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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조선의 로맨티스트들 본문
성리학으로 경직된 조선 사회에도 로맨스는 살아 있었습니다.
퇴계와 두향, 그리고 율곡과 유지의 러브 스토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퇴계 선생님은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조선 최고의 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48세가 되던 해에 단양 군수로 부임해 갔을 때 18살의 두향이라는 관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퇴계는 부인과 아들을 잃고 가슴 앓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텅 빈 퇴계의 가슴에 들어온 여인이 바로 두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사랑은 '어지러운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한 지방의 수령이라면 관기를 마음대로 취할 수도 있었지만 퇴계와 두향의 사랑은 지고지순까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선을 넘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당시 사대부들이 첩이나 기생을 취하는 것은 전혀 허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퇴계는 어린 기생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두향은 詩와 書와 거문고에 능했고 특히 퇴계처럼 매화를 좋아했습니다.
간혹 퇴계에게 매화나 난 화분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퇴계가 단양 군수로 있은 지 9개월 만에 그의 형 이해가 충청도 관찰사로 오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의 상피제도에 따라 퇴계는 풍기 군수로 옮겨 가게 됩니다.
떠나기 전날 밤 두향에게 아래와 같은 시를 읊습니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네."
死別己呑聲 (사별기탄성)
生別常惻測(생별상측측)
그러자 두향은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지,
술 다하고 나니 님마저 떠나는구나
꽃 피고 새 우는 이 좋은 날 어이할까 하노라."
이후 두향은 퇴계에게 누가 될까 하여 죽을 때까지 다시 만나지 못하다가 그의 사후 나흘을 걸어 안동 도산서원까지 가서 돌아가신 님을 뵈었다고 합니다.
두향의 무덤은 지금도 옥순봉 강선대 아래에 있습니다.
자세한 러브 스토리를 알고 싶은 분들은 최인호의 소설 '유림'을 보시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퇴계의 훌륭한 인품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를 또 소개하면
그는 개방적이요 인간적인 분이었습니다.
퇴계는 두 번 장가를 갔습니다.
첫 번째 부인인 김해 허 씨는 아들 둘을 낳고 산후조리를 잘못하여 일찍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나이 31살에 둘째 부인인 안동 권씨와 재혼했는데, 권 씨는 지적장애를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안동으로 귀양을 온 권질이 찾아와 과년한 딸이 정신이 혼미하여 아직도 출가하지 못했다면서 맡아줄 것을 부탁하자 퇴계가 별다른 거리낌 없이 승낙했다고 합니다.
장애가 있는 딸을 부탁하는 아버지도 대단하지만 그런 부탁을 선뜻 받아들인 퇴계는 정말 대단합니다.
그만큼 퇴계는 도량이 넓은 분이었고, 장애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혼 후 권 씨는 여러 가지 실수를 범했지만 퇴계는 사랑으로 포용하여 부부의 도리를 다했습니다.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한번은 온 식구가 분주하게 제사상을 차리는 도중 상 위에서 배가 하나 떨어졌습니다. 권 씨는 얼른 그것을 집어 치마 속에 감추었습니다. 퇴계의 큰형수가 그것을 보고 나무랐습니다.
“동서, 제사상을 차리다가 제물이 떨어지는 것은 우리들의 정성이 부족해서 하네. 근데 그걸 집어 치마 속에 감추면 쓰겠는가?”
방안에 있던 퇴계가 그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와 대신 사과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형수님. 앞으로는 더욱 잘 가르치겠습니다. 조상님께서도 손자며느리의 잘못이니 귀엽게 보시고 화를 내시진 않을 듯합니다.”
그러자 큰형수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습니다.
“동서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일세. 서방님 같은 좋은 분을 만났으니 말이야."
또 하루는 권 씨가 흰 두루마기를 다림질하다가 조금 태우고서는, 하필 붉은 천을 대고 기웠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퇴계는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입고 외출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경망스럽다고 탓하자, 퇴계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허허, 모르는 소리 말게. 붉은색은 잡귀를 쫓고 복을 부르는 것이라네. 우리 부인이 좋은 일이 생기라고 해준 것인데 어찌 이상하단 말인가.”
