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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연에 반한 김창흡 2022-06-13 본문
철원군청이 있는 지포리에서 용화 저수지로 올라가다 보면 터널이 하나 있고 바로 앞 왼편에 삼부연 폭포가 있습니다.
저는 군에 있을 때 이곳 용화동 op에서 파견생활을 했습니다.
아래 지도에서 보이는 철원군청에서 삼부연 폭포를 지나면 앞에 있는 저수지가 용화 저수지 입니다.
이 삼부연 폭포는 그래서 군에 있을 때 종종 지나다니기도 하고 분대원들과 함께 놀기도 한 폭포입니다
여름철 비 온 후의 폭포는 그야말로 장관을 이룹니다.
조선 시대 서울에 사는 선비들이 금강산 유람을 갈 때 이곳을 종종 지나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선도 삼부연 폭포를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이 폭포를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은 아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호가 삼연인 것도 이 폭포 이름인 삼부연(三釜淵)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삼연은 조선 후기 시인들 가운데 아주 독보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쓴 낙치설이란 수필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서 학생들에게도 그의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오늘은 삼연과 삼부연 폭포에 관해 글을 쓰려고 합니다.
삼연은 그 유명한 장동 김문의 후손입니다.
그의 부친 김수항에게는 조선시대 6창으로 알려진 6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창흡은 그중에서 창협과 함께 학계와 예술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안동 김문은 조선 시대에 전주 이씨 왕가 다음으로 우리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가문일 것입니다.
후기 김조순 일가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 선대인 김상헌이나 김수항과 그 아들들은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미쳤습니다.
안동 김문의 사람들은 과거 시험등으로 서울 장의동으로 세거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장의동에 산 안동 김씨들을 장동 김문으로 따로 구분해서 부르기도 합니다.
안동에 있는 김씨들은 고향에 있으니 향파, 서울에 있는 장동 김문은 경파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창흡은 이 장동 김문에 속한 사람입니다.
장동 김문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사람으로는 인조 때 척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상헌을 들 수 있습니다.
그의 손자가 김수항과 수흥이고 수항의 아들들이 바로 6창인 창집, 창협, 창흡, 창업, 창즙, 창립입니다.
수항과 수흥 그리고 창집은 영의정을 지낸 정계의 실력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창흡은 대단한 금수저 집안 출신입니다.
창흡의 증조부인 청음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청나라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척화파이고 그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이 주화파인 최명길입니다.
당시 인조는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청군이 쳐들어오자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고 했지만 이미 청군이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어서 할 수 없이 남한 산성으로 피해 갑니다.
여기서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결국 지금의 서울 잠실 근처인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지요.
야사에 의하면 항복할 때 3배9고두례를 행하면서 이마에 피가 흥건하게 젖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남한 산성에 들어간 인조 일행이 결국 항복하자 그동안 척화를 외치던 김상헌은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게 됩니다.
이후 최명길은 망해가는 명나라에 비밀 외교문서를 전하다가 청나라에게 발각되어 청나라로 소환됩니다.
그리고 끝까지 왕을 감싸다가 청나라 감옥인 북관에서 남관으로 이관되면서 여기서 김상헌을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은 만나서 결국 오해를 풀게 되고 김상헌도 최명길이 정말 나라를 위해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을 이해하고 두 사람은 친하게 지내게 됩니다.
김상헌은 6년후 귀국해 좌의정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의 손자 수항과 수흥도 영의정까지 지냅니다.
수항의 6아들 가운데 맏아들인 몽와 창집도 영의정에 오르고 동생 창협은 예조 판서를 지냅니다.
그외의 나머지 형제들도 학자나 예술가로 뚜렷한 족적들을 남깁니다.
창흡은 부모의 명령으로 과거에 응시했고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그 뒤로는 과거를 보지 않았습니다.
김석주(金錫胄)의 추천으로 장악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나가지 않았고 세제시강원등에도 추천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습니다.
창흡은 젊어서 오대산등 여러 산들을 유람했습니다.
그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보면
"27세 되던 1679년(숙종 5)에는 삼부연 폭포 옆에 집을 짓고 나무꾼과 섞여 지냈습니다.
이때 삼부연에서 이름을 취해 호를 삼연(三淵)이라 했습니다.
37세 되던 1689년(숙종 15)의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사사되자, 벼슬에 대한 관심을 아예 끊었습니다.
다만,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반대당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가 처사인 주제에 함부로 남을 ‘비난’한다는 비난도 들었습니다.
