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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국가경영 방상영 지식산업사 2021년 410/436쪽 ~8/18 본문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중심으로 엮은 책이다. 너무 전문적이어서 아마추어가 읽기에는 자루하고 어려운 부분이 있다.
조선 초기의 전제는
과전법 - 직전법 - 관수관급제로 변했다.
조선의 왕들 가운데 경연을 가장 많이 한 왕은 성종이다. 세종보다 횟수나 빈도가 월 29회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이는 13살에 왕위에 오르면서 능력을 키우기도 해야 했고. 수렴청정을 하는 대비들에게 인정을 받는 방법이기도 했다.
세종 시대에 만들어진 사가독서제가 세조때에 자기의 집권을 반대하는 집현전 학자들 때문에 집현전과 함께 없어졌다가 성종 7년에 다시 부활했다.
집현전도 명칭은 홍문관으로 되었지만 기능은 집현전의 기능을 했다.
성종은 교서관이란 출판기구를 만들었고
성균관 안에 존경각이란 도서관도 만들었다.
세종은 언론에 관해 언급하면서 '3번 간해서 임금이 듣지 않으면 떠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현석규 탄핵 사건에서 김언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는 당시 분위기로는 그를 사형에 처할 일이었다.
하지만 성종은 바른 말하는 그의 기백을 높이 사서 죽이지 않고 그의 직책을 계속 수행하게 허락했다.
정희 왕후는 세조의 부인
안순왕후는 예종의 부인으로 한확의 딸이다.
한확은 두 딸이 명나라 왕실의 후궁이 되어 국내에서 권력이 막강했다.
소혜 왕후(인수대비)는 의경세자(후에 성종이 덕종으로 추증)의 부인으로 성종의 어머니다.
예종이 일찍 죽자 의경세자의 맏아들인 월산대군이 있었지만 한명회의 딸(공혜왕후-결혼 후 일찍 죽었다.)과 결혼한 잘산군(성종)이 정희 왕후와 한명회의 도움으로 왕이 된다.
인수대비가 쓴 내훈에서 여자의 네가지 덕목은
1. 도덕적 행위로 조용하고 차분하며 정숙하고 예의범절이 있어야 핱다.
2. 얌전한 말씨로 상스러운 말이나 공격적인 말은 삼가고 잘 가려서 해야 한다.
3. 정숙한 외모로 아름다울 필요는 없으나 의복과 외모가 청결해야 한다.
4. 여성으로서의 의무로 베를 짜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의무들에 정성을 기울여야 핱다.
성종의 후궁이었던 폐비 윤씨는 왕비가 되고 나서도 질투가 심해서 정소용과 엄숙의가 자기를 해하려고 한다는 투서를 하고를독약과 굿하는 책을 몰래 가지고 있다가 발각된다. 이 독약은 왕을 해할려고 한ㄸ 것일 수도 있어서 빈으로 강등되고 처음에는 중궁에서 자수궁으로 격리했다. 이때 이미 연산군이 태어난 상태다.
2년 후 윤씨가 뉘우치지 않고 성종의 미움을 더 사서 폐비해서 서인으로 강등시켜 사저로 내쫓고 다음에 사사했다.
* 아래 칠거지악에 해당하면 부인을 내좇을 수 있다.
부모에 대한 불효
아들을 낳지 못 함
간통
절도
부당한 질투
중병
심한 수다
칠거지악의 악용을 막기 위한
三不去도 있었다.
재산이 크게 늘어난 경우
부인이 친정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경우
시부모에 복상의 의무를 다 한 경우
공법(조세법) 시행시 국가에서 농지의 등급에 따라 세금을 메겼는데 지방 관리들이 농지 등급을 낮추어서 세금을 줄여주는 댓가로 뇌물을 요구해서 그 피해가 세금보다 더 크기도 했다.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스러우면 맡기지 말라.
세종은 능력과 재능을 인사의 기본 원칙으로 하면서 보완적으로 마음바탕이 선한가를 살폈다.
성종은 임금의 도를 지키면서 청류와 탁류를 모두 받아들이고 거친 것을 너그러이 감싸주는 아량을 지니는 포용적 리더쉽을 발휘하였다. 언론을 존중하고 대간을 예우하고 그들이 표방하는 교화의 명분을 인정하였지만 동시에 대신을 존중하여 그들의 지위와 권위를 지켜주고자 하였다.
세종은 정치 스타일이 소 뒤에서 조종해 가는 스타일이었고 정조는 소를 끌고 가는 스타일이었다.성종은 가운데에서 중재하는 스타일이었다. 소를 옆에서 함께 따라가면서 이끄는 스타일이다.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인식하면서도 무리하게 앞에서 이끌지 않고 뒷걸음치지 않도록 옆에서 지켜보면서 함께 걸어가는 스타일이다.
세종의 치세는 수성의 시대였다.
백성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면서 한편으로는 태조와 태종이 이루어 놓은 법도를 제도화하는 데 집중했다.
인사정책에서는 허물이 있는 인재도 등용해서 만회할 기회를 주었고 불교 문제에서는 이단도 포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종은 정직,책임감, 공정성과 같은 행동양식가치를 실천한 리더였고 다양한 동기와 가치를 지닌 인재들이 한 무대에서 어우러져서 조화를 이루는 시대였다.
세종의 거래적 리더십이 이를 가능케 한 것이다.
성종의 치세는 교화의 시대였다.
성종은 한편으로 세조와 정희왕후에 대한 효를 내세워 훈구세력과의 정치적 타협과 안정을 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조대 이후 무너져 내린 풍속을 교화하고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여 교화의 정치를 뒷받침하는 일에 집중했다.
리더십 승계 문제에 있어서도 세종이 제도적 해결책을 모색한 것과 달리 성종은 세자에 대한 교육에 집중했다.
성종은 변혁적 리더십을 수행한 것이다.
조선 왕조는 세종과 성종을 거치면서 수성에서 교화의 시대로 진입했다.
그것은 거래적 리더십에시 변혁적 리더십으로의 변화를 의미했으며 행동양식가치 중심에서 목적가치 중심의 리더십 변화를 의미했다.
번즈가 말하는 리더십은 거래적 리드십과 변혁적 리드십으로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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