이렇듯 퇴계는 권 씨의 잘못을 탓하지 않고 사랑과 배려로 감싸주며 살았습니다. 그 후 권 씨가 세상을 떠나자, 퇴계는 전처소생의 두 아들에게 친어머니와 같이 시묘살이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권 씨의 묘소 건너편 바위 곁에 양지암을 짓고 1년 넘게 머무르면서 아내의 넋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
퇴계에 이어 율곡 이이와 기생 유지(柳枝)의 러브 스토리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관기라면 아주 천한 신분이라고 할 수도 있고 남자들의 성적 노리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조선 최고의 천재였던 구도장원공 율곡과 유지의 러브 스토리는 아주 신선한 감동을 줍니다.
율곡은 1574년 38세였을 때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받고 임지인 해주 관아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12살의 어린 동기(童妓)였던 유지를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총명하고 예쁜 유지를 귀여워하기는 했으나 술시중 정도만 들게 하였습니다.
유지는 율곡에게 자신의 부친은 선비이고 모친은 양갓집 여인이었으며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기적(妓籍)에 오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유지에게 격려와 따뜻한 가르침들을 주었습니다.
임기가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율곡과 유지의 관계는 끝나는 듯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9년이 지난 후 율곡은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遠接使: 조선시대 중국 사신을 영접하기 위하여 둔 임시 관직)로 평양으로 가는 길에 해주 관아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율곡의 침소로 유지가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유지는 몰라볼 정도로 성숙했고 꽃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연모의 마음을 간직하며 기다려온 유지는 이날 밤 율곡을 모시려 했으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유지는 율곡을 더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해가 바뀌어 몸이 약한 율곡은 요양을 하러 황주 누님 집으로 가는 길에 유지가 보고 싶어 해주에 들렀습니다.
유지를 다시 만나 같이 술을 나누고 황주로 갔다가 돌아와 해주 근처 강마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황해도 재령 부근에 있는 강이 흐르는 밤고지(재령 고을에서 60리 북쪽에 있는 율과 진을 말함) 마을이었습니다.
이곳으로 유지가 밤중에 찾아왔습니다.
율곡이 별세하기 3개월여 전인 1583년 9월의 일입니다.
이때 율곡은 당시의 상황과 유지에 대한 마음을 담은 글과 시를 지어 유지에게 주었습니다.
제목은 따로 없고 ‘유지사(柳枝詞)’라 불립니다.
이 유지사는 현재 이화여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유지는 선비의 딸이다.
몰락해 황강(黃岡·현재의 황주) 관아의 기생으로 있었다.
1574년 내가 황해도 감사(관찰사)로 갔을 적에 동기(童妓)로 내 시중을 들었다.
섬세하고 용모가 빼어난 데다 총명해서 내가 쓰다듬고 어여삐 여기긴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정욕의 뜻은 품지 않았다.
그 뒤에 내가 원접사가 되어 평안도로 오고 갈 적에 유지는 매양 마을에 있었지만 하루도 서로 가까이 보지는 않았다.
계미년(1583년) 가을, 내가 해주에서 황주로 누님을 뵈러 갔을 때 유지를 데리고 여러 날 동안 술잔을 같이 들었다.
해주로 돌아올 적에는 절(蕭寺)까지 나를 따라와 전송해 주었다.
그러곤 이별한 뒤 내가 밤고지(栗串)라는 강마을에서 묵고 있는데 밤중에 어떤 이가 문을 두드리기에 보니 유지였다.
방긋 웃고 방으로 들어오므로 나는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대감의 명성이야 온 백성이 모두 다 흠모하는 바인데 하물며 명색이 기생인 계집이 어떠하겠습니까.
게다가 여색을 보고도 무심하오니 더욱 탄복하는 바이 옵니다.
이제 떠나면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기 어렵기에 이렇게 감히 멀리까지 온 것이옵니다.”
