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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교동도 2022-06-16 본문
교동도는 강화도의 부속섬으로 예전에는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건너갔지만 지금은 교동대교가 놓여서 자동차로도 쉽게 건너갈 수 있습니다.
백제 관미성이 어쩌면 교동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이 391년에 백제로부터 이 땅을 빼앗은 기록이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교동도에는 화개산을 중심으로 산 아래 교동 향교가 있고 연산군 유배지도 있습니다.
교동 읍성문도 남아 있고 연산군의 사당으로 추정되는 부근당이 있습니다.
화개산은 최근에 관광지로 만드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동향교는 1127년 고려 시대에 세워진 우리 나라 최초의 향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궁벽한 곳에 우리 나라 최초의 향교가 세워졌다는 것은 그만큼 교동도 사람들의 교육열이 높았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교동향교 들어가는 입구 맞은편에는 부근당이 있습니다.
(아래의 사진들은 https://blog.naver.com/jsh11172 등 다른 사람들이 찍은 것을 가져왔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무속인들이 이곳에 기도하러 많이 오는 것 같습니다.
화개산 아래에는 또 연산군 유배지가 있습니다.
교동도에는 연산군뿐만 아니라 광해군 임해군등도 유배를 왔습니다.
왕족들이 특히 유배를 많이 왔습니다.
조선 시대 유배의 종류로는 부처(付處), 환도(還都), 안치(安置)등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부처는 주로 관리들에게 내려진 형벌로 유배지 관내 수령에게 유배인 관리에 대한 재량권을 일임하는 것이고 환도는 범죄인을 고향에서 약 400리 이상 떨어진 곳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안치는 다시 본향안치, 위리안치, 절도안치로 구분되는데, 본향안치는 죄인을 고향에 유배시키는 것으로 가장 가벼운 형벌이라 할 수 있고, 위리안치는 죄인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 가두는 형벌로, 대개 탱자나무가 많은 전라도 연해의 섬으로 귀양간 죄인에게 적용했습니다.
천극안치는 죄인이 사는 방에 다시 이중으로 가시 울타리를 쳐 햇빛을 보지 못하도록 한 형벌이며, 가극안치는 천극안치보다 심한 형벌로 가시 울타리를 더 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절도안치는 유배에서 가장 가혹한 조치로 중죄인을 멀고 험한 섬에 유폐시키는 형벌이었습니다.
조선의 역대 왕들 가운데 최악의 왕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연산군을 꼽습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이 쓴 실록의 글은 아무래도 연산군을 호평하기는 어렵겠지요.
광해군도 왕에서 폐위되어 왕릉에 묻히지도 못하고 종묘에도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임진왜란 때 세운 공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내세울 것이 별로 없습니다.
전국의 얼굴 반반한 기생들을 불러모아 흥청, 운평을 조직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흥청망청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고 신하들의 부인들도 강간하고 심지어는 큰아버지인 월산대군의 미망인인 박씨를 궁궐로 불러 간음했습니다.
〈연산군일기〉에 의하면 당시 임금은 관기의 명칭을 운평(運平)이라 바꾸고 궁궐에 불러들인 기생을 흥청(興淸)이라 불렀다.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기생은 지과흥청(地科興淸), 왕의 승은을 입으면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 불렀다.
흥청의 보증인은 ‘꽃을 보호하고 봄을 보탠다’ 하여 호화첨춘(護花添春), 흥청이 입는 옷은 ‘상서로움을 맞이하는 옷’이란 뜻의 아상복(迓祥服), 흥청의 식량 창고는 ‘화려함을 지키는 창고’라 하여 호화고(護華庫)라고 하였다.
또 각도에 미인을 찾아내는 관리를 채홍사(採紅使), 어린 여인을 찾아내는 관리를 채청사(採靑使)라 했다.
또 연산군 일기에는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당시 영응대군의 사위 구수영이 미녀를 구해 바쳐 팔도도관찰사가 되기까지 했다.
이때 후궁 가운데 장소용과 전숙원이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출입할 때면 요란하기가 왕비의 행차와 같았다.
또 시녀 및 공·사천과 양가의 딸을 팔도에서 뽑아 들였는데 만 명에 이르렀다.
그들의 급사, 수종과 방비라고 일컫는 자도 그 수와 같았다.
연산군은 이들을 7원 3각에 거처하게 했는데 운평, 계평, 채홍, 속홍, 부화, 흡려 따위의 호칭이 있었다.
또 따로 흥청악을 뽑았는데 악에는 세 과가 있었다.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지과(地科), 사랑을 받으면 천과(天科), 사랑을 받았으되 흡족하지 못하면 반천과(半天科)라 하고, 그중에서 가장 사랑을 받은 여인으로 숙화, 여원, 한아 등이 있었다.
왕이 그 속에 빠져 오직 날이 부족하게 여기며 흥청 등을 거느리고 금표 안에 달려 나가 사냥을 하거나 술을 마시며 가무하고 황망했다.
성질이 광조하여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내달려 동쪽에 있다 서쪽에 있다 하므로 비록 가까이 모시는 나인이라도 그 행방을 헤아리지 못했다.’
교동도에는 1636년 병자호란 때 광해군도 유배를 온 적이 있습니다.
산 아래에는 화개사라는 자그마한 절이 있습니다.
교동읍성 남문을 복원했습니다.
교동도에는 강화나들길 코스 20개 가운데 두곳이 있습니다.
이중 수정산을 지나는 아름다운 코스도 있습니다.
대룡시장이라는 상설시장이 남아 있어서 군것질도 즐길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강화도는 경주 국립공원처럼 섬 전체가 유적으로 가득찬 섬입니다.
섬 주위에는 군사적 용도로 사용된 많은 진이나 보가 설치되어 있고 고려 시대에 1232년(고종 19)~1270년(원종 11)까지 38년간이나 수도로 사용된 곳이니 유적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조선 후기에는 조선의 개국을 요구하던 서양인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등 역사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가까워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머리가 복잡할 때 등산도 하고 바다도 보면서 마음을 비울 수 있는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화도와 교동도 그리고 석모도까지 지금은 한번에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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