가족묘 입구에 강아의 묘가 있습니다.
강아의 묘를 보면서 퇴계 선생님과 두향의 러브 스토리가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공릉천변에 이 송강 공원이 있습니다.

 

정자의 이름도 송강정입니다.

 

 

이 공원에 송강의 시비가 있고 많은 시들이 있습니다.

 

 

 

송강의 시비들이 많이 있습니다.

 

 

 

 

공릉천 모습

 

 

 

 

 

 

송강문학관으로 사용되었던 집이 지금은 봉덕사라는 절이 되었습니다.

 

 

봉덕사에도 지장보살이 서 있는 것으로 봐서 납골당의 역할을 하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고개 이름에도 송강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송강 고개입니다.

 

 

봉덕사를 지나 100m 정도 오면 이 전봇대 앞에서 아래 사진과 같이 오른쪽으로 들어 가는 길이 보입니다. 여름에는 풀이 우거져서 잘 살펴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해서 강아가 의기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논개라면 몰라도...

 

 

 

 

무덤을 돌보는 사람이 없는지 봉분이 많이 가라앉았고 잡초에 뒤덮여 있습니다. 상석도 겨우 보입니다.

 

 

비석 뒷면에는 왜 그녀가 의기로 불리는지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이 묘는 송강의 맏누이 귀인 정씨의 묘입니다. 망주석과 석인이 있고 흙으로 된 곡장도 둘러져 있습니다.

 

 

 

 

 

정철의 가족묘 같습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정황은 정철의 동생입니다.

 

 

귀인 정씨의 묘에는 석상과 향로석도 있습니다.

 

 

귀인 정씨 묘에 있는 망주석

 

 

귀인 정씨 묘에 있는 석인

 

 

인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가 송강의 맏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