그래서 마침내 불을 밝히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 기생이란 다만 뜬 사내들의 다정이나 사랑하는 것이거늘 누가 도의(道義)를 사모하는 자가 있는 줄을 알았으랴.
더욱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도리어 감복했다고 하니 더욱더 보기 어려운 일이로다.
안타까워라!
이런 여자로서 천한 몸이 되어 고달프게 살아가다니.
더구나 지나는 이들이 내가 혹시 잠자리를 같이 하지나 않았나 의심하며 저를 돌아보아 주지 않는다면 국중 일색(國中一色)이 더욱 애석하겠구나.
그래서 노래로 읊고 사실을 적어 정에서 출발하여 예의에 그친 뜻을 알리는 것이다.
보는 이들은 자세히 알도록 하시라."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柳枝士人女也 落在黃岡妓籍 余按海西時 以丫鬟爲侍妓 纖細妖冶貌秀而心慧 余撫憐之 初非有情慾之感也 厥後 余以遠接使 往來關西 柳枝必在閤 而未嘗一日相眤 癸未秋 余自首陽 省女嬃于黃岡又□柳枝同杯觴者數日 還首陽時 追送余于蕭寺 旣別 余宿于栗串江村 入夜 有人扣扉 乃柳枝也 一笑入室 余怪問其由 則其言曰 公之名義 國人皆慕 況號爲房妓者乎 且見色無心 尤所嘆服 此別後會難期 故玆敢遠來耳 遂明燭夜話 噫 娼家只愛浪子之多情 孰知有義之可慕者乎 不以不見親爲恥 而反服焉 尤所難淂 惜乎 女士困于賤隸也 且過客疑余 有枕席之私 莫之顧眄 則國香尤可惜也 遂製詞以敍其實 發乎情止乎禮義之意 則觀者詳之"
아래와 같은 시도 써서 주었습니다.
"바다의 서쪽(황해도)에 사람이 있어 맑은 기운 모아 선녀의 모습을 내리었네.
얌전하고 아름답도다! 마음과 모습이, 밝고 곱도다! 얼굴과 말소리여,
가을 새벽 맑은 이슬 같은 것이, 어찌 길가에 버려졌나.
봄(남녀의 정)은 한창이고 꽃이 피었는데 부귀한 집으로 옭기지 못하니 애석하구나! 이 국향이여.
예전 서로 보았을 때 아직 안 피어 정만 맥맥히 서로 통했고 좋은 때는 다 가고 추위와 메마름만 남았다.
먼 앞날을 위한 계획 어긋나 허공에 떨어졌네.
이런저런 좋은 일 때 다 놓쳤으니 허리의 패옥을 풀 날은 언제이런가.
노년에 다시 해우를 했으나 완연한 옛 모습 그대로구나.
세월은 왜 이리도 빨리 흐르는가.
인생이 무성한 잎같이 푸르렀으나 어느 사이 늙어 여자의 문 앞에 서서 티끌 같은 정욕은 재가 되었네.
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아 연모하는 사랑의 눈초리를 돌리는가.
수레를 타고 황강으로 감이 길은 굽이굽이 멀고 더디구나.
내가 소사에서 수레 머물고 강가에서 말을 먹일 때 어찌 헤아릴 수 있었으리오.
어여쁜 이 멀리 따라와 밤이 들자 홀연히 내 방문 두들길 줄을.
아득한 들에 달은 어둡고 빈 숲에 범 우는소리 들리는데 나를 뒤밟아 온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옛날의 덕음(좋은 평판, 명망)을 생각해서 하네.
문을 닫는 것은 인(仁) 을 상하게 하고, 동침하는 것은 의(義)를 해하니 병풍은 걷어치워도 자리는 달리했고 이불도 달리했다.
은정을 다하지 못하니 일은 틀어져 밤부터 동이 뜰 때까지 초를 밝히고 보내는구나.
천군(사람의 마음)을 어찌 속이겠는가? 깊숙한 방이라도 내게 내려와 보시리니 혼인할 좋은 기약 잃어버리고 서로 따라 욕정을 둘이 참았네.