이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53세 때인 1705년(숙종 31) 9월에는 설악산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1706년(숙종 32) 8월 아내를 잃은 후 이듬해 1707년 청평산을 거쳐 설악산으로 들어가 10월에 벽운정사(碧雲精舍)를 지었습니다.
이듬해 벽운정사가 불타자, 설악의 여러 곳에 영시암(永矢菴), 완심루(玩心樓), 갈역정사(葛驛精舍) 등을 지어놓고 시절에 따라 옮겨 다녔습니다.
영시암은 57세 되던 1709년(숙종 35) 9월, 갈역정사는 59세 되던 1711년(숙종 37)에 완성했습니다.
갈역은 지금의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입니다.
영시암은 지금의 백담사에서 오세암이나 봉정암으로 올라가다 보면 왼편에 있는 암자입니다.
이미 쏜 화살처럼 영원히 속세를 떠나겠다는 의미를 가진 이름입니다.
하지만 이 이름대로 영원히 여기에 살 수가 없었습니다.
62세 되던 1714년(숙종 40)에 영시암에서 그의 시중을 들어주던 최춘금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일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김창흡은 춘천도호부의 곡운(谷雲)으로 옮겨갔다. 현재는 화천군에 속하는 곳이다. 1714년(숙종40) 11월에는 벽계에서 금화 수태사(水泰寺)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평강 부석사로 옮겼다. 이듬해 1715년 (숙종 41) 3월에는 강원도 이천(伊川) 온천에서 목욕하고 평강과 희령을 유람했다. 가을에는 곡운에 곡구정사(谷口精舍)를 지었고, 평강과 춘천을 왕래했다. 1717년과 1718년에는 갈역에서의 생활을 추억하여 「갈역잡영(葛驛雜詠)」 392수를 연작했다. 9월에는 전라도 고산(高山)의 안심사에 머물렀다. 68세 되던 1720년(숙종46) 3월, 아들 김양겸(金養謙)이 현령으로 있는 황해도 문화(文化)로 갔다. 윤3월에는 구월산을 유람하고, 5월에 영평으로 돌아왔다. 7월에는 곡운으로 갔다. 69세 되던 1721년(경종 원년) 12월의 신임옥사로 맏형 김창집이 거제로 유배되자, 아우 김창업이 울분으로 죽었다. 김창흡은 1722년(경종 2) 2월 19일 절필시를 짓고, 21일에 김언겸(金彦謙)의 별장 가구당(可久堂)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해 4월, 포천현 묘곡(卯谷)에 장사 지내졌다. 4월 29일, 김창흡의 형 김창집은 성주로 이배되어 즉시 사사되었다."
(https://cafe.daum.net/hasangsam/5Ms3/에서 복사해 왔습니다.
삼연집 어록(語錄)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선생이 설악산 영시암(永矢菴)에 계실 때 거사(居士) 최춘금(崔春金)이 판자방에서 염불을 하고 있었다.
야밤에 홀연 산이 무너질 듯 범이 우는 소리가 나더니 선생을 모시던 노비가 놀라 소리치기를 “거사가 없어졌습니다.”라고 하였다.
모두 황망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
노비 두 사람이 판자방에서부터 밖으로 나가면서 횃불을 들어 살펴보니 옅게 깔린 눈 위에 혈흔이 남아 있었다.
선생이 멍하게 한참을 있다가 말하기를 “내 일찍이 이 범놈에게 말을 잃고 또 노복을 잃었는데 지금 다시 이런 변고를 당하는구나.”라고 하였다. ······
이튿날 아침 승려들을 불러 모아 산에 올라 찾게 하였는데 승려들이 돌아와 단지 머리와 발만 남았다고 알리므로 다비하도록 하였다.
선생이 비로소 대성통곡하고 마침내 산을 나가기로 하였다."
조선시대의 뛰어난 인재들 가운데는 재력이 든든한 부모를 만나서 관리가 되지 않고도 평생을 편안히 지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찌보면 창흡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오대산 유산기를 보면 월정사 스님들인지 상원사 스님들에게 대나무로 만든 가마인 죽여를 메게하고 그 가마를 타고 오대산을 유람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선비들은 불교 승려들에게 이런 일들을 종종 시킨 것 같습니다.
날씨가 더워지니 시원한 삼부연 폭포가 생각나고 그 앞에 집을 짓고 한가롭게 살 수 있었던 창흡 선생이 부럽기도 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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