동이 트도록 잠 자지 않고 임하는 곳이 다르니 가슴엔 한만 가득 하늘엔 바람 불고 바다엔 물결치고 노래 한 곡조 슬프기만 하구나.
아아! 본심 깨끗하고 맑아 가을 강에 괴인 달과 같구나.
마음에 구름과 같은 병기(선악) 일적에 색을 보는 것에서 그중에도 더럽기는 색욕이거니 선비의 탐욕은 굳지 못하고 계집의 탐욕은 더욱 더하니 마땅히 시선을 거두어 근원을 분명히 밝히고 이에 처음의 맑고 밝음으로 돌아가야지.
만약 삼생이 있단 말이 헛말이 아니거든 장차 죽어 부용 지성에서 너를 만나리."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若有人兮海之西 鍾淑氣兮禀仙姿 綽約兮意態 瑩婉兮色辭
金莖兮沆瀣 胡爲委乎路傍 春半兮花綻 不遷金屋兮哀此國香
昔相見兮未開 情脈脈兮相通 靑鳥去兮寒脩 遠計參差兮墜空
展轉兮愆期 解佩兮何時日 黃昏兮邂逅 宛平昔之容儀
曾日月兮幾何 悵綠葉兮成陰 矧余衰兮開閤 對六塵兮灰心
彼妹姿兮妧姩 秋波回兮眷眷 適駕言兮黃岡 路逶遲兮遐遠
駐余車兮蕭寺 秣余馬兮江湄 豈料粲者兮遠追 忽入夜兮扣扉
逈野兮月黑 虎嘯兮空林 我卽兮何意 懷舊日之德音
閉門兮傷仁 同寢兮害義 撤去兮屛障 異牀兮異被
恩未畢兮事乖 夜達曙兮明燭 天君兮不欺 赫臨兮幽室
失氷洋洋佳期 忍相從兮鑽穴 明發兮不寐 恨盈盈兮臨歧
天風兮海濤 歌一曲兮悽悲 繄本心兮皎潔 湛秋江之寒月
心兵起兮如雲 最受穢於見色 士之耽兮固非 女之耽兮尤感
宜收視兮澄源 復厥初兮淸明 倘三生兮不處 逝將遇爾於芙蓉之城"
위 글에 의하면 유지가 찾아왔을 때 율곡은 방문을 닫고 만나 주지 않으면 인(仁)을 상하는 것이고 맞아들여서 동침하면 의(義)를 상하는 것이 되니 많은 고민을 한 것 같습니다.
이이가 병약하여 3개월 뒤 별세한 후 유지는 이이의 친필 유지사를 첩(帖)으로 만들었으며 박세채(朴世采)의 남계 견문록에 의하면 율곡(栗谷)이 떠난 뒤에 유지(柳枝)는 서울로 달려 올라와 곡하고 또 그대로 삼년상을 치렀다고 합니다.
유지는 3년 상을 치른 후 머리를 깎고 산속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위 율곡의 내용은 https://m.cafe.daum.net/seojinam 에서 참고했습니다.)
위 두 사람과 달리 율곡의 친구였던 송강 정철과 기생 강아의 러브 스토리는 상당히 질펀합니다.
율곡의 절친들 가운데 파주 근처에 살았던 우계 성혼이나 구봉 송익필등은 인품이 뛰어난 선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송강 정철은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관동별곡 등 가사문학의 대가로 배우기는 했지만 인품이 그리 뛰어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래 링크한 글은 전에 썼던 글입니다.
https://song419.tistory.com/m/3649
위 퇴계와 율곡 두 사람은 기생과도 아주 순수한 사랑을 나누었지만 실상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기생과 즐기거나 축첩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퇴계나 율곡도 당연히 첩이 있었고 그들에게서 자녀도 태어납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대쪽같이 강직한 성품의 남명 조식이나 다산 정약용도 첩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윤리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워낙 당연한 일이어서 기생과 하룻밤을 보냈다고 허물이 될 일이 전혀 없는데도 기생을 아끼고 보호한 퇴계와 율곡은 특별한 경우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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